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3–15장 ·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음
아름다운 세상과 창조주
지혜서 13장에는 기묘한 목수가 등장합니다.
그는 나무를 베어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남은 조각들로 불을 피워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아무 데도 쓸모없는 자투리 나무 하나가 남자, 그것을 정성스럽게 깎아 신상을 만듭니다.
그런데 지혜서 13장은 처음부터 이런 우상 제작자를 비웃으며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별과 빛, 바람과 물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부터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자세히 살피고, 그 놀라운 아름다움과 힘의 근원을 찾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자연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과 자투리 나무로 신상을 만든 목수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신으로 여깁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만든 것을 신으로 여깁니다.
두 경우 모두 피조물과 창조주를 혼동합니다.
이 장은 단순히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경고가 아닙니다.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능력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는 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작품을 보면서도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본디 헛되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고도 존재하는 이를 알아내지 못했고, 그분께서 만드신 것들을 살펴보면서도 그것들을 만드신 장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지혜서 13:1 · 두루새김
「헛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헛됨은 곧이어 나오는 인식의 실패와 연결됩니다.
이 구절에서 저자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교리를 설명하고 입증하지 않습니다. 뒤따르는 문장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태와 실패를 설명합니다.
문제는 눈을 감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가리키는 분에게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존재하는 이」라는 특별한 표현
1절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은 「존재하는 이」입니다.
저자가 문제 삼는 사람들은 존재하는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는 이」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모든 존재가 스스로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존재들을 만드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장인에 비유한 이유는 작품과 그것을 만든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훌륭한 작품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솜씨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작품의 아름다움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작품을 보면서도 중요한 것을 놓친 셈입니다.
저자는 바로 그런 일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신으로 여겼는가? (2절)
오히려 불이나 바람, 빠르게 움직이는 공기, 별들이 이루는 원, 거센 물, 하늘에서 빛나는 것들을 세상을 다스리는 신들이라고 여겼습니다.지혜서 13:2 · 두루새김
불은 따뜻함을 주지만 파괴하기도 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움직입니다. 별들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하늘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거센 물은 생명을 공급하면서도 인간이 다스리기 어려운 힘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과 힘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존경이 섞인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하늘의 별이나 자연의 힘을 신적인 존재와 연결하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지혜서 13:2는 그러한 자연 숭배의 여러 형태를 하나의 목록으로 묶어 비판합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연을 아름답게 여긴다는 사실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 자연물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것을 비판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4:19에서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하늘의 빛나는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지혜서가 출애굽기의 하나님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떠올리게 하는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구절의 그리스어 표현이 밀접하게 대응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름다움은 창조주를 가리키지만, 그 자체가 창조주는 아니다
저자는 자연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감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감탄이 더 멀리 나아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아름다움을 즐기며 그것들을 신으로 여겼다면, 그것들의 주인께서 얼마나 더 뛰어나신지 알아야 합니다.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그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3:3 · 두루새김
저자의 논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부정함으로써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 아름다움이 가리키는 근원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편 19:1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하늘의 넓은 공간이 그분의 손으로 하신 일을 알려 준다는 선언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냅니다.
「미루어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의 의미 (5절)
지어진 것들과 그 크나큰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들을 지으신 분을 미루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3:5 · 두루새김
아날로고스, 곧 유비로 또는 서로 대응하는 방식으로라는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미루어 알아볼 수」 있다고 옮겼습니다. 유비란 서로 다른 두 대상 사이에 있는 관계나 닮음을 통해 한쪽에서 다른 쪽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훌륭한 작품을 보고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뛰어난 솜씨가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만든 사람은 아니지만, 작품은 그 사람의 능력을 짐작하게 합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와 창조주의 관계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아름다움의 근원이심을 깨닫고, 자연의 힘을 보면서 그것을 만드신 분의 능력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연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나 뜻을 빠짐없이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는 그것을 지으신 분을 향해 인간의 생각을 이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저자는 이어서 자연을 탐구하다 잘못된 결론에 이른 사람들의 처지를 신중하게 평가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로마서 1:19–23에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통해 하나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가능성과,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높이는 인간의 잘못이 함께 나타납니다. 이는 지혜서 13장이 다루는 문제와 주제상 밀접한 연결을 보여줍니다. 다만 로마서가 이 장을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 그렇다면 왜 용서받을 만하지 않은가?
6절은 뜻밖에 관대한 평가를 내립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갈 책망은 적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찾고 만나기를 바라다가 길을 잘못 든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3:6 · 두루새김
원문에서 그리스어 타카(τάχα)는 어쩌면, 아마도라는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이 가능성을 「것일 수」라는 말로 드러냅니다. 따라서 저자는 그들이 실제로 모두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고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능성만으로도 앞선 강한 비판의 어조가 달라집니다.
그들의 잘못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결과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깊이 생각하고 탐구했지만 잘못된 결론에 이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어떻게 판단을 흐리게 하는가? (7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들을 자세히 살핍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름다워,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깁니다.지혜서 13:7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그 모습에 설득된다는 뜻으로 표현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인상적이어서, 그것을 궁극적인 신적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깊이 관찰한다는 사실만으로 언제나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찰한 대상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오면 오히려 그 대상 너머를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관찰과 탐구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관찰 능력과 올바른 판단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오류라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가? (8–9절)
그런데 8절은 다시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용서받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지혜서 13:8 · 두루새김
6절은 그들이 왜 잘못된 길에 들어섰는지를 이해하려 합니다. 8절은 그 잘못에 대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그들의 탐구를 인정하지만, 그 탐구가 도달했어야 할 결론을 놓쳤다고 비판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헤아릴 만큼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면, 어째서 이 모든 것의 주인은 더 빨리 찾아내지 못했습니까?지혜서 13:9 · 두루새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지식을 어디까지 따라가야 하는지 놓쳤다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문제는 세상을 너무 많이 탐구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탐구하면서 그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경험적 증명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이해하는 신앙의 관점에서 자연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알아보는 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자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보다 더 심각한 사례로 시선을 옮깁니다.
자연을 신으로 여기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을 신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비참하며, 죽은 것들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금과 은으로 공들여 만든 작품이나 짐승을 본뜬 형상, 또는 옛사람이 손으로 만든 쓸모없는 돌입니다.지혜서 13:10 · 두루새김
이 변화는 단순히 우상 숭배의 다른 유형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저자의 비판은 한층 강해집니다. 자연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보다 크고 강력하며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형상은 다릅니다.
그 재료를 구한 사람도 인간이고, 그 모양을 정한 사람도 인간이며, 그것을 완성한 사람도 인간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이 만든 물건 앞에 서서 그것을 신이라고 부릅니다.
저자는 이 상황을 앞선 자연 숭배보다 더 심각한 뒤바뀜으로 바라봅니다.
희망이 죽은 것들에 있다는 말
저자는 우상의 겉모습이 얼마나 조잡한지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희망을 어디에 두었는지 묻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름답게 만든 물건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귀하게 여기고 그 작품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건에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맡기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아무 생명도 없는 물건에게 생명을 지켜 달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역설을 독자가 직접 볼 수 있도록 한 목수의 작업장으로 데려갑니다.
나무가 신이 되는 과정 — 목수의 작업장에 들어가다
11절부터 본문은 갑자기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가 됩니다.
가령 어떤 목수가 다루기 쉬운 나무를 톱으로 베었다고 합시다. 그는 껍질을 모두 능숙하게 벗겨 내고 보기 좋게 다듬어, 생활에 쓸 만한 물건을 만듭니다.지혜서 13:11 · 두루새김
저자는 목수의 기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얼마나 솜씨 있게 일하는지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이 물건은 실제로 쓸모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을 줍니다.
12절에서는 작업하고 남은 조각들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들로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고 배를 채웁니다.
여기까지 목수는 능숙하고 실용적인 장인입니다.
가장 쓸모없는 나무가 가장 높은 자리에 놓이다 (13–15절)
그런데 13절에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러고는 그중에서도 아무 쓸모가 없는 조각, 곧 휘어지고 옹이가 박힌 나무를 집어 듭니다. 한가한 시간에 정성껏 깎고 솜씨를 발휘해 모양을 잡아, 사람의 모습을 본뜹니다.지혜서 13:13 · 두루새김
저자는 일부러 이 나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재료인지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목수는 그 나무를 정성스럽게 다듬어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색을 칠하고, 얼룩을 가리고, 집까지 만들어 줍니다.
처음에 나무는 목수가 생활용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나무는 목수가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형상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길게 묘사하는 것은 단순한 제작 과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손에 있던 재료가 어느 순간 인간이 경배하는 대상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한 번도 신적 능력이 생겨나는 순간이 없습니다. 나무가 잘리고, 다듬어지고, 칠해지고, 벽에 놓일 뿐입니다.
신상이 넘어질까 봐 미리 돌보는 목수 (15–16절)
그 형상에 알맞은 집을 만들고, 형상을 벽에 놓아 쇠로 단단히 고정합니다.지혜서 13:15 · 두루새김
이 행동은 목공 기술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입니다. 나무로 만든 물건은 넘어지거나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 행동은 치명적인 모순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목수는 형상이 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돌봅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형상일 뿐이며 도움이 필요합니다.지혜서 13:16 · 두루새김
이 장면에는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의 위치가 뒤바뀌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그 신이 자신보다 강하고 자신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목수는 자신이 섬기게 될 신상을 먼저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상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기려 합니다.
목수는 신상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지만, 그 신상은 목수의 안전을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목은 이사야 44:9–20과 예레미야 10:3–5의 우상 비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같은 나무의 일부로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고, 남은 부분으로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사람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이 만든 우상이 넘어지지 않도록 못으로 고정해야 하며, 스스로 걷지도 못해 다른 사람이 옮겨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러한 묘사는 우상 숭배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풍자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대에 신상을 사용하던 모든 사람이 나무나 돌 자체가 곧 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신상을 신적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거나, 그 존재가 함께하는 것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방식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지혜서 저자는 신상과 그 신적 의미를 구별하려는 논의를 자세히 다루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형상에게 실제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생명을 위해 죽은 것에 기도하다
17절부터는 목수의 작업이 끝나고 그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재산과 결혼과 자녀를 위해 기도하면서, 생명 없는 것에 말을 걸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 약한 것에 부르짖습니다.지혜서 13:17 · 두루새김
여기서 목수가 기도하는 내용은 특별히 악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기를 바라고,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며, 여행이 안전하기를 원하고, 자신의 노동이 좋은 결과를 맺기를 바라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기도 제목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 기도를 받는 신상이 어떤 존재인지를 함께 보여줍니다.
기도하는 내용과 기도받는 대상의 모순
생명을 위해 죽은 것에 청하고, 도움을 얻으려고 아무 경험도 없는 것에 애원합니다. 여행을 위해 제 발조차 쓰지 못하는 것에 간청합니다.지혜서 13:18 · 두루새김
돈벌이와 일, 손으로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며, 가장 힘없는 것에게 자기 손에 힘을 달라고 청합니다.지혜서 13:19 · 두루새김
17–19절은 매우 치밀한 대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목수가 구하는 것 | 기도받는 신상의 상태 | | --- | --- | | 건강 | 약한 것 | | 생명 | 죽은 것 | | 도움 | 아무 경험도 없는 것 | | 안전한 여행 | 제 발조차 쓰지 못하는 것 | | 일의 성공과 손의 힘 | 가장 힘없는 것 |
이 마지막 기도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그 신상을 만든 사람이 바로 목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쓸모 있는 생활용품을 만들었고, 음식을 준비했으며, 신상까지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든 형상에게 자기 손의 일이 잘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에는 앞부분에서 시작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힌 모습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장인으로 소개되셨습니다. 그런데 목수는 자신의 손으로 형상을 만든 뒤 그 형상을 자신의 보호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만든 사람과 만들어진 것의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인간에게는 경험과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신상에게는 경험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이 만든 도구가 인간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구가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과 그 도구를 신으로 삼아 생명과 미래를 맡기는 일은 다릅니다. 시편 115:4–8에서는 우상에게 입과 눈과 귀와 손과 발이 있지만 말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맺음말 — 목수의 두 손과 벽에 고정된 신상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과,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에게 자기 손의 일을 맡기려 했던 목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 무엇이며, 그 대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충분히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독자는 목수의 손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무를 다듬을 줄 알고, 물건을 만들 줄 알고, 신상을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할 수 있는 그 손입니다. 그런데 그 손의 주인이 자신이 만든 형상에게 자기 손에 힘을 달라고 청합니다.
자신이 만든 물건을 지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물건에게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수의 두 손은 여전히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신상은 여전히 벽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목수는 그 앞에서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도울 수 있습니까?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