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세상과 사람의 시작

죽음의 반복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

창세기 5장에는 구백 년 넘게 산 사람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아담은 구백서른 해, 셋은 구백열두 해, 야렛은 구백예순두 해를 살았습니다. 지금의 인간 수명과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긴 세월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그 긴 세월을 기록한 뒤에 성경이 붙이는 마지막 한마디입니다. 「아담은 모두 930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그러다가 에녹이라는 사람에게 이르러 갑자기 문장이 달라집니다.

창세기 5장은 인간의 수명을 계산하기 위한 숫자 목록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이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이어 가는 이야기이며, 그 반복 한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을 특별히 드러내는 기록입니다.

이 흐름의 시작점은 뜻밖에도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75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이름 지으신 사람, 사람이 이름 지은 아들

창세기 5:1–5 본문 →

아담과 그 후손들에 관한 기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닮도록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창조한 날에 그들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창세기 5:1–2 · 두루새김

그런데 계보를 시작하면서 본문은 곧장 아담이 셋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때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창세기 1:26–28의 창조 장면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역사를 죽음이나 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을 닮도록 만드시고 복을 주신 사건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의 이름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본문은 「그들에게」와 「그들을」이라는 복수 표현을 거듭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붙여 주신 이름은 하나입니다.

「사람」(⁨אָדָם⁩)이라는 낱말은 1절에서는 한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곧이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2절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함께 부르는 이름이 됩니다.

아담의 이야기는 한 남자의 가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신 대상에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포함됩니다. 뒤따르는 계보는 주로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을 따라가지만, 그 계보의 문을 여는 창조 선언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고 복을 받은 존재로 세웁니다.

하나님의 모습에서 아담의 모습으로

아담은 130살에 자기를 닮고 자기의 형상을 지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지었습니다.창세기 5:3 · 두루새김

5:1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을 닮도록」 만드셨다는 말은 5:3에서 사람이 「자기를 닮고 자기의 형상을 지닌 아들」을 낳았다는 말로 이어집니다. 이 표현이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과 사람이 자녀를 낳는 사건 사이의 연결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아담에게서 자기를 닮은 아들이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의 역사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셋만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도 아니고, 아담의 죄가 그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그런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인간이 죄와 상실을 겪은 뒤에도 자녀를 낳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창조의 언어를 사용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은 훗날 창세기 9:6에서 다시 인간 생명의 가치를 설명하는 근거가 됩니다.

이어서 아담은 셋을 낳은 뒤 팔백 해를 더 살며 아들딸들을 낳았다고 기록됩니다. 셋은 이 계보가 따라가는 후손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름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생애가 마무리됩니다.

아담은 모두 930년을 살고 죽었습니다.창세기 5:5 · 두루새김

앞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9). 이제 그 말이 계보의 첫 사람에게서 현실이 됩니다.

아담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서 태어난 후손들은 계속 살아갑니다.

다음 다섯 세대의 기록은 이 두 사실을 같은 문장 구조로 되풀이합니다.

긴 세월을 세는 문장, 끝에서 반복되는 죽음

창세기 5:6–20 본문 →

셋부터 야렛까지 다섯 사람의 기록은 거의 같은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몇 살에 아들을 낳았는지 말합니다. 그다음 그 아들을 낳은 뒤 몇 년을 더 살았는지 기록하고, 그동안 아들딸들을 낳았다고 덧붙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생 몇 년을 살았는지 모두 더한 뒤 죽었다고 말합니다.

셋은 구백열두 해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에노스는 구백다섯 해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게난은 구백열 해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마할랄엘은 팔백아흔다섯 해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야렛은 구백예순두 해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기록하면서도, 그 긴 세월 동안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게난이 어떤 일을 했는지, 마할랄엘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야렛이 무엇을 남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장의 관심은 그들의 업적이 아닙니다.

그들이 살았다는 것, 자녀를 낳았다는 것, 그리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 사람의 생애가 세 부분으로 정리됩니다. 이전 세대로부터 생명을 받고, 다음 세대에 생명을 이어 주고, 마침내 자신의 생애를 마칩니다.

죽음은 한 사람의 생애를 끝냅니다. 그러나 출생은 그 사람의 생애가 끝난 뒤에도 이야기가 계속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계보는 죽음의 기록인 동시에 생명이 계속된다는 기록입니다.

왜 그렇게 오래 살았을까?

이 장을 읽을 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구백 년 가까이 살았다는 말인가요?

본문은 이 숫자들을 인물들의 수명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명이 어떤 생물학적 조건에서 가능했는지, 왜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살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전해 내려온 본문들의 숫자도 하나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 사마리아 오경, 그리스어 칠십인역에는 자녀를 낳은 나이와 수명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본문만으로 이 숫자들이 현대적인 의미의 정확한 연대 기록인지, 어떤 상징적 의미까지 담고 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숫자를 전부 상징이라고 선언하는 것도, 이 숫자만으로 창조의 역사적 연도를 확정하는 것도 본문이 제공하는 근거를 넘어섭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도, 그 시간 자체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이 생명나무에 다가가지 못하게 된 사건과도 연결됩니다(3:22–24). 인간은 생명을 이어 가지만, 끝없이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이름이 없는 자녀들도 계속 태어났다

또 하나 주목할 표현은 「아들딸들을 낳았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계속해서 반복되지만, 대부분의 자녀에게 이름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계보를 그 시대에 존재한 모든 사람의 완전한 명단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기록자는 특정한 계보를 따라 이야기를 이어 가면서도, 그 바깥에 다른 아들딸들이 있었음을 거듭 밝힙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렇게 여러 세대의 생애가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간 뒤, 마침내 일곱 번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에녹입니다.

살았다는 말이 걸었다는 말로 바뀌다

창세기 5:21–24 본문 →

「에녹은 예순다섯 살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앞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부터 기록 방식이 달라집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뒤 300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살았고, 아들딸들을 낳았습니다.창세기 5:22 · 두루새김

다른 사람들에게는 몇 년을 「더 살며」라는 표현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에게는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살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먼저 기록되었다면, 에녹에게는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갔느냐를 보여 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걸었다는 뜻을 「걸으며 살았고」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함께」라는 말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어디론가 이동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나타낸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에게도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세대를 이어 가는 평범한 인간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활을 설명하는 말이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에녹에게 특별하게 기록된 것은 어떤 놀라운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살았다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표현의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했고 어떤 명령에 순종했으며 이웃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노아를 설명할 때 같은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창세기 6:9은 노아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노아가 의롭고 온전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함께 제시됩니다.

두 본문을 연결하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을 단순한 종교적 감정 이상으로 이해할 근거가 생깁니다. 다만 에녹에게 노아에 관한 모든 설명을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삼백예순다섯 해, 그리고 다른 결말

에녹은 모두 365년을 살았습니다.창세기 5:23 · 두루새김

이 숫자는 앞사람들의 수명과 비교하면 상당히 짧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렛은 구백예순두 해를 살았고, 뒤에 등장하는 그의 아들 므두셀라는 구백예순아홉 해를 삽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표현은 전혀 다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5:24 · 두루새김

앞의 여섯 사람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에녹에게서는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말을 특별히 선택합니다.

이야기의 구성 자체가 에녹에게 어떤 예외적인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에녹이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 자기 생애를 늘린 것이 아닙니다. 그의 결말을 다른 사람들의 결말과 다르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에녹이 평생 함께 걸으며 살았다고 기록된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삶에 연결할 때에도 단순히 에녹처럼 살면 오래 살거나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에녹의 생애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보다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에녹의 수명인 삼백예순다섯 해를 일 년의 날수와 연결하여 상징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숫자의 뜻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이유나 그의 삶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확정적인 상징으로 읽을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이 「사라졌습니다」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베에넨누(⁨אַיִן⁩)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그리고 그는 없다에 가까우며, 그 자체에 죽었는지 다른 장소로 이동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를 어디로 데려가셨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평범한 죽음을 맞았다고만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에서 죽음은 반복적으로, 분명하게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히브리서 11:5는 이 사건을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도록 옮겨졌다는 뜻으로 분명하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세기 본문의 짧은 진술을 더 구체적으로 풀어 낸 신약의 읽기입니다.

가장 오래 산 사람도 죽었다

창세기 5:25–27 본문 →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의 이야기는 앞선 계보의 형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라멕을 낳고, 그 뒤에도 오랜 세월 살며 아들딸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놀라운 숫자가 등장합니다.

므두셀라는 모두 969년을 살고 죽었습니다.창세기 5:27 · 두루새김

마소라 본문에 기록된 이 장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긴 수명입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들보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기록됩니다. 반면 그의 아들 므두셀라는 이 계보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죽었다고 기록됩니다.

수명이 길다는 사실이 에녹에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사건은 이 계보의 일반적인 질서를 완전히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반복되는 죽음 가운데 놓인 특별한 사건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음 세대의 라멕에게로 옮겨 갑니다.

보복을 노래한 라멕과 위로를 기다린 라멕

창세기 5:28–31 본문 →

라멕이라는 이름은 앞 장에서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의 라멕과 이 장의 라멕은 계보가 다른 인물입니다.

앞 장의 라멕은 자신의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며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선언했습니다(4:23–24). 반면 이 장의 라멕은 자기 아들이 태어나자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야훼께서 저주하신 땅에서 손으로 고되게 일하고 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수고하는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창세기 5:29 · 두루새김

한 사람은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얼마나 크게 보복할 것인지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서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두 계보를 단순히 악한 후손과 선한 후손으로 구분할 근거는 아닙니다. 하지만 창세기가 같은 이름의 두 인물에게 서로 다른 말을 하게 한다는 점은 독자가 두 장면을 비교하도록 만듭니다.

오래 지속된 고통을 기억하는 사람

라멕은 왜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저주받은 땅과 노동의 고통부터 이야기할까요?

그는 자기 시대의 삶을 설명하면서 아담에게 내려진 말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저주하신 땅」이라는 문장은 창세기 3:17을 직접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땅이 저주를 받아 사람이 고생하며 그 소산을 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 이후 여러 세대가 지났습니다. 계보에는 수많은 세월이 기록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녀를 낳고 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땅을 일구며 겪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의 고통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경험하는 노동의 수고를 말합니다. 노아의 탄생은 한 가정의 기쁨이지만, 그에게 붙여진 기대는 더 넓습니다. 라멕은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라멕이 어떻게 노아가 그 일을 이루리라고 생각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탄생에 담긴 아버지의 희망일 수도 있고,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내다보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장이 보여 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진 위로가 아니라 위로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라멕이 노아에게 품은 기대를 기록한 뒤, 다시 그의 수명을 기록합니다. 「라멕은 모두 777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후자의 기대가 그의 생전에 이루어졌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에 희망을 담아 주었지만, 그 자신은 죽었습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의 생애도 끝납니다. 그가 기대했던 이야기는 다음 세대에게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노아」(⁨נֹחַ⁩)라는 이름은 쉬다, 안식하다라는 뜻의 어근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라멕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동사는 예나하메누(⁨נָחַם⁩)입니다. 위로하다를 뜻하는 다른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두 낱말의 앞부분 소리가 비슷하지만, 정확히 같은 어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라멕의 말은 노아라는 이름을 사전적으로 설명한다기보다, 이름과 비슷하게 들리는 말을 사용하여 자신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를 표현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의 노동과 고통을 「손으로 고되게 일하고 있다」는 말로 풀어 옮겼습니다. 노아가 태어날 당시 라멕이 장차 홍수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기대는 뒤의 노아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8:21에서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선언이 창세기 3장의 저주를 어떤 의미에서 변화시키는지, 노아의 이름에 담긴 기대가 어디까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는지는 뒤의 이야기 전체를 따라 살펴야 합니다.

죽었다는 말 대신 세 아들의 이름으로 끝나다

창세기 5:32 본문 →

노아는 500살이 된 뒤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다.창세기 5:3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그동안 반복되던 계보의 형식과 다릅니다. 앞의 인물들은 모두 아들을 낳은 나이, 그 후에 산 기간, 다른 자녀들의 출생, 전체 수명이라는 흐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또한 노아가 몇 년을 더 살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아들딸들을 낳았다는 반복 문장도 없습니다. 전체 수명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계속되던 「살고 죽었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에녹에게서 그 말이 빠졌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노아에게서 빠진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노아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노아의 죽음은 이 장이 아니라 창세기 9:29에 기록됩니다. 창세기 5장은 그의 생애를 마무리하지 않고,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계보를 멈춥니다.

노아가 「500살이 된 뒤」 세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반드시 세 아들이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세 아들을 한꺼번에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셈과 함과 야벳의 이름은 계속 등장합니다. 특히 창세기 10장은 이 세 아들의 후손을 따라 여러 민족의 계보를 펼쳐 보입니다.

지금까지는 한 사람에게서 다음 한 사람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한 사람에게서 세 아들의 이름이 동시에 펼쳐집니다.

이제 이야기는 한 줄의 계보에서 더 넓은 인간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수명보다 먼저 기록된 것, 죽음보다 길게 이어진 것

창세기 5:1–32 본문 →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다는 첫 기록이, 인간이 죽음을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도 계속되는 출생의 이야기와 나란히 놓입니다. 그렇지만 이 장은 그 생명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여전히 반복되고, 땅에서 고되게 일하며 겪는 고통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살았다고 기록되고, 라멕은 위로를 기다리며 아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기록자는 다시 사람의 나이를 셉니다. 「노아는 500살이 된 뒤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다.」

그다음에 와야 할 것 같던 익숙한 말, 「살고 죽었습니다」는 나오지 않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

죽음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닫던 계보가, 이번에는 세 사람의 이름을 열어 놓은 채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