열왕기상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17–22장 · 엘리야와 아합

진실을 듣고도 전쟁터로 간 왕

아합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듣고도 전쟁터로 나갑니다. 예언자 미가야는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흩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 하늘의 왕좌에서 아합의 죽음이 논의되는 환상까지 들려줍니다. 아합은 그 말을 거짓이라고 단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를 감옥에 가두고, 자신은 모습을 바꾼 채 전쟁에 나섭니다.

이 장의 비극은 왕이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뜻을 듣고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땅의 왕좌에서는 누가 옳은 말을 하는지 왕이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왕좌가 드러나면서 질문이 뒤집힙니다. 왕이 과연 여호와야훼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판단받게 할 것입니까?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622장 본문 읽기 →

이미 결정한 전쟁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다

열왕기상 22:1–12 본문 →

길르앗 라못은 누구의 땅인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 없이 삼 년이 지난 뒤, 아합은 길르앗 라못 문제를 꺼냅니다.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역의 성읍으로, 이스라엘과 아람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이었습니다. 아합은 그곳이 본래 이스라엘의 것인데도 아람 왕에게서 되찾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열왕기상 20:34에서 아람 왕 벤하닷은 이전에 빼앗은 성읍들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22:3에 따르면 길르앗 라못은 여전히 아람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성읍이 그 약속에 구체적으로 포함되었는지, 왜 돌려주지 않았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아합에게는 군사 행동을 주장할 만한 영토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당해 보이는 목적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이루려는 모든 결정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가 살피는 것은 바로 그 사이의 간격입니다.

아합은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함께 싸우러 가자고 요청합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백성과 말들까지 아합과 한편이라고 대답합니다(22:4). 갈라진 두 왕국의 왕들이 함께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말했습니다. 「먼저 여호와야훼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물어보십시오.」열왕기상 22:5 · 두루새김

여호사밧은 이미 함께 싸우겠다고 말한 뒤에 여호와야훼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물어보자고 요청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뜻을 묻는 것과 그 대답에 따라 이미 내린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사백 명의 예언자와 한 사람의 예언자

아합은 예언자 사백 명쯤을 모읍니다. 그들의 대답은 일치합니다. 올라가면 승리하고, 주님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호사밧이 물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물어볼 여호와야훼의 예언자가 더 없습니까?」열왕기상 22:7 · 두루새김

여호사밧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의심했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이 예언자들을 모두 바알의 예언자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6절에서는 「주님」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지만, 11–12절에서 그들은 분명히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승리를 선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대립하는 것은 단순히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과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예언자들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야기 표면에서는 모두가 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가운데, 누가 실제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그를 통해 여호와야훼께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밉습니다. 저에게 좋은 일은 예언하지 않고 나쁜 일만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이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열왕기상 22:8 · 두루새김

여기서 아합은 예언이 참인지와 예언이 자신에게 이로운지를 혼동합니다. 왕에게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가 말씀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왕에게 불리한 예언이 반드시 왕을 해치려는 말은 아닙니다. 위험을 미리 알리는 경고라면 오히려 왕을 살리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왕이 듣고 싶어 하는 승리의 약속이 왕을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이 역설이 곧 현실이 됩니다.

왕좌 앞에서 벌어진 예언의 공연

두 왕은 사마리아 성문 입구의 타작마당에서 저마다 왕좌에 앉아 있고, 왕의 옷을 갖춰 입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예언자들이 예언합니다. 성문은 성읍의 공적인 활동과 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의 예언은 개인적으로 조언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공개적인 행사처럼 펼쳐집니다.

시드기야는 쇠로 뿔들을 만들어 아람을 들이받아 모두 없앨 것이라고 선언합니다(22:11). 실제 물건과 행동으로 승리를 눈앞에 보여 주는 상징 행위입니다. 신명기 33:17에서도 뿔은 적을 밀어붙이는 힘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선언하는 사람의 수가 많고, 그 형식이 장엄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왕의 뜻에 맞춰진 예언의 행렬 속으로, 그 행렬에 함께하기를 거부하는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왕이 요구한 진실과 왕이 거부한 진실

열왕기상 22:13–18 본문 →

모두가 한 입으로 말하기를 원하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람은 그에게 미리 조언합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예언자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왕께 좋은 말을 하고 있어요. 당신도 그들처럼 좋은 말을 해 주세요.」열왕기상 22:13 · 두루새김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람은 그에게 그들의 말이 옳은지 확인하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저 같은 말을 하라고 요청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이 참인지보다 왕 앞에서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는 일입니다.

22절에서 그 영은 모든 예언자의 「입에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한 입처럼 들리는 예언자들의 일치가 강조되지만, 나중에는 그 많은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오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사백 명이 모두 일부러 거짓말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자신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드기야가 미가야를 때리며 반박하는 장면은 그가 스스로 여호와야훼의 영을 받았다고 확신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예언의 잘못은 반드시 의도적인 사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잘못된 말을 전할 수 있습니다.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해요. 저는 여호와야훼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만 말하겠어요.」열왕기상 22:14 · 두루새김

참된 예언자의 자유는 자기 생각을 마음껏 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왕이 원하는 대답을 만들어 내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이 받은 말씀에 매여 있는 데 있습니다.

아합은 왜 미가야에게 진실을 요구하는가

그런데 왕 앞에 선 미가야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미가야가 왕에게 오자 왕이 물었습니다.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야 하겠느냐, 그만두어야 하겠느냐?」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올라가 승리를 거두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열왕기상 22:15 · 두루새김

확실한 것은 아합이 이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왕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내게 진실만 말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를 시켜야 하느냐?」열왕기상 22:16 · 두루새김

아합은 진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을 요청할 수 있고, 자신이 듣는 말이 진실인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진실이 자신의 계획을 거스르는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목자를 잃은 양들에게 남겨진 길

미가야가 전하는 첫 번째 환상은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군대의 모습이 아닙니다.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산에 흩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에게는 주인이 없다. 저마다 자기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여라.』」열왕기상 22:17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을 목자로 표현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세워지는 장면에서도 백성을 먹이고 돌보는 목자의 역할이 왕의 권한과 연결됩니다(사무엘하 5:2).

목자 없는 양 떼라는 그림은 군대가 지도자를 잃는다는 뜻을 암시합니다. 뒤에 나오는 아합의 죽음을 생각하면 이 목자는 이스라엘 왕을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환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을 자신에게 닥칠 나쁜 소식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환상 속에서 여호와야훼는 왕을 잃은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까지 말씀하십니다.

미가야의 환상은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몰살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자를 잃은 양들에게 돌아갈 길을 열어 놓습니다.

아합이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고 전쟁에 나설 때,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왕 없이 돌아가야 할 백성들까지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곳의 목자 이미지는 훗날 에스겔 34장에서 더욱 깊어지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양들을 돌보지 않는 목자들을 심판하시고, 자신이 직접 양들을 찾아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은 직접적인 인용 관계가 아니라, 왕과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에서 미가야가 왕을 비꼬며 말했다고 이해하는 읽기가 널리 가능합니다. 자신에게 같은 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그대로 들려주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미가야가 어떤 표정이나 말투로 말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꼼은 문맥에서 가능한 해석이지,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직접 확인해 주는 사실은 아닙니다.

땅의 왕좌 뒤에 있는 하늘의 왕좌

열왕기상 22:19–28 본문 →

두 왕좌는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미가야는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미가야가 말했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저는 여호와야훼께서 왕좌에 앉아 계시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그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열왕기상 22:19 · 두루새김

두 장면은 의도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왕좌, 왕 앞에 서 있는 무리, 왕에게 나아가 말하는 인물들이 모두 등장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는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차지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하늘에서는 아합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쓰러져 죽는 일이 논의됩니다.

아합은 전쟁의 결과가 아직 자신에게 열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미가야의 환상 속에서는 이미 그의 죽음을 전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이사야 6:1–8에서도 예언자는 높은 왕좌에 앉으신 여호와야훼를 보고, 그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명을 듣습니다. 두 환상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주어졌지만, 땅의 권력보다 높은 하나님의 통치라는 공통된 그림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늘의 회의에서 여호와야훼는 누가 아합을 꾀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쓰러져 죽게 할 것인지 물으십니다. 그때 한 영이 나서서 아합의 모든 예언자의 입에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시고 실행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이제 보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왕의 이 모든 예언자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으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왕에게 재앙을 선언하셨습니다.」열왕기상 22:23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막지 않으셨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예언자들의 입에 넣으셨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미가야는 아합을 속이는 환상을 아합 자신에게 공개합니다.

아합은 사백 명의 예언이 왜 잘못된 것인지에 관한 설명까지 듣습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다는 경고를 직접 듣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과 아합의 결정을 모두 서술합니다. 그 둘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풀어 주지 않으면서, 아합이 경고를 들은 뒤에도 전쟁에 나섰다는 사실을 독자 앞에 남깁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다가와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이 어느 길로 내게서 건너가 네게 말씀하셨느냐?」열왕기상 22:24 · 두루새김

이 질문에서 시드기야는 자신이 여호와야훼의 영을 받았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는 미가야의 예언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예언이 부정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반박은 증거나 말씀의 검토가 아닙니다. 폭력입니다.

앞에서 쇠로 뿔들을 만들어 아람을 들이받겠다고 선언했던 예언자가 이제 자기 곁에 선 예언자의 뺨을 때립니다. 그의 힘은 전쟁터의 아람 군대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말씀을 전하는 미가야에게 먼저 향합니다.

미가야는 그에게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가 숨는 날이 올 것이라고 대답합니다(22:25). 이 말이 정확히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 본문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합 역시 미가야의 말에 반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하여라. 『왕이 이렇게 말한다. 이자를 감옥에 가두고, 내가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빵과 물을 조금씩만 주어라.』」열왕기상 22:27 · 두루새김

여기서 「왕이 이렇게 말한다」는 표현은 앞서 시드기야가 사용한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와 나란히 놓입니다. 시드기야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전쟁의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이제 아합은 왕 자신의 이름으로 미가야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이 왕의 명령은 미가야가 전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합의 마지막 말이 자신의 운명을 확인하는 새로운 계기가 됩니다.

누가 무사히 돌아오는가

27–28절에서 중요한 말 하나가 반복됩니다.

미가야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정말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여호와야훼께서 저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또 말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아, 들어라.」열왕기상 22:28 · 두루새김

같은 표현이 정반대의 전망을 담아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아합은 자신이 돌아올 것을 확신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전제로 행동합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돌아오는지가 자기 예언이 참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신명기 18:21–22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전한 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 말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판단 기준을 제시합니다. 미가야는 이제 자신의 예언을 전쟁의 실제 결과 앞에 내놓습니다.

아합이 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무사히 돌아오는 일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신 것은 왕을 잃은 백성들이 돌아오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거짓말하는 영의 환상은 아합에 대한 심판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주어집니다. 열왕기상 20:42에서는 아람 왕을 놓아준 일로 자신의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고, 21장에서는 나봇의 죽음과 포도원을 빼앗은 일 때문에 심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거짓말하는 영의 환상은 아무런 경고 없이 사람을 속여 넘어뜨리는 이야기로 읽을 수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영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영이 어떤 존재인지, 여호와야훼께서 왜 이런 방식을 택하셨는지, 예언자들이 이 거짓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을 사탄이라고 특정하거나, 반대로 여호와야훼께서는 거짓과 전혀 관계없이 이미 일어난 거짓을 허용하셨을 뿐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모두 본문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그 다스림과 거짓의 관계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완전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 독자는 그 긴장을 그대로 마주해야 합니다.

왕을 찾아다닌 군대와 왕을 맞힌 화살

열왕기상 22:29–40 본문 →

아합은 왜 변장했는가

미가야의 예언을 들은 뒤에도 두 왕은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모습을 바꾸고 싸움터로 들어가겠습니다. 왕께서는 왕의 옷을 입으십시오.」 이스라엘 왕은 모습을 바꾸고 싸움터로 들어갔습니다.열왕기상 22:30 · 두루새김

아합은 전쟁에서 자신이 위험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아람 왕은 전투용 수레 부대의 지휘관 서른두 명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하고만 싸우라고 명령합니다(22:31). 따라서 모습을 바꾸는 일은 적에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는 군사적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아합이 미가야의 예언을 피하려고 모습을 바꾸었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호사밧을 의도적으로 대신 위험에 빠뜨리려고 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아람의 수레 부대 지휘관들은 여호사밧을 이스라엘 왕으로 잘못 알아봅니다. 그들은 여호사밧을 향해 방향을 돌리고, 여호사밧은 소리를 지릅니다. 지휘관들은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뒤쫓기를 멈춥니다.

아무렇게나 날아간 것처럼 보인 화살

어떤 사람이 활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뜻하지 않게 이스라엘 왕의 갑옷이 이어지는 틈을 맞혔습니다. 왕이 자기 수레를 모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방향을 돌려 나를 진영 밖으로 데리고 나가라. 내가 다쳤다.」열왕기상 22:34 · 두루새김

그런데 정작 아합을 맞힌 것은 그를 찾아다니던 지휘관들의 공격이 아니라, 특정한 왕을 표적으로 삼지 않은 한 사람의 화살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과, 앞서 선언된 예언이 이루어지는 일을 나란히 놓습니다. 아합은 사람들의 눈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것으로 여호와야훼께서 선언하신 결과를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병거 안에서 마지막까지 서 있던 왕

그러나 싸움이 더욱 거세지면서 그는 수레 안에서 부축을 받아 선 채 아람 군대를 마주하고 있다가 저녁에 죽습니다(22:35).

왕은 여전히 아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수레 안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전쟁을 일으킨 왕이 마지막 순간까지 전장에 남아 있지만, 그가 전쟁을 이끌 수 있는 힘은 이미 사라지고 있습니다.

해가 질 무렵 진영에 외침이 퍼졌습니다. 「저마다 자기 성읍으로, 자기 땅으로 돌아가라.」열왕기상 22:36 · 두루새김

이 말은 미가야의 첫 환상, 「저마다 자기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여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앞에서 환상으로 보았던 모습이 이제 전쟁터의 현실이 됩니다.

왕은 죽었고, 백성은 돌아갑니다.

사백 명쯤 되는 예언자는 왕이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한 사람은 왕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결과를 통해 어느 말이 참이었는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왕의 피가 흘러간 곳

아합의 시신은 사마리아로 옮겨져 묻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피 묻은 수레를 사마리아의 못가에서 씻습니다.

사마리아의 못가에서 왕의 수레를 씻었는데,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들도 그곳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열왕기상 22:38 · 두루새김

열왕기상 21:19에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나봇의 피를 개들이 핥은 곳에서 아합의 피도 개들이 핥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고, 이세벨이 꾸민 불의한 재판과 살인을 통해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엘리야는 왕이 저지른 그 일을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고발했습니다.

이제 아합 자신의 피가 개들의 혀에 닿습니다.

39절은 아합이 상아로 꾸며 지은 집과 그가 건설한 성읍들을 언급합니다. 이것들은 그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이룩한 부와 건설 사업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열왕기의 서술자는 그런 업적을 자세히 기록하는 대신 왕들의 역사책에 넘깁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건설했는지가 아니라, 그가 어떤 말씀을 듣고 어떻게 응답했는가입니다.

화려한 궁전의 주인이었던 왕이 죽은 뒤, 독자의 시선에 남는 것은 상아로 꾸민 집이 아니라 피 묻은 수레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활을 쏜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 히브리어는 레툼모(⁨תֹּם⁩)입니다. 문맥상 특별한 표적을 의식하지 않고 활을 쏘았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여호사밧이 정확히 무엇을 외쳤는지는 열왕기상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역대하 18:31은 여호사밧이 부르짖었을 때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도우셨다고 밝힙니다. 열왕기상은 이러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지휘관들이 신분을 확인하여 물러났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나봇 사건은 이스르엘에서 일어났지만,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은 곳은 사마리아입니다. 열왕기상 22:38은 분명히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라고 선언하면서도, 앞서 언급된 장소와 다른 장소를 기록합니다. 또한 21:27–29에 따르면 아합이 자신을 낮추자 여호와야훼께서는 그의 집안에 대한 재앙을 아들 시대까지 미루셨습니다. 열왕기하 9:25–26에서는 아합의 아들 요람의 시신이 나봇의 밭에 던져지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개들이 요람의 피를 핥았다는 서술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완전히 일치시키기보다, 열왕기상 22장이 아합의 피와 개들의 장면을 통해 엘리야의 경고가 현실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으며, 나봇의 땅에 대한 심판은 다음 세대 이야기에서도 이어진다고 읽는 편이 본문의 차이를 정직하게 존중하는 것입니다. 38절의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들도 그곳에서 몸을 씻었습니다」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병거를 씻는 바로 그때 그들이 그 못에서 몸을 씻었다는 뜻인지, 그 못이 그들이 목욕하던 장소였다는 배경 설명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합의 피로 몸을 씻는 특별한 의식을 행했다거나, 이 장면이 특정한 이방 종교의 의식을 묘사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아합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는 왕들의 길

열왕기상 22:41–54 본문 →

여호사밧은 어떤 왕이었는가

아합의 죽음과 장례가 끝난 뒤, 열왕기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를 정리합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열왕기상 22:43 · 두루새김

앞에서 여호사밧이 아합과 함께 전쟁에 나섰다고 해서 그를 아합과 똑같은 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의 서술자는 두 사람을 구별합니다.

여호사밧은 아사가 걸어간 길을 따랐으며, 아사 시대에도 남아 있던, 다른 신을 섬기는 곳에서 몸을 파는 남자들을 그 땅에서 몰아냈습니다(22:47). 이 행동은 그의 종교 개혁과 연결됩니다. 다만 두루새김이 이렇게 풀어 옮긴 사람들의 구체적인 종교 의식상의 역할은 원어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산당들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물을 바치고 태워 연기를 올렸습니다.열왕기상 22:44 · 두루새김

이는 여호사밧을 전적으로 악한 왕이나 완전한 왕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평가입니다. 왕의 군사적 성과나 외교적 능력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 앞에서의 행동과 백성의 예배 상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평화를 맺었다는 것과 올바른 길을 걸었다는 것

45절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과 평화를 맺었다고 말합니다.

갈라진 두 왕국이 서로 적대하는 대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이 장 앞부분에서 보았듯, 그 평화는 아합과의 군사적 협력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아합과 함께 전쟁에 나갔다가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 때문에 열왕기는 평화로운 외교 관계 자체를 무조건 잘못된 일로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관계가 여호와야훼의 말씀보다 앞설 때 어떤 위험이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물을 생각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한 정치적 관계와 이미 내린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충분히 다시 검토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부서진 배들과 거절된 제안

여호사밧의 통치 기록 가운데 뜻밖의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그는 오빌에서 금을 가져오려고 다시스 배들을 만들었으나, 배들이 에츠욘게베르에서 부서져 떠나지 못했습니다(22:49). 오빌은 앞서 솔로몬 시대의 금 무역에서도 등장한 장소입니다(열왕기상 9:26–28). 솔로몬은 에츠욘게베르에서 배들을 이용해 오빌에서 금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에츠욘게베르는 홍해 북쪽 아카바만과 연결되는 항구 지역으로 이해됩니다. 본문이 바로 앞에서 에돔의 통치 상황을 언급한 것도 이러한 남쪽 지역의 정세와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두 구절 사이의 정확한 원인과 결과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시스 배들」은 먼바다를 항해하는 큰 배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볼 수도 있고, 다시스와 관련된 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밝힌 이번 항해의 목적지는 다시스가 아니라 오빌입니다.

이 사건은 솔로몬의 번영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 번영을 그대로 이루지 못하는 후대 왕국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솔로몬의 배들은 금을 실어 왔지만, 여호사밧의 배들은 항해를 시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50절에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자신의 종들을 여호사밧의 종들과 함께 배에 태우자고 제안합니다. 여호사밧은 이를 거절합니다.

이는 앞에서 아합과 전쟁에 참여했던 모습과 대조됩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왕의 요청에 함께했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 왕의 아들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 사이에 여호사밧의 판단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직접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합의 길을 선택한 아하시야

열왕기상은 여호사밧의 죽음과 왕위를 물려준 일을 기록한 뒤, 다시 북이스라엘로 시선을 돌립니다.

아하시야는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어간 길을 따랐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도 따랐습니다.열왕기상 22:53 · 두루새김

아합이 죽으면서 그의 개인적 통치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아들의 통치 속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열왕기상은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는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야훼께 지혜를 구했고, 성전을 건축했으며, 큰 부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다른 신들에게 기울면서 왕국이 갈라질 것이라는 예고를 받았습니다(열왕기상 11:1–13).

이후 북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지만,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이 열어 놓은 잘못된 예배의 길이 반복되었습니다. 이제 열왕기상 마지막에 이르러 아하시야는 여로보암과 아합과 이세벨의 길을 함께 따르는 왕으로 소개됩니다.

여기에는 왕국의 문제가 한 사람의 잘못된 왕을 제거한다고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잘못된 예배와 통치의 방식이 다음 왕에게 이어지고, 그 왕은 다시 자기 행동으로 그 길을 굳힙니다. 아하시야가 아버지의 죽음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그가 아버지의 길을 떠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하 20:35–37은 이 선박 사업을 다르게 서술합니다.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와 협력하여 배를 만들었으며, 그 협력 때문에 여호와야훼께서 그 사업을 무너뜨리셨다고 예언자가 선언합니다. 열왕기상은 배를 만든 일과 아하시야의 제안을 구별하여 기록하고, 여호사밧이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말합니다. 두 기록의 세부적인 사건 순서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역대하는 이 사업의 실패를 잘못된 동맹에 대한 심판으로 밝힙니다.

왕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야훼와 왕을 잃은 백성

열왕기상 22:1–54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는 왕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왕이든 예언자든 여호와야훼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께서는 왕의 권세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목자 없는 백성이 돌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전쟁이 백성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전투에서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아합의 죽음과 이스라엘 군대가 흩어져 돌아가는 일을 통해, 왕의 종말이 곧 백성 전체의 종말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열왕기상 22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특별한 방법을 가르치는 본문이 아닙니다. 사백 명의 말보다 한 사람의 말이 언제나 옳다고 가르치는 본문도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말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주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등장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왕좌의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열왕기상은 이 모습을 보여 준 뒤 마지막 문장을 남깁니다.

아하시야는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몸을 굽혀 절했습니다. 아버지가 한 온갖 일을 그대로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몹시 화나게 했습니다.열왕기상 22:54 · 두루새김

하늘의 왕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도 전쟁터로 나갔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다른 신 앞에 몸을 굽히는 아들.

열왕기상은 두 왕의 모습을 나란히 남깁니다.

왕좌에 누가 앉아 있는지는 달라졌지만, 그 왕좌에 앉은 사람이 누구의 말씀을 따르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