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8–23장 · 홀로 남은 유다
왕이 펼친 편지, 하나님이 들으신 말
아시리아 왕 산헤립은 편지 한 장으로 예루살렘을 다시 위협합니다.
그 편지에는 새로운 군사 전략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앞서 랍사게가 외쳤던 말이 반복될 뿐입니다. 아시리아가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나라의 신들은 자기 백성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읽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자신에게 도착한 편지를 여호와야훼 앞에 펼쳐 놓습니다.
앞 장에서 아시리아의 사절은 예루살렘 성벽 앞에 서서 계속 말을 했습니다. 그는 아시리아의 군사력을 자랑했고, 히스기야의 믿음을 조롱했으며,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을 구하실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백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히스기야는 그 위협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이 장은 누가 더 큰 군대를 가지고 있는가에서 시작해, 누가 역사의 마지막 말을 할 수 있는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것은 히스기야의 기도입니다.
「아이를 낳을 순간이 되었는데」 — 아무것도 낳을 힘이 없는 날
히스기야가 랍사게의 말을 들은 뒤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자신의 옷을 찢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 말을 듣고 옷을 찢고 자루옷을 입은 뒤, 여호와야훼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열왕기하 19:1 · 두루새김
앞 장 마지막에서 아시리아의 말을 듣고 돌아온 관리들도 옷을 찢었습니다(18:37). 왕과 신하가 같은 행동을 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처한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드러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옷을 찢고 자루옷을 입는 행동은 깊은 슬픔과 재난,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과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앞 장에서 히스기야는 아시리아 왕에게 막대한 재물을 보냈고, 여호와야훼의 성전에 있던 것까지 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위협을 받자 이제는 자신이 직접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찾습니다.
왕은 왜 이사야를 찾아갔는가?
히스기야는 왕궁을 맡은 엘리야김과 기록 담당 관리 셉나, 제사장 지도자들을 예언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이사야는 이미 아하스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위협했을 때, 그는 아하스에게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이사야 7:3–9). 이제 아하스의 아들이 다른 위기 앞에서 같은 예언자를 찾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전한 말은 승리를 확신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사야에게 말했습니다. 「히스기야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고난을 겪고 꾸지람과 모욕을 당하는 날입니다. 아이를 낳을 순간이 되었는데 낳을 힘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열왕기하 19:3 · 두루새김
출산은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큰 위험이 따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어머니에게 힘이 없다면, 생명을 기대하던 순간이 오히려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기가 됩니다. 나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했지만, 스스로 그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사절은 유다의 군사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조롱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부족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는 확신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인정에서 출발합니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4절에서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아시리아 왕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라고 자기 신하 랍사게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말을 모두 들으시고, 그 말 때문에 그를 꾸짖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열왕기하 19:4 · 두루새김
랍사게는 유다의 관리들과 백성이 듣도록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말이 유다 사람들의 귀에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도 알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리아는 유다의 많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을 점령했습니다(18:13). 히스기야는 온 유다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히스기야는 여호와야훼의 응답을, 여호와야훼가 적의 말 때문에 그를 꾸짖으실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표현합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들으시고 행동하시기를 구하지만, 그분이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 하나님이 먼저 대답하시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도착하자, 예언자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왕께 이렇게 전해 주세요.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시리아 왕의 신하들이 나를 헐뜯는 말을 네가 들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라.』」열왕기하 19:6 · 두루새김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랍사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도 그 말들이 자신을 향한 모욕이었다고 밝히십니다. 이것은 유다의 정치적 위기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둘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유다를 공격하는 모든 행위가 자동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선 열왕기는 유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아시리아의 사절이 여호와야훼를 다른 신들과 비교하면서 그분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부정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말을 문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겠다고 말씀하시는가?
「『보아라. 내가 그의 안에 영을 넣겠다. 그는 소문을 듣고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그를 자기 나라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겠다.』」열왕기하 19:7 · 두루새김
이것은 앞 장에서 말로 예루살렘을 흔들려 했던 산헤립에게 어울리는 반전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신도 어떤 소식을 듣고 움직이게 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뒤 맞을 죽음까지 예고하십니다.
아직 그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제 산헤립이 아무리 강한 왕이라도 자신의 미래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원문의 루아흐(רוּחַ)는 바람, 숨, 영, 마음의 움직임을 두루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산헤립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기세가 일어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영이 작용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소문을 들은 산헤립, 다시 편지를 보내다
8절에서 랍사게는 아시리아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는 말을 듣고 돌아갑니다. 그는 왕이 립나를 공격하며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9절에서는 또 하나의 소식이 도착합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가 산헤립과 싸우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앞서 산헤립이 소문을 듣고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사건은 그 예고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다만 9절의 소식 하나가 7절의 예고 전체와 정확히 어떻게 맞물리는지 본문이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산헤립은 예루살렘에 대한 위협을 멈추지 않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전해라. 『네가 믿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은 아시리아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너를 속이게 두지 마라.』」열왕기하 19:10 · 두루새김
앞 장에서는 히스기야가 백성을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18:29). 이제는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정치적 판단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과거의 승리를 다시 나열합니다. 고산, 하란, 레셉, 에덴 사람들, 하맛, 아르밧, 스발와임, 헤나와 이와의 왕들이 등장합니다. 이 지명들은 아시리아가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보여 주는 목록입니다.
아시리아는 여러 나라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을 구하실 수 없다는 결론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산헤립은 자신의 과거 승리를 미래에도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보증으로 삼으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스는 이집트 남쪽의 나일강 상류 지역과 연결된 왕국이며, 이 시기에는 이집트 정치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디르하가는 고대 이집트 왕들의 이름에서 타하르카로 알려진 통치자와 연결됩니다.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일은 그의 왕실 기록에서 기원전 701년의 사건으로 확인되지만, 디르하가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시점은 그보다 뒤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이 나중에 왕이 된 인물을 익숙한 칭호로 소개했다는 읽기와, 현재 이야기의 여러 군사 행동이 서로 다른 시기의 사건을 함께 담고 있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본문만으로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편지를 펼쳐 놓은 왕 — 기도는 무엇을 바꾸는가?
히스기야는 사절들에게서 편지를 받아 읽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야훼 앞에 그 편지를 펼쳐 놓았습니다.열왕기하 19:14 · 두루새김
산헤립이 보낸 말은 더 이상 히스기야 혼자 감당해야 할 위협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왕은 그 말을 여호와야훼 앞에 가져가 기도합니다.
히스기야는 곧바로 적군을 물리쳐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고백합니다.
「주님만이 세상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 주님만이 세상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열왕기하 19:15 · 두루새김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이라는 표현은 언약궤와 관련된 성전의 상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여호와야훼를 단순히 언약궤가 놓인 곳에 머무시는 신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산헤립은 여호와야훼를 아시리아가 정복한 다른 나라들의 신들과 같은 부류에 놓았습니다. 그 신들이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므로 여호와야훼도 예루살렘을 지키실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비교의 출발점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에 속한 신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다른 신들과 힘을 겨루시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아시리아보다 더 강한 힘을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아시리아와 예루살렘이 모두 누구의 세계 안에 있는지를 고백합니다.
산헤립의 말은 누구에게 전달되었는가?
「여호와야훼,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보내 온 말을 들어 주십시오.」열왕기하 19:16 · 두루새김
아시리아 왕은 자신이 군사적으로 거둔 성과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제 하나님께 보고 들어 달라고 간절히 구합니다.
성경의 기도에서 이런 표현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 처한 상황을 살피시고 응답해 달라는 요청으로 사용됩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말을 자신의 자존심에 대한 공격으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그는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뒤에 나오는 나무와 돌의 우상과 대조됩니다.
히스기야는 아시리아의 승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여호와야훼, 아시리아 왕들이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열왕기하 19:17 · 두루새김
유다의 여러 성읍도 이미 점령당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이런 사실을 지운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산헤립과 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들은 그 민족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만든 나무와 돌이었기 때문에, 아시리아 왕들은 그것들을 없애 버렸습니다.」열왕기하 19:18 · 두루새김
산헤립은 모든 신들을 같은 부류에 놓았지만, 히스기야는 창조주와 사람이 만든 물건을 구별합니다. 아시리아가 그 우상들을 불태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차이를 근거로 마지막 요청을 드립니다.
「이제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부디 산헤립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 모든 나라가 주님 여호와야훼만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열왕기하 19:19 · 두루새김
여기서 히스기야는 자기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여호와야훼가 다스리시는 권한을 자기 나라의 이익 속에 가두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유다의 군사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적의 힘을 실제보다 작게 보지 않으면서도, 그 힘이 역사의 마지막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5:18–22에서 언약궤의 속죄 덮개 양쪽에는 그룹들이 만들어져 있고, 여호와야훼는 그곳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8:6–7에도 성전의 지성소와 언약궤를 덮는 그룹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나에게 드린 기도를 내가 들었다」 — 두 번째 응답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아시리아 왕 산헤립 때문에 나에게 드린 기도를 내가 들었다.」열왕기하 19:20 · 두루새김
3–4절에서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여호와야훼께서 랍사게의 말을 듣고 그를 꾸짖으실지도 모른다고 전했습니다. 14–19절에서는 자신이 직접 편지를 펼쳐 놓고 여호와야훼께 들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히스기야가 예상할 수 있었던 단순한 군사적 약속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산헤립을 두고 하신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처녀인 딸 시온이 너를 업신여기고 비웃는다. 딸 예루살렘이 네 뒤에서 머리를 흔든다.」열왕기하 19:21 · 두루새김
여기서 「딸 시온」과 「딸 예루살렘」은 도시를 여성처럼 그린 시적 표현입니다. 「처녀」라는 표현은 시온을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앞 장에서 산헤립의 사절은 예루살렘의 약함을 조롱했습니다. 그는 히스기야가 백성을 속이고 있으며, 여호와야훼도 성읍을 구하실 수 없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의 말씀 속에서 조롱의 방향이 거꾸로 바뀝니다.
이것은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이 실제로 성벽 위에서 아시리아 왕을 조롱하고 있다는 보도가 아닙니다. 앞으로 드러날 산헤립의 무력함을 시적 언어로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조롱의 대상이 바뀌는 이유
「네가 누구를 모욕하고 헐뜯었느냐? 누구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치켜떴느냐?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다.」열왕기하 19:22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는 이사야서에서 특별히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면서도, 그들의 판단이나 인간의 권력에 매이지 않는 거룩한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산헤립은 작은 나라의 왕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은 자신의 권력보다 훨씬 큰 분 앞에 도달한 것입니다.
「나는 수많은 병거를 이끌고」와 「내가 오래전에 이 일을 정하고」
23–24절은 산헤립의 자랑을 다시 인용합니다.
「너는 네 사절들을 시켜 주님을 모욕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많은 병거를 이끌고 높은 산들, 레바논의 깊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곳의 키 큰 백향목과 가장 좋은 사이프러스나무를 베고, 가장 깊은 곳의 쉼터와 울창한 숲까지 들어가겠다.』」열왕기하 19:23 · 두루새김
레바논의 백향목은 크기와 높이, 품질로 잘 알려진 귀한 목재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과 왕궁 건축에도 사용되었습니다(열왕기상 5:6; 7:2).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 가장 좋은 나무를 베겠다는 말은 단순한 벌목 이야기가 아닙니다.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까지 자기 힘으로 정복하고, 그곳의 귀중한 자원을 차지할 수 있다는 과시입니다.
「『나는 우물을 파서 남의 땅의 물을 마셨고, 내 발바닥으로 이집트의 모든 강줄기를 말리겠다.』」열왕기하 19:24 · 두루새김
이는 군사적 능력을 과장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는 마치 자연의 지형과 자원까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존재처럼 자신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25절에서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십니다.
「너는 듣지 못했느냐? 내가 오래전에 이 일을 정하고 먼 옛날부터 계획했다. 이제 내가 그 일을 이루어, 네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들을 무너뜨려 돌무더기로 만들게 했다.」열왕기하 19:25 · 두루새김
산헤립은 자기가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했지만, 여호와야훼는 그가 이룬 승리조차 자신의 오래전부터 이어진 다스림 안에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승리가 정당함의 증거는 아니다
사건이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래 있다는 것과, 그 사건에 참여한 인간의 모든 의도와 행동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은 구별됩니다. 바로 이 말씀을 하시는 여호와야훼가 산헤립의 교만과 자신을 향한 모욕을 꾸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0:5–15에서도 아시리아는 하나님의 심판에 사용되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그 교만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약해진 성읍들은 이미 상처를 입었다
「그곳 주민들은 힘이 없어 겁에 질리고 수치를 당했다. 그들은 들의 풀과 푸른 싹처럼, 지붕 위에 난 풀처럼, 곡식으로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린 싹처럼 되었다.」열왕기하 19:26 · 두루새김
평평한 지붕에 쌓인 흙에서 자란 풀은 충분한 흙과 수분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라 버릴 수 있습니다. 곡식으로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린 싹 역시 자라야 할 시기를 끝까지 채우지 못한 생명을 보여 줍니다.
산헤립은 그들의 약함을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증명하는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약함과 패배가 산헤립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밝히십니다.
왕을 짐승처럼 끌고 돌아가다
「네가 앉는 것도,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내가 안다. 네가 나에게 분노하는 것도 안다.」열왕기하 19:27 · 두루새김
산헤립은 여러 나라의 성읍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알고 계시는 분 앞에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분노했고 네 거만한 말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러므로 내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내 재갈을 네 입술에 물려, 네가 왔던 길로 너를 돌려보내겠다.」열왕기하 19:28 · 두루새김
다른 나라들을 끌고 다니던 왕이 이제 자신도 끌려가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23절에서 산헤립은 수많은 병거를 이끌고 높은 산까지 올라갔다고 자랑했습니다. 28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그가 돌아가야 할 길을 정하십니다.
제국의 왕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동의 방향까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아시리아의 왕실에서 돌에 새긴 그림과 기록에는 정복한 포로들을 묶거나 갈고리와 줄로 제압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코와 입에 도구를 사용하여 상대를 통제하는 이미지는 완전한 굴복을 나타내는 데 적합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런 통제의 이미지를 산헤립에게 적용하십니다.
전쟁의 끝보다 먼저 약속된 것 — 다시 씨를 뿌리는 날
이제 예언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21–28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산헤립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교만을 드러내고, 그를 돌아가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29절에서는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을 향한 말씀이 시작됩니다.
히스기야에게는 이런 말이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네게 표징이 될 것이다. 올해는 떨어진 낟알에서 저절로 자란 곡식을 먹고, 둘째 해에는 다시 저절로 난 곡식을 먹을 것이다. 셋째 해에는 너희가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며,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어라.」열왕기하 19:29 · 두루새김
앞에서는 높은 산과 백향목, 병거와 우물, 갈고리와 재갈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씨앗과 곡식과 포도밭이 등장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중대한 위기 속에서 농사에 대해 말씀하십니까?
성읍이 살아남는 것과 백성이 다시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에서는 평소처럼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피난했고, 밭은 짓밟혔으며, 농사에 필요한 사람과 자원을 잃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는 당시 유다의 농경지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전부 기록하지 않지만, 아시리아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많은 성읍을 점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농사짓는 삶이 심각한 영향을 받았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 두 해에는 사람이 계획하여 농사지은 곡식보다 저절로 자라는 곡식을 먹는 상황이 제시됩니다. 셋째 해에는 다시 평소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구원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성벽 안팎에서 사람들이 다시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앞에서 히스기야는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19:4). 여호와야훼의 응답은 바로 그 남은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다
「유다 집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열왕기하 19:30 · 두루새김
먼저 뿌리를 내리고 그다음 열매를 맺는 생명의 움직임이 그려집니다. 많은 성읍이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남은 사람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런 피해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26절에서 산헤립에게 패한 성읍의 주민들은 지붕 위에 난 풀처럼, 곡식으로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린 싹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30절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 대비는 하나님의 구원이 단순히 죽음을 피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무너진 삶이 다시 자라나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남은 이들은 누구인가?
「예루살렘에서 남은 사람들이 나오고, 시온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뜨거운 열정으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열왕기하 19:31 · 두루새김
이 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심판과 전쟁의 위기를 겪은 뒤에도 여호와야훼께서 유다의 남은 사람들을 지키시고 다시 살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뜨거운 열정으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자신의 뜻과 백성과의 관계를 끝까지 지켜 내시는 하나님의 강한 열의를 가리킵니다.
첫 장면에서 히스기야는 아이를 낳을 힘이 없는 산모에 비유하여 유다의 절망을 표현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스기야가 고백했던 무력함에 대한 응답이 단순한 군사적 승리보다 넓은 삶의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두 해가 정확히 어떤 농사 주기와 맞물리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안식년 규정과 연결하려는 읽기도 가능하지만, 본문은 그 두 해를 분명하게 안식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농사짓기 어려운 상황과 회복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읽는 편이 문맥에 충실합니다. 「남은 사람들」은 이사야서에서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사야 10:20–22는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치던 자에게 더는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야훼께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19:30–31이 곧바로 그 남은 사람들의 모든 마음의 변화와 미래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이사야 37장은 열왕기하 19장과 거의 같은 사건과 말씀을 전합니다. 두 기록은 하나님께서 제국의 힘을 제한하시고 남은 백성을 지키신다는 주제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 성읍에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 구원의 이유
이제 여호와야훼는 산헤립에게 일어날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께서 아시리아 왕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성읍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에 화살도 쏘지 못할 것이다. 방패를 들고 성읍 앞으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성을 공격할 흙 언덕을 쌓지도 못할 것이다.」열왕기하 19:32 · 두루새김
여기에는 아시리아의 성읍 공격 방식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화살을 쏘고, 방패를 들고 다가오고, 성벽을 공격하기 위해 흙 언덕이나 공격용 경사로를 쌓는 일입니다. 산헤립은 이미 유다의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들을 점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시리아 군대가 사용한 공격 기술은 고대 아시리아의 왕실 부조에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그런 공격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왔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읍에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열왕기하 19:33 · 두루새김
7절과 28절에서 예고된 돌아감이 이제 다시 확인됩니다. 그러나 34절은 군사적인 결과를 넘어 그 이유를 밝힙니다.
「내가 나를 위해, 또 내 종 다윗을 위해 이 성읍을 지켜 구하겠다.」열왕기하 19:34 · 두루새김
하나님은 왜 예루살렘을 지키시는가?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왕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했고,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이 성읍을 구하시는 근거를 히스기야가 믿음으로 이루어 낸 일에만 두지 않으십니다.
「나를 위해」라는 말씀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거룩하심에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산헤립은 여호와야훼를 다른 나라의 신들과 같은 존재로 취급하며 구원의 능력을 부정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호와야훼가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내 종 다윗을 위해」라는 말씀은 다윗에게 주어진 왕조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의 집과 왕조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1:36과 15:4에서도 다윗 때문에 그의 후손에게 왕조가 이어질 자리를 주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약속이 다윗의 후손들이 무엇을 하든 아무런 심판도 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열왕기는 다윗 왕조의 왕들이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고 심판받는 모습을 계속 보여 줍니다.
열왕기하 19장의 약속은 산헤립의 현재 공격에 관해 주어진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이후 유다의 역사를 다루는 열왕기하 25장에서는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함락됩니다. 따라서 19:34를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어떤 시대에도 함락될 수 없다는 보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했고,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이름과 말씀에 신실하신 분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날 밤 — 말없이 끝난 아시리아의 위협
35절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결말에 이릅니다.
그날 밤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나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18만 5천 명을 쳤습니다.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천사가 친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열왕기하 19:35 · 두루새김
오랫동안 아시리아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랍사게는 큰 소리로 외쳤고, 산헤립은 다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행한 일은 한 절에 기록됩니다.
여기에는 전투 명령이나 군대의 이동에 관한 자세한 묘사가 없습니다. 히스기야가 군대를 이끌고 아시리아를 공격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돌아간 왕
아시리아 왕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 니느웨에 머물렀습니다.열왕기하 19:36 · 두루새김
이 문장은 7절, 28절, 33절에서 반복된 예고의 결과입니다. 그는 수많은 병거를 이끌고 높은 산들까지 올라갔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하고 자신이 왔던 길로 돌아갑니다.
여호와야훼가 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이 장에서 예루살렘의 구원은 히스기야의 특별한 전술이나 군사적 능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산헤립의 힘에 한계를 정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전염병이나 다른 자연현상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특정한 질병이나 군사 사고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는 그 수를 전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아시리아 기록을 통해 같은 사망자 수나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산헤립의 왕실 비문은 그가 유다의 여러 성읍을 점령하고 히스기야를 예루살렘 안에 가두었다고 자랑하지만, 예루살렘을 함락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반면 열왕기는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은 이유를 여호와야훼의 개입으로 설명합니다. 두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과 각각의 기록이 고유하게 주장하는 내용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신의 집에서 죽은 왕
이 장의 마지막 절은 산헤립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산헤립이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엎드려 절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두 아들은 아라랏 땅으로 달아났고,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그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열왕기하 19:37 · 두루새김
7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산헤립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했던 왕이 자기 집안의 반역으로 죽습니다. 다른 왕국의 안전을 위협했던 왕이 정작 자신의 왕궁과 가족 안에서조차 생명을 보장받지 못한 것입니다.
산헤립은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을 구하실 수 없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자기 신의 신전에서 생명을 잃습니다.
자신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했던 왕이 결국 자기 생명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시리아 제국 자체가 그때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한 왕의 교만이 꺾이고 그의 생명이 끝났지만, 그 제국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열왕기하 19장은 세계의 모든 악이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특정한 때에 특정한 위협에서 예루살렘을 구하셨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니스록이 어떤 신이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 다른 아시리아 신과 정확히 같은 신을 가리키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산헤립의 유다 원정은 기원전 701년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죽음과 에살핫돈이 왕위를 이어받은 일은 기원전 681년에 일어났습니다. 약 2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열왕기는 그 긴 시간 동안 산헤립이 행한 모든 일을 기록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신 두 가지 결과를 연결합니다. 산헤립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에서 칼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편지와 농사의 약속
산헤립은 정복을 자랑했고, 여호와야훼는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산헤립이 자기 힘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위협을 하나님 앞에 가져갔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모든 일이 반드시 해결된다는 확신도 구별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19장에서 히스기야는 구체적인 구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모든 상황에 이 장의 결과를 그대로 적용하여 어떤 질병이나 전쟁, 경제적 위기가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한 채 니느웨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훗날 자기 신의 신전에서 죽임당합니다.
한편 예루살렘을 향한 여호와야훼의 약속에는 다시 농사짓는 날이 남아 있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사람들.
열왕기하 19장이 아시리아 왕의 자랑보다 더 오래 기억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다시 살아갈 미래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