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예루살렘을 위로하는 말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귀환의 길

바룩서 5장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산과 골짜기와 나무들이 움직이는 장면입니다.

포로들은 길을 닦지 않습니다. 산을 깎거나 골짜기를 메우지도 않습니다. 그 일을 명령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앞 장에서 예루살렘은 자녀를 빼앗긴 어머니로 등장했습니다. 그녀는 슬픔의 옷을 입고 자녀들을 위해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5장은 그 어머니에게 슬픔의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며 시작합니다.

먼저 어머니의 옷과 이름이 바뀝니다. 그런 다음 자녀들이 돌아옵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걸어올 길까지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하나로 묶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65장 본문 읽기 →

슬픔의 옷을 벗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입다

바룩서 5:1–2 본문 →

예루살렘은 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가

예루살렘아, 네 슬픔과 고난의 옷을 벗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영광을 영원히 입어라.바룩서 5:1 · 두루새김

4:20에서 예루살렘은 평화의 긴 옷을 벗고 간구의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자녀들을 빼앗긴 어머니가 슬픔과 기도의 옷으로 갈아입은 것입니다.

옷은 한 사람의 처지와 신분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굵은 베옷은 슬픔과 애도의 표시였습니다. 반대로 아름다운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기쁨과 존귀함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의 옷을 벗고 영광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를 지울 능력이 없습니다. 멸망한 도시의 명예를 스스로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영광의 옷은 예루살렘이 자기 힘으로 이루어 낸 성취의 표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의 표시입니다.

의의 겉옷과 영광의 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쳐라. 영원하신 분의 영광의 관을 네 머리에 얹어라.바룩서 5:2 · 두루새김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의로움으로 감싸지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영광의 관이 놓입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서 61:10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이사야서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다고 기뻐합니다. 신랑이 머리를 단장하고 신부가 장신구로 자신을 꾸미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바룩서는 그러한 회복의 모습을 예루살렘에게 적용합니다.

왜 영광의 옷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의로움의 겉옷」까지 입어야 합니까?

바룩서 앞부분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인정하면서 자신들에게는 낯부끄러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1:15; 2:6).

그런데 이제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바로잡히고, 그들이 의로움과 평화에 속한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리라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로움」이 신학적으로 정확히 어디까지 뜻하는지는 문장만으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그것을 이스라엘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미 그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죄가 없었던 것처럼 꾸미는 일이 아니라, 죄와 수치로 무너진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다시 존귀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미트라는 머리에 쓰는 장식이나 두건, 관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왕의 관이나 제사장의 머리 장식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특정한 왕실 또는 제사장 복장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은 성읍이 새로운 이름을 얻다

바룩서 5:3–4 본문 →

온 땅이 예루살렘의 찬란함을 보게 된다

3절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보는 시선을 넓힙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 온 세상에 네 찬란한 모습을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5:3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에게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 성읍의 멸망은 공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왕은 패배했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주변 나라들은 예루살렘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예루살렘의 회복도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이 보여 주겠다고 하는 것은 군사력이나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입니다. 그 찬란한 모습은 바로 앞에서 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과 의로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60:1–3에서도 시온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떠오르고, 민족들이 그 빛을 향해 나아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앞서 예루살렘의 파괴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면, 이제 그녀의 회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의로움의 평화」라는 이름

4절에서는 더욱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의로움의 평화」, 「하나님을 공경함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부르실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5:4 · 두루새김

고대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름은 사람이나 장소가 어떤 존재인지,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창세기 17:5에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에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62:2–4에서는 시온이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약속받습니다. 더 이상 버림받은 자라고 불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로 불릴 것입니다.

바룩서의 예루살렘도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자세히 보면, 단순히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이나 강한 성읍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의로움과 평화, 하나님을 공경함과 영광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얻게 될 평화는 의로움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녀가 얻게 될 영광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태도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 나라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반드시 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재산을 얻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32:17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그곳에서는 의로움의 열매가 평화이며, 의로움의 결과가 평안과 안전이라고 말합니다. 바룩서의 새 이름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로움과 평화를 서로 연결하는 신학적 전통을 공유합니다.

예루살렘이 스스로를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를 새롭게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은 이전에 어떤 이름으로 조롱받았든,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시는지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받습니다.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끌려 나갈 때와 돌아올 때, 무엇이 달라졌는가

바룩서 5:5–6 본문 →

일어나 높은 곳에 서라

5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에게 몸을 움직이라고 명령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라. 동쪽을 둘러보고 네 자녀들을 보아라. 그들은 거룩하신 분의 말씀에 따라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곳곳에서 모여들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고 있다.바룩서 5:5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자녀들을 떠나보낸 뒤 슬픔 속에 남겨진 어머니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도록 초대받습니다.

낮은 자리에서는 가까이에 있는 폐허만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서면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9:18과 60:4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시온은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라는 요청을 받고, 멀리 떠나 있던 아들과 딸들이 모여 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는 서쪽에서 동쪽까지라는 뜻입니다. 해가 지고 뜨는 방향을 통해 온 세상에 흩어진 백성이 모이는 모습을 그립니다.

여기서 「동쪽을 둘러보고」라는 명령과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라는 표현을 구별해야 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이 바라보는 방향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백성의 범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는 기쁨

여기서 「기억해 주신」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말은 흔히 그들을 위해 행동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24–25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어서 출애굽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바룩서에서도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셨다는 사실은 자녀들을 다시 모으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잊힌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에게는 이름 없는 포로에 불과했을 수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뒤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걸어서 떠났지만 왕좌처럼 들려 돌아온다

6절은 5장에서 가장 선명한 대조를 만듭니다.

그들은 원수들에게 끌려 걸어서 너를 떠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네게 데려오신다. 그들은 왕좌처럼 영광스럽게 떠받들려 온다.바룩서 5:6 · 두루새김

그들에게는 이동할 방향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포로였기 때문입니다.

왕좌는 권위와 존귀함을 나타냅니다. 한때 포로로 끌려가던 사람들이 이제 왕좌와 비교될 만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떠날 때에는 원수들에게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데려오십니다.

떠날 때에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존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이러한 대조는 이사야서 49:22–23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품에 안고 딸들을 어깨에 메어 데려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회복은 단순히 떠나왔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원수에게 끌려가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백성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므네이아는 「기억」, 「기억함」을 뜻하며, 이 구절에서는 문법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신다는 뜻과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뜻을 모두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장의 문맥은 하나님의 기억과 행동에 초점을 맞춥니다. 백성은 거룩하신 분의 말씀에 따라 모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직접 데려오십니다. 6절의 비유가 정확히 어떤 형태의 운반 장치를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범한 도보 행렬이 아니라 특별히 존귀하게 떠받들려 오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산과 골짜기까지 귀환을 위해 움직이다

바룩서 5:7–8 본문 →

돌아오는 길을 평평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지라고 명령하셨다. 땅을 평평하게 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안전하게 걷게 하시려는 것이다.바룩서 5:7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이사야서 40:3–5를 매우 가깝게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광야에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칩니다. 골짜기가 높아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져 길이 평평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사야서 40장에서 길은 먼저 하나님을 위해 준비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장면이 중심에 있습니다. 바룩서 5장에서는 그 길을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마련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시는 분이십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들이 낮아지다

여기서 산과 골짜기를 모든 개인적 어려움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로만 해석하면 본문이 지닌 역사적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이것은 먼저 포로 공동체의 귀환을 그리는 시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특히 산악 지형과 골짜기, 황량한 지역은 많은 사람이 함께 이동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긴 여정을 경험했습니다.

시인은 그 기억을 뒤집어 놓습니다.

예언적 시의 언어로, 하나님께서 백성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장애물을 없애실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산은 인간에게 거대한 자연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산을 피해 돌아가거나 험한 길을 넘어갈 수는 있지만, 산 전체를 낮추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산에게 낮아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앞 장들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지혜를 찾아낼 수 없었고, 예루살렘은 자신의 힘으로 자녀들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에 명령하여 이루실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산과 골짜기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포로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험한 길이 안전한 길로 바뀌다

6절에서 포로들은 걸어서 끌려갔습니다. 7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걷게 됩니다.

첫 번째 걸음은 원수의 강제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두 번째 걸음은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6절에서는 돌아오는 사람들이 왕좌처럼 영광스럽게 떠받들려 오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7절에서는 안전하게 걷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두 모습은 서로 다른 면을 강조합니다. 왕좌처럼 떠받들려 온다는 것은 그들이 받게 될 존귀함을 나타냅니다. 안전하게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귀환의 길을 보장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다

8절에서는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집니다.

숲과 향기 나는 모든 나무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그늘을 드리웠다.바룩서 5:8 · 두루새김

산과 골짜기는 길을 평평하게 만듭니다. 나무들은 그늘을 드리웁니다. 하나는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동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안전한 길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뜨거운 햇볕을 피할 그늘도 필요합니다. 시인은 회복의 길을 단순히 장애물이 없는 길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걷는 사람들에게 쉼과 보호가 주어지는 길로 묘사합니다.

출애굽기 13:21–22에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십니다. 시편 105:39는 하나님께서 구름을 덮개로 펴셨다고 노래합니다.

또한 이사야서 49:10에서는 돌아오는 백성이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뜨거운 바람과 햇볕이 그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룩서는 이러한 광야의 보호와 귀환의 약속을 자연의 모습으로 새롭게 그립니다.

나무들은 단순히 햇빛을 막는 도구처럼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향기를 지닌 풍요로운 생명의 일부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준비가 이루어져도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그 길에서 누가 이스라엘을 인도합니까?

조금 더 깊이

신약의 누가복음 3:4–6은 이사야서 40장의 길을 준비하는 말씀을 세례 요한의 사역과 연결합니다. 이는 공통된 이사야 전승이 후대에 새롭게 적용된 사례입니다. 바룩서 5장 자체에서는 먼저 포로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귀환의 길을 존중하여 읽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길을 이끄시는 분

바룩서 5:9 본문 →

하나님께서 직접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자비와 의로움을 베푸시며, 그분의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기쁨으로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바룩서 5:9 · 두루새김

이 단락에서 하나님은 길을 마련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 길을 따라 백성을 인도하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안전한 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안전한 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길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자비와 의가 함께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의 의로움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의로움도 자비가 사라진 냉혹한 행동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편 85:10–13에서 의로움과 평화,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회복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잊어버리고 처음 상태로 되돌려 놓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과 관계를 새롭게 바로잡으시고, 자신들이 버렸던 생명의 길을 다시 걷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기쁨으로 인도하신다

여기서 기쁨은 단순히 일이 잘 풀려서 느끼는 만족감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고,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시며, 그들이 안전하게 돌아올 길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비롯됩니다.

특히 그 기쁨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함께 나타납니다. 앞서 예루살렘은 영광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녀의 찬란한 모습은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영광의 빛이 돌아오는 백성의 길을 비춥니다.

사람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길

바룩서 5:1–9 본문 →

이스라엘의 회복은 백성이 스스로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새로운 현실을 마련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의 영광은 자녀들의 귀환과 연결되고, 자녀들의 귀환은 하나님의 인도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 장의 회복은 어느 한 개인의 영적 경험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읍과 백성, 땅과 자연,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책임이나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앞서 바룩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혜를 다시 붙들고 그분을 찾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의 바탕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고 다시 모으시겠다는 약속이 놓여 있습니다.

다만 이 시를 근거로 오늘의 모든 개인적인 고난이 반드시 원하는 형태의 회복으로 끝날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바룩서 5장은 역사적으로 흩어진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선포하는 구체적인 본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슬픔의 옷을 벗고 의로움과 영광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높은 곳에 서서 돌아오는 자녀들을 바라봅니다.

그 자녀들은 더 이상 원수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광스럽게 떠받들려 존귀하게 돌아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앞에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높은 산은 낮아졌고 골짜기는 메워졌습니다. 향기 나는 나무들이 길 위에 그늘을 드리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 길을 비춥니다.

마지막에 시인이 보여 주는 것은 왕좌에 앉은 예루살렘도, 완공된 성전도 아닙니다. 자비와 의로움을 베푸시며 자기 백성의 앞길을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때 원수에게 끌려가던 사람들이 이제 그분의 인도를 받아 걸어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돌아오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