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27장 · 서원과 바친 것

하나님께 드린 것을 다시 가져올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장 좋은 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양을 내놓을 때가 되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다른 양도 충분히 좋은 것 같았습니다. 처음 약속한 양은 남겨 두고 다른 양으로 바치면 안 될까요?

레위기 27장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그렇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다른 양으로 바꾸었다면, 처음 약속한 양과 새로 가져온 양이 모두 거룩한 것이 됩니다.

왜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이처럼 복잡한 규칙이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에서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자발적인 헌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27장은 전혀 다른 문제를 묻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뒤에도 그것을 여전히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습니까?

앞 장은 축복과 심판, 그리고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26:46에는 시나이산에서 주어진 규정들을 정리하는 결론까지 등장합니다. 그런데 레위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서원과 거룩하게 구별한 재산, 영구히 바친 것과 십일조에 관한 규정들을 덧붙입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배웠습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약속이라고 해서 그 약속을 지키는 방식까지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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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두고 서원하면 왜 돈으로 평가하는가

레위기 27:1–8 본문 →

하나님께 사람을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으로 정해진 금액을 여호와야훼께 바치기로 특별한 서원을 하면,』」레위기 27:2 · 두루새김

사람에 대해 특별한 서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 자체를 성소에 바친다는 뜻일까요? 성소에서 봉사하게 하겠다는 약속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일정한 금액을 바치겠다는 뜻일까요?

이어지는 원문 표현에는 사람과 그 사람에 대해 정해진 금액이 함께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사람의 값으로 정해진 금액을 여호와야훼께 바치기로」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하나님께 사람을 제물로 죽여 바치겠다는 뜻으로 곧바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뒤이어 사람을 제사장 앞에 세워 금액을 정하는 규정을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사람을 죽여 바치는 절차가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서원한 사람이 반드시 성소에서 평생 봉사하게 된다고도 밝히지 않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고 실제로 그를 성소 봉사에 맡긴 사건이 사무엘상 1:11, 24–28에 나오지만, 그 이야기를 레위기 27장의 모든 서원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이 분명히 규정하는 것은 사람과 관련된 특별한 서원을 정해진 금액에 따라 지키는 방식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정하는 표인가, 서원의 금액을 정하는 표인가

3–7절에는 네 가지 나이 구간과 남녀에 따른 금액이 나옵니다.

| 나이 구간 | 남자 | 여자 | | --- | --- | --- | | 태어난 지 한 달부터 다섯 살까지 | 은 5셰켈 | 은 3셰켈 | |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 은 20셰켈 | 은 10셰켈 | | 스무 살부터 예순 살까지 | 은 50셰켈 | 은 30셰켈 | | 예순 살 이상 | 은 15셰켈 | 은 10셰켈 |

레위기 27:3–7. 나이 구간의 경계일이 어느 구간에 포함되는지는 본문이 명확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람의 도덕적 가치나 생명의 존엄성을 설명하는 문맥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 관한 특별한 서원을 지킬 때 적용할 금액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무 살부터 예순 살까지의 남자에게 은 50셰켈, 여자에게 은 30셰켈을 정했다고 해서 남자의 생명이 여자보다 더 존귀하다는 신학적 선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남녀에게 서로 다른 금액을 정한 사실 자체를 지워서도 안 됩니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이나 당시 사회의 생산 활동과 관련하여 이러한 금액 차이를 이해하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가장 높은 금액은 성인 연령대에 주어지고, 어린아이와 나이 든 사람에게 정해진 금액은 낮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 금액이 반드시 일해서 생산할 수 있는 양을 기준으로 결정되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금액의 비율도 모든 연령대에서 일정하지 않습니다. 성인 남녀의 금액은 50과 30이지만,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는 20과 10이며, 예순 살 이상은 15와 10입니다.

이 차이를 하나의 단순한 생산성 공식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27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레위기 27장의 금액표는 그 진술을 대신하여 인간 가치의 높고 낮음을 정하는 표가 아닙니다. 다만 이 구별은 레위기 27장의 성별에 따른 차이를 오늘날의 평등 개념과 아무런 긴장이 없다고 설명하는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정해진 금액을 낼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서원한 사람이 가난하여 정해진 금액을 낼 수 없으면, 그를 제사장 앞에 세워야 한다. 제사장은 서원한 사람이 낼 수 있는 만큼 금액을 정해야 한다.』」레위기 27:8 · 두루새김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베푸는 호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 안에 들어 있는 규정입니다.

원문에서는 8절의 대명사들이 누구를 제사장 앞에 세우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습니다. 서원의 대상이 된 사람인지 서원한 사람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서원한 사람이」에 이어 「그를 제사장 앞에 세워야 한다」라고 옮겼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서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해진 금액을 낼 수 없는 사람에게 반드시 그 금액 전부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제사장은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맡는 사람일 뿐 아니라, 서원을 지키는 데 필요한 값의 계산과 판단을 맡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개인의 자발적인 헌신이 공동체의 공적인 질서 안에서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미루지 말고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서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전도서 5:4–5도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지 않는 일보다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자발적인 약속이라고 해서 가볍게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양을 나쁜 양으로 바꾸어도, 나쁜 양을 좋은 양으로 바꾸어도 안 된다

레위기 27:9–13 본문 →

한 번 거룩하게 된 것은 사람의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9절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가축을 다룹니다.

「『여호와야훼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가축이라면, 그 가운데 여호와야훼께 드린 것은 무엇이든 거룩한 것이 된다.』」레위기 27:9 · 두루새김

그 가축은 더 이상 일반적인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처분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등장합니다.

「『그 가축을 다른 가축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도,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도 바꾸지 마라. 만일 다른 가축으로 바꾸면, 원래 가축과 대신 내놓은 가축이 둘 다 거룩한 것이 된다.』」레위기 27:10 · 두루새김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바꾸는 일이 금지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좋은 가축을 바치기로 해 놓고 나중에 가치가 떨어지는 가축을 대신 내놓는다면, 약속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반대의 경우도 금지합니다.

왜 더 좋은 가축을 바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까요? 이 규정의 핵심은 제물의 품질을 높이는 일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대상을 마음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이라면 더 좋은 것으로 바꾸거나 다른 것으로 대신할 권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기로 구별된 가축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일방적인 결정에 맡겨진 물건이 아닙니다.

바꾸려 했던 사람은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만 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두 마리 모두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다른 가축으로 바꾸어 처음의 약속을 취소하려 했지만, 그 행동으로 오히려 두 마리 모두를 하나님께 구별한 결과가 되는 셈입니다.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가축은 어떻게 하는가

11–13절은 다른 경우를 다룹니다.

「『여호와야훼께 제물로 바칠 수 없는 부정한 가축이라면, 그 가축을 제사장 앞으로 데려가야 한다.』」레위기 27:11 · 두루새김

그런 동물은 제단에 올려 희생 제물로 바치는 대상이 아니므로, 제사장이 그 값을 정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가축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 살펴 값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친 사람이 다시 되사려면 정해진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다른 가축으로 바꾸지 못하게 한 규정과 달리 되사는 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공짜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방식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이 규정이 모든 제물의 결함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레위기 22장에서는 제단에 바칠 가축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따로 규정했습니다. 이곳의 관심은 제물의 몸이 제단에 바치기에 알맞은지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구별한 가축을 마음대로 바꾸는 행위를 금지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집을 다시 되찾으려면

레위기 27:14–15 본문 →

집을 바친다는 것의 실제적인 의미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야훼께 바치면, 제사장은 그 집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 살펴 값을 정해야 한다. 제사장이 정한 값이 그 집의 값으로 확정된다.』」레위기 27:14 · 두루새김

즉,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실제 재산의 가치와 소유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은 그 집을 바친 사람이 되찾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 집을 바친 사람이 자기 집을 되사려면, 제사장이 은으로 정한 값에 그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해 내야 한다. 그러면 그 집은 다시 그의 것이 된다.』」레위기 27:15 · 두루새김

이 말은 집을 바쳤다는 행위가 단순히 마음속의 헌신이나 상징적인 약속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집을 다시 자기 소유로 삼으려면 정해진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 바친 집을 되찾는 데 추가 금액이 필요한지는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벌금이나 약속을 어긴 대가로 내는 돈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한 재산은 아무런 대가 없이 다시 개인 소유로 돌릴 수 없습니다.

한편 이 규정은 바친 집을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정해진 값과 금액을 통해 소유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모든 재산을 집과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특히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의 경우에는 희년이라는 또 다른 규정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 밭을 바쳐도 희년의 법이 사라지지 않는다

레위기 27:16–25 본문 →

밭의 가격은 수확량이 아니라 씨앗의 양에서 시작된다

16절은 새로운 값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집안에 속한 밭의 일부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야훼께 바치면, 그 밭에 뿌리는 씨앗의 양에 따라 값을 정해야 한다. 보리 씨앗 한 호메르를 뿌리는 밭의 값은 은 오십 셰켈이다.』」레위기 27:16 · 두루새김

여기서 호메르는 부피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따라서 밭의 크기를 오늘날의 넓이 단위로 직접 표시한 것이 아니라, 그 밭에 필요한 씨앗의 양으로 값의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밭에서 실제로 얼마나 많은 곡식을 수확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방식과 구별됩니다.

그런데 밭의 값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영향을 미칩니다.

바로 희년입니다.

17절은 「희년이 되는 해에」 밭을 바치면 앞에서 정한 값을 그대로 적용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18절은 희년이 지난 뒤에 바쳤다면 다음 희년까지 남은 햇수에 따라 값을 줄이라고 합니다.

레위기 25장에서 땅을 사고팔 때에는 희년까지 남은 수확 가능한 기간에 따라 가격을 정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밭을 바칠 때에도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고려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은 단순히 영구적으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그 땅을 둘러싼 거래와 권리의 기간을 제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바치는 밭의 값 역시 그 시간적 한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특별한 헌신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땅의 질서를 마음대로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밭과 돈을 주고 산 밭

16–21절은 「자기 집안에 속한 밭」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치는 경우를 다룹니다.

여기서 자기 집안에 속한 밭이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에 해당합니다. 이 밭을 바친 사람이 되찾고 싶다면, 정해진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되살 수 있습니다(19절).

그러나 20–21절에서는 더 엄중한 결과가 나옵니다.

그가 그 밭을 되사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린 상황이 되면, 더 이상 되살 수 없으며, 희년에 그 밭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의 땅이 됩니다.

레위기 25장은 가난 때문에 팔린 조상의 땅이 희년에 돌아와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27장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친 조상의 땅이 특정한 경우에는 희년에 제사장들에게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두 경우의 차이는 땅을 처분한 이유와 법적 지위에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팔린 땅에는 가족이 물려받은 땅을 회복하는 규정이 적용됩니다. 반면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친 땅에는 그 행위가 만들어 낸 별도의 권리와 제한이 적용됩니다.

특히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은 개인 한 사람의 현재 재산일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생계와 상속에도 연결됩니다. 그러한 땅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치는 일은 가볍게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들인 밭은 왜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가

22–24절에서는 다른 경우가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집안에 속한 밭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사들인 밭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야훼께 바치면,』」레위기 27:22 · 두루새김

이 경우에는 제사장이 희년까지 남은 기간에 따라 금액을 계산하고, 그 금액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2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희년이 되면 그 밭은 그가 밭을 샀던 상대에게, 곧 그 땅을 본래 자기 집안의 땅으로 가진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기 27:24 · 두루새김

밭을 사들인 사람이 희년 이후의 영구적인 소유권까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희년까지 그 밭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범위 역시 자신이 가진 권리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을 돈을 주고 샀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명분으로 원래 가족이 희년에 돌려받을 권리까지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자신의 권리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까지 처분할 수 있는 허가가 아닙니다.

25절은 이러한 모든 값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셰켈의 기준을 정합니다.

「『모든 값은 성소의 셰켈을 기준으로 정해야 한다. 한 셰켈은 이십 게라다.』」레위기 27:25 · 두루새김

이것은 금액을 정할 때 마음대로 고른 단위에 맡기지 않고 일정한 기준을 사용하도록 하는 규정입니다. 서원한 사람의 의도가 자발적이더라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는 금액은 공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져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히브리어는 두 조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 다른 사람에게 파는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완전히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뒤의 조건을 「그 밭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면」이라고 옮겼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모든 거래 과정을 단정적으로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자신의 권리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까지 처분할 수 있는 허가가 아니라는 원칙은 신약의 마가복음 7:9–13에서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신 「고르반」의 관행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 드렸다는 종교적인 선언을 부모를 돌볼 책임을 피하는 데 이용하는 행위를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십니다. 다만 그 관행의 구체적인 규칙을 레위기 27장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이라면 다시 바칠 수 없다

레위기 27:26–27 본문 →

맏배는 왜 서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그러나 가축 가운데 어미가 처음 낳아 여호와야훼께 속한 것은, 아무도 따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쳐서는 안 된다. 소든 양이든 염소든 그것은 여호와야훼의 것이다.』」레위기 27:26 · 두루새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바치겠다는데 왜 금지하시는 것일까요? 어미가 처음 낳은 새끼는 특별한 것이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명령은 어미가 처음 낳은 새끼를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3: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태어난 것을 자신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은 이집트의 처음 태어난 것들에게 재앙이 내렸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과 연결됩니다(출애굽기 13:11–15).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축 가운데 어미가 처음 낳은 새끼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특별한 자발적 헌신인 것처럼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 가축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가 먼저 있기 때문입니다.

서원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과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하도록 정해진 것은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부정한 가축의 맏배는 어떻게 하는가

27절은 부정한 가축의 경우를 다룹니다.

그것은 정해진 값에 그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되찾을 수 있습니다. 되찾지 않으면 정해진 값에 팔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3:13에는 나귀가 처음 낳은 새끼를 어린양으로 대신하여 되찾는 규정이 나옵니다. 레위기 27:27은 부정한 가축을 정해진 값과 추가 금액으로 되찾거나 팔 수 있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두 본문은 처음 태어난 새끼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공통된 전제 아래 서로 다른 처리 규정을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정한 가축에 어떤 방식이 적용되는지는 각 규정의 범위를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미 속한 것이라고 해서 모든 경우에 실제 동물을 제단에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물로 적합하지 않은 동물은 정해진 값을 통해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물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28절에 이르면 되찾을 수 있는 길조차 허용되지 않는 전혀 다른 종류의 바침이 등장합니다.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 — 영구 봉헌의 무거운 의미

레위기 27:28–29 본문 →

일반적인 성별과 영구 봉헌은 다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 가운데서 여호와야훼께 영구히 바친 것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자기 집안의 밭이든, 팔아서도 안 되고 값을 치르고 되찾아서도 안 된다. 그렇게 영구히 바친 것은 모두 여호와야훼께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레위기 27:28 · 두루새김

지금까지 하나님께 바친 가축이나 집, 밭 가운데에는 값을 치르고 되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영구히 바친 것」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헤렘(⁨חֵרֶם⁩)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인 서원이나 거룩하게 구별하는 일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구별하여 돌이킬 수 없게 하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헤렘은 성경에서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속하여 사람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경우에는 전쟁이나 심판의 맥락에서 파괴하거나 죽임에 넘기도록 지정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을 영구 봉헌하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가

29절은 이 장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입니다.

「『영구히 바치기로 정해진 사람은 누구도 값을 치르고 풀려날 수 없다.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한다.』」레위기 27:29 · 두루새김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의 서원에 대한 2–8절의 금액을 정하는 규정과 분명히 다릅니다. 28절은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 가운데서 영구히 바치는 경우를 언급하지만, 29절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절차와 권한에 의해 죽음에 넘겨지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29절에 나타난 인간의 죽음을 오늘날 개인이 마음대로 선언하거나 실행할 수 있는 종교적 권한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의 헤렘이라는 엄중한 법과 종교 의식의 범주 안에서 읽어야 하며, 그 구체적인 적용 범위에는 본문 자체가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명령이기 때문에, 본문이 말하지 않은 권한과 절차를 함부로 보충하지 않는 신중함이 더욱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는 28절과 29절을 긴밀하게 연결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게 바쳐진 경우를 설명하는 규정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원문에서 두 절에 같은 헤렘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팔거나 되찾을 수 없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다른 하나는 29절을 단순한 개인 서원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심판이나 전쟁의 상황에서 파괴하도록 정하신 사람을 가리키는 규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6–7장과 사무엘상 15장에 등장하는 헤렘의 쓰임이 이러한 읽기의 배경이 됩니다. 따라서 어느 범위의 사람에게, 누가 어떤 근거로 헤렘을 선언할 수 있었는지를 이 구절 하나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열 번째 짐승은 좋은지 나쁜지 고를 수 없다

레위기 27:30–34 본문 →

십일조는 서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속한다

「『땅에서 거둔 것의 십일조는, 곡식이든 나무 열매든 모두 여호와야훼의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야훼께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다.』」레위기 27:30 · 두루새김

십일조는 누군가 특별히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만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나는 곡식과 나무의 열매 가운데 정해진 몫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들에게 돌아가는지는 다른 규정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민수기 18:21–24에서는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레위 사람들의 몫으로 주어집니다. 신명기 14:22–29에는 십일조를 절기와 공동체의 식사, 레위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과 연결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이 본문들 사이의 세부적인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에는 해석상의 문제가 있지만, 레위기 27장의 관심은 십일조가 누구에게 속한 것으로 구별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되찾거나 바꾸려 할 때 어떤 규칙을 적용하는지에 있습니다.

31절에서는 곡식과 열매에 해당하는 십일조의 일부를 되사는 경우를 허용합니다. 그러나 그 값에 그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합니다. 앞에서 집이나 밭, 부정한 가축을 되살 때 등장했던 규정이 다시 나타납니다.

지팡이 아래로 지나가는 열 번째 짐승

32절은 마지막으로 가축의 십일조를 다룹니다.

「『소와 양과 염소의 십일조는 이렇게 바쳐라. 가축이 지팡이 아래로 지나갈 때 세어서, 열 번째 가축마다 여호와야훼께 거룩하게 구별하여라.』」레위기 27:32 · 두루새김

이것은 가축 전체를 살펴본 뒤 가장 좋은 열 퍼센트를 골라내는 방식과 다릅니다. 그것이 좋은 가축인지 나쁜 가축인지는 다음 절에서 특별히 가려서 골라내지 못하도록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가려서 골라내거나 다른 가축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만일 바꾸면, 원래 가축과 대신 내놓은 가축이 둘 다 거룩한 것이 된다. 어느 것도 값을 치르고 되찾을 수 없다.』」레위기 27:33 · 두루새김

이것은 10절에서 등장했던 원칙이 다시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로 구별한 가축을 다른 가축과 바꾸면 두 마리 모두 거룩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가지 말이 더해집니다.

가축 십일조의 경우에는 바꾼 뒤 추가 금액을 내고 되찾는 길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열 번째 가축이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순간을 결정하는 것은 주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입니다.

마지막 선언은 다시 시나이산으로 돌아간다

34절은 레위기를 다음과 같이 끝맺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도록 모세에게 내리신 명령들입니다.레위기 27:34 · 두루새김

이것은 모세가 개인적인 판단으로 정한 종교 관습의 모음이 아닙니다. 본문의 서술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장의 금액표와 되사는 규정, 십일조에 관한 법도 다른 명령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장은 매우 일상적인 사물들로 끝납니다.

집과 밭, 곡식과 열매, 가축의 무리입니다. 이것들은 특별한 종교 의식을 행할 때에만 필요한 물건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고, 먹고, 일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 두는 것들입니다.

레위기의 거룩함은 마지막까지 사람들의 실제 생활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2장에서는 제물로 바칠 가축의 온전함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십일조에 해당하는 가축을 「좋은지 나쁜지 가려서 골라내거나」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앞의 규정은 제단에 바칠 희생 제물로 적합한지를 다룹니다. 이곳은 가축의 십일조로 구별되는 대상을 정하는 방식을 다룹니다.

결론 — 지팡이 아래로 지나가는 열 번째 짐승

레위기 27:1–34 본문 →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단지 내 것을 하나님께 건네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나의 권한을 제한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레위기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가축들이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한 마리씩 지나갑니다. 목자는 그 가축들을 세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건강하고 튼튼해 보입니다.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작거나 눈에 덜 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가축을 골라 십일조로 지정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열 번째가 지나갑니다.

그 가축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됩니다. 목자는 그 가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가축들은 계속 지팡이 아래로 지나갑니다. 그리고 열 번째 가축이 지나가는 순간, 목자는 그것을 붙잡아 자기 마음대로 고르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몫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명령이 시나이산에서 주어졌다는 선언과 함께 레위기는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