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0–28장 · 둘로 갈라진 나라

싸우지 않아도 나아가야 하는 백성

여호사밧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압과 암몬, 세일 산지의 세력이 힘을 합쳐 유다로 쳐들어왔고, 적군은 이미 엔게디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이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왕은 두려워했습니다. 백성은 온 나라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함께 서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한 레위 사람에게 여호와야훼의 영께서 임하셨고, 뜻밖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다.」 「내일 그들을 맞으러 나가라.」 싸울 필요가 없다면서 왜 적군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하실 것이라면 예루살렘에 남아 기다려도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백성에게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장은 이러한 놀라운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는 선언 뒤에 여호사밧은 다시 악한 일을 하는 북왕국의 왕과 힘을 합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군대가 아니라 배들이 부서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 왕이 어째서 다시 같은 종류의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이 장의 중심에는 세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리로 나아가는 일,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920장 본문 읽기 →

두려워한 왕이 선택한 첫 번째 행동

역대하 20:1–4 본문 →

적군은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그 뒤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암몬 사람들 일부와 함께 여호사밧을 치러 전쟁에 나섰습니다.역대하 20:1 · 두루새김

모압과 암몬은 요단강 동쪽에 자리한 이스라엘의 이웃 민족이었습니다. 이야기 뒤에서는 세일 산지 사람들도 공격에 참여한 집단으로 등장합니다. 세일은 주로 에돔과 연결되는 산악 지역입니다.

사람들이 여호사밧에게 와서 알렸습니다. 「바다 건너 아람에서 큰 군대가 임금님을 치러 왔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습니다.」역대하 20:2 · 두루새김

엔게디는 사해 서쪽 해안에 있는 오아시스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유다 광야의 길들과 연결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 적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침략이 먼 국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유다 중심부를 위협하는 현실이 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였을까

여호사밧은 두려웠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를 찾기로 마음을 정하고, 온 유다에 금식을 선포했습니다.역대하 20:3 · 두루새김

역대기는 왕의 두려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졌는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여기서 두려움과 하나님을 찾는 행동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위협 앞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능력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본문에서 여호사밧의 믿음은 두려움 자체를 없애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두려운 상황에서 누구를 찾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온 유다에 금식이 선포되었고, 여러 성읍의 백성이 여호와야훼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금식은 먹는 일을 삼가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절박함과 간절한 부탁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장에서는 개인이 믿음을 기르는 훈련보다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대응한다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행동은 앞 장에서 여호사밧이 백성을 그 조상들의 하나님께 돌아오게 했다는 기록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제 위기가 닥쳤을 때 왕과 백성이 함께 여호와야훼를 찾습니다.

그렇게 왕의 두려움은 온 백성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에서 「암몬 사람들 일부」라고 번역된 부분은 원문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앞서 암몬 자손이 등장한 뒤 다시 암몬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이 부분에 「미나이 사람들」이라는 별도의 집단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 때문에 이들을 세일 지역과 관련된 므우님 사람들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10절과 22–23절에 세일 산지가 등장한다는 점은 그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다만 어느 형태가 원래의 표현이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아람에서」라는 표현에도 지리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람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북동쪽의 시리아 지역과 연결되지만, 이 본문에 등장하는 모압과 암몬과 세일은 사해 동쪽과 남쪽에 자리합니다. 그래서 「아람」을 글자 모양이 비슷한 「에돔」으로 이해하면 침략군의 위치와 이동 방향이 더 자연스러워진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해진 히브리어 본문에는 아람이 있고, 확인되는 칠십인역 본문 역시 시리아를 뜻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에돔이 적합하다는 사실만으로 원문이 반드시 에돔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을 바라봅니다」

역대하 20:5–12 본문 →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부터 말한다

여호사밧은 여호와야훼의 성전 새 뜰 앞에 섭니다. 그곳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모여든 백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왕은 군사 작전을 발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가 기도했습니다. 「저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주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의 나라들을 다스리십니다. 주님의 손에 힘과 능력이 있으니, 아무도 주님께 맞설 수 없습니다.」역대하 20:6 · 두루새김

모압과 암몬과 세일의 연합군은 유다보다 강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들 역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여러 나라 가운데 일부라는 사실에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6절에서 왕은 하나님의 손에 힘과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12절에서는 자신들에게 적군과 맞설 힘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에게는 힘이 있고, 자신들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에게 힘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합니다. 그 결과 힘이 없다는 사실은 절망의 이유로만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 땅은 누구의 것인가

여호사밧은 이어서 가나안 땅의 역사를 떠올립니다.

「저희 하나님,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이 땅의 주민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이 땅을 영원히 주시지 않았습니까?」역대하 20:7 · 두루새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그 후손에게 주신 땅의 선물이 현재의 위기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12:7과 15:18–21에 기록된 땅의 약속이 여호사밧의 기도 속에서 다시 언급되는 것입니다.

7절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을 사랑한」 사람으로 불립니다. 이사야 41:8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친구로 묘사됩니다. 여호사밧이 아브라함을 떠올리는 이유는 조상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조상과 맺으신 관계가 지금도 의미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땅에서 살아가는 백성은 자신의 힘만으로 안전을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 땅을 주신 분께 도움을 구합니다.

솔로몬의 기도가 여호사밧의 기도가 되다

여호사밧은 땅의 약속을 말한 뒤 성전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저희에게 전쟁으로 받는 벌이나 전염병이나 굶주림 같은 재앙이 닥치면, 저희는 이 성전 앞에, 주님 앞에 서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고난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는 들으시고 구해 주실 것입니다.』」역대하 20:9 · 두루새김

솔로몬은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백성이 전쟁이나 굶주림이나 전염병 등 여러 재난을 만났을 때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역대하 6:24–35). 솔로몬에게는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던 재앙이 여호사밧에게는 현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은 새로운 약속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드려졌던 기도와 하나님이 맺어 주신 언약의 관계를 기억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며,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고난을 아뢸 수 있는 장소입니다.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백성 가운데 두신 그분의 이름이 기도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하늘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믿음으로 성전에 섰습니다.

이전에 해치지 않았던 민족들이 이제 쳐들어오다

기도는 10절에서 뜻밖의 역사적 기억으로 이어집니다.

「이제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지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쳐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들을 피해 갔고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역대하 20:10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동할 때 에돔과 모압과 암몬의 땅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신명기 2:4–19). 하나님은 그 민족들에게도 살 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이웃 민족의 땅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저희에게 이렇게 갚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물려주신 주님의 땅에서 저희를 쫓아내려고 온 것입니다.」역대하 20:11 · 두루새김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물려주신 땅이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땅으로 불립니다.

이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땅이 누구의 것인지에 관한 단순한 주장으로 줄이지 않게 합니다.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그 선물을 주신 분 앞에서 백성은 자신의 처지를 호소합니다.

이 표현에는 배신감과 억울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 억울함을 백성에게 보복하라고 명령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기도로 가져갑니다.

기도는 답을 안다는 선언이 아니라 모른다는 고백으로 끝난다

「저희 하나님, 그들에게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희에게는 쳐들어오는 이 큰 군대에 맞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주님을 바라봅니다.」역대하 20:12 · 두루새김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자신의 적을 무조건 멸망시켜 달라는 막연한 미움만을 쏟아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명령과 지금 침략자들의 행동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것은 왕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왕은 위기 앞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백성은 왕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고, 왕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금식을 선포하고, 백성을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해결할 충분한 힘도, 확실한 계획도 자신에게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특히 「다만 주님을 바라봅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늘을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움을 기대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여호사밧의 믿음은 해결 방법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해결 방법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이 끝나자 성전 뜰의 광경이 다시 묘사됩니다.

모든 백성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 사람에게 말씀이 임하다

역대하 20:13–17 본문 →

어린아이들까지 함께 서 있었다

온 유다가 여호와야훼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아내들과 아들들도 함께 서 있었습니다.역대하 20:13 · 두루새김

왕의 기도가 끝났지만, 아직 하나님의 응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침략의 위협은 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성읍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생명과 생활도 위험해집니다.

역대기는 그들을 전쟁 이야기의 주변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질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이 함께 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앞서 여호사밧은 성전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제 온 백성이 그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적군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머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왕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한 레위 사람에게 영이 임하다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여호와야훼의 영께서 아삽 자손인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습니다. 야하시엘은 스가랴의 아들이고, 스가랴는 브나야의 아들이고, 브나야는 여이엘의 아들이고, 여이엘은 맛다냐의 아들이었습니다.역대하 20:14 · 두루새김

아삽은 다윗 시대에 예배 음악과 관련된 일을 맡았던 인물입니다(역대상 16:4–7). 따라서 야하시엘의 집안 내력은 이 장에서 이어질 찬양의 장면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왕이 기도를 인도했지만, 왕이 스스로 하나님의 대답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습니다. 백성의 위기를 해결해야 할 책임은 왕에게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일은 그 혼자 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맡으신 전쟁

야하시엘이 전한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하시엘이 말했습니다. 「온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그리고 여호사밧 왕이시여,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큰 군대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기가 꺾이지 마라. 이 전쟁은 너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다.』」역대하 20:15 · 두루새김

여호사밧은 기도하면서 자기 백성에게 충분한 힘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백에 응답하여 전쟁의 결과를 그들의 군사적 능력에 맡기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왕은 적군을 감당할 힘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직접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왕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왕은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이 구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싸우지 말라면서 왜 나아가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의 명령은 구체적입니다.

「『내일 그들을 향해 내려가라. 그들은 시스 비탈길로 올라오고 있다. 너희는 여루엘 광야 앞 골짜기 끝에서 그들을 만날 것이다.』」역대하 20:16 · 두루새김

하나님의 말씀은 막연하게 용기를 내라는 위로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는 명령입니다.

「『이번에는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다. 자리를 잡고 서서 여호와야훼께서 너희를 구해 주시는 것을 보아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두려워하거나 기가 꺾이지 마라. 내일 그들을 맞으러 나가라. 여호와야훼께서 너희와 함께하신다.』」역대하 20:17 · 두루새김

유다가 해야 할 일은 전쟁에서 승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적군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다는 증거는 아직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적군이 존재하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구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스 비탈길과 여루엘 광야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적군이 나아오는 길과 유다가 마주할 장소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세 명령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자리를 잡고 서서 여호와야훼께서 너희를 구해 주시는 것을 보아라」로 옮겼습니다. 이 명령들은 출애굽기 14:13–14를 떠올리게 합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야훼께서 구해 주시는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어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출애굽기 14:15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역대하 20:17에서도 다음 날 적군을 맞으러 나가라고 명령합니다.

승리가 보이기 전에 시작된 찬양

역대하 20:18–21 본문 →

응답을 들은 사람들의 첫 행동

야하시엘의 말씀이 끝나자 여호사밧은 얼굴을 땅에 대고 몸을 굽힙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야훼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다음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 속한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 아주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장면에는 아직 적군의 패배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선포되었지만, 실제 전투의 결과는 다음 날에야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은 이미 하나님께 절하고 찬양합니다.

찬양의 이유는 자신들이 눈으로 승리를 확인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찬양은 구원을 경험한 뒤에 나타나는 반응일 때가 많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뒤 여호와야훼께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역대하 20장에서는 구원이 일어나기 전에도 찬양이 시작됩니다.

믿음과 굳게 섬의 관계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드고아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들이 나갈 때 여호사밧이 서서 말했습니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굳게 믿어라. 그러면 너희가 굳게 설 것이다. 그분의 예언자들을 믿고 승리를 거두어라.」역대하 20:20 · 두루새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한결같이 믿을 만한 분이시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이 굳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8장에서 아합은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따르다가 죽었습니다. 여호사밧의 말은 이 상황에서 여호와야훼의 영께서 임하셔서 말씀을 전한 야하시엘의 예언과 연결됩니다.

문제는 예언자라는 직함 자체가 아니라 그가 전한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군사들 앞에 선 사람들

여호사밧은 백성과 의논한 뒤, 여호와야훼께 노래하며 그분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찬양할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무기를 갖춘 군사들보다 앞서 나아가며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 감사하여라.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이다.」역대하 20:21 · 두루새김

그들은 아직 내일이 어떻게 될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전에 어떤 분이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결같다는 고백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약속을 연결합니다.

그들은 적이 얼마나 강한가를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한결같이 믿을 만한 분이신가를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전쟁의 방향이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굳게 믿어라」와 「굳게 설 것이다」는 히브리어의 같은 어근 아만(⁨אָמַן⁩)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이 어근은 확실함, 신뢰할 만함, 굳건함의 의미와 관련됩니다. 두루새김이 「한결같은 사랑」으로 옮긴 히브리어의 헤세드(⁨חֶסֶד⁩)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서 보이시는 변함없이 충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입니다. 역대상 16:34에서 다윗의 예배와 관련하여 같은 고백이 등장합니다. 역대하 5:13에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도 이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시편 136편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며 같은 후렴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과 아름다움을 찬양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찬양하는 사람들이 거룩한 예복이나 장식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원문의 표현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유다가 싸우기 전에 적군이 무너지다

역대하 20:22–24 본문 →

노래가 시작될 때 일어난 일

그들이 기뻐 외치며 찬양하기 시작할 때, 여호와야훼께서는 유다로 쳐들어오는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지 사람들을 치도록 숨어서 공격할 자들을 배치하셨습니다. 그러자 쳐들어오던 군대가 패배했습니다.역대하 20:22 · 두루새김

본문은 찬양이 시작된 시점과 적군의 패배가 시작된 시점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맡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백성은 그 말씀을 신뢰하며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적군의 패배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찬양하면 반드시 적이 무너진다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찬양 자체에 적군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패배를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연합군이 스스로 무너지다

그들은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연합했습니다. 서로 협력하여 더 강한 군사력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그 연합은 오히려 서로를 무너뜨리는 관계로 바뀝니다.

암몬 자손과 모압 사람들이 세일 산지 주민들을 공격했고, 세일 주민들을 다 없앤 뒤에는 남은 세력이 서로 공격하여 죽였습니다. 침략군은 유다를 쓰러뜨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이 자신들을 무너뜨리는 결과에 이르렀습니다.

유다의 군대가 적을 공격하여 승리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보라고 하신 것을 마침내 보다

유다 사람들은 광야를 내려다보는 곳에 이르러 적의 군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적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땅에 쓰러져 있었고, 살아서 빠져나간 사람이 없었습니다.역대하 20:24 · 두루새김

하나님은 백성에게 자리를 잡고 서서 자신이 구해 주시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봅니다.

본문은 「살아서 빠져나간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 이야기에서 유다를 공격한 그 군대의 패배가 완전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모압이나 암몬, 세일 지역의 모든 주민이 역사적으로 멸망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면에서 백성은 자신들이 싸워서 얻은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눈으로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적군의 패배에서 곧바로 끝나지 않습니다.

승리를 경험한 백성이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받아들였는지가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이 배치하신 「숨어서 공격할 자들」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이들이 다른 군대였는지, 침략군 내부의 어떤 집단이었는지, 또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보이지 않는 개입을 나타내는 표현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23절 후반부의 히브리어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서로를 파멸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만, 서로 돕는 행동이 결국 파멸로 이어졌다는 식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침략군 내부의 관계가 무너지고 서로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혔다는 전체 흐름은 분명합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출애굽기 14:13, 30–31). 홍해에서는 바닷물이 갈라지고 다시 덮이는 일이 기록됩니다. 여호사밧 시대에는 침략군 내부의 충돌과 파멸이 기록됩니다. 사건의 방식은 달랐지만, 유다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구원이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신학적 의미가 이어집니다.

전리품을 거둔 골짜기가 찬양의 장소가 되다

역대하 20:25–30 본문 →

전쟁터에서 사흘을 보내다

여호사밧과 백성은 적군에게서 전리품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전리품이 너무 많아 사흘 동안 거두어야 했습니다. 본문은 그곳에 많은 재물과 귀중한 물품이 있었고 시체들도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침략군은 유다를 공격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침략군에게 빼앗기는 대신 그들이 가지고 왔던 물품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은 단순히 죽음을 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침략의 위협 속에서 백성이 안전과 물질적인 유익을 얻는 결과까지 포함합니다.

물론 이것을 하나님을 신뢰하면 언제나 많은 재물을 얻는다는 약속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침략과 구원 사건의 결과를 기록합니다.

브라가 골짜기는 무엇을 기억하는 이름인가

넷째 날에 그들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 여호와야훼를 찬양했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를 찬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부릅니다.역대하 20:26 · 두루새김

침략군이 무너진 전쟁터는 승리의 기념비를 세우거나 왕의 업적을 자랑할 장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그곳에서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장소의 이름은 왕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 행위에서 나왔습니다.

전쟁터로 나아갈 때 그들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찬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처음의 찬양은 약속을 신뢰하는 응답이었고, 마지막의 찬양은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뒤의 응답이었습니다. 두 찬양 사이에는 적군의 패배가 있습니다.

하지만 찬양의 대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출발한 성전으로 돌아오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은 여호사밧을 앞세우고 기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원수들의 패배로 그들을 기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역대하 20:27 · 두루새김

처음에 여호사밧은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제 백성은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경험하고 기쁘게 돌아갑니다.

두려움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하프와 수금과 나팔을 연주하며 예루살렘에 들어와 여호와야훼의 성전으로 갔습니다.역대하 20:28 · 두루새김

처음에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성전에 섰습니다. 이제는 이루어진 구원을 찬양하기 위해 성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전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장소이면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감사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찬양은 단순히 극적인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억해야 하는지 표현하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

여러 땅의 모든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과 싸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여호사밧의 왕국은 평온했습니다. 그의 하나님께서 사방에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역대하 20:30 · 두루새김

구약에서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시는 안식은 적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신명기 12:10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사방의 적들에게서 안식을 주시는 상황을 말합니다. 여호사밧의 왕국도 그러한 안식을 경험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여호사밧의 이야기는 완벽한 승리의 기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전리품을 거두는 장면에 죽은 사람의 몸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전해진 히브리어 본문에는 시체를 뜻하는 표현이 있지만, 일부 전승에서는 옷이나 의복을 뜻하는 말이 나타납니다. 이는 히브리어에서 두 표현의 철자가 비슷하다는 사실과도 관련됩니다. 따라서 본문에 시체가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존중하되, 유다 사람들이 시체 자체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그곳에 재물과 귀중한 물품과 시체들이 있었다고 한 뒤, 사람들이 많은 물건을 거두었다고 옮깁니다. 그곳에 있던 것들과 실제로 가져간 물품을 구별하는 것이 신중한 읽기입니다.

승리한 왕국에도 남아 있던 문제

역대하 20:31–34 본문 →

여호사밧의 전체 통치를 돌아보다

31–34절은 여호사밧의 통치를 정리하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는 서른다섯 살에 왕이 되었고, 예루살렘에서 스물다섯 해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실히의 딸 아수바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의 본을 따르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역대하 20:32 · 두루새김

그는 하나님을 찾았고, 백성을 가르치고, 재판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이 장에서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했으며,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는 중요한 단서가 붙습니다.

그러나 산당들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도 여전히 조상들의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굳게 정하지 않았습니다.역대하 20:33 · 두루새김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

역대하 19:3에서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찾으려고 마음을 굳게 정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20:33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굳게 정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왕과 백성 사이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도록 사람들을 보낼 수 있습니다. 산당을 없애도록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재판관들에게 정의로운 판결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하나님께 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20장에는 백성 전체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찬양하며 구원을 경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33절은 여전히 백성의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정한 위기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로 그분의 구원을 경험했다는 사실과,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충실히 따른다는 보증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하 17:6에서는 여호사밧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을 없앴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20:33에서는 산당들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여호사밧이 일부 산당을 없앴지만 모든 곳을 없애지는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우상 숭배와 관련된 시설을 없앴지만 다른 산당들은 남아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확한 경위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왕의 배들이 부서지다

역대하 20:35–37 본문 →

다시 등장한 북왕국과의 동맹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안을 얻은 뒤, 여호사밧은 다시 북왕국의 왕과 힘을 합칩니다.

그 뒤에 유다 왕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힘을 합쳤습니다. 아하시야는 악한 일을 하는 왕이었습니다.역대하 20:35 · 두루새김

당시 여호사밧은 아합을 도와 라못길르앗 전쟁에 참여했고,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해 주셨지만, 예언자 예후는 그가 악한 자를 도왔다고 책망했습니다(역대하 19:2).

그런데 이제 여호사밧은 다시 아합의 집안과 손을 잡습니다.

이번에는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가는 일이 아니라 배를 만드는 사업입니다. 여호사밧은 아하시야와 함께 다시스로 갈 배들을 만들려고 했고,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만들었습니다.

배들이 부서진 까닭

마레사 출신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에게 예언합니다.

마레사 출신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에게 예언했습니다. 「왕께서 아하시야와 힘을 합치셨으므로, 여호와야훼께서 왕이 하신 일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배들은 부서져 다시스로 갈 수 없었습니다.역대하 20:37 · 두루새김

이번에도 역대기는 여호사밧의 선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합니다.

두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동맹 자체가 모든 경우에 무조건 금지되었다는 일반 법칙이 아닙니다. 역대기는 여호사밧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아합과 전쟁에서 운명을 함께했고, 이번에는 악한 일을 하는 아하시야와 경제적 사업을 함께했습니다.

여호사밧에게는 정치와 경제를 위해 외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어떤 동기와 계산으로 이 동맹을 선택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탐욕 때문에 이 사업을 추진했다거나, 자신의 부를 늘리려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여호사밧의 위대한 구원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가 잘못된 동맹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에시온게벨은 홍해 북쪽 아카바만 부근에 있었던 항구 지역으로 이해됩니다. 열왕기상 9:26–28에서는 솔로몬이 이곳에서 배들을 만들어 오빌과 연결되는 바다 무역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다시스는 성경에서 먼 바다와 장거리 바다 무역에 관련된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열왕기의 다시스 배는 먼 거리를 항해하는 배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역대하는 다시스를 항해의 목적지로 제시합니다. 특히 에시온게벨이 홍해 쪽에 있었다는 사실은 다시스를 정확한 항해 목적지로 볼 때 지리적인 질문을 낳습니다. 열왕기상 22:48은 같은 선박 사업과 관련하여 배들이 오빌에서 금을 가져오려 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역대하 20장의 「다시스」를 반드시 같은 지리적 목적지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사건을 다루는 열왕기상 22:48–49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사밧이 만든 배들이 에시온게벨에서 부서졌다고 기록한 뒤, 아하시야가 자기 사람들을 배에 태워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여호사밧이 거절했다고 말합니다. 반면 역대하 20:35–37은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와 힘을 합쳐 배들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두 기록의 순서와 협력 관계를 정확하게 어떻게 조화시킬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먼저 공동사업이 있었고 배가 부서진 뒤 추가적인 협력을 거절했다고 이해할 가능성은 있지만, 본문들이 그 과정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하나의 확정된 사건 순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믿음의 모습

역대하 20:1–37 본문 →

그들은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자기 힘의 한계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이 가리키는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 골짜기를 찬양의 장소로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 사라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했다는 이유로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독자가 이 말씀을 자신의 모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만 기다려야 한다고 이해한다면, 그것 역시 본문의 뜻에서 벗어납니다. 여호사밧의 시대에 하나님은 특정한 전쟁에 관해 특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에는 유다가 직접 싸울 필요가 없다는 약속과 다음 날 적군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 장의 특별한 전쟁 방식을 오늘날의 모든 문제 해결 방법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역대하 20장에는 두 가지 인상적인 광경이 남습니다.

하나는 드고아 광야로 나아가는 백성입니다.

그들 앞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적군의 패배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찬양합니다.

다른 하나는 에시온게벨에서 부서진 배들입니다.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와 함께 만들었던 배들은 목적지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나아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 말씀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왕이 다른 왕과 손잡고 배들을 만들어 나아가려 했지만, 그 사업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오래 남는 말은 여호사밧의 마지막 실패보다, 위기 속에서 그가 드렸던 기도일 것입니다.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 말을 드린 다음 날 아침, 백성은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씀을 들었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적군이 아직 눈앞에 있었지만, 자신들이 싸워서 승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여호와야훼께 감사하여라.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래하며 나아간 사람들이 마침내 광야를 내려다보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라고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