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버려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길
예루살렘에는 아직 성전이 서 있습니다. 왕도 있고, 높은 관리들도 있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약속의 땅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왕을 잃고, 집과 재산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누가 더 나은 처지에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현실만으로 판단한다면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더 나아 보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고향과 성전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로잡혀 간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패배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무화과 두 바구니를 보여 주시며 그 판단을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지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로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려는 것은 빼앗긴 삶의 자리뿐입니까, 아니면 그분을 향한 사람의 마음까지입니까?
이 장의 중심에는 무화과의 품질보다 그것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이 있습니다.
성전 앞에 놓인 두 바구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의 아들인 유다 왕 여고냐와 유다의 높은 관리들, 기술자들과 대장장이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뒤였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내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성전 앞에 무화과 두 바구니가 놓여 있었습니다.예레미야 24:1 · 두루새김
환상은 매우 평범한 물건에서 시작합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던 과일입니다. 포도나 올리브와 함께 그 땅의 농업과 풍요를 보여 주는 열매이기도 했습니다. 신명기 8:8에서는 약속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농산물 가운데 무화과가 언급됩니다.
성전 앞이라는 장소는 우연한 배경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두 바구니에 대한 판정이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는 장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6:2에는 땅에서 처음 거둔 것을 바구니에 담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곳으로 가져오는 규정이 나옵니다. 따라서 성전 앞의 무화과 바구니는 처음 거둔 것을 바치는 관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예레미야 24장은 이 바구니들이 실제로 바쳐진 제물이라고 밝히지 않으므로, 제사에 쓰인 바구니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건은 기원전 597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사람들이 사로잡혀 간 일에 해당합니다. 열왕기하 24:10–17에 그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고냐는 22장에서 고니야라고 불렸던 왕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과 동일한 인물입니다.
그가 끌려간 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를 유다 왕으로 세웠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24장의 환상은 유다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 이미 한 차례 큰 타격을 받고 왕과 주요 인물들이 사로잡혀 간 상황에서 주어집니다.
왕과 높은 관리들뿐 아니라 기술자들과 대장장이들도 끌려갔습니다. 나라의 통치와 기술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바벨론으로서는 정복한 나라의 주요 인력과 자원을 자기 제국으로 옮기는 일이었지만, 유다 사람들에게는 왕국의 중심부가 떨어져 나가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예레미야 24장은 그들의 생각을 직접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역사적 상황을 다루는 에스겔 11:15에서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사로잡혀 간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으며 자신들에게 그 땅이 주어졌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그들에게 사로잡혀 가는 일은 하나님의 보호에서 멀어졌다는 증거처럼 보였고, 땅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자신들이 여전히 정당한 소유자라는 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환상은 바로 그런 판단을 뒤집습니다.
한 바구니에는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아주 좋은 무화과가 있었습니다. 다른 바구니에는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무화과가 있었습니다.예레미야 24:2 · 두루새김
먼저 익은 무화과는 특별히 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열매였습니다. 이사야 28:4에서도 처음 익은 무화과가 발견하자마자 먹고 싶어지는 열매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질문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내게 물으셨습니다.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내가 대답했습니다. 「무화과가 보입니다. 좋은 무화과는 아주 좋고, 나쁜 무화과는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습니다.」예레미야 24:3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예레미야 1:11–1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물으셨고, 예레미야는 자신이 본 것을 대답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정확하지만 아직 환상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무화과의 상태는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무화과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하나님이 밝히십니다.
사람들도 포로들과 예루살렘 주민의 처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은 현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십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을 하나님이 좋은 무화과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칼데아 사람들의 땅으로 보낸 유다의 포로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좋게 보아 주겠다. 그들이 잘되도록 돌보겠다.」예레미야 24:5 · 두루새김
하나님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좋은 무화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좋은 무화과」와 그들을 「좋게 보아 주겠다」는 표현이 서로 맞물립니다. 본문은 포로들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가보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시고 무엇을 이루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중요한 것은 심판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으로 「보낸」 분이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에서는 바벨론 왕이 그들을 「사로잡아 간」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역사적 사건의 직접적인 행위자는 바벨론 왕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정복 행위가 모두 선하고 정당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인간이 행한 전쟁과 포로로 끌고 간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을 이끄시는 뜻이라는 관점에서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심판의 사건을 포로들에게 결국 좋은 일을 이루시는 방향으로 이끄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로잡혀 간 사람들은 고향을 잃었습니다. 가족과 생업의 관계가 끊어졌을 수 있으며, 낯선 제국의 권력 아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고통은 실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통을 좋은 경험이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신 뒤에도 계속 바라보시며, 그들이 잘되도록 돌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무화과라는 이름은 사로잡혀 가는 일이 즐거운 일이었다는 평가가 아니라, 사로잡혀 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열어 두신 미래를 가리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로 「좋다」를 뜻하는 토브가 이 단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원문에서는 무화과를 평가하는 데 사용된 말이 하나님이 포로들에게 행하실 일의 방향을 설명하는 말로 이어집니다. 두루새김은 그 뜻을 「그들이 잘되도록 돌보겠다」라고 풀어 줍니다.
무너뜨리시던 하나님이 이제 세우고 심으십니다
「내가 그들이 잘되도록 지켜보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들을 세우고 무너뜨리지 않으며, 심고 뽑아 버리지 않겠다.」예레미야 24:6 · 두루새김
포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던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삶도 더 이상 이전처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멀리 떠났다고 해서 자신의 시야에서도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내 눈을 그들 위에 두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눈길은 단순한 관찰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살피신다는 표현이 심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세우시고 심으시려는 관심입니다.
이 약속은 에스겔 11:15–17과 나란히 읽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은 포로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흩어진 나라들에서도 자신이 그들에게 성소가 되어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던 장소에서 쫓겨난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에게서도 쫓겨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6절에는 이보다 더 깊은 반전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10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여러 민족과 왕국 위에 세우시며 뽑고 무너뜨리고 멸망시키고 파괴하며 세우고 심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언자의 사명은 부수는 일과 세우는 일, 뽑는 일과 심는 일이라는 대조로 표현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4:6에서는 그 동사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제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뽑아 버리지 않으시고 심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맡은 사명의 두 방향 가운데 회복의 방향이 포로들을 위해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입니다.
고향에서 살아갈 기반을 빼앗겼고, 조상들이 소유하던 땅에서도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심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뿌리 뽑힌 식물은 스스로 이전 자리로 돌아가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옮겨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자신이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돌아오는 것과 다시 살아갈 기반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집터로 돌아왔다고 해서 집이 저절로 세워지지는 않습니다. 황폐해진 땅에 발을 디뎠다고 해서 공동체가 곧바로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일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삶까지 내다보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약속을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다시 땅에 심으시는 것에 더하여, 그들 안에 새로운 것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새로운 땅만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을 주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나를 알고 내가 여호와야훼임을 깨닫는 마음을 주겠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들이 온 마음으로 내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4:7 · 두루새김
앞에서는 포로들이 잃어버린 땅과 삶을 회복하는 일이 약속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조상들에게 행하신 일도 전해 들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뒤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마음」은 사람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뜻을 정하는 내면의 중심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그분께 응답할 수 있도록 사람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을 고쳐 먹는 일이 먼저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시는 일이 먼저 선언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시고, 사람들은 온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이 두 행동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응답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로 제시됩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레위기 26:12와 출애굽기 6:7에서도 같은 관계가 선언됩니다.
포로들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이전과 같은 불신과 불순종 속에서 살아간다면, 땅을 되찾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의 회복과 더불어 마음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신명기 30:3–6과 깊이 연결됩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조상들의 땅으로 데려오시며, 그들이 온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도록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는 이 기대가 새 언약의 약속으로 더욱 발전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백성의 마음에 새기시고, 그들이 자신을 알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11:19–20과 36:26–27에서도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단순히 잃어버린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삶을 무너뜨렸던 문제까지 새롭게 다루시는 일입니다.
이 관계는 강제로 끌려가는 포로의 경험과도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포로들은 바벨론 왕의 권력에 의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그분을 아는 마음과 온 마음의 응답으로 묘사됩니다.
바벨론 왕은 사람들의 몸을 고향에서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는 이유나 설명을 나타내는 키가 사용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그들이 온 마음으로 내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옮겨 이유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을 「너희가 먼저 온 마음으로 돌아오면, 그 대가로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겠다」라는 조건문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마음을 주시는 일과 사람들의 돌이킴 사이에 정확히 어떤 시간적 순서가 있는지도 이 한 절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두 사건이 하나의 회복 안에 함께 있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았다는 것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의 높은 관리들, 예루살렘의 남은 사람들, 곧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이집트 땅에 사는 사람들을 너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저 무화과처럼 만들겠다.」예레미야 24:8 · 두루새김
좋은 무화과로 불린 사람들은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나쁜 무화과로 불린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루살렘에 남은 이들도 있고, 이집트에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환상은 단순히 외국으로 떠난 사람과 고향에 남은 사람을 선악으로 나누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좋은 무화과에 해당하는 특정한 포로 공동체와, 앞으로 심판을 받을 것으로 선언된 시드기야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대조하는 예언입니다.
그렇다고 양쪽에 속한 모든 개인의 도덕적 상태나 마지막 운명이 이 환상에서 빠짐없이 결정되었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역사적 공동체들을 집단적으로 묘사하는 예언입니다.
겉으로 보면 왕국은 아직 계속되고 있습니다. 왕좌가 비어 있지 않고, 성전도 남아 있으며, 예루살렘에도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아직 그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려 세상의 모든 나라가 그들을 보고 몸서리치게 하겠다.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내는 모든 곳에서 모욕을 당하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와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 사람들이 남을 저주할 때 들먹이는 본보기가 되게 하겠다.」예레미야 24:9 · 두루새김
여기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는 사람들이 어떤 비참한 처지를 설명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경고할 때 그들을 예로 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28:37의 언약을 어긴 데 따른 저주와 이어집니다. 그곳에서도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가운데 놀라움과 조롱과 이야기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단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유다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이 그 언약을 저버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드러내는 예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칼과 굶주림과 전염병을 보내겠다. 그들과 그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그들이 모두 멸망하여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예레미야 24:10 · 두루새김
칼과 굶주림과 전염병은 예레미야서에서 전쟁과 심판을 묘사할 때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재앙들입니다. 칼은 전쟁의 폭력을, 굶주림은 포위와 살아갈 기반이 무너지는 일을, 전염병은 공동체를 덮치는 죽음의 위협을 보여 줍니다.
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땅에서 그들을 쫓아낼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심판 선언은 그 집단이 더 이상 자신들이 안전하게 살아남을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으며, 그 땅에서의 삶 자체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적 경고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한쪽은 고향에서 쫓겨났지만 다시 심어질 것입니다.
다른 한쪽은 고향에 남아 있지만 결국 뽑혀 나갈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위치와 하나님이 선언하신 미래가 서로 반대입니다.
조금 더 깊이
또한 본문은 이집트에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주 경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42–44장에는 훗날 이집트로 이동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이 환상의 배경에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모두 멸망하여 없어질 때까지」라는 말씀을 당시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이 예외 없이 모두 죽었다는 역사적 통계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열왕기하 25:12와 예레미야 40장에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맺음말 — 두 바구니는 여전히 성전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보았던 두 바구니의 차이는 지금 누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시려는가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알 수 있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난을 당하는 모든 사람이 특별히 선하고, 형편이 잘 풀리는 사람은 악하다는 뒤집힌 공식이 아닙니다. 본문은 새로운 공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겉으로 드러난 형편을 근거로 하나님의 판단을 함부로 단정하는 일을 경계하게 합니다.
성전 앞에 놓인 좋은 무화과는 아직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집도 다시 세워지지 않았고, 뿌리내릴 땅도 되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들의 미래는 이미 새로운 방향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떠난 땅에서 하나님의 눈길도 함께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낯선 바벨론 땅에 있는 그들을, 하나님은 잘되도록 지켜보겠다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