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17–21장 · 언약과 전쟁, 성전 터

사람을 세던 왕이 백성을 살려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역대상 21장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확인하려는 다윗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얼마나 많은 전사가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요압이 반대하지만 다윗은 명령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시고, 전염병으로 칠만 명이 죽습니다. 이어서 예루살렘 위에 칼을 뽑아 든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다윗은 타작마당을 사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천사는 칼을 칼집에 넣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소가 훗날 솔로몬 성전이 세워질 장소가 됩니다(역대하 3:1).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의 자리는 왕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장소가 아니라, 왕의 죄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심판이 멈춘 장소였습니다.

처음에는 백성이 군사력의 숫자로 나타납니다. 나중에는 보호해야 할 양 떼로 나타납니다.

다윗이 바라보는 백성의 모습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와 함께, 이야기는 왕의 인구 조사에서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21장 본문 읽기 →

다윗은 왜 이스라엘의 수를 세려고 했는가

역대상 21:1–6 본문 →

이 장의 첫 문장은 뜻밖의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나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했다.역대상 21:1 · 본디새김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령하는 사건은 사무엘하 2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책은 시작부터 다르게 말합니다. 사무엘하 24:1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올랐고,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을 부추겨 백성의 수를 세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사탄인가, 어떤 대적자인가

역대상 21:1에 사용된 히브리어 사탄(⁨שָׂטָן⁩)은 기본적으로 「대적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 낱말이 반드시 고유명사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22:22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발람의 길을 막는 대적자로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29:4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이 전쟁에서 자신들의 적대자가 될까 봐 경계합니다.

욥기 1–2장과 스가랴 3:1–2에는 「그 사탄」이라는 뜻으로 관사가 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역대상 21:1에는 관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고유명사 「사탄」으로 읽을 수도 있고, 어떤 대적자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다윗을 부추겼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관사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느 쪽이 옳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고유명사는 일반적으로 관사 없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본문은 그 존재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약에 나타나는 사탄에 관한 모든 설명을 이 한 구절에 곧바로 가져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하와 역대상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궁극적인 차원과, 실제로 다윗을 부추긴 대적자의 활동을 구별하여 두 기록을 함께 이해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같은 사건을 전하는 두 성경 저자가 재앙의 원인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두 기록의 표현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두 서술의 차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저자들이 정확히 어떤 관계를 의도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역대상 21장의 문면에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존재가 다윗을 부추겼고, 다윗은 그 부추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다른 존재에게 떠넘기지 않습니다.

인구 조사는 왜 죄가 되었는가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가서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이스라엘의 수를 세어라. 내가 그들의 수를 알도록 내게 보고하여라.」역대상 21:2 · 본디새김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남쪽에서 북쪽까지 온 지역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과 지명의 순서가 반대지만, 여기서도 전국적인 조사를 뜻합니다.

그런데 인구 조사가 언제나 죄였던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1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라고 명령하십니다. 민수기 26장에서도 인구 조사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단순히 사람의 수를 세었다는 행위 자체를 죄라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5절을 보면 요압이 보고한 수는 「칼을 뽑는 남자」의 수입니다. 조사의 대상이 단순한 거주 인구가 아니라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남성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파악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명기 17:16의 왕에 관한 규정이나 시편 20:7의 병거와 말보다 여호와야훼를 의지한다는 고백이 떠오릅니다. 왕이 자신이 확보한 군사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경계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반드시 하나님보다 군대의 수를 더 신뢰하려는 마음으로 이 조사를 명령했다고 본문이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출애굽기 30:11–16의 규정과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조사받을 때 각자 자신의 생명을 위한 속전을 바치도록 명령하고, 그렇게 해야 인구 조사 때문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역대상 21장에도 인구 조사와 재앙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두 본문을 함께 생각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21장은 다윗이 속전을 거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규정을 어긴 것이 이 사건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이 군사력과 관계된 백성의 수를 세도록 명령했습니다. 요압은 그것이 이스라엘에 죄책을 가져올 일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악하게 보셨습니다.

요압은 왜 반대했는가

요압이 말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금의 백 배로 늘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주이신 임금님, 그들은 모두 임금님의 종들이 아닙니까? 임금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요구하십니까? 왜 이 일이 이스라엘에 죄책이 되어야 합니까?」역대상 21:3 · 본디새김

요압의 질문은 군사적 효율성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일이 이스라엘에 죄책이 된다고 말합니다.

요압은 다윗이 이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다윗이 그들의 수를 추가로 확인해야만 자신의 왕권이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왕이 백성을 숫자로 확인하여 통제하려는 태도에 대한 반대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정확히 어떤 생각으로 이 말을 했는지는 본문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 요압을 눌렀다. 요압은 나가서 온 이스라엘을 두루 다닌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역대상 21:4 · 본디새김

왕에게는 명령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이 정당한 반대를 무시하고 잘못된 일을 밀어붙이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왕의 명령이 강하다는 사실이 그 명령의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요압은 레위와 베냐민 지파를 조사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왕의 명령을 혐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21:6). 왜 특별히 이 두 지파를 제외했는지까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민수기 1:47–49에서 일반적인 군사 인구 조사와 구별되어 있었으므로 그 전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제외한 이유는 별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제외를 성전의 미래 위치나 특정한 지파의 역사와 연결하려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보고된 숫자는 이스라엘의 칼을 뽑는 남자 110만 명과 유다의 47만 명입니다. 사무엘하 24:9에는 이스라엘 80만 명과 유다 50만 명이 기록되어 있어 두 기록의 숫자가 다릅니다. 집계 범위가 달랐을 가능성이나 본문 전승 과정의 차이가 논의될 수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왕은 백성의 수를 알게 되었지만, 이제 그 행동이 가져온 결과를 마주하게 됩니다.

다윗은 수를 얻었지만, 백성은 생명을 잃는다

역대상 21:7–13 본문 →

이 일은 하나님이 보기에 악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쳤다.역대상 21:7 · 본디새김

죄를 지은 사람은 다윗인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시는가요?

본문은 이 질문에 간단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왕의 결정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각 개인이 왜 재앙을 당해야 했는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하 24:1에는 처음부터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21장은 그 배경을 제시하지 않고, 다윗의 명령과 그 결과를 집중해서 기록합니다. 따라서 역대상만으로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윗 자신이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전에 다윗은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말했다. 「저는 이 일을 하여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부디 당신의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몹시 어리석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역대상 21:8 · 본디새김

여기서 「어리석게 행동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계산을 잘못했거나 판단력이 부족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어리석음이 도덕적 판단의 실패와 연결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따르지 않고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재앙은 곧바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견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세 해 동안의 기근, 석 달 동안 적들에게 휩쓸리는 일, 사흘 동안 여호와야훼의 칼과 전염병이 임하는 일입니다.

기근은 땅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적에게 쫓기는 일은 다른 사람의 군사력 앞에 무너지는 고통입니다. 전염병은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칼을 동원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던 왕이, 이제는 자신이 가진 군사력으로 막을 수 없는 칼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 대조를 저자가 직접 해설하지는 않지만, 「칼을 뽑는 남자」(21:5)와 「여호와야훼의 칼」(21:12), 그리고 곧 등장할 천사의 뽑힌 칼(21:16)이 서로 연결되어 읽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윗이 갓에게 말했다. 「나는 몹시 괴롭소. 부디 내가 여호와야훼의 손에 떨어지기를 바라오. 그분의 긍휼이 매우 크기 때문이오. 그러나 사람의 손에는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오.」역대상 21:13 · 본디새김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결과를 주실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긍휼이 매우 크다는 사실에 기대어 자신의 운명을 맡기려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크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언제나 인간에게 고통 없는 결과만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칠만 명의 죽음이 기록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다윗의 고백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다윗은 구체적으로 「사흘 동안의 전염병을 선택하겠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람의 손보다 여호와야훼의 손에 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사건에서 전염병이 일어나므로, 그의 선택은 세 번째 재앙과 연결됩니다.

칼을 든 천사에게 「그만하면 됐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역대상 21:14–16 본문 →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내렸고, 이스라엘 사람 7만 명이 쓰러져 죽었다.역대상 21:14 · 본디새김

처음의 숫자는 군사력을 나타내는 숫자였습니다. 이제의 숫자는 잃어버린 생명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예루살렘까지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파괴하려고 그곳에 천사를 보냈다. 천사가 파괴하고 있을 때 여호와야훼가 이를 보고 그 재앙에 대해 마음을 돌렸다. 그는 파괴하는 천사에게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이제 네 손을 거두어라.」 여호와야훼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서 있었다.역대상 21:15 · 본디새김

하나님은 다윗이 제단을 쌓기도 전에 파괴를 멈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에 다윗이 천사를 보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제단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인간의 제사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선 천사

다윗이 눈을 들어 보니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땅과 하늘 사이에 서 있었다. 천사는 뽑힌 칼을 손에 든 채 예루살렘 위로 겨누고 있었다. 다윗과 장로들은 자루옷을 걸친 채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역대상 21:16 · 본디새김

이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윗의 궁전이나 군대가 통제할 수 없는 차원에서 임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다윗과 장로들은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린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다윗은 처음의 인구 조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백성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음을 돌렸다」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나함(⁨נָחַם⁩)이며, 후회하다, 뜻을 돌이키다, 위로하다 등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셨다는 뜻으로 곧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문맥에서는 계속되고 있던 재앙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자루옷은 애도와 겸비, 탄원의 상황에서 사용되던 거친 옷입니다.

「그러나 이 양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역대상 21:17 본문 →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말했다. 「백성의 수를 세라고 한 사람이 바로 저 아닙니까? 죄를 짓고 참으로 악을 행한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그러나 이 양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여호와야훼, 저의 하나님, 부디 당신의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치시되, 당신의 백성은 재앙으로 치지 말아 주십시오.」역대상 21:17 · 본디새김

그는 죄의 책임을 요압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추긴 존재에게도 돌리지 않습니다.

칼을 뽑는 남자에서 양 떼로

다윗은 본래 양을 돌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어 인구 조사를 명령할 때에는 백성을 군사력의 수로 세었습니다.

이제 재앙 속에서 그는 백성을 다시 양으로 부릅니다.

양은 보호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목자는 양을 이용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세려고 했던 사람들은 왕의 힘을 나타내는 숫자이기 전에, 왕이 돌보아야 할 백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잘못의 결과를 백성이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다윗은 자신과 자기 집안이 벌을 받더라도 백성을 더 이상 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물론 본문은 하나님이 다윗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와 그의 집안을 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다윗이 실제로 백성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았다는 사건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말만으로 이미 죽은 칠만 명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장은 잘못한 지도자가 사과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지도자의 잘못에는 실제적인 결과가 있으며,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왕의 권위를 사용하여 백성의 수를 세게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왕의 책임을 인정하며 백성의 생명을 위해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 직후에 뜻밖의 명령이 내려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궁전이나 성막으로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한 여부스 사람의 타작마당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양들」이라는 표현은 역대상 17:7과 연결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이 그를 목초지에서, 양 떼 뒤를 따르던 데서 데려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필 여부스 사람의 타작마당이었는가

역대상 21:18–23 본문 →

여호와야훼의 천사는 갓에게 말했다.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올라가 여호와야훼를 위한 제단을 세우라고 전하여라.」역대상 21:18 · 본디새김

여부스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다윗의 성읍이 되기 전부터 그 지역과 관련되어 있던 주민들입니다(역대상 11:4–5). 따라서 오르난은 단순히 다윗 궁정의 관리나 제사장이 아닙니다. 자기 타작마당에서 밀을 타작하던 사람입니다.

첫째, 다윗이 제단의 장소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그 장소는 이미 성소로 사용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셋째, 그 장소에는 실제 소유자가 있었고, 다윗은 그와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왕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하겠다고 생각했던 역대상 17장과도 다른 장면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집을 지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윗에게 특정한 장소에 제단을 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께 제안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로 가는 사람이 됩니다.

네 아들은 숨고, 오르난은 밀을 타작한다

오르난이 돌아서서 그 천사를 보았다. 그와 함께 있던 네 아들은 몸을 숨겼다. 오르난은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역대상 21:20 · 본디새김

한 평범한 사람의 일터와 가족도 그 사건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습니다. 타작마당은 농부가 곡식에서 알곡을 분리하는 곳입니다. 오르난이 사용하던 타작 썰매와 소, 밀도 뒤에서 등장합니다.

오르난의 일상적인 장소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단의 자리로 바뀌려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땅을 왕의 권위로 빼앗지 않습니다.

다윗이 오르난에게 말했다. 「타작마당 터를 내게 주게. 내가 거기에 여호와야훼를 위한 제단을 쌓겠네. 백성에게 닥친 재앙이 멎도록, 제값을 다 받고 그 터를 내게 넘겨주게.」역대상 21:22 · 본디새김

그는 타작마당을 얻으려 하지만, 그 소유자의 권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르난은 왕에게 땅과 제물을 모두 주겠다고 합니다.

오르난이 다윗에게 말했다. 「가져가십시오. 저의 주이신 임금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하십시오. 보십시오, 번제물로 소들을, 땔감으로 타작 썰매들을, 곡식 제물로 밀을 드립니다. 전부 드립니다.」역대상 21:23 · 본디새김

그는 자기 일터에 있던 것들을 모두 내어놓겠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오르난이 왜 이렇게 행동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왕에 대한 존중 때문인지, 천사를 본 두려움 때문인지, 재앙이 멎기를 바랐기 때문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숨는 동작의 주체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약간의 문법적 여지가 있지만, 본디새김은 네 아들이 숨었고 오르난은 타작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흐름으로 읽습니다.

다윗은 왜 값없이 제사를 드리려 하지 않았는가

역대상 21:24–25 본문 →

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말했다. 「아니네. 나는 반드시 제값을 다 치르고 사겠네. 자네 것을 가져다가 여호와야훼께 바쳐 값없이 번제를 올리지는 않겠네.」역대상 21:24 · 본디새김

문제는 단순히 제사를 드릴 때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다른 사람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권위로 요압의 반대를 눌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무상으로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본문이 이 두 장면을 명시적으로 대조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이 특별히 인구 조사에서 배운 교훈 때문에 땅값을 치르기로 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것을 자기 것처럼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값비싼 제사를 더 좋아하신다는 뜻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적은 것을 드리거나, 다른 사람이 기꺼이 제공한 것을 공동체가 함께 바치는 일이 잘못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25절은 다윗이 오르난에게 금 600세겔을 지불했다고 기록합니다. 다윗은 땅을 얻었고, 그곳에 제단을 세웁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재앙 앞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병행 본문인 사무엘하 24:24에는 다윗이 타작마당과 소를 은 50세겔에 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역대상은 성전이 들어설 넓은 부지 전체의 가격을 기록했고, 사무엘하는 타작마당과 소의 가격만 기록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설명은 가능성이 있지만, 두 본문이 실제로 서로 다른 면적을 가리킨다고 명시하지 않으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 전승이나 기록 방식의 차이로 보는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칼집으로 돌아간 칼

역대상 21:26–27 본문 →

다윗은 그곳에 여호와야훼를 위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올렸다. 그가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자, 여호와야훼는 하늘에서 번제단 위로 내린 불로 그에게 응답했다.역대상 21:26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천사의 칼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 위에 임합니다.

다음 절에서 천사의 칼이 움직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천사에게 명령하자, 천사는 자기 칼을 칼집에 도로 넣었다.역대상 21:2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생명을 결정적으로 위협하던 것은 적군의 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협을 끝낸 것도 다윗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장에는 심판이 멈추라는 첫 명령과, 제사 이후 칼이 완전히 거두어지는 마지막 장면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행동은 중요합니다. 그는 죄를 고백하고, 백성을 위해 간구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끝낼 최종적인 권한은 다윗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지만, 천사에게 칼을 거두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칼을 거두도록 명령하신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9:24에서는 여호와야훼 앞에서 불이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지방을 태웁니다. 그 모습을 본 백성은 기뻐하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열왕기상 18:38에서는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기도한 뒤 여호와야훼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웁니다. 이러한 본문들과 연결하여 읽으면 역대상 21:26의 불은 하나님이 다윗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그 제사를 받아들이셨음을 나타내는 표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브온의 성막이 있는데 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렸는가

역대상 21:28–30 본문 →

이제 재앙이 멈추었으므로 이야기가 끝나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마지막 세 절을 통해 독자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다윗은 왜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을까요?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여호와야훼의 성막과 번제단은 그때 기브온 산당에 있었다.역대상 21:29 · 본디새김

역대상 16:39–40에서도 사독과 제사장들이 기브온의 성막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세운 것은 기존의 성막과 번제단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곳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찾으러 그 성막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여호와야훼의 천사의 칼 때문에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역대상 21:30 · 본디새김

다윗이 기브온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가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갓을 통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말씀을 따라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기존의 성막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지시하신 장소에서 응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심판이 멈춘 장소가 성전의 자리가 된다

역대상 21장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앞으로 어떤 장소가 될 것인지 아직 직접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장의 첫 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이 여호와야훼 하나님의 집이며, 이곳이 이스라엘을 위한 번제단이다.」 (역대상 22:1)

그리고 역대하 3:1에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야산에서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그 장소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마련한 곳이라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역대상 21장은 훗날 성전이 세워질 장소가 어떻게 정해졌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단순히 죄가 있었기에 성전이 세워졌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칠만 명의 죽음이 마치 성전 건축을 위한 불가피한 준비였던 것처럼 들릴 위험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죽음을 그렇게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전의 터가 되는 장소에는 왕의 죄와 백성의 고통, 심판의 두려움이 함께 기억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긍휼과 응답의 이야기가 놓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그 성막 앞으로」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의 대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기브온의 성막 앞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그곳의 번제단 앞으로 읽을 수도 있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다윗이 기존 성막이 있는 기브온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칼이 칼집으로 돌아간 자리

역대상 21:1–30 본문 →

그러나 그 숫자로도 막을 수 없었던 재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멈추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훗날 성전이 세워질 장소가 드러났습니다. 왕의 군사적 위대함을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왕의 죄가 드러나고, 백성의 고통이 기록되고, 하나님이 심판을 멈추신 장소였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는데 왜 그 많은 백성이 죽어야 했습니까? 본문은 그 질문에 완전한 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 자신이 「이 양들은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질문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아니라, 본문 속 인물이 실제로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의 질문이 하나님을 심판하는 최종적인 판결로 제시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백성을 더 이상 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마지막에 다윗은 여전히 천사의 칼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기브온에는 모세가 만든 성막과 번제단이 있지만, 그는 그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다윗이 경험했던 두려움과 재앙의 기억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했던 칼은 더 이상 예루살렘을 향해 뽑혀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칼을 뽑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세려 했지만, 그날 예루살렘을 살린 것은 더 많은 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의 칼을 거두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칼이 거두어진 자리에는 다윗이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제 그곳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을 새로운 장소로 남게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