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41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못으로 고정된 신과 손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41장에는 서로를 격려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세상이 두려움에 휩싸이자 사람들은 이웃에게 다가가 「힘내자」 하고 말합니다. 장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서둘러 무언가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들이 완성한 것은 자신들을 지켜 줄 것으로 기대하는 우상입니다.
잠시 뒤,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이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다른 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누가 누구를 붙들어 주나요?
세상을 법정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해안 땅들아, 내 앞에서 잠잠하여라. 민족들은 새 힘을 얻고 가까이 와라. 그런 다음 말해 보아라. 함께 재판 자리로 나아가자.」이사야 41:1 · 두루새김
이사야 41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로가 아니라 온 세상을 불러 모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5절의 「땅끝의 사람들」과 함께 보면, 「해안 땅들」은 특정한 해안 국가 몇 곳보다 이스라엘의 시야에서 멀리 떨어진 여러 민족을 불러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가와서 말하라고 하십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함께 재판 자리로 나아가자」라는 표현은 이 장의 분위기를 결정합니다. 서로의 주장을 제시하고, 그 주장이 옳은지 따져 보는 법정의 형식입니다.
무엇을 두고 다투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가 다스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갑자기 한 인물의 출현을 이야기하십니다.
「누가 동쪽에서 한 사람을 일으키고, 의롭게 그를 불러 자기 뒤를 따르게 했느냐? 그를 부른 이는 민족들을 그 사람 앞에 넘겨주고, 그가 왕들을 굴복시키게 한다. 그 사람의 칼 앞에 그들을 먼지처럼, 그의 활 앞에 흩날리는 지푸라기처럼 내준다.」이사야 41:2 · 두루새김
본문은 그가 누구인지 먼저 묻지 않습니다. 그를 일으킨 이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4절에서 마침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집니다.
「누가 이 일을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한 세대 한 세대를 불러냈느냐? 나 여호와야훼다. 내가 처음이며, 마지막 세대들과 함께 있는 이도 바로 나다.」이사야 41:4 · 두루새김
한 정복자의 출현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인류의 모든 세대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만이 아니라 세대의 시작과 끝까지 하나님의 활동 범위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세대는 바뀌고 왕조는 교체됩니다. 한때 강력했던 나라가 사라지고 다른 나라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변화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신지 달라지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한 가지 읽기는 그를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44:28과 45:1에서는 고레스가 이름으로 등장하며, 45:13에서는 그의 활동과 포로들의 해방이 연결됩니다. 다른 읽기는 아브라함을 떠올립니다. 아브라함도 동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왔으며, 창세기 14장에서는 왕들을 쫓아가 무찌릅니다. 더욱이 이사야 41:8은 아브라함을 직접 언급합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전투와 고레스의 제국 정복은 규모와 역사적 상황이 다르며, 41장 후반부와 이어지는 장들의 표현은 고레스의 활동과 보다 직접적으로 맞물립니다. 그렇다고 41:2 자체가 인물의 이름을 밝힌 것은 아닙니다. 「의롭게 그를 불러 자기 뒤를 따르게 했느냐」라는 표현에도 문법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체데크는 ‘의’, ‘올바름’을 뜻하지만, 문맥에 따라 올바른 판단이나 승리와 연결되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이 의로운 목적을 위해 그 인물을 부르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그가 나아가는 곳마다 의로운 승리가 뒤따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표현이 정복자 개인의 모든 행동을 도덕적으로 의롭다고 판정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다
하나님의 질문을 들은 민족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정복자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사람들에게 머릿속으로만 따지는 신학적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나라와 도시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은 저마다 이웃을 도우며 서로 말했습니다. 「힘내자!」이사야 41:6 · 두루새김
그러나 다음 절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해 협력하는지 드러납니다.
장인은 금속을 다루는 장인을 격려하고, 망치로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이는 모루를 두드리는 이를 격려합니다. 이어 붙인 곳을 살펴보고 「잘 붙었어」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성된 우상을 못으로 고정합니다.
그런데 그 형상은 스스로 설 수조차 없습니다.
사람들이 못으로 고정해야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우상을 만들지만, 그 우상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노력 자체가 그들의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의 「도우며」와 「힘내자」,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곧바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합니다. 민족들이 서로를 도우며 우상을 붙들어 세우는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직접 돕고 붙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 종 이스라엘아 — 선택은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 종 이스라엘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를 사랑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아,」이사야 41:8 · 두루새김
여기서 「그러나」는 단순한 화제 전환이 아닙니다. 같은 역사적 변화를 마주한 두 집단이 서로 다른 말을 듣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호칭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뒤이어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종의 모습과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지만, 이 구절에서 종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이스라엘로 제시됩니다.
종이라는 이름에는 주인에게 속해 있고 그를 섬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그 종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시기 전에 자신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땅끝에서 너희를 붙잡고, 땅의 먼 구석에서 너희를 불러냈다. 내가 너희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 종이다. 내가 너희를 선택했고 버리지 않았다.』」이사야 41:9 · 두루새김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왕조는 몰락했으며, 그들의 정치적 독립도 사라졌습니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이 취소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택은 잘못을 면제받는 자격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잘못과 심판을 겪었음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과 이스라엘의 오른손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불안해하며 두리번거리지 마라. 내가 너희 하나님이다. 내가 너희를 굳세게 하겠다. 반드시 너희를 돕고,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희를 받쳐 주겠다.」이사야 41:10 · 두루새김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강해지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그들을 강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오른손」에서 ‘의’는 하나님의 올바른 판단과 약속을 지키며 구원하시는 행동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오른손은 힘과 행동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붙드시는 힘은 단순히 강한 힘이 아니라, 자신의 약속에 따라 올바른 일을 이루는 힘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분노하고 맞서 싸우던 자들이 수치를 당하며 사라집니다. 그들을 찾아도 찾지 못할 만큼 적대 세력의 힘이 무너집니다. 본문의 상황에서는 백성을 억압하던 세력의 권세가 지속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처지를 뒤바꾸실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설명하는 13절에는 더욱 가까운 이미지가 나옵니다.
「나 여호와야훼, 너희 하나님이 너희 오른손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돕겠다.』」이사야 41:13 · 두루새김
하나님은 멀리서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으로만 그려지지 않으십니다. 손을 붙잡고 곁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명령은 감정에 대한 책망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전제에서 내려진 명령이 아니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그 두려움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말씀에는 두 역사적 기억이 겹쳐 보입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자신이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2:1–3). 다른 하나는 먼 곳에 흩어진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땅끝과 땅의 먼 구석에서 붙잡고 불러내셨다는 표현은 유배와 흩어짐 가운데 있는 백성의 귀환을 떠올리게 합니다. 본문은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분명하게 가리키지 않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선택이 먼 곳에 흩어진 그의 자손에게도 여전히 이어진다고 선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사람입니다. 창세기 15:6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하며, 창세기 22장은 그 믿음이 실제 행동으로 시험받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벌레 같은 야곱을 날카로운 타작 썰매로 만드시다
여러분을 구해 내시는 분,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야훼께서 선언하십니다. 「벌레 같은 야곱아,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돕겠다.」이사야 41:14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의 종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이스라엘을 이제는 벌레에 빗대어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고, 버리지 않고, 붙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벌레 같은 야곱」은 이스라엘을 혐오하거나 관계에서 밀어내는 호칭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표현은 강력한 제국들 앞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드러냅니다.
벌레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이 거의 없습니다. 밟히거나 짓눌리기 쉽습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왕과 군대의 이미지에 비하면 극단적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강하다고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연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면서 그 연약함이 마지막 모습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회복을 자신의 일로 삼으십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날카로운 날들이 달린 새 타작 썰매로 만들었다. 너희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부수고, 언덕들을 겨처럼 만들 것이다.」이사야 41:15 · 두루새김
불과 한 절 전까지 벌레 같았던 야곱이 이제는 산을 부수는 타작 썰매가 됩니다.
여기서 산과 언덕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나 통치자를 뜻하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 등장한 이스라엘의 적대 세력들과 연결하면, 이 이미지가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강력한 장애물의 무너짐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끝없는 폭력이나 정복의 권한을 주는 말씀으로 읽는 것은 본문을 넘어섭니다. 핵심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백성을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신다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들을 공중에 날리면 바람이 실어 가고 폭풍이 흩어 버릴 것이다. 너희는 나 여호와야훼 때문에 기뻐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인 나를 자랑할 것이다.」이사야 41:16 · 두루새김
이 장면의 끝은 승리한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으면 아직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결국 강한 적을 물리치고 자신의 백성을 더 강하게 만드는 일인가요?
다음 단락은 그보다 다른 모습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여러분을 구해 내시는 분」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고대 이스라엘에서 친족이 맡던 역할을 생각해야 합니다. 레위기 25:25에서는 어떤 사람이 가난 때문에 자기 소유지를 팔면 가까운 친족이 그것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 룻기 4장에서도 가까운 친족이 가족의 권리와 소유지를 회복하는 문제를 맡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어려움과 무관한 외부인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행동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밝히십니다. 타작 썰매는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농기구로, 아래쪽에 날카로운 돌이나 금속 날을 붙여 곡식의 낟알과 줄기 등을 분리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
「가난하고 먹고살 것이 없는 사람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고, 그들의 혀는 갈증으로 바싹 말랐다. 나 여호와야훼가 그들에게 응답하겠다.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이사야 41:17 · 두루새김
16절과 17절 사이에서 장면이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적을 제거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이들을 「가난하고 먹고살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고난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지만, 본문 자체가 이들을 특정한 정치적 집단으로 한정하지는 않습니다. 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겪는 부족함이 앞에 놓입니다.
먼저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버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다음에야 물을 공급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말씀은 9절의 「내가 너희를 선택했고 버리지 않았다」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선언된, 선택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이제 구체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향한 돌보심으로 나타납니다.
광야 전체가 달라지다
「내가 헐벗은 산등성이에 강물이 흐르게 하고, 골짜기 한가운데 샘물이 솟게 하겠다. 광야를 연못으로, 메마른 땅을 물이 솟는 곳으로 만들겠다.」이사야 41:18 · 두루새김
본문은 여러 지형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어느 곳에도 물이 부족하지 않은 풍경을 그립니다. 산과 골짜기, 광야와 메마른 땅이 모두 생명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내가 광야에 백향목과 아카시아, 도금양과 기름나무를 심겠다. 사막 평원에 사이프러스와 느릅나무와 회양목을 함께 심겠다.」이사야 41:19 · 두루새김
물만 있는 땅이 아니라 숲을 이룰 수 있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단순히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됩니다.
16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부서진 산들을 공중에 날리는 이로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이 강물이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20절에 이르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밝혀집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함께 보고 알고, 마음에 새기며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손이 이 일을 이루었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인 내가 이것을 창조했다는 것을 말이다.」이사야 41:20 · 두루새김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가 누구의 행동인지 이해하기를 바라십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어 유지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사람과 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롭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을 내셨습니다(출애굽기 17:1–7). 이사야 41장은 그 이미지를 더욱 넓힙니다. 이제 한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광야 전체가 물을 품은 땅으로 바뀝니다. 19절에 나오는 나무들이 어떤 종류를 가리키는지는 일부 불확실합니다. 특히 뒤쪽의 나무 이름들은 히브리어가 현대의 어느 나무에 정확히 대응하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열린 법정 — 미래를 말하고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가
21절에서 하나님은 또다시 재판의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야곱의 왕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주장을 내놓아라. 너희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가져와라.」이사야 41:21 · 두루새김
처음에는 해안 땅들과 민족들이 불려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우상들 자체가 시험대에 오릅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고, 자기 힘으로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야곱의 왕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그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 그들의 진정한 왕이시라는 선언입니다.
그 왕이 우상들에게 증거를 요구하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내놓고 우리에게 알려 보아라. 이전 일들이 무엇인지 알려 보아라.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그 일들의 결말을 알아보겠다. 아니면 다가올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어라.」이사야 41:22 · 두루새김
이 요구를 단순히 미래를 맞히는 능력에 대한 시험으로만 이해하면 본문의 초점을 놓치기 쉽습니다. 여기에는 과거와 미래가 함께 등장합니다.
핵심은 사건 하나를 우연히 맞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그 의미와 결과를 밝힐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쪽에서 정복자를 일으킨 이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도 역사를 설명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23절에서는 시험이 더욱 직접적으로 바뀝니다.
「뒤에 닥칠 일들을 알려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인정하겠다. 좋은 일이든 해로운 일이든 해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놀라며 함께 지켜보겠다.」이사야 41:23 · 두루새김
이것은 단순히 우상이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든 해로운 일이든 실제로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의 판정이 내려집니다.
「보아라, 너희는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못하고, 너희가 하는 일도 아무 가치가 없다. 너희를 선택하는 자는 역겨운 자다.」이사야 41:24 · 두루새김
8–9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그들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이 우상을 선택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이 먼저 선택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관계입니다. 우상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에 도움을 기대하는 관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너희가 하는 일도 아무 가치가 없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아파는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다른 히브리어 형태와 연결하거나 본문을 고쳐 읽어 ‘아무것도 없음’에 가까운 뜻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전해진 자음을 유지하면서 덧없음을 나타내는 ‘입김’으로 옮기는 읽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은 우상에게 실제적인 능력이 없다는 앞의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북쪽에서 일으킨 사람과 예루살렘에 전해지는 소식
「내가 북쪽에서 한 사람을 일으켰고, 그가 왔다. 해 뜨는 쪽에서 온 그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는 통치자들을 진흙처럼 밟고 지나가며, 옹기를 만드는 사람이 진흙을 밟듯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이사야 41:25 · 두루새김
이제 처음 등장했던 정복자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납니다.
강력한 지배자로 군림하던 통치자들이 이제 옹기를 만드는 사람이 다루는 재료처럼 묘사됩니다. 장인들은 형상을 만들기 위해 금속을 정성껏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권력자들은 진흙처럼 다루어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다」라는 표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정복자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그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었거나 개인적인 신앙으로 돌아섰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45:4–5에서는 하나님이 고레스에게 자신을 알지 못했어도 그를 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두 본문을 함께 읽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하나님의 행동임을 누가 미리 알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려서 우리가 알게 했느냐? 누가 미리 알려서 우리가 『그가 옳다』 하고 말하게 했느냐? 아무도 알리지 않았고,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다. 너희 말을 들은 사람도 없다.」이사야 41:26 · 두루새김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막연한 종교적 권위가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하고 그것에 관해 참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침묵과 대조되는 것이 27절입니다.
「내가 맨 먼저 시온에게 『보아라, 그들이 여기 있다』 하고 알렸다. 내가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를 보내겠다.」이사야 41:27 · 두루새김
이 대목은 40장에서 시작된 선포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41장에서는 그 기쁜 소식의 배경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민족들을 뒤흔드는 사건이 단순히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재난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회복을 위해 역사 속에서 일으키시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장은 기쁜 소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두 절에서 다시 침묵하는 우상들에게 시선이 돌아갑니다.
「내가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들 가운데 조언할 자도, 내가 물으면 대답할 자도 없었다.」이사야 41:28 · 두루새김
하나님은 마치 법정에서 증인을 찾는 재판관처럼 살펴보십니다. 첫머리에서 민족들에게 말하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들이 의지하는 신들에게서 아무런 답변도 얻지 못하십니다.
「보아라, 그들은 모두 헛되며, 그들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금속을 부어 만든 그들의 우상들은 바람처럼 텅 비어 있다.」이사야 41:29 · 두루새김
금속으로 만들었으니 무게도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도록 못까지 박았으니 눈앞에서 굳건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는 단단한 형상이지만, 실제로 역사를 설명하거나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의 법정은 이렇게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에서는 동쪽에서 일어난 사람이라고 했는데, 25절에서는 북쪽과 해 뜨는 쪽이 함께 언급됩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인물을 가리킨다고도 읽을 수 있지만, 같은 정복자의 출현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묘사한 것으로 읽을 근거도 있습니다. 특히 2절의 「일으키고」와 25절의 「일으켰고」는 같은 행동을 나타내고, 왕들과 통치자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이 나란히 나타납니다. 고레스를 염두에 두면 동쪽은 페르시아의 위치와 연결되고, 북쪽은 그 세력이 활동하거나 바벨론에 접근하는 방향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정확한 군사 진격로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두 방향을 특정한 역사적 경로에 하나씩 맞출 수는 없습니다. 27절의 원문에서는 첫머리에 동사가 없이 ‘처음’과 ‘시온에게’라는 말이 놓여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내가 맨 먼저 시온에게」와 「알렸다」로 옮겨, 하나님이 먼저 알리셨다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여기 있다」의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정복자의 출현과 관련된 사건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귀환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어느 한 가지 사건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무엇을 붙들 것인가
특히 본문은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뒤집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스스로 강해진 다음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여전히 약한 동안에 먼저 손을 붙드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움은 사람이 원하는 모든 일이 즉시 이루어진다는 보장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이사야 41장은 구체적인 역사적 회복을 선포하는 예언이며, 모든 개인의 삶에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 성공의 공식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단단한 금속 우상이 아닙니다.
목마른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된 땅입니다.
아무것도 자라지 못할 것 같던 곳에 여러 나무가 함께 서 있습니다. 예전에는 물을 찾아 헤매야 했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생명을 이어 갑니다.
사람들이 못으로 고정해 놓은 신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붙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사람들을 위해 광야에 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보는 사람들이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나 여호와야훼의 손이 이 일을 이루었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인 내가 이것을 창조했다는 것을 말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