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이집트의 종살이
이름을 기억하는 하나님, 이름 없는 왕
출애굽기는 뜻밖에도 사람들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오래전에 이집트로 내려온 한 가족의 이름이 하나씩 불립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집트 전체를 다스리는 왕에게는 이름이 없고, 그 왕의 명령을 거역한 산파 두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시프라와 푸아입니다.
당시 세상의 눈으로 보면 파라오는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이고 산파들은 그 역사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장은 누구의 이름을 남길 것인지부터 다르게 결정합니다.
이 장에는 아직 모세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다가 갈라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에서 울려 퍼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점점 더 깊은 억압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충돌은 한 가족이 큰 민족으로 자라는 데서 시작하여, 갓 태어난 아이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하는 선택으로 좁혀집니다.
모두 죽었으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여는 이름들
출애굽기 첫 문장은 창세기 46:8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 시작되었던 이름의 목록이, 출애굽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펼쳐지는 것입니다. 독자가 출애굽기를 창세기의 연속으로 읽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에 내려온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간 요셉이 그 땅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고, 기근이 찾아오자 가족을 구해 주었습니다. 야곱은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집트는 그 가족에게 피난처가 되었습니다(창세기 45–47장).
그런데 그보다 앞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집트로 내려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46:3–4).
야곱에게서 태어난 자손은 모두 일흔 명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이집트에 있었습니다.출애굽기 1:5 · 두루새김
일흔 명은 거대한 나라 이집트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가족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약속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후손의 약속은 거대한 군대나 강력한 왕조가 아니라, 서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가족의 모습으로 이집트에 들어왔습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 세대의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출애굽기 1:6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으로 창세기의 주요 인물들이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요셉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겪었던 오랜 세월, 형제들과 화해하기까지의 갈등, 야곱의 생애가 모두 지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은 죽음과 정반대되는 말로 가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녀를 많이 낳아 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강해졌고, 그 땅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가득 찼습니다.출애굽기 1:7 · 두루새김
약속을 처음 들었던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도 약속의 역사가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의 언어가 이집트에서 되살아나다
원문에서는 증가를 나타내는 동사를 네 개 연달아 사용합니다. 자식을 낳고, 왕성하게 불어나고, 수가 늘고, 강해졌다고 말한 뒤, 강조하는 표현까지 덧붙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생명에게 번성하고 땅을 가득 채우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9:1에서는 홍수 이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다시 번성하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후손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창세기 17:2, 22:17).
이제 그 생명의 풍성함이 이집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수가 늘어나는 일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며, 세대를 이어 가는 평범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창세기와 연결된 표현을 통해 그 평범한 삶 안에 흐르는 더 큰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극적인 사건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세대가 지나고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 긴 시간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 풍성함이 문제의 시작이 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의 증가였던 것이 이집트 왕에게는 위협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
한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8절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꿉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출애굽기 1:8 · 두루새김
새 왕이 요셉에 관한 역사적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시대가 너무 오래전에 지나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다」는 사람이나 사건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관계적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새 왕이 요셉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읽기뿐 아니라, 요셉이 이집트에 베풀었던 공헌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확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결과는 분명합니다. 요셉을 통해 이집트에 자리 잡았던 가족이 더는 이전과 같은 관계 속에서 대우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기근을 대비했고, 이집트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했습니다(창세기 41:46–57, 47:13–26). 하지만 그가 한 일을 기억하지 않는 정치권력 아래에서 그 후손들은 다른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한때 환영받던 가족이 이제 경계해야 할 집단이 됩니다.
본문은 이 새 왕의 이름이나 정확히 언제 왕이 되었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비돔과 라암세스라는 도시 이름이 뒤에 나오지만, 그것만으로 이 왕이 역사상의 특정 파라오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장이 주목하는 것은 왕이 누구였는가보다 그가 백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입니다.
위협은 먼저 왕의 말에서 만들어진다
왕이 자기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이스라엘 자손은 우리보다 수가 많고 강하다.」출애굽기 1:9 · 두루새김
앞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수가 늘고 강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사실을 「우리보다」라는 비교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장했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위험하다는 주장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두 번째 주장을 하려면 실제로 그들이 이집트를 해치려 한다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왕의 말에는 그런 근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자, 그들을 꾀를 써서 다루자.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수가 더 늘어나고, 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원수들의 편에 서서 우리와 싸우다가 이 땅을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출애굽기 1:10 · 두루새김
왕의 정책은 실제 반란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자신이 두려워하는 가능성을 막으려는 시도에서 출발합니다. 왕은 자기 판단을 영리하고 지혜로운 대책으로 제시합니다.
왕이 말하는 지혜란 다른 집단을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을 억압하여 통제하려는 계산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이 한 집단 전체를 억압하는 근거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출애굽기의 핵심 사건인 이집트 탈출이 처음 언급되는 자리가 뜻밖에도 파라오의 두려움 속입니다.
원문에서는 「이 땅을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עָלָה)는 자리에 올라간다는 뜻의 동사가 쓰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출애굽기 3:8, 17).
파라오는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는 일을 위험으로 여깁니다. 반면 출애굽기는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는 일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같은 이동을 바라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억압할수록 더 퍼져 나가는 백성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세워지는 파라오의 도시
왕의 염려는 곧 정책이 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강제로 힘든 일을 시켜 괴롭히려고 감독들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파라오를 위해 물자를 쌓아 둘 도시인 비돔과 라암세스를 지었습니다.출애굽기 1:11 · 두루새김
비돔과 라암세스는 「물자를 쌓아 둘 도시」로 소개됩니다. 이런 도시는 국가가 자원과 물자를 모으고 관리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이집트로부터 위험한 집단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동은 파라오의 나라를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나 노동하는 사람들 자신은 존중받지 못합니다.
11절은 감독들이 세워진 목적까지 밝혀 줍니다. 노동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괴롭히려고」 세운 것입니다. 이 경우 노동 자체가 사람을 괴롭히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잔혹한 정책이 가장 중요한 목적에 실패하다
그런데 12절에서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괴롭힐수록 이스라엘 자손은 더 많아지고 더 널리 퍼졌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두려워하며 꺼렸습니다.출애굽기 1:12 · 두루새김
이 구절을 고통이 많으면 언제나 사람이 번성한다는 일반 법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가혹한 노동은 사람을 해치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고통을 좋은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제 노동의 목적이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왕이 바라는 결과와 실제로 일어나는 결과가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술은 창세기에서 주어진 약속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손의 번성은 파라오의 통제 아래 놓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반전이 이스라엘의 생활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집트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억압은 더 거세집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종으로 삼아 가혹하게 부렸습니다.출애굽기 1:13 · 두루새김
진흙을 반죽하고 벽돌을 만드는 힘든 일과 들에서 하는 온갖 일로 그들의 삶을 괴롭게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시키면서 그들을 가혹하게 부려 먹었습니다.출애굽기 1:14 · 두루새김
진흙을 반죽하고 벽돌을 만드는 일, 들에서 하는 일까지 언급함으로써 독자는 이 억압이 삶의 여러 영역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약속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왜 고통이 시작되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번성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결과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향한 폭력의 구실이 됩니까?
본문은 이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번성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파라오가 그들을 억압한 것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의 약속을 고려하면 상황은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인간의 왕이 그 일을 자기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여 억압합니다.
그리고 파라오는 강제 노동만으로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더 끔찍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이 낯선 땅에서 종살이하고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리는 민족을 심판하시고 후손들이 그 땅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5:13–14).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번성의 약속과 고난에 대한 예고가 함께 현실이 된 것입니다. 훗날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도 이집트의 종살이 경험은 중요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특히 레위기 25:43은 동족을 가혹하게 부리지 말라고 명령하는데, 여기에 사용된 베파레크는 출애굽기 1:13–14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부린 방식을 표현한 말과 같습니다. 과거에 당한 억압은 자유를 얻은 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기준이 됩니다.
파라오의 명령과 두 산파의 선택
거대한 제국의 왕 앞에 등장한 두 이름
15절에 이르러 이야기의 무대가 갑자기 작아집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것은 민족, 왕, 도시, 감독, 국가 정책이었습니다. 이제 아이 낳는 일을 돕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집트 왕이 아이 낳는 일을 돕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시프라였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푸아였습니다.출애굽기 1:15 · 두루새김
이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단순한 역사적 정보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행동을 생각하면, 글쓴이는 파라오가 행사한 권력보다 산파들이 내린 선택에 독자의 관심을 모으는 듯합니다.
산파들은 히브리인이었을까?
15절의 「히브리 산파들」은 번역에 중요한 갈림이 있는 표현입니다.
두 단어의 정관사와 형태를 고려하면, 히브리인인 산파들을 가리키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히브리인들의 산파들’이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표현을 사용합니다. 히브리 여자들의 출산을 담당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 산파였다면 자기 백성의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집트인 산파였다면 다른 민족의 아이들을 위해 자기 나라 왕의 명령을 거역한 셈입니다.
이야기는 산파들이 어떤 민족에 속했는가보다 누구를 두려워했는가를 행동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생명을 돕는 일을 죽음의 도구로 만들려는 왕
파라오의 명령은 출산의 순간을 겨냥합니다.
왕은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히브리 여자들이 출산 의자에서 아이를 낳도록 도울 때, 아기를 살펴보아라. 남자아이면 죽이고 여자아이면 살려 두어라.」출애굽기 1:16 · 두루새김
출산은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입니다. 산파의 일은 산모를 돕고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도록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바로 그 일을 이용해 아이를 죽이도록 명령합니다.
감독들은 사람들을 고되게 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에게 요구된 일은 그보다 직접적으로 생명을 없애는 일입니다.
왕의 정책이 노동의 영역을 넘어 출산의 자리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왕이 남자아이들을 잠재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여겼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이유를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 세대 가운데 남자아이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산파들이 두려워한 분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남자아이들을 살려 두었습니다.출애굽기 1:17 · 두루새김
12절에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두려워하며 꺼렸습니다」. 이 두려움은 억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17절에서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두려움은 생명을 지키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두려움이지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은 단순히 무서운 감정을 느낀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뜻을 무겁게 여기고, 그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설명도 없고, 누군가 그들에게 명령을 거역하라고 지시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행동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연결합니다.
왕은 왜 아이들을 살렸느냐고 묻는다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하여 남자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출애굽기 1:18 · 두루새김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의 죽음이 아니라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산파들은 왕이 예상하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파라오가 자기 명령을 당연히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면, 산파들은 그것을 따를 수 없는 명령으로 여겼습니다.
산파들이 파라오에게 대답했습니다.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자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를 낳습니다.」출애굽기 1:19 · 두루새김
산파들의 대답이 윤리적으로 옳았는지를 논의할 수는 있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왕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보다 왕의 살해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파라오는 아이들의 죽음을 명령할 수 있었지만, 산파들이 그 명령을 자기 행동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이 실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한 것인지, 산파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놓은 변명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산파들이 왕을 속였다고 이해하는 읽기가 있지만, 본문 자체는 그들의 대답을 분명하게 거짓말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대답이 모든 경우에 사실이었다고 보증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산파들이 한 말은 히브리 여자들과 이집트 여자들 사이에 실제로 출산 능력의 차이가 있었다는 의학적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왕의 추궁에 대한 산파들의 답변입니다.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집안을 이루어 주시다
본문이 처음으로 직접 말하는 하나님의 행동
20절에 이르러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분으로 분명하게 등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산파들에게 좋은 일을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가 늘고 매우 강해졌습니다.출애굽기 1:20 · 두루새김
이 장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의 약속은 배경에 있었지만, 출애굽기 1장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이 직접 서술된 것은 여기서 처음입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집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출애굽기 1:21 · 두루새김
파라오는 산파들에게 다른 사람의 가정을 무너뜨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죽게 만들고, 부모가 그 아이를 기르는 일을 불가능하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그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집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이들이 자라 가정을 이루는 것을 막으려는 왕의 뜻과, 생명을 살린 이들에게 집안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서로 대조됩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을 선한 일을 하면 누구나 자녀와 가정을 얻는다는 보편적인 보상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 두 산파에게 베푸신 일을 말합니다. 그 일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의 삶에 동일한 결과가 약속된 것은 아닙니다.
집안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과 집안을 무너뜨리려는 왕
출애굽기 1장에서 원문의 집안을 뜻하는 말은 처음과 끝을 연결합니다. 1절에서 야곱의 아들들은 저마다 자기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왔습니다.
이야기는 이름을 가진 가족들에서 시작되었고, 이름을 가진 산파들이 집안을 이루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가족이 이어지는 일이 이 장 전체를 관통합니다. 파라오는 그것을 위협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지키십니다.
조금 더 깊이
「집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팀은 본래 집들을 뜻하지만, 집안이나 가족을 나타내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사무엘하 7:11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집을 세워 주시겠다는 말씀 역시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왕조와 가문이 이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어의 마지막 동사는 주어를 별도로 반복하지 않지만,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좋은 일을 베푸셨다는 서술을 고려하면 하나님을 행위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고대 해석 전통에는 다른 이해도 전해집니다.
나일강에 던져지는 아이들
두 사람에게 내린 명령이 온 백성에게 확대되다
마지막 절에서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어두워집니다.
파라오가 자기 백성 모두에게 명령했습니다. 「태어나는 남자아이는 모두 나일강에 던지고, 여자아이는 모두 살려 두어라.」출애굽기 1:22 · 두루새김
16절에서는 산파 두 사람에게 아이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기 백성 모두」에게 명령합니다. 아이를 죽이는 일이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맡겨진 비밀스러운 행위에서, 이집트 백성 전체가 수행해야 하는 명령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파라오는 처음부터 나일강에 아이들을 던지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백성을 위험한 집단으로 규정했고, 그들을 괴롭힐 제도를 만들었고, 그 제도가 원하는 결과를 거두지 못하자 더 직접적인 폭력을 선택했습니다.
독자는 그의 두려움이 잔혹함으로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생명을 주는 강이 죽음의 장소가 되다
왕이 아이들을 던지라고 명령한 장소는 나일강입니다.
나일강은 이집트의 농업과 생활에 꼭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강이었습니다. 강이 넘쳐흐르는 일과 물의 이용은 이집트 문명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생명을 지탱하는 물이 죽음의 도구로 사용되려는 것입니다.
산파는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파라오는 그 일을 죽음의 도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제 나일강이라는 생명의 자원마저 아이들을 죽이는 데 사용하려고 합니다.
파라오의 통치 아래에서는 본래 생명을 돕는 것들이 생명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뒤바뀝니다.
이 대조는 출애굽기 1장에 흐르는 깊은 비극을 드러냅니다. 억압이 단지 사람들에게 고된 일을 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출산과 양육, 물과 노동처럼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영역까지 침범합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에서는 히브리 여자들의 출산이라는 대상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22절의 문장 자체에는 ‘히브리’라는 한정어가 반복되지 않습니다. 앞 문맥을 고려하면 파라오의 정책은 이스라엘 자손의 증가를 막으려는 것이므로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겨냥한 명령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마지막 명령의 문면은 앞선 명령보다 한정이 적습니다. 모든 남자아이라는 표현 자체가 넓은 범위를 가리킨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 파라오가 이집트인 남자아이들까지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 범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두려움을 따라 살아가는가
이 장은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파라오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할 미래를 두려워했습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신보다 강한 왕의 명령이라도 생명을 죽이는 명령에는 따르지 않도록 이끌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은 권력을 가진 사람과 힘없는 사람을 단순하게 나누고, 힘없는 사람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프라와 푸아가 남자아이들을 살려 두었어도 파라오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선하게 응답하신 뒤에도 나일강에 아이들을 던지라는 명령은 내려졌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모든 결과를 자기 손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결과를 다 알지 못해도 생명을 향한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로 드러납니다.
출애굽기 1장의 마지막에는 두 산파의 이름이 더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모든 아이의 생존을 보장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는 사실은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려 했던 파라오의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처음에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중간에는 시프라와 푸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갓 태어난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지라는 명령이 울려 퍼집니다.
한 왕이 미래를 통제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두 산파는 그 왕이 명령한 것과 다른 일을 했습니다.
왕은 죽이라고 했고, 그들은 살려 두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은 그 작은 차이를 남긴 채, 나일강 앞에서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