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34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제물에 비친 가난한 사람의 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값진 제물을 바칩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들여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종교적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집회서 34장은 그 제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같아질 수 있을까요?
꿈을 믿는 사람과 부당하게 얻은 재물로 제사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문제를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꿈을 무조건 믿는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에 소망을 겁니다. 부당하게 얻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바치면서 하나님이 받아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실제로 믿을 만한지 충분히 살피지 않습니다.
34장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어떤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꿈은 왜 그림자와 바람에 비유되는가
꿈이 아니라 꿈에 의지하는 사람이 문제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헛되고 거짓된 희망을 품고, 꿈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집회서 34:1 · 두루새김
꿈이 사람의 마음을 부풀려 마치 날아오르는 것처럼 만든다는 뜻입니다. 꿈속에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남을 수 있습니다.
꿈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그림자를 붙잡고 바람을 뒤쫓는 사람과 같다.집회서 34:2 · 두루새김
그림자는 실제로 보입니다. 바람도 실제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를 손에 쥐거나 바람을 붙잡아 자기 소유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을 꾸었다는 경험은 실제이지만, 꿈속에서 본 내용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믿을 만한 진실이라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문제는 꿈을 꾸는 일이 아니라, 꿈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일입니다.
꿈속에서 보는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꿈에서 보는 것은 어떤 것을 마주 비춘 모습이다. 얼굴 앞에 비친 그 얼굴을 닮은 모습이다.집회서 34:3 · 두루새김
거울에 비친 얼굴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거울 속에는 분명 얼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은 실제 사람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실제 얼굴의 모습을 비춘 영상입니다.
본문은 거울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굴 앞에 비친 그 얼굴을 닮은 모습」이라는 표현은 꿈의 영상이 실제 사물과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그것과 같지는 않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어울립니다.
더러운 것에서 무엇이 깨끗해지겠느냐? 거짓된 것에서 무엇이 참되겠느냐?집회서 34:4 · 두루새김
이 두 질문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거짓된 것으로부터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판단의 출발점을 믿을 수 없다면, 그 위에 세운 결론도 흔들리기 쉽습니다.
아이를 낳느라 고통받는 여자의 마음처럼 헛것을 그린다는 말
점을 치는 일과 징조를 풀이하는 일과 꿈은 헛되다. 마음은 아이를 낳느라 고통받는 여자의 마음처럼 헛것을 그려 낸다.집회서 34:5 · 두루새김
세 가지의 공통점은 인간이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통해 아직 알 수 없는 미래나 숨겨진 뜻을 알아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정확히 어떤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강렬한 감정과 기대 속에서 마음이 여러 모습을 만들어 내는 현상을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다만 아이를 낳는 여자의 실제 고통이나 생각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비유의 초점은 점과 꿈을 통해 사람이 자기 마음속의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현상에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일이 있으면 우연한 사건을 불길한 예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일이 있으면 꿈속의 장면을 그 일이 이루어질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꿈이 진실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이 꿈을 해석하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꿈은 예외다
지극히 높은 분께서 너를 찾아와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마라.집회서 34:6 · 두루새김
저자는 모든 꿈이 무의미하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높은 분께서 보내신 경우를 분명히 인정합니다.
창세기 28:12–17에서 야곱은 꿈속에서 하늘에 닿는 계단과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합니다. 창세기 41장에서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합니다. 다니엘 2장에서는 꿈을 통해 왕국들의 미래에 관한 계시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이 모든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 23:25–32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거짓된 꿈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꾸지람을 듣습니다.
꿈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꿈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는 꿈을 꾸었다는 사실만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꿈은 많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고, 그들은 꿈에 소망을 두었다가 무너졌다.집회서 34:7 · 두루새김
문제의 핵심은 결국 소망을 어디에 두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믿을 만한 길잡이가 없습니까?
조금 더 깊이
꿈에 관한 경고는 신명기 13:1–5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표징을 제시하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도록 이끈다면 그 말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꿈이 인상적이거나 그 내용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꿈이 하나님께 충실한 삶을 해친다면 그것을 따를 수 없습니다. 집회서 34장 역시 꿈의 특별함보다 하나님의 율법과 신실함을 우선합니다.
거짓 없는 율법과 실제로 겪어 얻는 지혜
율법은 꿈보다 왜 믿을 만한가
율법은 거짓 없이 이루어질 것이고, 지혜는 믿음직한 입을 온전하게 한다.집회서 34:8 · 두루새김
꿈에 자신의 소망을 거는 사람은 확실하지 않은 영상에 의지합니다. 반면 율법을 따르는 사람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단순한 법률 조항들의 모음이 아닙니다. 집회서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이며, 지혜로운 삶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앞에서는 거짓된 꿈이 인간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이제는 지혜가 믿음직한 입을 온전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 내는 재능과 같지 않습니다. 진실한 가르침을 믿음직하게 전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저자는 곧바로 경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책으로 배운 지식과 몸으로 겪은 지식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경험이 많은 사람은 깨달은 것을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집회서 34:9 · 두루새김
9절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πολύπειρος)는 전해 내려온 본문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교육받거나 훈련받은 사람이라는 읽기)를 따르면 배움과 경험이 나란히 등장하고, 후자(여러 곳을 돌아다닌 사람이라는 읽기)를 따르면 여행과 다양한 경험이 더욱 강조됩니다. 어느 쪽을 따르더라도 9–13절 전체에서 저자가 경험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닌 사람은 일을 풀어 가는 능력을 키울 것이다.집회서 34:11 · 두루새김
11절의 「일을 풀어 가는 능력」은 여러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책에서 어떤 상황을 배울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멀리 여행하는 사람은 낯선 언어와 관습, 예상하지 못한 위험과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뿐 아니라 복잡한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2절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고,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하는 말보다 많다.집회서 34:12 · 두루새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경험으로 얻은 지혜에는 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사람의 말 뒤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위험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직접 겪으며 배우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경험은 단순한 여행의 즐거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 번 죽을 위험에 놓였지만, 이런 경험과 깨달음 덕분에 살아남았다.집회서 34:13 · 두루새김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생존을 전적으로 자기 능력의 결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주를 경외하는 사람의 소망이 자신을 구하시는 분께 있다고 말합니다. 경험은 사람을 더 지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위험을 피하는 능력을 길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인간에게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그는 그 위험 속에서 끝내 의지할 분이 누구인지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여기서 이것들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문맥을 통해 살펴야 합니다. 앞에서는 여행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를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익힌 경험과 판단 능력 덕분에 위험을 벗어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의 눈이 바라보는 사람들
꿈에 소망을 둔 사람과 주께 소망을 둔 사람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영은 살아 있을 것이다.집회서 34:14 · 두루새김
그들의 소망이 자신들을 구하시는 분께 있기 때문이다.집회서 34:15 · 두루새김
두 경우 모두 인간은 자신에게 아직 주어지지 않은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줄 무언가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소망의 대상이 다릅니다.
꿈을 무조건 믿는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영상에 소망을 둡니다.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을 구하시는 분께 소망을 둡니다.
저자는 죽음의 위험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따라서 주를 신뢰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위험과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이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가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그의 소망이시기 때문이다.집회서 34:16 · 두루새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위험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실제로 공포나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마음 상태에 관한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두려운 상황이 전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의지할 분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방패와 그늘과 버팀목
주의 눈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다. 주께서는 강력한 방패이며 튼튼한 버팀목이고, 타는 더위를 피할 그늘이며 한낮의 더위를 피할 그늘이시다.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키시고, 쓰러지지 않게 도우신다.집회서 34:19 · 두루새김
방패는 공격을 막아 주는 물건입니다. 버팀목은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것을 지탱합니다. 그늘은 뜨거운 햇볕을 피해 쉴 수 있는 장소입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길을 걷는 사람에게 그늘은 단순히 기분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몸을 쉬게 하고 여정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입니다. 앞에서 저자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위험을 겪었다고 했으므로, 이러한 이미지는 추상적인 비유 이상의 현실감을 가집니다.
장 처음에 등장한 사람은 꿈속의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에서 미래의 확실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선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았느냐보다 하나님이 누구를 바라보고 계시는가가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이것은 시편 33:18–19가 하나님의 눈이 그분을 경외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그들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지신다고 노래하는 것과 가깝습니다.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키시고 쓰러지지 않게 도우신다
19절의 마지막 부분은 작은 차이를 가진 두 표현을 나란히 놓습니다.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키시고」와 「쓰러지지 않게 도우신다」입니다. 첫 번째는 위험을 예방하는 보호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번째는 넘어질 위기나 쓰러지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도움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북돋우고 눈을 밝히며, 병을 고쳐 주고 생명과 복을 주신다.집회서 34:20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잘못 보고 잘못 믿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눈을 밝히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구절의 「눈을 밝히며」라는 표현은 몸의 활력과 회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곧바로 영적인 깨달음만을 가리키는 비유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사람의 먹고살 길을 빼앗아 얻은 재물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보호에 관한 선언은 시편 91편과 연결됩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피난처와 요새로 묘사하고, 그분의 보호 아래 사는 사람이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왜 많은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가
제물의 가치는 어디에서 결정되는가
부당하게 얻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면, 그 제물은 조롱을 받는다.집회서 34:21 · 두루새김
저자는 제물의 양이나 가격부터 묻지 않습니다. 그 제물을 어떻게 얻었는지 묻습니다.
율법에서는 제물에 흠이 없어야 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레위기 22:20–25). 제물 자체가 훌륭하더라도 그것을 얻는 과정이 부당했다면, 그 제사는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이 깨끗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얻은 방법까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4절의 질문 「더러운 것에서 무엇이 깨끗해지겠느냐? 거짓된 것에서 무엇이 참되겠느냐?」와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거짓된 꿈에서 믿을 만한 진실을 얻으려는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이제는 부당하게 얻은 재물로 거룩한 제사를 만들려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둘 다 잘못된 출발점에서 올바른 결과를 얻으려는 시도입니다.
많은 제물로 죄를 씻을 수 없는 이유
지극히 높은 분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제물을 많이 바친다고 죄를 씻어 주지도 않으신다.집회서 34:23 · 두루새김
제물의 수량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수단이 아닙니다.
여기서 저자는 제사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부당한 행동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물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려는 태도입니다.
이사야 1:11–17에서도 하나님은 불의가 가득한 백성이 바치는 많은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악한 행동을 멈추고 정의를 추구하며 억압받는 사람을 돕는 일입니다.
아모스 5:21–24에서도 제사와 노래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일에서 분리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특히 미가 6:6–8에서는 수많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정의를 행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아끼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장은 더욱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그리스어에는 전해 내려온 본문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전승의 메모케메네는 조롱거리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읽히지만, 다른 전승의 메모메네는 흠이 있거나 결함이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전자를 따르면 부당하게 얻은 제물은 조롱거리이며, 후자를 따르면 제물 자체가 흠 있는 제물이 됩니다. 두 읽기 모두 부당하게 얻은 재물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빵을 빼앗는 것은 왜 살인인가
제물 뒤에 감추어진 사람을 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재물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아들을 그 아버지 앞에서 죽여 바치는 사람과 같다.집회서 34:24 · 두루새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바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단 위에 놓인 재물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재물을 잃은 사람의 입장에서 제사를 바라보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빼앗은 재물은 원래 그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빼앗아 제단에 올리는 행동은 단순히 재산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아들을 아버지 앞에서 죽여 바치는 비유는 그 폭력을 눈앞에 드러냅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잃는 고통, 생명이 빼앗기는 현실, 그것을 지켜보면서도 막을 수 없는 무력함이 한 장면에 담겨 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자신의 경건을 보고 있지만, 저자는 그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 희생당한 사람을 보게 합니다.
빵은 재산이 아니라 생명이다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의 음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이다. 그 생명을 빼앗는 사람은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이다.집회서 34:25 · 두루새김
생활이 넉넉한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은 여러 음식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에게 음식은 그날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합니다. 그 음식을 빼앗으면 단순히 식사를 불편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재물의 가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하루의 식사나 살 곳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금액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적 불의를 판단할 때에는 빼앗은 금액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상대방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저자는 그 상실을 생명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품꾼의 삯을 떼어먹는 것은 피를 흘리는 일이다
먹고살 길을 빼앗는 사람은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고,집회서 34:26 · 두루새김
일꾼에게 일한 대가를 주지 않는 사람은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이다.집회서 34:27 · 두루새김
고대 사회에서 가난한 일꾼은 하루 동안 일하고 받는 돈에 생계를 의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일한 대가를 주지 않는 것은 단순히 약속을 어기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을 빼앗는 일입니다.
여기서 잘못은 단지 돈을 적게 주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한 사람이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을 주지 않는 일입니다.
레위기 19:13은 일꾼에게 일한 대가를 주지 않은 채 아침까지 밤새도록 붙잡아 두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4:14–15는 가난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일꾼을 억압하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그날 일한 대가를 주라고 명령합니다. 그가 가난하여 그 돈을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예배로 넘어온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참된지 판단하기 위해 경제적 불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재물을 얻는 과정의 불의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경제적 관계 안에서 누군가의 먹고살 길을 좌우할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결정이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필 책임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비유 속의 아버지를 곧바로 하나님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문장 자체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을 죽여 바치는 극심한 폭력의 모습을 통해 가난한 사람에게서 빼앗은 재물로 드리는 제사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한 사람은 기도하고 다른 사람은 저주한다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일을 무너뜨릴 때
한 사람은 쌓고 다른 사람은 허문다면, 애쓴 것 말고 무엇을 더 얻겠느냐?집회서 34:28 · 두루새김
한편에서는 경건한 일을 하려고 제물을 준비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불의를 행하여 그 제물의 의미를 무너뜨립니다.
여기서 쌓는 사람과 허무는 사람이 반드시 같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위를 나란히 놓습니다. 그러나 앞뒤의 흐름을 보면 이 모습은 경건한 행위와 불의한 행위가 서로 충돌할 때 어떤 모순이 생기는지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제사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하면서 다른 사람의 먹고살 길을 빼앗는다면, 앞에서 쌓으려는 것을 뒤에서 허무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목소리를 들으시는가
한 사람은 기도하고 다른 사람은 저주한다면, 주께서는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주시겠느냐?집회서 34:29 · 두루새김
부당하게 얻은 재물로 제사를 드린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안, 그에게 재물을 빼앗긴 사람이 억울함 속에서 저주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기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가해자이고 저주하는 사람이 반드시 피해자라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부당하게 얻은 것으로 드리는 제사와 일한 대가를 주지 않는 일을 이야기한 흐름은 그와 같은 대조를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제단에 놓인 제물만 보시지 않습니다.
그 제물 뒤에 있는 가난한 사람도 보십니다.
하나님의 귀는 기도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들으시지 않습니다.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행한 불의를 없던 일로 만드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불의를 덮어 주는 말이 아니라, 불의를 행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사만으로 죄를 덮을 수 없다면 금식과 정결 예식은 어떠합니까?
조금 더 깊이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출애굽기 22:22–24에서도 나타납니다. 약한 사람들이 억압을 당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서 야고보서 5:4는 일꾼에게 주지 않은 일한 대가가 부르짖고, 추수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이는 집회서 34:27–29의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일한 대가를 빼앗긴 사람의 고통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주제에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몸을 씻고 다시 시신을 만지는 사람
정결 예식을 마치고 다시 부정해지다
시신을 만진 뒤 몸을 씻고도 다시 그 시신을 만진다면, 몸을 씻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집회서 34:30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의 정결 예식을 배경으로 합니다.
민수기 19:11–12에는 사람의 시신을 만진 사람이 일정 기간 부정하게 되며, 정해진 정결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신을 만져 정결 규정에 따라 부정하게 되는 것이 곧 도덕적인 죄를 지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족의 장례를 치르는 일처럼 필요한 행동으로도 이런 부정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그 정결 규정을 비유로 사용합니다.
저자는 정결 예식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는 절차를 거친 뒤 곧바로 같은 상태로 돌아간다면, 그 절차의 효과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금식했지만 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
자기 죄 때문에 금식하고도 다시 가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도 그렇다. 누가 그의 기도를 들어주겠느냐? 자신을 낮추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집회서 34:31 · 두루새김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죄를 슬퍼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금식 자체가 아니라, 금식과 실제 삶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질문은 사람이 실수로 같은 죄에 다시 빠지는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절대적인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뒤의 흐름은 금식하고도 다시 같은 잘못을 행하는 태도, 곧 실제로 삶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종교적 행위를 비판합니다.
저자가 문제 삼았던 죄는 막연한 도덕적 잘못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먹고살 길을 위협하고, 일꾼에게 일한 대가를 주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금식은 죄를 대신하여 갚는 행위가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태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피해를 준 일이 있다면, 회개는 그 피해를 외면한 채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바로잡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이사야 58:3–7과 주제에서 직접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백성은 자신들이 금식하는데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금식하면서도 자기 일꾼들을 억압하고 다툰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억압의 멍에를 풀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며,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과 연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맺음말 — 제단 위에 놓인 빵
꿈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것인지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믿을 수 없습니다. 경험은 도움이 되지만 모든 위험을 없애지 못합니다. 제사와 금식은 중요한 경건의 행위일 수 있지만 불의를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모든 판단과 행위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삶을 인간이 도덕적으로 이룬 것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구하시고, 지키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칩니다.
그런데 저자는 제단에 놓인 재물보다 그 재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그 재물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음식이었습니다. 일꾼에게는 하루 동안 일하고 받아야 할 대가였습니다.
그것을 빼앗아 제단에 올린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일 위에 세워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34장의 마지막에는 금식을 마치고도 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합니다. 자신을 낮추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제단 위의 제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제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서 먼저 바로잡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