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6장 · 모금과 끝인사
사람의 손을 거쳐 도착하는 은혜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장은 뜻밖에도 돈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5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죽음의 소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이르자, 일주일에 얼마씩 돈을 따로 모아 둘 것인지, 누구에게 그 돈을 맡길 것인지, 자신이 언제 어느 도시를 방문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중요한 신학적 설명이 끝나고 평범한 행정 업무가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앞에서 가르쳤던 복음은 마지막 장에서 돈과 여행,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공동체의 관계 속으로 들어옵니다.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보낼 구제금을 「여러분의 선물」이라고 부르는데(3절), 원문에서는 은혜를 뜻하는 말로 이 선물을 부릅니다.
은혜가 어떻게 예루살렘까지 여행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은혜를 가지고 길을 떠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돈을 모아야 하고, 누군가는 믿을 만한 전달자를 골라야 하며, 누군가는 먼 길을 여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공동체가 받은 은혜는 다른 공동체가 손에 쥘 수 있는 도움으로 바뀝니다.
바울의 마지막 관심은 새롭고 거창한 가르침을 덧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실제로 서로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는 매우 엄한 경고와 따뜻한 사랑의 고백이 나란히 놓입니다.
멀리 있는 형제들을 위한 준비
왜 예루살렘인가
이제 성도들을 위해 돈을 모으는 일에 관해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대로 여러분도 하십시오.고린도전서 16:1 · 두루새김
바울은 이 모금을 처음 설명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이 일에 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합니다.
모금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고린도는 로마가 다스리던 아가야 지역에 속한 도시였고, 갈라디아 역시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도록 이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9–10을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의 주요 지도자들과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도 언급합니다. 또한 로마서 15:25–27에서는 이방 사람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통해 영적인 유익을 얻었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도 그들을 섬기는 일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모금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는 자선사업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 안에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모두 예수님께 속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그 하나 됨은 말로만 주장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유대인 신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이방인 신자들은 그들의 필요를 자기 일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어떤 지도자가 더 중요한지를 두고 갈라졌고,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은사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 평가했으며, 주님의 만찬 자리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런 공동체에 바울은 이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수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돈을 모으라고 말합니다.
공동체의 경계가 자기들이 모이는 자리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왜 매주 조금씩 모으라고 하는가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각자 얻은 수입에 따라 얼마씩 따로 모아 두십시오. 내가 도착한 뒤에야 돈을 모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6:2 · 두루새김
바울은 모든 사람이 같은 금액을 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비율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얻은 수입에 따라」, 곧 각자의 형편에 맞게 참여하도록 합니다. 이를 특별히 부유해진 사람만 기부하라는 지시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로 모아 두십시오」로 옮긴 원문의 표현에(τίθημι)는 자기 곁에 놓아 둔다는 말이 있어, 각자가 집에서 모아 두는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매주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이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20:7). 그러나 이 절만으로 당시 모든 교회가 일요일에 정해진 헌금 예식을 시행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특정한 의식보다 미리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방문한 뒤에야 급하게 모금을 시작하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방문한 사도의 권위나 현장의 감정에 이끌려 갑자기 많은 돈을 내게 하기보다, 각자가 자신의 형편을 살피며 꾸준히 준비하도록 하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계획하며 준비하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요란한 열정이 아니라 꾸준한 성실함입니다.
은혜를 누가 가져갈 것인가
내가 도착하면 여러분이 믿을 만하다고 인정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주어 보내겠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의 선물을 예루살렘에 가져가게 하겠습니다.고린도전서 16:3 · 두루새김
두루새김의 「여러분의 선물」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그리스어 카리스(χάρις)로, 은혜, 호의, 선물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에 보내는 구체적인 도움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부유하게 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며, 그 은혜가 사람들 사이의 나눔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연결합니다.
그렇다고 구제금이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호의이자 선물입니다.
바울은 전달자를 혼자 정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믿을 만한 사람들을 인정하도록 하고, 자신도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되면 그들과 동행하겠다고 말합니다. 편지를 언급하는 말은 고린도 교회가 편지로 전달자를 승인한다는 읽기와, 고린도 교회가 고른 사람들에게 바울이 추천서를 써서 보낸다는 읽기가 모두 문장 구조상 가능하며, 두루새김은 뒤의 읽기를 따랐습니다. 어느 쪽이든 전달자를 인정하는 데 고린도 공동체가 참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구제금을 자신의 소유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그 돈은 고린도 교회의 선물이며,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당시 실제로 어떤 회계 절차가 마련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누가 그것을 운반할지도 신중히 다루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선한 마음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실제적인 준비까지 요구합니다.
계획을 세우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에 오래 머물고 싶은 이유
5절부터 바울은 마케도니아를 지난 뒤 고린도로 가겠다는 여행 계획을 설명합니다.
지금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잠깐 보고 마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여러분과 얼마 동안 함께 지내기를 바랍니다.고린도전서 16:7 · 두루새김
바울은 이 편지에서 분열, 성적으로 그릇된 행동, 공동체 내부의 소송, 우상에게 바친 음식, 예배의 무질서 등 심각한 문제를 여러 차례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보내어 꾸짖는 것으로 관계를 끝내려 하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합니다.
갈등을 겪는 공동체라고 해서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곁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편지로 가르칠 수 있지만 편지만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로서 가진 권위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여러 번 등장하는 「어쩌면」
바울은 「어쩌면 여러분 곁에 한동안 머물거나 겨울을 날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어느 길로 갈지, 어느 도시에 머물지, 어느 계절을 보낼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에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조건이 놓입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주님의 허락을 구별합니다.
바울의 의지와 판단은 실제로 작동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자동으로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15–23에서 바울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바꾼 문제 때문에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설명합니다. 언제 방문하고, 얼마나 머물고, 왜 계획을 바꾸는지가 공동체와의 신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열린 문 앞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무르겠습니다. 내게 큰 문이 열려 많은 일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맞서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6:8–9 · 두루새김
보통은 문이 열렸다면 길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문이 열려 있다는 설명 바로 뒤에 맞서는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입니다. 「많은 일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ἐνεργής)로 풀어 옮긴 원문의 말은 실제 효력을 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실제로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가 열려 있다고 판단합니다.
두 사실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맞서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문이 닫힌 것은 아니고, 큰 기회가 있다는 이유로 위험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저항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에 머물겠다고 했고, 여기서는 열려 있는 문 때문에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그는 미래를 완전히 알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에게 아무런 계획도 없다는 뜻이 아니며, 반대로 자신이 세운 계획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계획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계획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에베소는 당시 로마가 다스리던 아시아 지역의 주요 도시였고, 사도행전 19장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한 일과 그곳에서 발생한 갈등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9절의 반대자들이 사도행전 19장의 특정 인물들과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 두 편지의 구체적인 여행 계획을 정확한 시간 순서로 정리하는 데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디모데를 두려움 없이 지내게 하라
디모데가 가면 여러분 곁에서 두려움 없이 지내도록 살펴 주십시오. 그도 나처럼 주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6:10 · 두루새김
왜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본문은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어렸기 때문이라거나 성격이 소심했기 때문이라고 이 구절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를 내세우며 서로 다른 지도자에게 속했다고 주장했고(1:12), 어떤 사람들은 바울 자신의 권위에도 도전했습니다(4:18–21).
그런 공동체에 바울과 함께 일하는 디모데가 찾아갑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지위나 업적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도 나처럼 주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한 가지 이유만 제시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차이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같은 주님께 속한 일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를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가 내게 올 수 있도록 평안히 길을 떠나게 도와주십시오. 나는 형제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6:11 · 두루새김
「하찮게 여기지」(ἐξουθενέω)에 해당하는 동사는 고린도전서 1:28에서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말에 사용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지위와 능력을 하나님의 선택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가르침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찾아온 사역자를 하찮게 여긴다면, 자신들이 배운 복음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는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도 있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돕는 힘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디모데에게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복음을 이해하는 정도를 보여 주는 셈입니다.
아볼로에게 가라고 했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디모데에 관한 당부 뒤에는 아볼로의 이름이 나옵니다.
형제 아볼로에 관해서는, 형제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가라고 내가 여러 번 간곡히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장은 갈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갈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6:12 · 두루새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따르고,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를 따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3:5–9에서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에서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가라고 여러 번 간곡히 권했다는 한 문장이 그 설명을 실제 관계 속에서 확인시켜 줍니다. 바울이 아볼로를 경쟁자로 여겼다면 그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권할 이유가 적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당장은 갈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거절의 이유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아볼로의 결정을 비난하지도 않고, 기회가 되면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간곡히 권할 만큼 분명한 바람이 있었지만, 상대방의 결정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하나의 주님을 섬긴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열에 익숙했던 고린도 교회는 사람들을 서로 대립하는 편으로 나누는 대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거절의 이유로는 아볼로가 자신의 지지자들 때문에 분열이 더 심해질 것을 걱정했다는 해석과, 단순히 다른 일정이나 사역 때문에 방문이 어려웠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원문의 표현을 아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지만, 문맥상 아볼로의 의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강해지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바울은 개인적인 당부를 이어 가다가 갑자기 짧고 힘 있는 명령들을 제시합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 위에 굳게 서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강해지십시오.고린도전서 16:13 · 두루새김
이 문장만 따로 읽으면 전쟁을 앞둔 군대에 내리는 명령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ἀνδρίζομαι)로 옮긴 그리스어는 성인 남자를 뜻하는 단어와 연결된 표현이며, 여호수아 1:6–9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요구하는 문맥에 사용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편지를 받는 공동체 전체에게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남성이 더 뛰어나다는 주장이나 특별히 남자다운 모습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당시 익숙하게 쓰던 표현으로 공동체 전체에 용기와 담대함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바라는 강함은 어떤 종류의 강함일까요?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고린도전서 16:14 · 두루새김
네 가지 명령 뒤에 사랑이 놓입니다. 바울은 용기와 힘을 요구한 다음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한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지식과 자유와 은사를 자랑했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 힘이 사랑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고린도 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강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강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모든 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돈을 모으는 일에도, 여행을 계획하는 일에도, 다른 사역자를 맞이하는 일에도, 권위를 사용하는 일에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16:14는 13장의 사랑에 관한 긴 설명을 현실에 적용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어서 사랑으로 행동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실제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보여 줍니다.
누가 공동체에서 존중받아야 하는가
스데바나의 집안이 특별한 이유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스데바나의 집안은 아가야에서 처음 믿은 사람들이며,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자신들을 바쳤습니다.고린도전서 16:15 · 두루새김
바울은 고린도전서 1:16에서 자신이 스데바나의 집안에 세례를 베풀었다고 말했습니다. 원문에서는 이들을 「첫 열매」(ἀπαρχή)라고 부르며, 두루새김은 그 뜻을 풀어 「처음 믿은 사람들」로 옮겼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지역 교회의 시작과 연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일찍 믿었다는 사실만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내어놓았다고 말합니다. 무슨 구체적인 일을 했는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바울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직분이나 지위보다 섬김의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섬기는 이들에게 복종하라
여러분도 이런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복종하십시오.고린도전서 16:16 · 두루새김
왜 섬기는 사람이 복종을 받는 자리에 놓입니까?
여기서 「복종하고」와 「복종하십시오」는 질서 아래 자신을 두거나 다른 사람의 지도와 역할을 받아들이는 의미를 지닙니다. 16:16의 대상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바울은 특정한 집안이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졌거나 오래 믿었으니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사람의 지위는 태어난 집안, 재산, 시민권, 후원 관계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고대 사회에서도 봉사와 공헌이 존경을 받을 수 있었지만, 바울이 내세우는 근거는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섬김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존중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봉사하는 사람에게 끝없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특정한 교회 직분의 권한이나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자세히 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동체가 실제로 자신들을 돌보고 수고하는 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은 분명하며, 디모데를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라고 했던 당부도 여기서 다시 의미를 얻습니다.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들
나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와서 기쁩니다. 여러분이 함께하지 못한 빈자리를 이 사람들이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6:17 · 두루새김
「여러분이 함께하지 못한 빈자리」(ὑστέρημα)로 옮긴 원문 표현은 해석이 갈립니다. 한쪽은 고린도 교회가 마땅히 제공했어야 할 도움이나 책임을 이들이 대신했다고 읽고, 다른 쪽은 고린도 교회 전체가 바울 곁에 있을 수 없었지만 이 세 사람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고 읽습니다. 두루새김은 두 번째 읽기를 따랐고, 바로 다음 절이 그 읽기에 무게를 싣습니다.
그들이 내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에 쉼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인정해 주십시오.고린도전서 16:18 · 두루새김
그들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관계를 이어 주는 일을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소식을 전달했는지,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직접 가져온 사람들이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갈등과 문제들로 가득한 편지입니다. 그런 편지의 끝에서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쉼을 가져온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 쉼을 공동체 전체와 연결합니다. 먼 거리를 찾아와 함께 있어 주고, 관계를 이어 주고, 불안한 마음을 쉬게 하는 일도 공동체를 세우는 섬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수고는 공동체 안에서 보이지 않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아에서 고린도까지 이어지는 문안
집 한 채에 모이는 교회
아시아의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도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와 함께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따뜻한 인사를 전합니다.고린도전서 16:19 · 두루새김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를 가리키며, 에베소가 그 지역에 속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 도시에 고립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18:1–3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천막 제작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를 만나 함께 일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이동했고(18:18–19),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18:26). 고린도 교회는 이 부부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가 고린도에 인사를 전합니다. 교회는 반드시 따로 마련한 예배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로마서 16:3–5에도 이 부부의 집에 모이는 교회가 언급됩니다. 바울은 한 부부의 집에 모이는 사람들도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는 서로 만난 적이 없더라도 같은 주님 안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
모든 형제자매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고린도전서 16:20 · 두루새김
멀리 있는 교회들의 안부를 전한 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인사하라고 말합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입맞춤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인사와 애정을 표현하는 행위였고, 바울은 그것을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부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식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요구하는 것이 말로 하는 인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서로를 판단하고 비교하며 깔보던 사람들에게 바울은 편지 끝에서 서로 인사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같은 주님께 속한 사람을 형제자매로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바울이 직접 펜을 들다
손수 쓰는 문안
이 인사는 나 바울이 직접 손으로 씁니다.고린도전서 16:2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앞의 긴 편지가 글을 받아쓰는 사람을 통해 기록되었고 마지막 인사에서 바울이 직접 썼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로마서 16:22에는 편지를 기록한 더디오의 인사가 등장하고, 갈라디아서 6:11과 골로새서 4:18에도 바울이 손수 썼음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실제로 받아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여러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편지의 마지막을 이름 없는 규정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인사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임하는 저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저주가 있기를 빕니다. 우리 주님, 오십시오!고린도전서 16:22 · 두루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서로 인사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주를 말합니다.
왜 이런 엄중한 선언이 편지의 끝에 놓입니까?
그는 「나 바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의 지혜와 자유와 은사, 자신이 지지하는 지도자들에 관해 수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바울이 마지막에 제시하는 기준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주」는 단순한 악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는 상태를 나타내는 엄중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어떤 사람을 교회에서 어떻게 징계해야 하는지 절차를 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인 주 예수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마라나 타 — 주님을 향한 고백
그런데 그 엄중한 선언 바로 뒤에 「우리 주님, 오십시오!」가 등장합니다.
원문에서는 이 자리에 아람어에서 유래한 「마라나 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스어를 쓰는 공동체에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아람어 표현이 보존되어 사용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말은 「우리 주님, 오십시오」라는 간구로 읽을 수도 있고(두루새김의 읽기), 「우리 주님이 오셨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 중 하나만이 가능한 의미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간구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기다리는 공동체의 기도가 되어,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15:23과 이어집니다. 선언으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이미 오셔서 공동체가 새로운 다스림 아래 놓였다는 고백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이 짧은 아람어 표현에서 중심은 「우리 주님」입니다.
저주 다음에 은혜와 사랑이 온다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고린도전서 16:23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3절에서 예루살렘으로 보낼 물질적인 선물에도 은혜라는 말을 썼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선물을 전달해야 하지만, 그들 자신도 주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성숙하고 완전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도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못과 갈등이 많은 사람들도 주님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내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고린도전서 16:24 · 두루새김
이것이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바울은 그가 책망한 사람들, 그와 다른 판단을 내렸던 사람들, 아직 공동체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자신의 사랑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물론 「모두」라는 표현이 앞서 내린 경고를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경고와 책망이 공동체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랑은 개인적인 호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맺어진 관계에 근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라나 타」는 그리스어 표기의 단어 구분에 따라 「마라나 타」(우리 주님, 오십시오)와 「마란 아타」(우리 주님이 오셨다)로 나뉩니다. 현대적인 단어 구분만으로 원래 아람어 형태를 확정할 수는 없으며, 일부 해석은 서부 중기 아람어 자료를 바탕으로 명령형 해석에 언어학적 문제가 있다고 보아 완료형으로 읽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의 주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구하는 기도도 주제가 가깝지만, 16:22가 그 구절을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에 남은 사람들
돈과 여행과 사람들의 이름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을 하나로 묶는 말은 14절의 「사랑으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높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고, 그런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받은 은혜와 능력을 다른 사람을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16장의 실천적인 당부들은 앞선 신학적 논의와 무관한 부록이 아니라, 은혜가 사람의 손을 거쳐 실제로 도착하는 모습입니다. 다만 이 장이 모든 교회에 똑같은 조직 형태나 후원 방식을 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6장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고, 그에게 맞서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고린도에는 디모데가 방문할 수도 있고, 아볼로는 지금 갈 뜻이 없지만 기회가 되면 가겠다고 합니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바울 곁에 와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자기 집에 모이는 교회와 함께 인사를 보냅니다. 멀리 예루살렘에는 도움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하고 있는 일도 다르고, 내리는 판단도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바울은 직접 펜을 들어, 새로운 규정도 더 강한 경고도 아닌 「내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는 그들과 떨어져 있고,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이 그들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 보내는, 바울이 손수 쓴 사랑의 인사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