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5–10장 · 예루살렘과 언약궤
죽은 개라 부른 사람에게 마련된 자리
사무엘하 9장은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물었습니다. 「사울 집안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느냐? 요나단을 위해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싶다.」
그런데 이 질문은 듣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대신하여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사울의 집안과 다윗의 집안은 한동안 왕권을 두고 대립했습니다. 그런 왕이 이제 옛 왕가의 생존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울 집안에 속한 사람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무엇을 예상했을까요?
다윗은 처음부터 목적을 밝힙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생존자에게는 왕의 부름이 두려운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오래전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도 자신을 죽은 개라고 불렀습니다(사무엘상 24:14). 그때 죽은 개라고 말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이제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사울의 손자입니다.
두 사람의 처지가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한때 자신을 죽은 개처럼 여기던 왕 앞에서, 이제 다른 사람이 같은 말로 자신을 낮춥니다. 다윗은 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요?
왕이 찾는 것은 적이 아니라 약속의 상대다
이 장은 앞 장의 한 문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무엘하 8:15에서 다윗은 자기 백성 모두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왕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제 9장은 그가 한 사람에게 무엇을 행하는지 보여 줍니다.
다윗이 물었습니다. 「사울 집안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느냐? 요나단을 위해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싶다.」사무엘하 9:1 · 두루새김
당시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고, 다윗은 사울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왕권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을 것이며, 다윗이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자기 목숨만이 아니라 자기 집안에 대해서도 사랑을 끊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사무엘상 20:14–17).
요나단은 다윗과 경쟁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왕위를 이을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없애거나 다윗과의 관계를 끊는 대신, 다윗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두 사람의 삶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그들의 집안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까지 포함했습니다.
다윗은 죽은 친구와 맺었던 약속이 지금도 자신에게 지켜야 할 책임을 준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본문의 「한결같은 사랑」이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히브리어는 헤세드(חֶסֶד)입니다. 이 말은 사랑과 친절을 나타내지만, 관계와 약속을 한결같이 지키는 태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다윗이 베풀려는 한결같은 사랑에는 두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므비보셋에게는 뜻밖의 호의이지만, 다윗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사울 집안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느냐? 그에게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싶다.」 시바가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아직 있습니다. 두 다리에 장애가 있습니다.」사무엘하 9:3 · 두루새김
이것을 하나님께 속한 사랑, 곧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히브리어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 어떤 성질의 크기를 강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므로, 특별히 큰 사랑을 뜻한다고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맺은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약속을 충실히 지키려는 행동과 연결하여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이 반드시 한 가지 의미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왕이 된 뒤에도 과거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 그 약속을 실행할 힘이 생겼습니다.
왜 시바는 그의 이름보다 장애를 먼저 말했을까요?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몸 상태를 설명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단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 주기 위해 특징을 덧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시바의 의도를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윗의 반응은 분명합니다.
왕이 「그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자, 시바가 대답했습니다. 「로드발에 있는 암미엘의 아들 마키르의 집에 있습니다.」사무엘하 9:4 · 두루새김
다윗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건강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왕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찾는 기준은 그의 신체적 능력이 아니라 요나단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드러나는 곳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거나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하려는 일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새로운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 직접 설명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을 지키려는 사람의 행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본문은 다윗의 행동을 보여 주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므비보셋을 찾아가라고 직접 명령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므비보셋에게 어떤 감정을 주셨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맺어진 언약을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드발에서 예루살렘으로
므비보셋은 로드발에 있는 마키르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로드발의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사무엘하 17:27에서 마키르가 길르앗 지역의 마하나임에 도착한 다윗을 돕는 사람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요단강 동쪽 지역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키르가 므비보셋과 어떤 관계로 그를 보호하거나 돌보고 있었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습니다. 다만 므비보셋이 자기 왕궁이나 사울 집안의 땅에 사는 대신 다른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무엘하 4:4를 기억해야 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섯 살 때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를 돌보던 여인이 아이를 안고 급히 도망치다가 떨어뜨렸고, 그 사고로 그는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는 두 종류의 상실이 겹칩니다. 하나는 가족과 왕조를 잃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다친 일입니다. 왕가의 아들이었던 그는 도망치는 아이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긴 장애를 안고 성장했습니다.
9장의 므비보셋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12절에서는 그에게 미가라는 어린 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래전 왕조가 무너진 일은 여전히 그의 삶을 결정짓는 배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그를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게 합니다.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했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아」 하고 부르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왕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사무엘하 9:6 · 두루새김
사울의 손자라는 사실은 그를 다윗의 왕권과 경쟁했던 옛 왕가에 연결합니다. 반면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를 다윗이 지키려는 언약에 연결합니다.
한 사람의 혈통 안에 정치적 위험과 언약의 약속이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합니다. 이것은 왕에게 바치는 극진한 예의이지만, 권력의 차이 또한 드러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이 장애가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그를 「므비보셋아」 하고 부릅니다. 그는 더 이상 정보 속의 생존자나 사울 집안의 남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왕 앞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 옛 왕가의 후손에게 돌아온 유산
다윗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 아버지 요나단을 위해 내가 반드시 네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겠다. 네 할아버지 사울의 땅을 모두 네게 돌려주겠다. 너는 늘 내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것이다.」사무엘하 9:7 · 두루새김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은 므비보셋이 처한 정치적 불안을 고려하게 합니다. 다윗은 그를 해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네 할아버지 사울의 땅을 모두 네게 돌려주겠다」는 말은 생활의 기반과 집안의 재산에 관한 것입니다. 다윗은 단지 그에게 당장 먹을 양식을 제공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울 집안에 속했던 땅을 그의 소유로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늘 내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것이다」라는 선언은 재산 문제를 넘어섭니다.
왕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음식을 제공받는다는 뜻이지만, 그뿐만은 아닙니다. 왕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왕의 가까운 생활 영역 안에서 대접받는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지 않습니다.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앞으로 다윗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에서 밝힌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네 아버지 요나단을 위해.」
므비보셋의 미래가 그의 현재 능력이나 업적보다 앞서 맺어진 관계에 의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므비보셋이 절하며 말했습니다. 「왕의 종인 제가 무엇이기에, 저같이 죽은 개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써 주십니까?」사무엘하 9:8 · 두루새김
므비보셋이 사용한 이 표현은 왕 앞에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는 말입니다. 한때 힘없는 처지에서 사울에게 자비를 구했던 다윗이 이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다윗은 과거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행사되었던 왕권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힘을 옛 왕가의 남은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합니다.
이것이 9장의 중심적인 반전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에서 개는 종종 업신여기는 대상으로 언급됩니다. 더구나 죽은 개는 스스로를 지키거나 위협할 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사울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후손을 끊어 버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고, 다윗은 맹세했습니다(사무엘상 24:21–22). 따라서 므비보셋을 대하는 다윗의 행동에는 요나단과의 언약뿐 아니라 사울 자신에게 한 맹세와도 연결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저자가 두 장면을 직접 짝지으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책에 나타나는 이 표현의 반복은 두 장면을 나란히 읽게 합니다.
은혜는 말로 끝나지 않고 생활의 질서가 된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약속한 다음 장면에서 저자는 시바를 다시 등장시킵니다.
7절에서 한결같은 사랑은 다윗의 입에서 선언되었습니다. 9절부터는 그 사랑이 실제 재산과 노동, 생산과 식량의 문제로 구체화됩니다.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해 땅을 일구고 수확한 것을 들여와라. 그러면 네 주인의 손자에게 먹을 양식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네 주인의 손자 므비보셋은 늘 내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것이다.」 시바에게는 아들 열다섯 명과 종 스무 명이 있었습니다.사무엘하 9:10 · 두루새김
시바는 단순히 한 사람을 곁에서 시중드는 종이 아닙니다. 그가 상당한 규모의 집안 사람들과 일할 사람들을 관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므비보셋이 땅을 가진 권리가 실제 생산을 통해 유지되도록 합니다. 땅을 돌려받았다는 말만으로는 그 땅에서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보장되지 않습니다. 땅을 일구고 수확한 것을 가져올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둘째, 므비보셋을 돕는 일이 일시적인 선물에 머물지 않도록 합니다. 땅을 일구고 수확하는 일은 반복되는 노동입니다. 다윗의 명령은 그런 지속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합니다.
므비보셋은 늘 왕의 식탁에서 먹는데, 왜 별도로 그의 땅을 일구어 양식을 마련해야 할까요?
본문은 이 질문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왕의 식탁에서 먹는다는 사실과 자기 집안의 재산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왕의 식탁은 므비보셋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대우를 나타냅니다. 반면 사울 집안의 땅과 그 수확은 그의 집안이 유지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요청했던 사랑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 집안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다윗이 사울 집안의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는 일은 그 집안의 다음 세대와도 연결됩니다.
다윗이 땅을 돌려주고 왕의 식탁에 초대했다는 것은 분명한 호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므비보셋은 왕의 권위 아래 살아가게 되며, 땅을 관리하는 일도 시바에게 의존합니다. 왕의 가까이에 머무는 일이 정치적으로 보호받는 길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왕의 통제 아래 놓이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장은 다윗의 숨은 정치적 의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므비보셋을 왕궁에 사실상 인질로 붙잡아 두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독립적인 처지에 있었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것은 고대 왕권의 현실 안에서 베풀어지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분명 실제적인 유익을 주지만, 권력과 의존의 관계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습니다.
특히 시바와 므비보셋의 관계는 이후 이야기에서 다시 문제가 됩니다.
사무엘하 16:1–4에서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때 시바가 므비보셋에 관한 불리한 말을 전하고, 다윗은 그의 말을 듣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줍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19:24–30에서 므비보셋은 시바가 자신을 속이고 모함했다고 주장합니다. 두 사람의 말이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9장 자체에서는 시바가 다윗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이 시점의 순종을 기록하며, 사랑의 약속이 실행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왕의 아들 가운데 하나처럼
시바가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제 주인이신 왕께서 이 종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모두 하겠습니다.」 다윗이 말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의 아들 가운데 하나처럼 내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것이다.」사무엘하 9:11 · 두루새김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가에 속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두 집안은 왕권을 두고 대립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므비보셋을 법적으로 양자로 삼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공식적인 입양이나 왕위를 이을 권리를 주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왕실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것과 같은 식탁의 대우를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생명을 지켜 주는 것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것은 적대적인 행동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식탁으로 초대하는 것은 지속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일입니다.
빈자리에서 마련된 자리로
당시 다윗은 사울의 분노를 피해 숨어 있었습니다. 초하루 식사 때 사울은 평소처럼 자리에 앉았지만, 다윗의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사무엘상 20:24–27). 요나단은 다윗을 보호하려 했고, 사울은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제 사무엘하 9장에서는 정반대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한때 사울의 식탁에서 목숨의 위협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 했던 다윗이, 이제 자기 식탁에 사울의 손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합니다. 두 이야기는 서로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며, 저자가 두 장면을 서로 짝지으려고 의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을 나란히 읽으면 관계의 변화가 인상적으로 드러납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요나단과의 언약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충실하면서도 다윗을 보호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맺은 언약은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이제 그의 아들을 살리는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절의 원문에는 작은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마지막 문장은 「내 식탁에서 먹는다」라는 1인칭 표현을 사용합니다. 앞에서 시바가 말하고 있으므로 시바의 발언이 계속된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문맥상 다윗의 식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칠십인역도 이 부분을 다윗의 식탁에서 먹는다는 뜻으로 전합니다. 두루새김은 「다윗이 말했습니다」라고 화자를 밝히고, 「내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것이다」라는 다윗의 말로 옮겼습니다.
식탁의 자리와 절뚝이는 두 다리
마지막 두 절에서 저자는 므비보셋의 새로운 생활을 요약합니다.
므비보셋에게는 미가라는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시바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므비보셋의 종이었습니다.사무엘하 9:12 · 두루새김
므비보셋은 한 세대의 마지막 생존자로만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도 아들이 있고, 앞으로 이어질 집안이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늘 왕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그는 두 다리를 절었습니다.사무엘하 9:13 · 두루새김
7절에서 다윗은 므비보셋이 늘 자기 식탁에서 먹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10절에서는 시바에게 같은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13절에서는 므비보셋이 실제로 늘 왕의 식탁에서 먹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약속이었던 일이 마지막에는 생활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 번 왕궁에 초대받아 특별한 식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이 사는 곳이 예루살렘이 되었고, 왕의 식탁에서 먹는 일이 그의 지속적인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미 3절에서 시바를 통해 므비보셋에게 두 다리의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 사실을 다시 언급합니다.
첫째, 므비보셋에게 일어난 변화를 정확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았지만, 다리의 장애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의 신체적 조건이 아니라 삶의 자리와 관계입니다.
둘째, 이 마지막 문장은 독자가 므비보셋을 그의 장애로만 기억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냅니다. 시바가 처음 그를 소개할 때에는 이름보다 장애가 먼저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날 무렵 독자는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그의 아버지를 알고, 그의 할아버지를 알고,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장애가 다시 언급되더라도 그것이 므비보셋에 관해 우리가 아는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며, 동시에 요나단의 아들이고, 미가의 아버지이며, 사울 집안의 유산을 돌려받은 사람이고, 왕의 식탁에서 먹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사랑은 므비보셋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이 자신의 조건 그대로 새로운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바꾼 것은 무엇이었는가
따라서 이 장에서 변화의 출발점은 므비보셋의 행동이 아니라 다윗의 기억입니다. 그 기억은 단순히 옛 친구를 떠올리는 감정이 아니라, 그 친구와 맺은 언약을 오늘의 행동으로 옮기는 기억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행동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무엘하는 이후 다윗의 잘못과 실패도 숨기지 않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다윗은 자신이 가진 힘을 언약에 충실한 행동을 위해 사용합니다.
사무엘하 9장은 특별한 기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므비보셋은 여전히 두 다리를 절었습니다. 아버지 요나단이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무너진 사울 왕조가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일상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왕의 식탁에는 그가 늘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죽은 개나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부르던 사람에게, 왕은 한 번의 동정이 아니라 계속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가 두 다리를 저는 모습까지 그대로 남겨 둔 채, 사무엘하 9장은 그 식탁의 장면에서 조용히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