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2–6장 · 왕들을 섬긴 다니엘
불 속에서 풀려난 사람들
다니엘 3장은 이상한 반복으로 시작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웠습니다. 왕국의 관리들을 불러 모아 그 조각상의 봉헌식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조각상 앞에 섰고, 음악이 울리자 모두 엎드려 절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조각상」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왕 자신도 「내가 만든 조각상」이라고 부릅니다(3:1–15).
이 반복은 앞 장의 꿈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은 금 머리를 가진 거대한 조각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조각상은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은 돌에 맞아 무너졌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2:44–45).
그런데 3장에서 왕은 다시 조각상을 세웁니다. 이번에는 금으로 된 조각상입니다.
3장의 조각상이 2장의 꿈에 대한 왕의 의식적인 반응이라고 본문이 밝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뚜렷한 대조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왕권이 영원하지 않음을 보여주셨지만, 왕은 사람들 모두가 자기 명령 앞에 무릎 꿇는 세상을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왕이 만든 질서는 세 사람 때문에 균열을 드러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들은 바벨론의 관리였고 왕이 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세운 조각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왕은 사람을 불 속에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까지 지배할 수 있었을까요?
온 나라를 하나의 동작으로 움직이게 하다
높이 예순 규빗, 너비 여섯 규빗
1절은 금 조각상의 크기부터 소개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높이는 예순 규빗이고 너비는 여섯 규빗이었습니다. 왕은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야에 세웠습니다.다니엘 3:1 · 두루새김
높이와 너비의 비율이 10대 1인 조각상입니다. 고대의 규빗을 대략 45센티미터로 계산하면 높이는 약 27미터, 너비는 약 2.7미터가 됩니다. 정확한 환산 길이는 사용된 규빗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당히 높고 가느다란 구조물입니다. 조각상 자체만의 크기인지, 그것을 받치는 밑받침까지 포함한 수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전체가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다른 재료 위에 금을 입혔는지도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평야는 많은 사람이 모여 거대한 조각상을 바라보는 장면과 잘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왕은 조각상을 세운 뒤 왕국의 여러 지방에서 관리들을 불러 모읍니다.
태수, 지방 장관, 총독, 왕에게 조언하는 고문, 돈과 재산을 맡은 관리, 재판관, 법을 집행하는 관리, 그리고 지방을 다스리는 모든 사람이 참석합니다. 직함이 일곱 가지나 잇달아 나열됩니다. 일부 직함의 정확한 직무와 위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행정 조직 전체가 왕의 부름에 응답하여 한자리에 모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 참석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출석이 아닙니다.
모두가 같은 소리를 듣고, 같은 순간에, 같은 동작을 해야 합니다.
음악이 울리면 모두 엎드려야 한다
왕의 명령을 알리는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든 백성과 민족, 여러 언어를 쓰는 사람들아, 너희에게 명령한다.」다니엘 3:4 · 두루새김
바벨론 제국은 다양한 민족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같은 언어를 말하거나 같은 전통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요구하는 행동은 하나입니다.
조각상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음악이 사용됩니다. 뿔나팔, 피리, 리라, 삼각 현악기, 프산테린, 숨포니아와 온갖 악기가 등장합니다.
일부 악기의 정확한 형태는 알기 어렵습니다. 음악은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기쁨을 표현하도록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명령을 실행할 시간을 알려 주는 신호입니다.
본문은 이 악기들의 이름과 절하라는 명령을 여러 차례 되풀이합니다(3:5, 7, 10, 15). 처음에는 장엄한 봉헌식처럼 보이던 광경이 반복될수록 점점 기계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악기의 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절합니다. 왕의 명령이 전달되고, 사람들이 그 명령을 실행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말 그 조각상을 신성하게 여기는지, 그 의식에 동의하는지, 왕에게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왕은 눈에 보이는 동작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마가 기다립니다.
모든 사람이 절하는 광경은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절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형상인가
본문은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조각상이 정확히 누구를 나타내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 자신의 모습을 만든 것인지, 바벨론의 어떤 신을 나타낸 것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의식이 종교적 경배와 관련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12절에서 고발자들은 세 사람이 왕의 신을 섬기지 않고 금 조각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왕도 14절에서 이 두 문제를 함께 제기합니다.
따라서 이 의식은 단순한 국가 행사나 왕에 대한 일상적인 존경의 표시로만 볼 수 없습니다. 왕은 자신이 세운 조각상에 종교적 경배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 유다 사람은 왕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강한 왕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경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출애굽기 20:3–5에서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계명과 직접적인 주제적 관계를 갖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1:17에서 히브리 산파들이 이집트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우선했던 장면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이야기의 상황은 다르지만, 왕의 명령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의무와 충돌할 때 인간의 권위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은 공통적입니다.
고발당한 사람들은 왕이 직접 임명한 관리들이었다
왕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고발의 근거가 되다
8절에서 칼데아 사람 몇 명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그런데 왕께서 바벨론 지방의 일을 맡기신 유다 사람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습니다. 왕이시여, 이 사람들은 왕을 무시합니다. 왕의 신을 섬기지도 않고, 왕께서 세우신 금 조각상에 절하지도 않습니다.」다니엘 3:12 · 두루새김
다니엘 2:49에서 다니엘의 요청으로 세 사람이 바벨론 지방의 일을 맡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고발의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왕이 특별히 임명한 외국 출신 관리들이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발자들은 세 사람의 불복종을 왕에 대한 무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발자들의 해석입니다. 세 사람이 왕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전체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왕의 행정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바벨론의 모든 법이나 직무를 거부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이 요구하는 특정한 종교적 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고발자들은 그 구별을 없애 버립니다.
왕의 신을 섬기지 않고 조각상에 절하지 않는 행동을 곧 왕 자체에 대한 무시로 규정합니다. 그들은 왕국에서 맡은 일을 수행할 수는 있지만, 왕의 권력이 요구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왕은 마지막 기회를 준다
느부갓네살은 분노하여 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곧바로 불가마에 던지지는 않습니다. 왕은 먼저 그들이 정말 일부러 자신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금 조각상에 절하지 않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줍니다.
「이제 뿔나팔과 피리와 리라와 삼각 현악기와 프산테린과 숨포니아를 비롯한 온갖 악기 소리가 들릴 때, 내가 만든 조각상 앞에 엎드려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좋다. 그러나 절하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다니엘 3:15 · 두루새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세 사람의 설명이 아닙니다. 그들이 결국 절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왕은 자신의 권력이 미치는 범위를 생사의 최종적인 결정권에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금 조각상에 절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느부갓네살의 손이 하나님보다 강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2장에서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이 왕들의 주인이시라고 말했습니다(2:47). 그런데 3장에서 그는 자신이 내리기로 결정한 죽음에서 누가 사람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던 왕이 이제 자기 권력의 한계 앞에 다시 서게 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원문에서는 15절의 첫 번째 조건절이 완결된 문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좋다」로 옮겼지만, 원문에서 왕은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분명히 마무리하지 않고, 곧바로 절하지 않을 경우의 처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더라도」 — 결과를 조건으로 삼지 않는 충성
세 사람은 변명하지 않는다
느부갓네살의 질문에 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시여, 이 일에 관해서는 저희가 왕께 답변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다니엘 3:16 · 두루새김
이 말은 무례한 반항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을 바꿀 여지가 없음을 밝힙니다. 왕은 음악이 다시 울리면 절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대답해야 할 문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왕이 어떤 논리로 그들을 설득하더라도, 하나님 외의 신을 섬기고 조각상에 절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 사람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관해 말합니다.
구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리고 결과를 모르는 사람들
「저희가 불가마에 던져진다면,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왕이시여, 그분은 타오르는 불가마에서, 또 왕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다니엘 3:17 · 두루새김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더라도, 왕이시여, 이것은 알아 두십시오. 저희는 왕의 신을 섬기지 않으며, 왕께서 세우신 금 조각상에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다니엘 3:18 · 두루새김
세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유를 자신들이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는 보장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능력 있으시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어떤 결과를 허락하실 것인지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위험 앞에서는 자신이 믿는 것이 정말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세 사람도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거래로 만들지 않습니다.
절하면 살 수 있습니다. 절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왕이 제시한 선택의 구조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살기 위해 반드시 절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심은 자신이 살아남을 가능성보다 먼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행동을 미리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확정하는 일과 같지 않습니다. 세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왕의 손보다 강하시고, 불가마에서도 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명령할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하나님을 통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대답의 중심은 자신들이 얼마나 굳센 믿음을 가졌는가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며, 그런 하나님은 구원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섬길 가치가 있는 분이시라는 고백에 있습니다.
세 사람에게 하나님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 첫머리의 아람어 표현은 문법적으로 까다롭습니다. 원문에서는 「만일 그렇게 된다면」을 불가마에 던져지는 상황과 연결하는 읽기가 있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라는 조건 표현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저희가 불가마에 던져진다면」으로 옮겨, 불가마에 던져지는 상황과 연결했습니다. 또한 17절에는 하나님이 구하실 능력이 있다는 진술과 실제로 구하실 것이라는 진술이 함께 나옵니다. 반면 18절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더라도」라는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이 때문에 두 절의 관계를 완전히 매끄럽게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왕의 분노는 불을 더 뜨겁게 만들었지만
세 사람의 대답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격분합니다.
본문은 왕의 얼굴빛까지 달라졌다고 기록합니다. 세 사람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습니다. 반면 왕은 그들의 대답 하나로 자신의 표정과 태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누가 더 큰 권력을 갖고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누가 자기 판단과 행동을 더 안정적으로 유지하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왕은 불가마를 평소보다 일곱 배 더 뜨겁게 달구라고 명령합니다. 왕에게 이미 불가마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왕의 요구를 거절하자, 그는 그 죽음의 도구를 더욱 강력하게 사용하려 합니다.
왕의 행동은 실용적인 판단보다는 분노가 더 커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가장 극단적인 처벌을 가하고자 합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왕의 명령이 가혹한 데다 가마가 몹시 뜨거웠기 때문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데리고 올라간 군인들이 불길에 타 죽었습니다.다니엘 3:22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불이 실제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이야기 안에서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불가마가 뜨겁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왕의 군인들은 그 불길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그 안으로 떨어집니다.
겉옷과 페타시와 모자와 그 밖의 옷을 입은 채 묶여 불 속으로 던져집니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야기의 시선이 왕에게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일곱 배」는 극도로 높은 열기를 강조합니다. 실제 온도가 평소의 정확히 일곱 배였다는 측정값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부 옷의 정확한 형태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옷차림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뒤에 등장할 장면을 준비합니다. 27절에서는 그 겉옷들이 불에 손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불은 그들을 죽이지 못했고, 그들은 불 속을 걸었다
왕은 왜 사람을 다시 세는가
24절에서 느부갓네살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납니다.
그때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고문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사람 셋을 묶어서 불 속에 던지지 않았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시여.」다니엘 3:24 · 두루새김
그런데 왕이 다시 본 광경은 전혀 다릅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보아라! 네 사람이 풀려서 불 속을 걸어 다니고 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들의 아들과 같구나.」다니엘 3:25 · 두루새김
왕의 명령과 왕이 실제로 보는 광경이 완전히 어긋납니다. 왕은 세 사람을 불가마에 던져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도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에 굴복한 사람들은 조각상 앞에 엎드렸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은 불 속에서 자유롭게 걸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었지만, 왕이 던져 넣은 불 속에서 그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불가마는 왕이 통제하는 처형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세 사람은 왕의 명령이 의도한 죽음이 아니라, 왕도 설명할 수 없는 자유를 경험합니다.
넷째 사람은 누구인가
왕은 넷째 사람의 모습을 「신들의 아들과 같구나」라고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눈에 보인 모습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왕이 세 사람만 불 속에 던졌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왕의 손에 넘겨진 순간에도, 왕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도움이 있었습니다.
구원은 불이 꺼진 뒤에 시작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불가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도록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불가마에 실제로 던져졌습니다. 불은 실제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그들을 다시 보았을 때 그들은 이미 불 속에서 풀려 있었고, 넷째 존재와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 백성을 고난 속에 들어가게 하신 뒤 반드시 기적으로 구해 주신다는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세 사람 자신이 이미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이 기적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왕의 위협이 현실이 되기 전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명령했고, 군인들이 집행했으며, 세 사람이 실제로 불 속에 떨어진 뒤에도 하나님이 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왕은 불가마의 입구까지 세 사람을 데려갈 수 있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날 일을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불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느부갓네살은 불가마 입구로 다가가 세 사람을 부릅니다.
느부갓네살은 타오르는 불가마 입구로 다가가 외쳤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밖으로 나와 이리 오너라.」 그러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속에서 나왔습니다.다니엘 3:26 · 두루새김
왕의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자신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는 왕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태수들과 지방 장관들과 총독들과 왕의 고문들이 모여 세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불이 그들의 몸을 해치지 못했습니다. 머리카락도 그슬리지 않았고 겉옷도 손상되지 않았으며, 불에 탄 냄새조차 배지 않았습니다.다니엘 3:27 · 두루새김
본문은 불의 위험을 약화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마지막에 불에 탄 냄새조차 배지 않았다는 사실은 구원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강조합니다. 불을 가까이한 사람에게는 몸이나 옷에 그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불 속에 들어갔다 나왔으면서도 그런 흔적조차 없습니다.
왕이 세운 처형의 도구가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를 남기지 못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아람어 표현 바르 엘라힌은 문자적으로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고대의 표현 방식에서 신적 존재에 속하거나 신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8절에서 왕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세 사람을 구하셨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야기 안에서 왕은 그 넷째 존재를 하나님의 사자로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그 존재의 정체를 더 구체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넷째 존재를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모습으로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다니엘 3장의 아람어 표현만으로 그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직접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이사야 43:2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 불꽃이 그들을 태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맥락에서 주어진 약속입니다. 다니엘 3장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는 주제는 깊이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연결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불이 없어진다는 약속이 아니라 불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관계를 끊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왕은 세 사람을 칭찬하지만, 여전히 폭력으로 명령한다
왕의 입에서 나온 예상 밖의 인정
불가마에서 세 사람이 나온 뒤, 느부갓네살은 그들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다! 그분은 천사를 보내셔서 자신을 믿고 의지한 종들을 구하셨다. 이들은 왕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몸을 내주었다. 자기들의 하나님 말고는 어떤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다니엘 3:28 · 두루새김
왕의 평가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왕을 무시하는 사람들로 고발되었습니다. 이제 왕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어겼다고 인정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그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또한 왕의 고백에는 이야기의 중심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처음에 왕은 자기 손에서 구할 신이 없을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이 불가마에 던져 넣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왕의 질문이 왕 자신의 증언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왕의 명령은 바뀌었지만, 통치 방식은 바뀌었는가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명령한다. 어느 백성이나 민족에 속하든, 어떤 언어를 쓰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는 자는 몸이 잘리는 형벌로 죽을 것이고, 그 집은 쓰레기 더미가 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을 구해 낼 수 있는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다니엘 3:29 · 두루새김
그는 이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보호해야 할 신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방식은 여전히 폭력적인 명령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꿈을 알아내지 못하는 지혜자들의 몸을 토막 내고 집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습니다(2:5). 그런데 3장에서도 같은 처벌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왕이 높이려는 대상은 달라졌지만, 왕이 명령을 집행하는 방식은 여전히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다른 어떤 신보다 뛰어난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셨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 다스리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본문은 왕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이 자신의 권한으로 내린 명령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교훈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다니엘 3장은 단순한 회심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왕의 입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나오지만, 그의 권력 행사는 아직 긴장을 남깁니다.
번영으로 끝나는 세 사람의 이야기
30절은 왕이 세 사람이 바벨론 지방에서 하는 일이 잘되게 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처음에 그들은 왕이 임명한 관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임명 사실이 고발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제 왕은 다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들이 맡은 일이 잘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일이 잘될 것을 알고서 절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결과를 겪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뒤에 구원을 받고 하는 일이 잘되는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본문은 충성하면 성공한다는 단순한 보상 이야기로 축소됩니다.
그들의 충성은 결과가 결정되기 전에 이미 드러났습니다.
왕이 세운 형상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로
30절에서 세 사람의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31절부터는 느부갓네살 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이번에는 관리들을 모으거나 불가마에 던지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왕은 온 땅의 백성과 민족과 여러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 느부갓네살 왕이 온 땅에 사는 모든 백성과 민족, 여러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여러분에게 평안이 넘치기를 바랍니다.다니엘 3:31 · 두루새김
4절에서도 왕의 명령을 알리는 사람은 백성과 민족과 여러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때 요구된 것은 금 조각상 앞에 엎드려 절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다니엘 3:32 · 두루새김
왕은 처음에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보다 높은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분의 표징은 얼마나 큽니까! 그분이 하시는 놀라운 일은 얼마나 힘찹니까! 그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고, 그분의 다스림은 대대로 이어집니다.다니엘 3:33 · 두루새김
이 선언은 앞 장에서 다니엘이 전한 꿈의 해석과 맞닿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44). 이제 느부갓네살의 입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다만 31–33절의 왕의 선포는 이어지는 왕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서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만으로 왕의 신앙과 인격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왕이 세운 조각상 앞에 절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는 왕의 선언으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맺음 — 불이 닿지 못한 사람들
왕은 세 사람을 죽이겠다고 위협했지만, 그 위협만으로 그들이 누구를 섬길지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끝까지 행사한 자리에서, 왕보다 강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모든 신앙적 갈등을 불가마 앞에 선 세 사람과 쉽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명령과 혼동할 수도 있고, 단순한 의견 차이를 신앙을 포기하라는 압박으로 잘못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거부한 것은 본문에서 분명한 종교적 경배의 요구였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자신의 확신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세 사람을 묶어서 불가마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군인들이 그들을 묶었습니다. 겉옷을 입고 모자를 쓴 그대로 불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세 사람을 데리고 올라간 군인들이 그 불길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다시 불가마를 들여다보았을 때, 그곳에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묶여 있던 사람들은 풀려 있었습니다.
쓰러져 있어야 할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불 속에 던졌지만, 그들이 불 속에서 어떻게 될지는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왕국의 관리들이 모여 그들의 몸을 살펴보았습니다. 머리카락도 그슬리지 않았고, 겉옷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불에 탄 냄새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반드시 불가마에서 살아 나올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구해 주지 않으시더라도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왕이 불가마를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불 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