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1–8장 ·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눈을 뜬 사람들과 보지 못한 사람들
아람의 큰 군대가 이스라엘의 작은 성읍을 포위했습니다. 말과 병거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밖으로 나온 엘리사를 시중드는 사람은 절망했습니다.
엘리사를 시중드는 사람은 눈앞의 군대를 보았지만, 엘리사는 그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눈을 열어 주시자, 그는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됩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볼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이스라엘의 고통은 끝납니까?
열왕기하 6장은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동시에, 그 능력을 경험한 뒤에도 인간이 얼마나 쉽게 두려움과 폭력에 사로잡힐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야기는 물에 빠진 작은 도끼날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성읍 전체가 죽음의 위기에 빠지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물에 빠진 빌린 도끼날 하나
열왕기하 6장은 뜻밖에도 집을 넓히려는 예언자 무리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언자 무리는 자신들이 지내는 곳이 너무 좁아졌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요단강으로 가서 나무를 베고 새로운 거처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신탁이나 거대한 종교적 행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이 함께 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일하려는 모습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탁했습니다. 「스승님도 저희와 함께 가 주세요.」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나도 가겠다.」열왕기하 6:3 · 두루새김
그는 예언자 무리의 지도자이지만, 그들이 새 거처를 만드는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엘리사는 아람의 군대 지휘관 나아만에게 직접 나오지 않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두 사건의 상황이 달라 행동도 다르지만, 이 차이는 엘리사가 사람의 지위에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군대 지휘관에게는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예언자가, 나무를 베러 가는 제자들과는 기꺼이 함께합니다.
빌린 도끼날이 물에 빠졌을 때
예언자들이 나무를 베던 중 사고가 일어납니다.
한 사람이 집을 지을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다가 도끼날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가 소리쳤습니다. 「아, 스승님! 빌려 온 도끼예요!」열왕기하 6:5 · 두루새김
그는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돌려줄 책임이 있었습니다. 예언자 무리는 새 거처를 마련하려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를 위해 일하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디에 빠졌느냐?」 그 사람이 빠진 곳을 가리키자, 엘리사는 나무를 잘라 그곳에 던져 도끼날이 물 위로 떠오르게 했습니다.열왕기하 6:6 · 두루새김
하나님의 사람이 곧바로 기적을 선언하기보다 먼저 도끼날이 빠진 곳을 묻습니다. 철로 된 도끼날이 물에 뜬다는 것은 일반적인 물리적 성질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문은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한 자연적 과정이나 나무의 특별한 성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에는 한 단계가 더 남아 있습니다.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네가 건져라.」 그 사람은 손을 뻗어 도끼날을 집어 들었습니다.열왕기하 6:7 · 두루새김
이 마지막 행동 때문에 이야기는 단순히 쇠가 물에 떴다는 신기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물건이 실제로 그 사람의 손에 돌아오는 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작은 일에도 관여하시는가?
이 사건은 바로 뒤에 나오는 전쟁 이야기에 비하면 매우 작아 보입니다.
도끼날 하나를 잃어버린 일과 나라 전체가 적군의 위협을 받는 일은 규모가 다릅니다. 그런데 열왕기하의 서술자는 이 작은 사건을 생략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분명하게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일상적인 문제 가운데서도 활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엘리사는 왕들의 전쟁에만 관여하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예언자 무리가 지낼 집을 짓는 일에도 함께하고, 빌린 도끼를 잃어버린 사람의 곤란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도끼날을 되찾는 일은 한 사람이 자기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작고 일상적인 사건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곧바로 나라 사이의 전쟁으로 넘어갑니다.
왕의 침실에서 한 말까지 알려지는 이유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하들과 군사 작전을 의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아람군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차리고 위험한 지역을 피합니다. 그 이유는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말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말을 따라 대비합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신하들과 상의하여 정한 작전이 계속 이스라엘에 알려집니다. 아무리 몰래 움직이려 해도 상대가 미리 대비합니다.
아람 왕은 이 일로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는 신하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이스라엘 왕 편에 서 있는지 말해 보아라.」열왕기하 6:11 · 두루새김
작전이 새어 나간다면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상대에게 알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이유를 제시합니다.
신하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임금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예언자 엘리사가 임금님이 침실에서 하시는 말씀까지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줍니다.」열왕기하 6:12 · 두루새김
왕의 침실은 매우 사적인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하는 말까지 알려진다는 것은 왕이 아무리 깊숙한 곳에서 비밀을 논의해도 숨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4장에서 엘리사는 수넴 여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감추셨다고 말했습니다(4:27). 따라서 엘리사가 언제나 모든 사람의 말과 생각을 알았다고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람군의 계획을 엘리사를 통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주신 것으로 서술됩니다.
그런데 아람 왕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엘리사를 잡아 오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를 잡으면 비밀이 지켜질까?
아람 왕은 엘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령합니다.
그가 도단에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왕은 말들과 병거와 큰 군대를 보냅니다. 그는 엘리사가 자신이 은밀하게 논의한 군사 작전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군대를 보내 엘리사를 붙잡으려 합니다. 자신의 계획을 계속 드러내는 사람을 무력으로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아람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존재를 알아냈지만, 그 말씀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람 군대는 밤에 도단을 둘러쌉니다. 이제 인간의 눈으로 보면 엘리사에게 빠져나갈 길이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성읍을 둘러싼 군대와 산을 가득 채운 군대
아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시중드는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말과 병거를 거느린 군대가 성읍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가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아, 주인님!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열왕기하 6:15 · 두루새김
엘리사를 시중드는 사람이 두려워한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위협을 상상해서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아람군이 실제로 도단을 포위했습니다.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와 함께 있는 이들이 그들과 함께 있는 이들보다 많다.」열왕기하 6:16 · 두루새김
이 말은 아직 그 사람에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눈에는 아람군이 훨씬 많아 보입니다. 엘리사와 자신은 성읍 안에 갇혀 있습니다.
엘리사는 무엇을 먼저 구했는가?
엘리사는 아람군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기와 자신을 시중드는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먼저 구하는 것은 그 사람의 눈이 열리는 일입니다.
엘리사가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야훼여, 이 사람의 눈을 열어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그 사람의 눈을 여시자,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둘러싼 채 산에 가득한 것이 보였습니다.열왕기하 6:17 · 두루새김
이 기도가 특별한 이유는 상황을 바꾸어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시야를 바꾸어 달라는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아람군은 여전히 성읍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나타납니다.
이 장면은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야가 떠날 때 등장했던 불의 병거와 불의 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2:11). 그때 불의 병거와 말들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갈라놓았습니다. 이번에는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시중드는 사람이 처음 본 것은 포위당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리자 그는 다른 둘러쌈을 보게 됩니다. 아람군이 성읍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보지 못했던 것은 적군의 위험이 아니라, 그 위험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였습니다.
눈을 뜬다고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눈을 뜬 뒤에도 아람군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처음에 보았던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도단의 특정한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어떻게 보호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것은 곧 이어지는 사건에서 더욱 뜻밖의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눈이 열린 그 사람과 달리, 이제 아람 군사들의 눈은 멀게 되기 때문입니다.
눈먼 군대가 자기 발로 사마리아에 들어가다
아람군이 엘리사에게 내려오자 그는 다시 기도합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에게 내려오자, 엘리사가 여호와야훼께 기도했습니다. 「이 무리의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는 엘리사가 말한 대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열왕기하 6:18 · 두루새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자신이 찾던 엘리사를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사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길도 아니고 이 성읍도 아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 데려다주겠다.」 그는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열왕기하 6:19 · 두루새김
도단에서 엘리사를 포위했던 아람군은 이제 엘리사를 따라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한가운데로 들어갑니다. 그들이 처음 계획한 것은 엘리사를 붙잡아 아람 왕에게 데려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눈이 다시 열렸을 때
아람군이 사마리아에 도착하자 엘리사는 세 번째로 기도합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에 들어오자 엘리사가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야훼여, 이들의 눈을 열어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눈을 여셨습니다. 그들이 눈을 뜨고 보니 사마리아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열왕기하 6:20 · 두루새김
첫 번째 기도에서는 엘리사를 시중드는 사람이 눈을 뜹니다.
두 번째 기도에서는 아람군의 눈이 멀게 됩니다.
세 번째 기도에서는 아람군의 눈이 다시 열립니다.
자기 힘으로 상황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던 아람군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제 군사들의 운명은 이스라엘 왕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왕의 첫 반응은 또 다른 문제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눈을 멀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산웨림(סַנְוֵר)은 매우 드문 낱말입니다. 창세기 19:11에서도 같은 말이 사용됩니다. 그곳에서는 롯의 집 문을 찾으려던 사람들이 눈이 멀어 문을 찾지 못합니다. 이 두 사건을 비교하면 단순히 빛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만을 가리키는지, 방향과 대상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까지 포함하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 아람군은 엘리사의 인도를 받아 이동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시각 장애를 겪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람군이 찾고 있는 사람은 엘리사 자신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들이 찾는 사람에게 데려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가 군사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그들이 찾으러 온 목적을 이룰 장소가 여기가 아니라는 의미의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엘리사의 말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덧붙이지 않습니다.
「쳐 죽여도 되겠습니까?」라는 왕의 질문
이스라엘 왕은 사마리아 한가운데 들어온 아람군을 보고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들을 쳐 죽여도 되겠습니까? 쳐 죽여도 되겠습니까?」열왕기하 6:21 · 두루새김
왕에게는 눈앞의 상황이 더없이 좋은 기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람군이 자기 성읍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은 도망치거나 싸워서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엘리사를 존중하는 표현입니다. 왕은 그를 자기보다 높은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죽이지 마십시오. 임금님이 직접 칼과 활로 사로잡은 사람들을 죽이시겠습니까? 이들 앞에 빵과 물을 놓아 먹고 마시게 하시고, 자기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십시오.」열왕기하 6:22 · 두루새김
적군의 생명을 지키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큰 군대가 큰 잔치를 먹다
왕은 엘리사의 말을 따릅니다.
왕은 그들을 위해 큰 잔치를 차렸습니다. 그들이 먹고 마신 뒤 왕이 돌려보내자, 그들은 자기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 뒤로 아람의 습격 부대는 더 이상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열왕기하 6:23 · 두루새김
아람 왕은 군대를 보냈고, 이스라엘 왕은 그 군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을 적군을 학살하는 기회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에게 그들의 생명을 지키도록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적을 제압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그 제압의 마지막 목적은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돌려보내는 일이었습니다.
하늘의 군대가 나타났지만, 그들은 아람군을 불로 태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적군을 반드시 죽여야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습격이 멈추다
적군을 먹여 돌려보내는 행동 이후 습격 부대의 활동이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건에서는 적을 죽이지 않는 선택이 공격을 멈추게 하는 결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은 잠언 25:21–22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원수가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면 마실 물을 주라고 합니다. 열왕기하 6장은 그 가르침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에게 음식과 물을 준다는 구체적인 행동은 두 본문이 같은 주제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열왕기하 6장은 매우 아름다운 평화의 이야기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다음 절입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질문은 왕이 직접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들은 왕의 칼과 활로 잡은 사람들이 아닌데 어떻게 죽이겠느냐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 가운데 어느 쪽인지 원문의 의문문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큰 잔치를 베풀던 성읍에 큰 기근이 들다
그 뒤에 아람 왕 벤하닷이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열왕기하 6:24 · 두루새김
23절은 「습격 부대」의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말합니다. 24절에서는 아람 왕이 온 군대를 동원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합니다. 작은 부대가 되풀이해서 벌이는 습격과 나라 차원의 대규모 군사 작전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또한 24절은 「그 뒤에」라고 말할 뿐, 두 사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선 잔치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단정하거나, 잔치 때문에 아람 왕이 더 큰 군대를 보내 보복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 왕이 아람 군대에게 큰 잔치를 차렸습니다. 이제는 바로 그 이스라엘 왕의 수도에 먹을 것이 크게 모자랍니다. 이 대조 때문에 독자는 사마리아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됩니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여든
포위가 계속되자 사마리아의 식량 사정은 극도로 나빠집니다.
사마리아에는 먹을 것이 크게 모자랐습니다. 포위가 계속되면서 나귀 머리 하나가 은 80에, 비둘기 오물 4분의 1갑이 은 5에 팔릴 지경이 되었습니다.열왕기하 6:25 · 두루새김
평소에는 식량으로 거의 생각하지 않을 물품까지 매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될 만큼 성 안의 사정이 절박해졌다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나아만은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세겔, 많은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막대한 재물을 지녔지만 그 재물 자체로는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성 안에 은이 있어도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재물과 권력이 인간의 생존을 완전히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의 상황은 단순히 비싼 음식을 사 먹어야 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한 여자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굶주림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파괴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나귀는 이스라엘의 음식 규정에서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레위기 11:3–8). 게다가 머리는 보통 고기로 먹을 만한 부분이 적습니다. 「비둘기 오물」이라는 표현은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이 전해진 형태와 낱말의 뜻을 두고 여러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문자 그대로 비둘기의 배설물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고, 어떤 식물성 식량이나 다른 물품의 이름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실제로 비둘기 배설물을 먹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왕에게 구원을 요청한 여인이 들려준 이야기
이스라엘 왕이 성벽 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성벽 위를 지나가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왕에게 외쳤습니다. 「임금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열왕기하 6:26 · 두루새김
왕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며, 약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왕의 첫 대답은 냉혹하게 들립니다.
왕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너를 구해 주시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어디서 먹을 것을 가져와 너를 구하겠느냐? 곡식을 터는 마당에서냐, 포도즙을 짜는 틀에서냐?」열왕기하 6:27 · 두루새김
왕은 더 이상 백성에게 나누어 줄 곡식이나 포도주를 마련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요청은 왕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했습니다.
왕이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여자가 제게 『네 아들을 내놓아. 오늘은 네 아들을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라고 했습니다.」열왕기하 6:28 · 두루새김
「그래서 저희는 제 아들을 삶아 먹었습니다. 다음 날 제가 이 여자에게 『네 아들을 내놓아. 그 아이를 먹자』라고 했더니, 자기 아들을 숨겼습니다.」열왕기하 6:29 · 두루새김
여인이 왕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왕은 그 말이 식량을 구해 달라는 요청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여자가 실제로 꺼낸 것은 다른 여자와 맺은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문제입니다. 여자는 자신이 이미 아들을 내놓았으므로 상대도 아들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에서는 자기 아들을 잃은 슬픔보다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불만이 앞에 나타납니다. 이것을 여자가 실제로 슬픔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녀의 속마음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자녀를 보호해야 할 가족의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자녀를 희생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행동이 마치 약속을 지켜야 하는 거래처럼 이야기됩니다.
왕에게는 단순히 식량 부족을 해결하는 능력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 안에서는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관계 자체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경고가 현실이 되다
이 장면은 신명기 28:53–5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약에 충실하지 않을 때 적에게 포위되어 극심한 굶주림을 겪고, 결국 자기 자녀를 먹게 되는 비극을 경고합니다. 레위기 26:29에도 부모가 자기 아들과 딸의 살을 먹게 되리라는 무서운 경고가 나옵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신명기와 레위기의 경고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집니다.
본문은 이 두 여자가 특별히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이 이런 비극을 겪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굶주림에 몰린 사람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건은 한 사회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결과를 생각하게 하지만, 피해자 개인에게 죄의 책임을 쉽게 돌리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나라의 멸망은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녀마저 먹어야 할 만큼 삶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그 나라는 이미 깊은 파멸 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7절의 첫 문장은 해석이 갈립니다. 왕이 실제로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너를 구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읽은 것입니다. 반면 히브리어 표현을 조건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구하지 않으신다면 내가 어디에서 너를 구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 됩니다. 첫 번째로 읽으면 왕이 절망 속에서 여자에게 가혹한 말을 하는 장면이 됩니다. 두 번째로 읽으면 자신에게는 여자를 구할 힘이 없다고 인정하는 장면이 됩니다. 곡식을 터는 마당에서는 곡식을 얻고, 포도즙을 짜는 틀에서는 포도에서 즙을 냅니다. 이 두 장소는 땅에서 얻는 먹을거리와 연결됩니다.
옷을 찢은 왕은 왜 엘리사를 죽이려 하는가?
왕은 여자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습니다.
왕은 여자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왕이 성벽 위를 지나가고 있어서, 백성은 그가 겉옷 안에 자루옷을 맨살에 걸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열왕기하 6:30 · 두루새김
옷을 찢는 것은 구약에서 슬픔과 충격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자루옷 역시 슬퍼하고 자신을 낮추며 회개하는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가 자루옷을 걸쳤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회개에 이르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오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목을 베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고 또 내리시기를 바란다.」열왕기하 6:31 · 두루새김
분명한 것은 왕이 자기 백성에게 일어난 참혹한 일을 듣고, 그 분노를 엘리사에게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왕은 엘리사를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적군을 죽여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왕은 그 엘리사를 죽이려 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따라 적군의 생명을 살렸지만, 이제는 자기 백성의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 합니다.
왕의 고통은 진실하지만 판단은 별개의 문제다
그는 왕으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위기를 실제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가 진실하다고 해서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분노는 현실의 고통에서 나왔지만, 그가 선택한 행동은 또 다른 죽음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상황을 해결할 힘이 없었지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권력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왕은 그 문제의 원인을 충분히 살피기보다 누군가를 죽이는 방식으로 행동하려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앞서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군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먹여 돌려보냈습니다.
엘리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사는 자기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자기 집에 앉아 있었고, 백성의 지도자들도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왕은 자기 곁에 있던 사람 하나를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엘리사가 지도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살인자의 아들이 제 목을 베려고 사람을 보낸 것을 아세요? 그 사람이 오면 문을 닫고 밀어 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그 뒤에서 주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나요?」열왕기하 6:32 · 두루새김
앞에서 그는 아람 왕의 군사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여호와야훼를 더 기다려야 하느냐?」
엘리사가 아직 지도자들과 말하고 있는데, 왕이 보낸 사람이 그에게 내려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이 재앙은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 것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여호와야훼를 더 기다려야 하느냐?」열왕기하 6:33 · 두루새김
이 말은 자신들이 겪는 재앙을 하나님과 연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에게는 하나님을 더 기다리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아직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어떻게 끝내실지 듣지 못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질문은 하나님의 능력을 본 사람이 왜 여전히 하나님을 기다리기 어려워하는가 하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엘리사가 앞서 아람 군대를 죽이지 말고 먹여 돌려보내라고 했기 때문에 그를 원망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사가 현재의 재앙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분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본문에 분명히 나오지 않은 동기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왕의 아버지 아합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과정에서 나봇이 죽임당한 일에 책임이 있는 왕이었습니다(열왕기상 21:1–19). 그러나 엘리사가 정확히 어떤 사건을 생각하며 이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33절의 말을 누가 했는지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도착한, 왕이 보낸 사람이 말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뒤를 따라온 왕이 직접 한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내용상 왕의 절망과 분노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기 자연스럽지만, 본문은 말한 사람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눈이 열리는 것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것이 앞으로 모든 위기가 같은 방식으로 해결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엘리사는 도단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가 포위당했을 때에도 위기는 실제로 계속되었습니다. 왕은 앞서 엘리사의 말을 따라 적군에게 잔치를 차렸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이후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는 태도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이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엘리사가 보여 준 것처럼, 적을 제압할 수 있을 때에도 그를 살려 돌려보낼 수 있는 다른 길을 찾는 일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6장은 아직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엘리사의 집에서 멈춥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와 함께 앉아 있고, 왕이 보낸 사람이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여호와야훼를 더 기다려야 하느냐?」
이 말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는 눈이 열린, 엘리사를 시중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마리아에서는 왕과 백성이 아직 아무런 구원의 징조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을 가득 채운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목소리 앞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들리는 곳에는 여전히 엘리사가 앉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