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35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가난한 사람의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제단 위에서 타오릅니다. 그 향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갑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예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집회서 35장에는 제물의 향기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바칠 재물이 있지만,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기도가 구름을 뚫고 지극히 높은 분께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왜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의 기도에 이렇게 강렬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재물을 바쳐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바칠 수 없는 억울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로 향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메마른 땅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이 장의 시작과 끝을 연결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삶이 제사가 된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재앙을 늘린다는 말인가
35장은 제사에 관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두루새김 첫 절에는 해석상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재앙을 늘린다.집회서 35: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곧바로 이어지는 화목제와 곡식 제물, 찬양의 제사에 관한 설명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의 「재앙」에 해당하는 표현은 이 그리스어 본문들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차이가 어떤 전승 과정에서 생겼는지는 현재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1–5절의 흐름을 이해할 때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제물을 풍성히 바친다는 뜻을 기준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일상의 행동을 제사의 언어로 표현하다
계명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화목제를 바치는 사람이다.집회서 35:2 · 두루새김
은혜를 갚는 사람은 고운 밀가루를 바치는 사람이고,집회서 35:3 · 두루새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찬양의 제사를 바치는 사람이다.집회서 35:4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감사와 교제를 표현하는 제사였고, 고운 밀가루는 곡식 제물에 사용되었습니다. 찬양의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행위와 연결됩니다(레위기 2:1–3; 3:1–5; 7:11–15).
찬양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말이나 제사의 행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의 행동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제사의 의미를 일상생활로 넓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행동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고, 은혜에 응답하며,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일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악에서 떠나는 것이 속죄라는 말
악을 멀리하는 것은 주를 기쁘게 하는 일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은 죄를 씻는 일이다.집회서 35:5 · 두루새김
저자는 불의한 삶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저자는 단지 잘못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바꾸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행하던 악한 행동에서 실제로 돌아서라고 합니다.
앞 장에서 불의하게 얻은 재물로 바치는 제사를 비판했던 내용과 이어지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35장은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행동 자체가 어떤 예배의 의미를 갖는지 설명합니다.
빈손으로 오지 말되, 값을 치르듯 바치지 마라
왜 다시 실제 제물을 바치라고 하는가
빈손으로 주 앞에 나타나지 마라.집회서 35:6 · 두루새김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일이기 때문이다.집회서 35:7 · 두루새김
앞에서 삶의 행동들을 제사에 비유했지만, 저자는 실제 제물의 중요성도 인정합니다.
「빈손으로 주 앞에 나타나지 마라」는 명령은 출애굽기 23:15, 신명기 16:16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정해진 절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빈손으로 나타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절기와 제사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과 돌보심을 경험한 백성이 그 은혜에 응답하는 중요한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해서 구체적인 예배와 감사의 표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삶의 불의가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두 가지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제단을 기름지게 하는 제물
의로운 사람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는 지극히 높은 이 앞에 이른다.집회서 35:8 · 두루새김
「기름지게 하고」라는 말은 풍성하고 넉넉한 제물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의 번제와 여러 제사에서는 제물이 불살라지고 그 향기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8:21과 레위기 1:9에서 하나님이 제물의 향기를 기쁘게 받으시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제물의 종류나 양보다 그것을 드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밝힙니다.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드리는 제사는 받아들여질 만하며, 그 제사를 기억하게 하는 제물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35:9 · 두루새김
두루새김이 「그 제사를 기억하게 하는 제물」로 풀어 옮긴 자리의 그리스어 므네모쉬논(μνημόσυνον)은 기억하게 하는 것, 기념의 의미를 지닙니다. 레위기 2:2에서는 곡식 제물의 일부를 태워 하나님 앞에 기념이 되게 하는 제사의 표현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의 얼굴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께 영광을 돌려라. 네 손으로 처음 거둔 것을 바칠 때 그 양을 줄이지 마라.집회서 35:10 · 두루새김
무엇을 바치든 밝은 얼굴로 바쳐라. 기쁜 마음으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칠 몫으로 구별하여라.집회서 35:11 · 두루새김
10절에서 「너그러운 마음으로」라고 번역된 표현은 그리스어로 엔 아가토 옵탈모, 곧 「좋은 눈으로」라는 뜻입니다. 이는 인색하지 않고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원문의 눈에 관한 표현과 두루새김에서도 보이는 얼굴에 관한 표현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과 겉모습이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은 마지못해 제물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계명을 지키지만 마음속에서는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께 바칠 때 기쁨을 표현하라고 합니다.
지극히 높은 분께서 네게 주신 것에 맞게 그분께 바쳐라. 네 손으로 얻은 것에 맞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쳐라.집회서 35:12 · 두루새김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제물은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과 수확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제물은 이미 받은 것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신명기 16:17에서도 각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복에 따라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받습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말하는 너그러움은 자신의 처지를 무시하고 무조건 많은 재물을 바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과 자신이 실제로 얻은 것에 맞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일곱 배로 갚아 주신다는 말은 거래의 약속인가
주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시며, 네게 일곱 배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35:13 · 두루새김
그러나 이 표현을 돈을 얼마나 더 돌려받을지 계산하는 공식으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지혜문학에서 일곱이라는 수는 풍성함이나 충만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갚아 주심이 넉넉하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했는데, 14절에서는 「뇌물로 주를 달래려 하지 마라」라고 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은혜에 응답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응답을 미리 계산하고 하나님께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요구할 권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바치는 뇌물은 다릅니다.
그 차이는 제물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는 재판장이시다
제단에서 법정으로
뇌물로 주를 달래려 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집회서 35:14 · 두루새김
부당한 제사에 기대지 마라. 주께서는 재판장이며, 사람의 지위를 보고 봐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집회서 35:15 · 두루새김
이 두 절에서 제사의 언어가 재판의 언어로 바뀝니다.
뇌물은 재판의 공정성을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재판장에게 선물을 주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기대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때 재판의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재판장에게 무엇을 주었는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제물을 받으시지만, 제물 때문에 판단이 비뚤어지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낯을 보아주지 않으신다
여기서 「사람의 지위를 보고 봐주지 않으시기」라는 표현은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이나 지위 때문에 판단을 달리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고대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의 신분이나 재산, 사회적 영향력은 실제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다른 사람의 체면을 봐주느라 가난한 사람을 불리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집회서 35:16 · 두루새김
공정하게 판단한다는 것과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여지게 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자기 편에서 말해 줄 사람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치우친 특혜가 아니라 공정한 판단에 필요한 일입니다.
본문의 표현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그 사람을 옳다고 판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가난이 불리한 판결의 이유가 되지 않으며, 그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의 호소가 무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신명기 10:17–18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지위나 겉모습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며,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고아와 과부의 목소리
고아의 간청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며, 과부가 말을 쏟아 놓을 때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집회서 35:17 · 두루새김
고아와 과부는 구약에서 보호와 정의가 특별히 요청되는 사람들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가족이나 집안을 대표하여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을 잃어버린 상황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그런 상실은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법적 다툼이나 착취에 쉽게 노출되는 상황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아와 과부의 목소리가 하나님께 중요하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공동체도 그들의 목소리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 권한을 가진 사람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공동체는 그들에게 단순히 참으라고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듣고, 필요한 경우 그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들의 억울함을 들으시고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46:7–9에서도 하나님은 억압받는 사람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는 분으로 노래되십니다. 이러한 본문들과 함께 읽으면 집회서 35장의 하나님은 단순히 제사를 받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실제 삶과 사회적 관계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과부의 눈물은 누구를 향해 부르짖는가
과부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집회서 35:18 · 두루새김
그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을 향해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지 않느냐?집회서 35:19 · 두루새김
눈물의 원인을 묻는 하나님
이 장면에서 눈물은 단순히 개인적인 슬픔의 표현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과부가 고통받고 있다면 그 고통이 단순히 불행한 운명 때문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불의한 행동이 그에게 고통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가해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과부의 눈물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하나님을 공정한 재판장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됩니다. 재판장은 단순히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마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하고, 그 잘못을 일으킨 사람의 책임을 밝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눈물을 보시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눈물을 흘리게 한 불의를 향합니다.
제물의 향기와 과부의 눈물
제물의 향기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부의 눈물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 때문에 흘러나옵니다.
사람은 제물을 준비하여 성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풍성한 제물이 없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바꿀 사회적 권한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길이 닫혀 있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과부의 눈물과 하나님의 응답은 출애굽기 22:22–24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하며,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집회서 35장은 그 약속을 과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기도라는 생생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기도
기도는 어디까지 올라가는가
기꺼이 섬기는 사람은 받아들여질 것이고, 그의 간절한 기도는 구름에까지 이를 것이다.집회서 35:20 · 두루새김
여기서 「기꺼이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그분을 섬기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 앞에 이른다고 했다면, 이제는 사람의 간절한 기도가 구름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더 강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낮아진 사람의 기도는 구름을 뚫고 올라간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 가까이 이를 때까지 그는 결코 위로받지 못할 것이다. 지극히 높은 분께서 찾아 돌보실 때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35:21 · 두루새김
여기서 「낮아진 사람」은 단순히 겸손한 성품을 지닌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앞의 고아와 과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 관한 흐름을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낮은 처지에 놓이고 고통받는 사람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고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에서 하늘과 구름은 사람의 손이 쉽게 닿지 않는 높은 곳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름은 사람과 하늘 사이에 펼쳐진 거대한 경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가장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기도가 그 경계를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낮은 곳에서 시작한 기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힘을 과시하는 말이라기보다 하나님이 누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는지 보여 주는 이미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도는 왜 위로받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가
그 기도는 단순히 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아 돌보시고 올바른 판결을 내리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에게는 실제로 바로잡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이 당한 불의가 있고, 그 불의를 일으킨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사건을 살펴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위로보다 판결을 기다리는 기도
특히 21절에서 「위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다음 절의 「의롭게 심판하고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위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위로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재산을 빼앗았거나,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거나, 정당한 권리를 부정했다면 그 잘못이 바로잡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기도는 단지 슬픔을 달래 달라는 요청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앞 문장의 주어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원문에서 이어지는 가까이 다가가고, 위로받고, 물러서는 행동의 주체를 계속 기도로 이해할 수도 있고, 기도하는 사람으로 전환하여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전자를 따르면 기도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응답을 얻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는 시적인 표현이 됩니다. 후자를 따르면 낮아진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기까지 위로받지 못하고 계속 부르짖는다는 뜻이 됩니다.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18:1–8의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비유가 떠오릅니다. 과부는 자기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달라고 계속 요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끈질긴 기도에 관해 가르치십니다. 집회서 35장의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주제적 관계가 있습니다.
자비 없는 자들의 허리를 부수실 때까지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는가
지극히 높은 분께서는 의롭게 심판하고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주께서는 결코 지체하지 않고, 자비 없는 사람들을 오래 참아 주지도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허리를 부수실 것이다.집회서 35:22 · 두루새김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이 공정한 재판장이시라는 앞의 선언으로 돌아옵니다.
앞에서는 낮아진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이 찾아 돌보실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결코 지체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사람은 왜 기다려야 합니까?
저자는 그 질문에 시간표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사람이 기대하는 시점에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약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이 불의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마침내 공정하게 판결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실제로 불의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정의가 아직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현실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기도가 물러서지 않고 계속된다는 이미지 안에 그 기다림을 남겨 둡니다.
자비 없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심판
민족들에게 보복하고, 거만한 사람들의 무리를 없애며, 불의한 사람들의 왕권을 나타내는 지팡이를 부수실 것이다.집회서 35:23 · 두루새김
이 문장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히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이 아니라 불의한 힘을 꺾는 행동으로 묘사합니다.
이 지팡이는 왕의 권위와 다스리는 힘을 나타내는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팡이를 부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잘못만을 꾸짖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행사하던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이미지를 담습니다.
저자는 불의가 개인의 잘못된 행동에만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다른 사람을 억압할 수도 있고, 권력을 가진 집단이 불의한 질서를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는 그런 권력을 향하기도 합니다.
다만 「민족들에게 보복하고」라는 표현을 모든 외국 민족이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심판받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흐름에서 심판의 중심 대상은 자비 없는 사람들과 거만한 사람들, 불의한 통치자들입니다. 민족들에 대한 보복은 그러한 불의와 대립의 흐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의 행동뿐 아니라 속생각까지
사람에게 그가 한 일에 따라 갚고, 사람들의 행동도 그들의 속생각에 따라 갚으실 것이다.집회서 35:24 · 두루새김
이 절은 심판의 기준을 더 깊은 곳으로 가져갑니다.
어떤 사람이 제물을 바칠 때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움직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명예를 얻으려는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의 판단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뿐 아니라 어떤 생각과 의도로 행동했는지도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의 송사를 판결하시는 하나님
마침내 자기 백성의 억울한 일을 판결하고 자기 자비로 그들을 기쁘게 하실 것이다.집회서 35:25 · 두루새김
여기서 「자기 백성의 억울한 일을 판결하고」라는 말은 법정에서 다투는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분노를 드러내는 행위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불의를 바로잡고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4절의 자선, 22절의 자비 없는 사람, 25절의 하나님의 자비가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삶이 요구됩니다.
자비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함께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자비 없는 사람들을 오래 참아 주지도 않으실 것이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해석상 두 방향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건을 더 이상 오래 미루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자비 없는 악인들을 더 이상 참아 주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두 번째 방향을 따라 「자비 없는 사람들」을 직접 밝힙니다. 그리스어의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확실하게 결정하기 어렵지만, 이어지는 자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후자의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가뭄이 든 때의 비구름
고난을 겪을 때에 자비는 참 아름답다. 가뭄이 들었을 때의 비구름과 같다.집회서 35:26 · 두루새김
이 마지막 절은 앞의 심판 이미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허리가 부러지고, 왕권을 나타내는 지팡이가 부서지고, 악한 사람들의 무리가 무너지는 장면이 지나갑니다. 그 뒤에 나타나는 것은 비구름입니다.
왜 자비를 비구름에 비유하는가
가뭄이 들면 땅은 메마릅니다.
씨앗을 뿌렸더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물이 부족해지고 농작물이 시들며 사람과 가축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이때 비구름은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생명을 계속 이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시입니다.
가뭄이 계속되는 동안 비가 필요하듯,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어려움 속에서 자비가 필요합니다. 자비는 형편이 이미 넉넉해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장식 같은 선물이 아닙니다. 삶이 무너질 위험에 놓인 사람에게 찾아오는 생명의 도움입니다.
맺음말 — 구름을 뚫은 기도와 가뭄 속의 비구름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 매수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억울한 사람의 부르짖음에는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이루시는 까닭은 단지 불의한 사람을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의 때문에 메말라 가는 사람들의 삶에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35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메마른 땅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땅은 갈라지고,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과부의 눈물은 아직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낮아진 사람의 기도도 구름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메마른 땅 위에 비구름이 다가옵니다.
집회서 35장은 바로 그 구름을 보여 주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