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17–22장 · 엘리야와 아합
왕이 탐낸 포도원, 하나님이 기억하신 이름
왕은 포도원을 원했습니다. 땅의 주인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절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왕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공동체의 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던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했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바로 그 포도원에서 아합을 찾아내십니다.
나봇은 이미 죽었습니다. 거짓 증언을 바로잡을 기회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침묵한 자리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왕의 죄를 드러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심판을 선포받은 왕이 자신을 낮추자,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도 보십니다.
나봇의 포도원: 왕에게는 땅이었지만 나봇에게는 유산이었다
채소밭을 만들려는 왕
이야기의 첫머리에는 포도원의 위치가 자세히 소개됩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의 일입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는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은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전 곁에 있었습니다.열왕기상 21:1 · 두루새김
이스르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아합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았지만, 이스르엘에도 왕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말했습니다. 「네 포도원을 내게 주어라. 내 집 바로 곁에 있으니 채소밭으로 쓰겠다. 대신 이것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 네가 원하면 이 포도원 값만큼 은을 주겠다.」열왕기상 21:2 · 두루새김
처음부터 아합이 폭력적으로 땅을 빼앗으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포도원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이미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합에게 그곳은 왕궁 옆에 있어서 편리한 땅입니다. 나봇에게 그곳은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땅입니다.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이라는 말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했습니다.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왕께 드리는 일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결코 할 수 없습니다.」열왕기상 21:3 · 두루새김
나봇은 왕이 제시한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땅을 구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땅의 성격이 아합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루새김이 「물려받은 땅」으로 풀어 옮긴 히브리어는 나할라(נַחֲלָה)입니다. 이 말은 상속받은 몫, 대대로 물려받는 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뒤 지파와 가족에 따라 땅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그 땅은 단순히 개인이 자유롭게 사고파는 재산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25:23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시며, 땅을 영구히 팔아넘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36:7도 이스라엘의 유산이 지파 사이에서 옮겨 다니지 않고 각 지파가 조상에게서 받은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밝힙니다.
물론 이 법들이 땅을 사고파는 모든 일을 똑같이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 25장은 땅을 팔아야 하는 상황과 그것을 되찾는 절차도 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왕에게 영구히 넘기는 일을 여호와야훼 앞에서 허용할 수 없는 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포도원은 단순히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있는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상들과 연결된 자신의 몫이었고, 근본적으로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의 일부였습니다.
아합은 더 좋은 포도원을 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봇에게는 더 좋은 포도원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땅의 최종 권한이 있는가
아합은 왕이므로 자신에게 필요한 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맞은 대가를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왕의 요구보다 우선하는 기준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뜻입니다.
신명기 17:14–20은 이스라엘의 왕이 자신을 백성 위에 절대적으로 높이지 말고 여호와야훼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왕 역시 여호와야훼의 말씀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나봇의 거절은 정치적으로 힘없는 사람이 강한 사람의 요구를 거부한 사건이면서, 동시에 왕의 권한이 어디까지인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아합은 땅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봇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지켜야 한다고 믿는 땅을 왕의 욕망 때문에 넘겨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 경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침상에 누운 왕: 거절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
지난 장과 똑같은 감정
나봇에게 거절당한 아합은 궁전으로 돌아갑니다.
아합은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왕께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열왕기상 21:4 · 두루새김
열왕기상 20:43에서 아합은 예언자의 심판 선언을 들은 뒤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서 사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앞 장에서 아합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책망받았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나봇에게 땅을 넘겨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말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예언자가 자신을 책망할 때도, 평범한 백성이 정당한 이유로 요청을 거절할 때도 같은 감정으로 돌아옵니다. 그에게 두 상황은 모두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경험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에서 아합이 들어야 했던 말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왕의 뜻보다 우선하는 기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이 얼굴을 돌리고 먹지 않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큰 군대를 지휘하고 다른 나라의 왕들과 조약을 맺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하나를 얻지 못하자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거부합니다.
저자는 왕의 힘을 과장하여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그가 얼마나 무기력하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불만은 궁전 안에 머물러 있지만, 그 불만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아합은 무엇을 빼놓고 말했는가
이세벨이 찾아와 왜 음식을 먹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아합은 나봇과의 대화를 전합니다.
그런데 아합이 전하는 나봇의 말은 실제 대화와 다릅니다.
아합이 아내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네 포도원을 내게 팔아라. 네가 원하면 대신 다른 포도원을 주겠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가 『제 포도원을 왕께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어요.」열왕기상 21:6 · 두루새김
아합의 설명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이라는 표현도 사라졌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나봇이 포도원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뿐입니다.
그가 일부러 말을 왜곡했는지, 자신에게 중요하게 느껴진 부분만 요약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두 대화를 나란히 놓고 보면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봇의 신앙적 양심은 아합의 설명 속에서 단순한 개인적 거절로 줄어들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 맞아요?」
아내 이세벨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 맞아요?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기분을 푸세요.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당신에게 드릴게요.」열왕기상 21:7 · 두루새김
나봇에게 왕도 여호와야훼의 명령을 넘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세벨에게 왕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나봇은 여호와야훼 때문에 포도원을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세벨은 자신이 그 포도원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그 땅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왕실의 권력과 그 권력을 움직일 수 있는 지위입니다. 그녀는 그 권력을 사용해 나봇의 거절을 무력화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다: 조작된 재판
왕의 이름과 인장이 사용되다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에 아합의 도장을 찍어 봉하고,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들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도장은 문서가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수단이었습니다. 이세벨의 편지는 아합 왕의 명령처럼 전달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세벨은 나봇의 죽음을 개인적인 폭력 사건이 아니라 국가의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처럼 만들었습니다.
왜 금식을 선포했을까
편지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금식하는 날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맨 앞자리에 앉혀라.」열왕기상 21:9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금식은 죄와 재앙 앞에서 자신을 낮추거나,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공동체의 행동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무엘상 7:6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세벨이 금식을 명령한 이유를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나봇을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 사람으로 고발하게 했다는 점에서, 금식은 마치 공동체 안에 심각한 죄가 발생하여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봇을 백성의 맨 앞자리에 앉히는 것도 공개적인 절차를 마련하는 행동입니다. 그 자리가 처음에는 존중받는 자리였는지, 고발당한 사람을 세우는 자리였는지 본문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백성 앞에서 집중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세벨은 은밀하게 사람을 살해한 뒤 시신을 숨기는 방식이 아니라, 공개적인 재판과 처형의 형태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나봇의 죽음이 사적인 살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정당하게 집행한 형벌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명의 증인을 세운 이유
「악한 사람 두 명을 나봇의 맞은편에 앉혀라. 그들이 나봇을 고발하며 『너는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라고 증언하게 하여라. 그런 다음 나봇을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라.」열왕기상 21:10 · 두루새김
신명기 19:15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확정하려면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안 되고 두세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정합니다. 신명기 17:6도 죽일 죄를 지은 사람을 처형할 때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세벨의 계획은 그 법적 조건을 겉으로 충족합니다.
그런데 그 증인들이 거짓말하도록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이세벨은 법이 거짓 증언을 막기 위해 마련한 절차를 이용해 오히려 거짓 증언을 확실한 증거처럼 보이게 합니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법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로 뒤집혔습니다.
나봇이 고발당한 죄의 의미
나봇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합니다.
레위기 24:16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매우 엄격하게 다룹니다. 출애굽기 22:28은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고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고발은 당시 공동체에서 매우 심각한 혐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의 뜻을 존중했기 때문에 포도원을 넘겨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한 사람으로 고발당합니다.
본문은 13절에서 나봇이 실제로 자신을 변호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자신의 결정을 밝혔지만, 정작 죽음을 결정하는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왜 그대로 따랐는가
나봇의 성읍에 사는 장로들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이세벨이 보낸 편지에 적힌 지시대로 했습니다.열왕기상 21:11 · 두루새김
장로들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왜 이세벨의 명령을 따랐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실의 권력이 두려웠을 수도 있고, 왕의 이름과 도장이 찍힌 문서를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이유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나봇과 같은 성읍에 살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나봇의 땅과 그가 지키려던 유산의 의미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공동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실의 계획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악은 한 사람의 욕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욕망을 실현하도록 협력한 여러 사람의 행동을 통해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율법의 형식을 따르고, 공동체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차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거짓을 선택하면, 절차 자체가 오히려 불의를 가리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들은 이세벨에게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열왕기상 21:14 · 두루새김
누가 거짓 증언을 했는지, 나봇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에게 어떤 억울함이 있었는지는 보고되지 않습니다. 계획했던 일이 끝났다는 사실만 전달됩니다.
이제 이세벨은 아합에게 포도원을 차지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가는 왕
「나봇은 이제 살아 있지 않아요. 죽었어요」
이세벨은 아합에게 말합니다.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세벨이 아합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세요. 당신에게 팔기를 거절했던 그 포도원이에요. 나봇은 이제 살아 있지 않아요. 죽었어요.」열왕기상 21:15 · 두루새김
나봇이 죽었다는 사실이 슬픔이나 애도의 이유가 아니라,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는 이유로 제시됩니다. 이세벨은 나봇이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갔습니다.열왕기상 21:16 · 두루새김
그는 나봇의 억울함을 조사하지 않습니다. 나봇이 남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지도 않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곳으로 내려가다
이때 여호와야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라. 지금 그는 나봇의 포도원에 있다.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갔다.」열왕기상 21:18 · 두루새김
왕은 포도원을 차지하러 내려갑니다.
예언자는 그 왕을 만나러 내려갑니다.
아합은 그곳에서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내시는 장소가 됩니다.
그가 빼앗은 땅이 곧 그가 심판의 말씀을 듣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네가 사람을 죽이고 그 땅까지 차지했느냐?」
「그에게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고 전하여라. 『네가 사람을 죽이고 그 땅까지 차지했느냐?』 또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고 전하여라.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았던 곳에서 바로 네 피도 핥을 것이다.』」열왕기상 21:19 · 두루새김
실제 음모를 꾸민 사람은 이세벨입니다. 편지를 보내고 거짓 증인을 세우도록 지시한 것도 이세벨입니다. 나봇을 돌로 쳐 죽인 사람들은 성읍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직접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의 욕망이 사건의 출발점이었고, 왕의 이름과 도장이 범죄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나봇의 죽음으로 생긴 이익을 실제로 차지하려 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 모든 과정의 최종적인 책임을 아합에게 물으십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권력이 만들어 낸 악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봇의 억울함은 누구에게도 바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나봇의 죽음을 단순한 처형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살인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차지한 행위를 부당하게 땅을 빼앗은 일로 규정하십니다.
사람들이 합법적인 판결처럼 꾸민 일을 하나님께서는 본래의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조금 더 깊이
나봇이 처형되었다는 이유로 그 땅이 어떤 법률에 따라 자동으로 왕의 것이 되었는지는 본문이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실이 그 땅을 몰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정확한 법적 절차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합이 이세벨의 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느 단계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8:14에서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에게 왕이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밭을 빼앗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나봇의 이야기는 그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미가 2:1–2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탐내는 밭을 빼앗고 집들을 차지하는 일을 책망합니다. 이사야 5:8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여 다른 사람이 살아갈 자리를 빼앗는 자들에게 화를 선언합니다. 이러한 예언의 공통점은 땅과 재산의 문제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와 연결된다는 데 있습니다. 후속 이야기인 열왕기상 22:38은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았다고 전하고, 열왕기하 9:25–26은 아합의 아들이 나봇의 땅에서 심판받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다만 열왕기상 21:19의 장소 표현과 22:38의 사마리아라는 장소는 글자 그대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므로, 모든 세부 사항이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내 원수야, 나를 찾아냈느냐?」
아합에게 엘리야는 왜 원수인가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말합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말했습니다. 「내 원수야, 나를 찾아냈느냐?」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찾아냈습니다. 왕께서 여호와야훼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는 데 자신을 온통 내맡기셨기 때문입니다.」열왕기상 21:20 · 두루새김
앞서 18장에서도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오히려 아합과 그의 집안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도 비슷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자신의 원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실제로 드러내는 것은 아합 자신이 여호와야훼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왕권을 차지하려는 경쟁자가 아닙니다. 아합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원수의 목소리처럼 듣습니다.
포도원을 사려던 왕이 자신을 팔아넘기다
문맥에서는 아합이 악을 행하는 데 자신을 내주었다는 뜻입니다.
아합은 처음에 은을 주고 포도원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끝에 이르러 엘리야는 그가 악을 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팔아넘겼다고 선언합니다.
포도원은 그의 소유가 되었지만, 그는 악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안처럼
여호와야훼께서는 아합의 집안을 없애 버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네 집안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안처럼,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네가 나를 몹시 화나게 하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했기 때문이다.』」열왕기상 21:22 · 두루새김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안은 앞선 장들에서 이미 멸망했습니다. 두 왕조 모두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스르고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합의 왕가도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아합의 악은 개인의 재산 욕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백성을 잘못된 예배로 이끌었고, 왕권을 통해 무고한 사람의 생명과 소유까지 빼앗았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일과 이웃에게 불의를 저지른 일이 같은 왕의 삶 안에서 드러납니다.
이 둘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를 섬긴다는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이웃의 권리와 생명을 존중하는 일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아합의 죄를 이세벨에게만 돌릴 수 있는가
참으로 아합처럼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는 데 자신을 온통 내맡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내 이세벨이 그를 부추겼습니다.열왕기상 21:25 · 두루새김
그러나 저자는 아합을 단순히 아내에게 끌려다닌 희생자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가 악한 일을 하는 데 「자신을 온통 내맡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세벨이 아합을 부추겼다는 사실과, 아합 자신이 악을 행했다는 사실은 함께 기록됩니다.
다른 사람이 악을 권했다는 사실이 그 악을 받아들인 사람의 책임을 지워 주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히트마케르는 「팔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나온 형태로, 자신을 어떤 일에 내맡기거나 팔아넘긴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그 뜻을 「자신을 온통 내맡기셨기 때문입니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원문의 이 표현이 의도적인 말놀이인지까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장 안에서 사고파는 행위와 자신을 팔아넘기는 표현이 만들어 내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심판 선언을 들은 아합: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금식하다
앞에서는 먹지 않았고, 이제는 금식한다
아합은 이 말들을 듣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맨몸에 거친 베를 두르고 금식했으며, 거친 베를 두른 채 누워 잤습니다. 천천히 걸어 다녔습니다.열왕기상 21:27 · 두루새김
처음에는 나봇이 포도원을 주지 않아서 먹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의 심판 말씀을 듣고 금식합니다.
또한 9절에서 이세벨은 금식하는 날을 선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금식은 거짓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27절에서 아합이 금식합니다.
한 번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종교적인 절차로 위장하기 위해 금식이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한 번은 실제로 죄의 책임을 지적받은 왕이 자신을 낮추는 행동으로 금식합니다.
금식이라는 형식 자체가 하나님께 충실함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행동과 결합되고 어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므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그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의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열왕기상 21:29 · 두루새김
그의 악을 보시는 분과 그의 낮아진 모습을 보시는 분이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집안에 대한 심판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 시기를 미루십니다. 아합의 집안이 멸망하리라는 선언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자비와 심판이 함께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아합의 죄가 가벼워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을 낮춘 행동을 여호와야훼께서 외면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미루어졌다면 나봇의 억울함은 어떻게 되는가
나봇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의 포도원은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자신을 낮추었다는 이유로 재앙이 미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나봇의 억울함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본문은 이 질문을 모두 해결하지 않습니다. 특히 나봇의 가족에게 어떤 회복이 주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의 겸손에 대한 여호와야훼의 반응만을 기록합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은 아합의 집안에 대한 심판을 미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봇의 죽음을 없었던 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나봇에게 일어난 불의 역시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겸손이나 뉘우침을 피해를 바로잡는 책임과 혼동하지 않도록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합이 옷을 찢고 거친 베를 두르는 이러한 행동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깊은 슬픔이나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나봇의 죽음을 깊이 후회했는지, 자신의 왕권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는지, 또는 두 감정이 함께 있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원래의 가족에게 돌려주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나봇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바로잡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완전한 회개와 관계 회복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아합의 행동을 전부 거짓된 연기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다음 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이 행동을 평가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맺음말 — 포도원을 차지한 왕이 고개를 숙이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죽은 나봇의 억울함을 기억하시면서도, 악을 행한 아합이 자신을 낮추는 순간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지워 버리려 한 나봇의 죄 없는 피도, 심판 앞에서 낮아진 아합의 모습도 하나님의 눈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아합은 한때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무시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권력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여호와야훼 앞에서 얼마나 낮은 사람인가를 몸으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은 그 왕이 거친 베를 두르고 천천히 걸어 다니는 모습과, 그 모습을 보신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남긴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