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6장 · 모금과 끝인사

사람의 손을 거쳐 도착하는 은혜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장은 뜻밖에도 돈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5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죽음의 소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이르자, 일주일에 얼마씩 돈을 따로 모아 둘 것인지, 누구에게 그 돈을 맡길 것인지, 자신이 언제 어느 도시를 방문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위대한 신학적 논증이 끝나고 평범한 행정 업무가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앞에서 가르쳤던 복음은 마지막 장에서 돈과 여행,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공동체의 관계 속으로 들어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보낼 구제금을 단지 돈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3절에서 그것을 「여러분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은혜가 어떻게 예루살렘까지 여행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은혜를 가지고 길을 떠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돈을 모아야 하고, 누군가는 신뢰할 만한 전달자를 선정해야 하며, 누군가는 먼 길을 여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공동체가 받은 은혜는 다른 공동체가 손에 쥘 수 있는 도움으로 바뀝니다.

바울의 마지막 관심은 새롭고 거창한 교리를 덧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실제로 서로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는 매우 엄중한 경고와 놀라울 만큼 따뜻한 사랑의 고백이 나란히 놓입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916장 본문 읽기 →

멀리 있는 형제들을 위한 준비

고린도전서 16:1–4 본문 →

왜 예루살렘인가

성도를 위해 모으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지시한 그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고린도전서 16:1 · 본디새김

바울은 이 모금을 처음 설명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이 일에 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모금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고린도는 로마의 아가야 속주에 속한 도시였고, 갈라디아 역시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도록 이 일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9–10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주요 지도자들과 이방인 선교의 사명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도 언급합니다. 로마서 15:25–27에서는 이방 사람들이 유대인 신자들의 영적 유익에 참여하게 되었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도 그들을 섬기는 일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모금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는 자선사업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 안에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모두 예수님께 속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그 일치는 말로만 주장한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유대인 신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이방인 신자들은 그들의 필요를 자기 일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와 예루살렘 공동체 사이의 실제적인 연대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교회들 사이의 교제와 일치를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어떤 지도자가 더 중요한지를 두고 갈라졌고,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은사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 평가했으며, 주님의 만찬 자리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런 공동체에 바울은 이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수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돈을 모으라고 말합니다.

공동체의 경계가 자기들이 모이는 자리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왜 매주 조금씩 모으라고 하는가

이레의 첫날마다 여러분 각자가 잘 풀린 만큼 자기 곁에 놓아 쌓아 둘 일입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제야 모으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6:2 · 본디새김

바울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금액을 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정된 비율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각자가’와 ‘잘 풀린 만큼’이라는 말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참여하도록 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특정한 의식보다 미리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방문한 뒤에야 급하게 모금을 시작하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방문한 사도의 권위나 현장의 감정에 이끌려 갑자기 많은 돈을 내게 하기보다, 각자가 자신의 형편을 살피며 꾸준히 준비하도록 하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필요를 채우는 일은 일시적인 감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계획하며 준비하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요란한 열정이 아니라 꾸준한 성실함입니다.

은혜를 누가 가져갈 것인가

3절에서 바울은 모금을 「여러분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은혜(χάρις)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은혜, 호의, 선물 등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이 구절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에 보내는 구체적인 도움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사람들 사이의 나눔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연결입니다.

그렇다고 구제금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호의이자 선물입니다.

내가 가면, 여러분이 편지로 인정한 이들을 보내어 여러분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하겠습니다.고린도전서 16:3 · 본디새김

바울은 전달자를 일방적으로 임명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인정하도록 하고, 자신도 함께 가는 것이 적절하다면 그들과 동행하겠다고 말합니다.

‘편지로’라는 표현의 연결에는 해석상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편지로 전달자를 승인한다는 읽기와, 고린도 교회가 선정한 사람들에게 바울이 추천서를 써서 보낸다는 읽기입니다. 그리스어의 문장 구조와 문장부호 처리에 따라 두 해석이 가능하며, 제시된 본문은 앞의 읽기를 채택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전달자를 인정하는 데 고린도 공동체가 참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구제금을 자신의 소유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그 돈은 고린도 교회의 선물이며,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은혜로 시작된 일이라고 해서 책임 있게 관리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돕기 위해 맡겨진 돈이기 때문에, 그 목적지까지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선한 마음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실제적인 준비까지 요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잘 풀린 만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그 사람이 실제로 얻은 형편이나 성과에 따라 마련한다는 뜻으로, 특별히 부유해진 사람만 기부하라는 지시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곁에 놓아’는 각자가 자신에게 따로 보관하거나 집에서 모아 두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이해되며, 공동 예배 시간에 반드시 헌금을 내라는 직접적인 지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공동체 차원의 모금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레의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이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도 하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7에는 이레의 첫날에 모여 빵을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6:2만으로 당시 모든 교회가 일요일에 정해진 헌금 예식을 시행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당시 실제로 어떤 회계 절차가 마련되었는지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계획을 세우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16:5–9 본문 →

바울이 고린도에 오래 머물고 싶은 이유

5절부터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을 설명합니다. 마게도냐를 지난 뒤 고린도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지나는 길에 잠깐 여러분을 보고 마는 것은 원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여러분 곁에 얼마 동안 머무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6:7 · 본디새김

이 말을 고린도 교회의 형편과 함께 읽으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분열, 성적 부도덕, 공동체 내부의 소송, 우상에게 바친 음식, 예배의 무질서 등 여러 심각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보내어 꾸짖는 것으로 관계를 끝내려 하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합니다. 갈등을 겪는 공동체라고 해서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곁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대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편지로 가르칠 수 있지만 편지만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번 등장하는 ‘어쩌면’

이 짧은 여행 계획에는 불확실성을 나타내는 표현이 여럿 나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어쩌면 머무를 수도 있고 겨울을 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에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조건이 놓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습니다. 어느 길로 갈지, 어느 도시에 머물지, 어느 계절을 보낼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운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주님의 허락을 구별합니다.

고린도후서 1:15–23에서 바울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문제 때문에 자신의 신실성을 해명합니다. 바울에게 여행 계획은 단순한 이동 경로 이상의 문제였습니다. 언제 방문하고, 얼마나 머물고, 왜 계획을 바꾸는지가 공동체와의 신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열린 문 앞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은 아직 에베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무르겠습니다. 나에게 크고 일을 이루게 하는 문이 열려 있고 맞서는 이들도 많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6:8–9 · 본디새김

큰 문이 열려 있다는 설명 바로 뒤에 맞서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보통은 문이 열렸다면 길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일을 이루게 하는’은 효과적으로 작용하거나 실제 효력을 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실제로 의미 있는 사역의 기회가 열려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많은 사람이 그를 반대합니다.

두 사실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맞서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문이 닫힌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큰 기회가 있다는 이유로 위험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저항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라면 반대가 있더라도 머무르겠다고 합니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에 머물겠다고 했고, 여기서는 열려 있는 문 때문에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그는 미래를 완전히 알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현재의 필요를 살피며, 주님의 뜻 아래에서 계획을 세우고 변경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에게 아무런 계획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자신이 세운 계획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계획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계획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 태도는 곧이어 다른 사역자들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의 구체적인 여행 계획을 정확한 시간 순서로 재구성하는 데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에베소는 당시 로마 아시아 속주의 주요 도시였고, 사도행전 19장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과 그곳에서 발생한 갈등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6:9의 반대자들이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과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디모데를 두려움 없이 지내게 하라

고린도전서 16:10–11 본문 →

디모데가 가거든 그가 여러분 곁에서 두려움 없이 지내도록 살피십시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고린도전서 16:10 · 본디새김

왜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본문은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어렸기 때문이라거나 성격이 소심했기 때문이라고 이 구절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를 내세우며 서로 다른 지도자에게 속했다고 주장했고(1:12), 어떤 사람들은 바울 자신의 권위에도 도전했습니다(4:18–21). 그런 공동체에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디모데가 찾아갑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지위나 업적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이유만 제시합니다. 디모데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이 보낸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도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차이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그를 업신여기지 말 일입니다. 그를 평화 가운데 보내 주어 나에게 오게 하십시오. 나는 형제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6:11 · 본디새김

‘업신여기다(ἐξουθενέω)’에 해당하는 동사는 고린도전서 1:28에서 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말에 사용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지위와 능력을 하나님의 선택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찾아온 사역자를 업신여긴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복음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는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도 있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돕는 힘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디모데에게 후자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복음을 이해하는 정도를 보여 주는 셈입니다.

아볼로에게 가라고 했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6:12 본문 →

디모데에 관한 당부 뒤에는 또 한 사람, 아볼로의 이름이 나옵니다.

형제 아볼로를 두고는, 형제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가라고 내가 그에게 간곡히 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려는 뜻은 도무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틈이 나면 갈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6:12 · 본디새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따르고,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를 따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3:5–9에서 자신과 아볼로를 경쟁하는 지도자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가라고 간곡히 권했다고 말합니다. 만약 바울이 아볼로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겼다면, 그가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권할 이유가 적었을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앞에서 했던 설명을 실제 관계 속에서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지금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거절의 이유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볼로가 자신의 지지자들 때문에 분열이 더 심해질 것을 걱정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이 있고, 단순히 다른 일정이나 사역 때문에 방문이 어려웠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뜻’을 아볼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지만, 문맥상 아볼로의 의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아볼로의 결정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간곡히 권할 만큼 분명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결정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그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하나의 주님을 섬긴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열에 익숙했던 고린도 교회는 사람들을 서로 대립하는 편으로 나누는 대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굳세어지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 안에서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6:13–14 본문 →

바울은 개인적인 당부를 이어 가다가 갑자기 짧고 힘 있는 명령들을 제시합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사내답게 용기를 내십시오. 굳세어지십시오.고린도전서 16:13 · 본디새김

이 문장만 따로 읽으면 전쟁을 앞둔 군대에 내리는 명령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내답게 용기를 내십시오(ἀνδρίζομαι)’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성인 남자를 뜻하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여호수아 1:6–9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요구하는 문맥에 사용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남자들에게만 이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편지의 수신자인 공동체 전체에게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남성의 우월성이나 특별한 남성성의 요구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당시 언어의 관용적 표현을 사용하여 공동체 전체에 용기와 담대함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바라는 강함은 어떤 종류의 강함일까요? 바로 다음 절이 그 의미를 결정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일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질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6:14 · 본디새김

네 가지 명령 뒤에 사랑이 놓입니다. 바울은 용기와 힘을 요구한 다음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행사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제한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강함을 자랑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자유와 은사를 자랑했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 힘이 사랑 안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린도 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강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 강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모든 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돈을 모으는 일에도, 여행을 계획하는 일에도, 다른 사역자를 맞이하는 일에도, 권위를 행사하는 일에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바울이 한 당부들과 앞으로 이어질 당부들이 모두 이 문장 안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16:14는 13장의 사랑에 관한 긴 설명을 공동체의 일상에 적용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막연한 이상으로 남지 않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어서 사랑 안에서 행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실제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보여 줍니다.

누가 공동체에서 존중받아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16:15–18 본문 →

스데바나의 집안이 특별한 이유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스데바나의 집안이 아가야의 첫 열매이고 성도를 위한 섬김에 자신들을 바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6:15 · 본디새김

스데바나는 편지 처음에도 등장했습니다. 바울은 1:16에서 자신이 스데바나의 집안에 세례를 베풀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그 지역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초기 신자들이라는 뜻이며, 바울은 그들을 지역 교회의 시작과 연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일찍 믿었다는 사실만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내어놓았다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도움, 환대, 공동체를 돌보는 일 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본문은 무슨 일을 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정체성을 어떤 직분이나 지위보다 섬김의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섬기는 이들에게 복종하라

여러분도 그런 이들에게, 그리고 함께 일하고 수고하는 모든 이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6:16 · 본디새김

이 명령은 조금 뜻밖입니다. 왜 섬기는 사람이 복종을 받는 자리에 놓입니까?

여기서 ‘복종하다’는 질서 아래 자신을 두거나 다른 사람의 지도와 역할을 받아들이는 의미를 지닙니다. 16:16의 대상은 ‘그런 이들’과 ‘함께 일하고 수고하는 모든 이’입니다. 바울은 특정한 가문이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졌거나 오래 믿었으니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공동체를 위해 섬기고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명예 체계와도 긴장 관계를 이룹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사람의 지위는 출생, 재산, 시민권, 후원 관계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도 봉사와 공헌이 존경을 받을 수 있었지만, 바울이 이 자리에서 내세우는 근거는 스데바나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섬김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존중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봉사하는 사람에게 무제한적인 권한이 주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특정한 교회 직분의 권한이나 권력 행사 방식을 세부적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동체가 실제로 자신들을 돌보고 수고하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은 분명합니다. 앞에서 디모데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던 당부도 같은 기준에서 나옵니다.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들

나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와 있어 기쁩니다. 이들이 여러분의 모자란 것을 채웠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6:17 · 본디새김

‘여러분의 모자란 것’이라는 표현은 해석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한쪽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마땅히 제공했어야 할 도움이나 책임을 이들이 대신했다고 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고린도 교회 전체가 바울 곁에 있을 수 없었지만, 이 세 사람이 그들의 빈자리를 채웠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바로 다음 절을 보면 후자의 해석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들이 내 영과 여러분의 영을 쉬게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이들을 알아주십시오.고린도전서 16:18 · 본디새김

그들의 방문은 바울에게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도 쉼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관계를 이어 주는 일을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갈등과 문제들로 가득한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논증하고, 권면하고, 때로 엄하게 경고합니다. 그런 편지의 끝에서 바울은 자신을 쉬게 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자신이 받은 그 쉼을 공동체 전체와 연결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가운데는 돈이나 물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 거리를 찾아와 함께 있어 주고, 관계를 이어 주고, 불안한 마음을 쉬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공동체를 세우는 섬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수고는 공동체 안에서 보이지 않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스데바나의 집안이 아가야에서 최초로 믿은 개인들이었는지, 대표적인 초기 가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 논의할 여지가 있습니다. ‘복종하다’로 옮긴 동사 계열은 고린도전서 14:32, 14:34와 15:27–28에도 사용되지만, 그 문맥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복종 관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관계에서 복종하는지는 각 문맥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또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어떤 소식을 전달했는지,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직접 가져온 사람들이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아시아에서 고린도까지 이어지는 문안

고린도전서 16:19–20 본문 →

집 한 채에 모이는 교회

아시아의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와 함께 주 안에서 여러분에게 각별히 문안합니다.고린도전서 16:19 · 본디새김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를 가리키며, 에베소가 그 지역에 속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 도시에 고립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교회 가운데 바울은 특별히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이름을 적습니다. 사도행전 18:1–3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 부부를 만나 함께 일했습니다. 이들은 바울과 같은 일을 하던 장막 제작자들이었고, 18:18–19에서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이동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 부부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가 고린도에 문안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별도의 예배 건물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자들이 가정에 모여 교회를 이루는 일도 있었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이 그러한 모임의 장소였습니다.

바울은 거대한 조직의 규모나 건물의 크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한 부부의 집에 모이는 사람들도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멀리 떨어진 고린도 교회에 문안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는 서로 만난 적이 없더라도 같은 주님 안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습니다. 여러 도시를 연결하는 것은 바울 개인의 여행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거룩한 입맞춤

형제들이 모두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고린도전서 16:20 · 본디새김

바울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문안을 전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여러분도 서로를 따뜻하게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입맞춤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인사와 애정을 표현하는 행위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의 의식이었는지는 이 문장에서 알 수 없지만, 그가 요구하는 것이 말로 하는 인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서로를 판단하고 비교하며 멸시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편지 끝에서 서로 문안하라는 것은 단순한 예절의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주님께 속한 사람을 형제자매로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다고 믿는지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8:26에서는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로마서 16:3–5에도 이 부부와 그 집에 모이는 교회가 언급됩니다. 그들은 여러 도시를 이동하면서 다른 신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직접 펜을 들다

고린도전서 16:21–24 본문 →

손수 쓰는 문안

이 문안은 나 바울이 손수 쓰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6:21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의 긴 편지가 서기관을 통해 기록되었고 마지막 문안에서 바울이 직접 필기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제까지 여러 공동체의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편지의 마지막을 익명의 규정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문안합니다.

다음 문장은 그 문안의 분위기를 갑자기 바꾸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임하는 저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을 일입니다. 마라나 타.고린도전서 16:22 · 본디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서로 문안하고 사랑 안에서 모든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주를 말합니다. 왜 이런 엄중한 선언이 편지의 끝에 놓입니까?

그는 ‘나 바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의 지혜와 자유와 은사, 자신이 지지하는 지도자들에 관해 수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마지막에 제시하는 기준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만을 내세운다면, 그 모든 것은 복음의 근본적인 방향과 어긋납니다.

‘저주받을 일(ἀνάθεμα)’로 옮긴 말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악담을 퍼붓는 말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는 상태를 나타내는 엄중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어떤 사람을 교회에서 어떻게 징계해야 하는지 상세한 절차를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인 주 예수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마라나 타 — 주님을 향한 고백

그런데 그 엄중한 선언 바로 뒤에 ‘마라나 타’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그리스어로 편지를 쓰다가 마지막에 아람어에서 유래한 표현을 남깁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아람어 표현이 보존되어 사용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우리 주님, 오십시오’라는 간구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기다리는 공동체의 기도가 됩니다. 15:23에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살아난다고 말했던 것과도 연결됩니다. ‘우리 주님이 오셨다’는 선언으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간의 삶과 공동체가 새로운 주권 아래 놓였다는 고백이 됩니다. 두 읽기 중 하나만이 가능한 의미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짧은 아람어 표현에서 중심은 ‘우리 주님’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문안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주님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힘도, 믿음을 지키는 이유도, 공동체가 서로 사랑해야 할 근거도 결국 그분에게 있습니다.

저주 다음에 은혜와 사랑이 온다

22절의 엄중한 말 뒤에 바울은 이렇게 기원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고린도전서 16:23 · 본디새김

앞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으로 보낼 물질적인 선물을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편지를 끝내면서는 주 예수님의 은혜가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은혜를 전달해야 하는 동시에, 스스로 주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성숙하고 완전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도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에게도 잘못과 갈등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직접 드러냅니다.

내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고린도전서 16:24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가 책망한 사람들, 그와 다른 판단을 내렸던 사람들, 아직 공동체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한 수신자 모두에게 자신의 사랑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모두’라는 표현이 앞서 내린 경고를 무효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경고와 책망이 공동체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개인적인 호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에 근거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에 남은 사람들

고린도전서 16:1–24 본문 →

고린도전서 16장을 처음 읽으면 여러 주제가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장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따라가면 그들을 관통하는 질문이 보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추상적인 정의보다 구체적인 관계로 답하며, 그 모든 관계를 하나로 묶는 말이 14절의 ‘사랑 안에서’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높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받은 은혜와 능력도 다른 사람을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16장의 실천적인 권면들은 앞선 신학적 논의와 무관한 부록이 아니라, 바울이 전했던 복음이 돈을 모으는 방법과 누군가를 환영하는 태도에까지 닿는 자리입니다. 다만 이 장이 모든 교회에 하나의 획일적인 조직 형태나 후원 방식을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동들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고린도에는 디모데가 방문할 수도 있습니다. 아볼로는 지금 갈 뜻이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가겠다고 합니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바울 곁에 와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자기 집에 모이는 교회와 함께 문안을 보냅니다. 멀리 예루살렘에는 도움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하고 있는 일도 다르고, 내리는 판단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 연결을 위해 돈을 모으도록 하고, 여행을 계획하고,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하도록 당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직접 펜을 들어 자신의 문안을 남깁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에 전할 마지막 말은 새로운 규정도, 더 강한 경고도 아닙니다. 「내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바울은 편지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마지막 확인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과 떨어져 있고,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바울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편지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바울의 명령보다 더 오래 마음에 머무는 한 장면입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바울이 손수 쓴 사랑의 문안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