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5장 · 부활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닌 까닭

고린도전서 15장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를 논하는 장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무덤도, 하늘도 아닙니다. 뜻밖에도 그는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로 돌아옵니다. 「언제나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15:58).

죽음에 대한 긴 논증이 어째서 수고에 대한 권면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붙들고 읽으면, 15장의 방향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바울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가를 묻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죽은 사람의 부활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5:11–12).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부활을 부정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그들의 생각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모순을 풀어 가면서 시야를 넓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출발하여 아담과 인류의 역사로, 다시 모든 통치와 권력을 넘어 죽음 자체가 사라질 때로 나아갑니다. 그러고는 씨앗 하나를 손에 쥐게 하고, 그 씨앗이 어떻게 다른 몸으로 자라는지를 보게 합니다.

논증의 마지막에는 두 가지 확신이 남습니다.

죽음은 끝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행한 수고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둘이 어떻게 이어지는지가 15장의 핵심입니다.

읽는 시간 36분소단락 1015장 본문 읽기 →

받은 복음으로 돌아가다

고린도전서 15:1–11 본문 →

논증이 아니라 기억으로 시작하는 이유

바울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들이 이미 받아들인 복음을 다시 들려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알려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 위에 굳게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헛되이 믿은 것이 아니라면, 내가 전한 복음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는 한 그 복음을 통해 구원받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5:1–2 · 두루새김

복음은 한때 믿기로 결심했던 과거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의 핵심을 부정하는 생각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전했던 복음을 다시 말하는 이유입니다. 새로운 가르침을 덧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의 의미를 끝까지 생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그 복음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 여러분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에서 「받은 것」과 「전했기 때문입니다」는 앞서 전해진 가르침을 받아 전달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보다 먼저 전해지던 복음의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전달했다고 설명합니다.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살아나셨고, 보이셨다

바울이 전달한 복음은 네 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받은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소식으로 여러분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셨고, 게바에게 나타나신 뒤 열둘에게 나타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3–5 · 두루새김

죽으셨습니다. 묻히셨습니다. 살아나셨습니다. 나타나셨습니다.

이 네 사건은 두 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죽음에는 묻힘이 뒤따르고, 묻힘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부활에는 나타나심이 뒤따르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목격자들의 증언과 연결됩니다.

「다시 살아나셨고」(ἐγείρω)는 원문에서 완료형으로, 지나간 사건을 말하면서도 그 결과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이 전하는 소식에서 예수님께서는 한때 살아나셨다 다시 사라지신 인물이 아니십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분으로 살아 계십니다.

두 차례 반복되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갑자기 일어난 두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에 드러내신 구원의 일과 이어지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특정 구절을 지목하지는 않습니다.

그 중심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십자가는 단지 의인의 비극적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이 복음의 출발점이고, 부활은 그 죽음으로 이루어진 일이 무효가 되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증인들의 이름이 길게 나오는 까닭

바울은 게바, 열둘,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 야고보, 모든 사도, 마지막으로 자신을 차례로 열거합니다. 오백 명에 관해서는 대부분이 지금도 살아 있다고 덧붙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소식을 오래전 전해 들은 이야기로 취급하지 않고, 그의 시대에 살아 있던 사람들의 증언과 관련된 사건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장은 증인들이 각자 한 말이나 목격 상황을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증인 목록의 마지막에 도달하면 글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맨 마지막에는 유산된 아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8 · 두루새김

「유산된 아이」는 유산되거나 때를 채우지 못하고 나온 아이를 가리킬 수 있는 강한 표현입니다. 단순히 늦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보다 거칠고 불편한 이미지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고,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으니 말입니다.고린도전서 15:9 · 두루새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 바울은 자신을 가장 어울리지 않는 증인으로 여깁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던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바울 자신의 존재가 그가 전하는 복음의 특징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수고했다고 말하면서도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내게 주신 그분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모두보다 더 수고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한 하나님의 은혜가 한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5:10 · 두루새김

은혜와 수고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은혜는 바울의 수고를 필요 없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했습니다.

그가 말한 「헛되지 않았습니다」는 15장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에는 바울 자신의 수고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아는 확신으로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3–5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또는 전해 내려온 복음의 정해진 문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어디까지가 바울 이전에 형성된 문구인지에는 논의가 있지만, 바울이 앞서 전해진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본문에서 분명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와 관련해, 우리 죄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이사야 53:4–12의 고난받는 종을 떠올리게 하며, 부활은 시편 16:10이나 호세아 6:2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본문들이 모두 직접 인용인 것은 아니며, 특히 「사흘째 되는 날」을 호세아 6:2 하나에서 끌어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호세아는 본래 심판을 겪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열둘」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 목격 현장에 정확히 열두 사람이 있었다는 숫자 보고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무엇이 무너지는가

고린도전서 15:12–19 본문 →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문제를 직접 다룹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하고 있다면, 어떻게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고린도전서 15:12 · 두루새김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복음 자체는 받아들이면서도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일은 부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 둘을 서로 다른 종류의 사건으로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므로,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일 자체가 모순이 됩니다.

바울은 그 모순을 하나씩 따라갑니다. 먼저 사도들이 전하는 소식이 헛된 것이 되고, 그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됩니다. 더 심각하게는,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증언했으므로 실제로 그런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에 관해 거짓으로 증언한 셈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에 도움이 되는 상징이 아니라, 복음의 참과 거짓을 가르는 사건입니다.

17절은 논증을 더욱 깊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자기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고린도전서 15:17 · 두루새김

3절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빼면 그 죽음이 가져온 구원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서로 경쟁하는 두 구원 사건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이 하나의 복음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부활을 죄 용서를 이루는 유일하고 독립적인 원인이라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면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그대로 지킬 수 없다고 논증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도 멸망한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8 · 두루새김

원문은 이 절과 6절에서 죽은 신자들을 잠든 사람들로 표현하는데, 두루새김은 두 자리 모두 죽었다는 뜻을 바로 드러냅니다. 잠들었다는 표현이 죽음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그들이 실제로 멸망했다고까지 말합니다. 잠이라는 표현에 담긴 소망은 부활에 근거하므로, 부활이 없다면 그 표현을 떠받치는 약속도 사라집니다.

19절은 이 논증의 바닥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품는 희망이 이 삶에만 해당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고린도전서 15:19 · 두루새김

신앙이 현재의 삶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고난을 감수해 왔습니다. 그 삶이 하나님께서 죽음까지 이기신다는 약속 위에 세워져 있는데, 만약 그 약속이 거짓이라면 그들의 희생과 기다림은 결정적인 토대를 잃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고 싶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논증을 느슨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이 없다면 무엇을 잃는지 끝까지 인정합니다.

그래야 다음 절의 반전이 얼마나 큰 것인지 드러납니다.

첫 열매에서 마지막 원수까지

고린도전서 15:20–28 본문 →

한 사람의 부활이 어떻게 모든 사람의 미래가 되는가

바울은 길게 이어 온 가정을 단번에 뒤집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십니다.고린도전서 15:20 · 두루새김

바울은 더 이상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살아나셨다는 복음의 사실에서 출발하여, 그 사건이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첫 열매」는 수확의 처음 열매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도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는 수확의 일부였습니다(레위기 23:10–11). 첫 열매는 홀로 떨어진 예외가 아닙니다. 뒤따라올 수확에 속한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사례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부활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하나의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담이 등장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두 죽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2 · 두루새김

아담과 예수님은 단순히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대비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의 운명을 대표합니다.

아담 안에서 인류는 죽음의 현실에 놓이고, 예수님 안에서는 생명이 주어집니다. 21절은 이를 「한 사람을 통해」 죽음이 왔고, 「한 사람을 통해」 부활도 온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인간이 본래 지녔던 죽지 않는 성질을 발견하는 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겪는 현실이고, 부활은 그 현실 안으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수님을 통해 가져오시는 새로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22절의 「모두」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한 해석은 아담 안에서 죽는 모든 사람과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는 모든 사람의 범위를 똑같이 이해하여,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일이 인류 전체에 미친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소속의 차이에 주목하고, 바로 다음 23절이 생명을 얻을 이들을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본문은 이 자리에서 모든 개인의 최종 운명을 자세히 논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분명히 하는 것은 아담과 예수님께서 각자에게 속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대표하신다는 점입니다.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첫 열매가 나왔다고 해서 수확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각자 차례가 있습니다. 첫 열매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고린도전서 15:23 · 두루새김

부활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 사이에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간격이 둘 사이의 관계를 끊지는 못합니다.

첫 열매는 이미 나타났고, 수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죽음의 위협 아래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하더라도 아직 죽음이 사라진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 통치의 최종 결과가 모두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원수는 죽음이다

24절부터 바울의 시야는 인류의 부활을 넘어 우주 전체로 넓어집니다.

그다음에는 마지막이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력과 능력을 없애시고,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주실 때입니다.고린도전서 15:24 · 두루새김

왜 부활에 관한 논증에서 갑자기 나라와 통치와 권력이 등장할까요? 바울에게 죽음은 개인의 몸이 피할 수 없는 운명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전체가 아직 완전한 생명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원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다는 말은 하나님께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통치를 끝내시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질서를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두 시편을 함께 사용합니다. 25절의 원수들을 발 아래 두신다는 표현은 시편 110:1을 반영하고, 27절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키셨다」는 시편 8:6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시편 110편의 왕으로서 다스리는 일과 시편 8편의 인간에게 맡겨진 통치를 예수님께 연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대표이실 뿐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통치의 사명이 완성되는 분으로 제시되십니다. 그리고 26절이 그 통치의 마지막 목표를 밝힙니다.

맨 마지막으로 없어질 원수는 죽음입니다.고린도전서 15:26 · 두루새김

바울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일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죽음은 원수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가르쳐 주는 스승도, 영혼을 참된 세계로 데려가는 친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맞서는 마지막 원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일은 그 원수가 사라지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나라를 아버지께 넘겨드리시는 아들

모든 것이 예수님께 복종하게 되지만, 모든 것을 복종시키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제외되십니다(15:27).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께 복종하십니다.

모든 것이 아들께 복종하게 되면, 아들 자신도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시키신 하나님께 복종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8 · 두루새김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복종하신다면,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라는 뜻일까요? 역사적으로 이 구절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본문이 되어 왔습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의 복종을 아버지와 구별되는 질서와 권위의 표현으로 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문맥이 구원의 완성과 예수님의 통치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이 구절에서 곧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지니신 본질이 아버지보다 낮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본문 자체에서 확실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통치가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와 경쟁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라를 아버지께 넘겨주시는 것은 사명이 실패하거나 중단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통치가 향해 온 목적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는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문장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문맥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 반대하는 통치와 죽음이 더는 지배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는 완성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된 일은 이처럼 창조 세계 전체의 회복을 향해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20절에서 레위기의 첫 열매 규정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첫 열매라는 표현은 하나의 수확에 속한 처음 부분과 나머지 부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시편 110편은 본래 하나님께서 왕의 주를 자기 오른편에 앉히시고 원수들을 굴복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왕권의 시입니다. 시편 8편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 세계를 다스릴 존귀한 자리를 주셨음을 찬양합니다.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던 논증이 이 두 시편의 연결에서 다시 의미를 얻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왜 위험을 감수하는가

고린도전서 15:29–34 본문 →

20–28절에서 바울은 죽음이 사라질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그는 갑자기 고린도 교회의 이상한 관행과 자신의 위험한 생활로 돌아옵니다. 그 전환은 예상 밖이지만 논리적입니다. 부활이 실제라면 사람들의 현재 행동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만, 부활이 없다면 그 행동들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잠기는 사람들

부활이 없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셈입니까? 죽은 사람들이 전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왜 그들을 위해 세례를 받습니까?고린도전서 15:29 · 두루새김

이 절은 신약성경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느냐입니다. 해석은 셋으로 갈립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받는 세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소망하며 받는 일반적인 세례, 그리고 고린도인들의 표현이나 바울의 고난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이 절은 실제 대리 의식에 대한 언급이 되기도 하고, 세례와 부활 신앙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 관행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바울이 그 행위를 승인했는지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그 관행을 설명하거나 시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논증에서 이 절이 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전제로 삼아 행하는 일이 있다면,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그 행동의 의미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셈입니다. 바울은 이 관행을 언급한 다음 자신의 삶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또 우리는 왜 언제나 위험에 처해 있습니까?」(15:30)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반복해서 위험에 처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는 투옥과 매질, 여행 중의 위험, 굶주림과 고단함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31절은 그 모든 위험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여러분을 자랑하는 것을 걸고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 두루새김

이 말은 매일 자신을 부인하는 영적 수련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바로 앞뒤 문맥이 실제 생명의 위협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복음 전파는 현재 삶을 보다 편안하게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때로는 살아남을 가능성 자체를 낮추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택한 사람이 부활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사람의 생각으로 에베소에서 맹수들과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을 테니까」라고 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32 · 두루새김

「먹고 마시자」는 이사야 22:13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그 말을 가져와 부활이 없다고 보는 생각이 자신의 희생적인 삶과 얼마나 충돌하는지 보여 줍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쾌락만 추구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33절의 「나쁜 사귐은 좋은 성품을 망친다」는 당시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던 격언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관한 잘못된 생각을 단순한 지식의 오류로 보지 않습니다. 그 생각이 공동체 안에서 퍼지면 사람들의 행동도 영향을 받습니다. 미래에 대한 이해가 현재의 삶을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4절은 단순히 생각을 고치라는 말이 아니라 정신을 바르게 차리고 죄를 짓지 말라는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29절의 세 읽기에는 각기 근거가 있습니다. 대리 세례로 보는 해석은 그리스어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중시합니다. 일반 세례로 보는 해석은 이미 죽은 신자들과 함께 부활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강조하며, 특별한 대리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세례와 부활 신앙의 관계를 말한다고 봅니다. 비유로 보는 해석은 이를 고린도인들이 쓴 표현이나 바울이 선교하며 겪은 고난을 가리키는 말로 읽습니다. 32절의 「맹수들과 싸웠다면」이 실제 경기장에서 짐승과 싸운 사건인지, 자신을 죽일 듯이 공격하던 사람들과의 싸움을 비유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은 에베소의 소요를 기록하지만, 두 사건이 같다고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22장의 본래 문맥에서는 심판의 위기 앞에서 돌이키기보다 먹고 마시는 일에 몰두하는 백성의 태도가 문제 됩니다. 33절의 격언은 고대 그리스 희극 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과 연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떤 경로로 전해졌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씨앗은 자신이 될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5:35–41 본문 →

바울은 이제 다른 질문을 예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어떤 몸으로 옵니까?」고린도전서 15:35 · 두루새김

앞의 논쟁이 부활이 실제로 일어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고, 살아 있을 때 가졌던 힘과 형태도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이전 몸이 그대로 되돌아온다는 것일까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일까요?

바울은 씨앗으로 대답합니다.

뿌리는 것과 자라나는 것은 같은 모습이 아니다

여러분이 뿌리는 것은 앞으로 생겨날 몸이 아니라 씨 한 알뿐입니다. 밀알이든 다른 씨앗이든 마찬가지입니다.고린도전서 15:37 · 두루새김

씨앗을 손에 쥐고 들여다보아도 그 씨앗이 자라나 이룰 식물의 전체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줄기와 잎과 이삭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라난다고 해서 씨앗과 완전히 무관한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 비유로 보여 주는 것은 이어짐과 변화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씨앗은 앞으로 생겨날 몸과 같은 형태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대로 그 씨에 몸을 주시며, 씨앗마다 그 종류에 맞는 몸을 주십니다.고린도전서 15:38 · 두루새김

바울은 부활이 일어나는 생물학적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씨앗이 죽는다는 표현도 모든 씨앗이 싹트기 전에 실제로 죽는다는 과학적 진술이 아닙니다. 그는 「뜻하신 대로」를 말합니다.

비유가 향하는 곳은 생명의 형태를 정하고 몸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현재의 몸만을 보고 하나님께서 주실 몸의 가능성을 모두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몸이 지금의 몸과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씨앗의 비유는 지금 뿌리는 것과 이후 하나님께서 주시는 몸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 비유는 ‘똑같은 것을 그대로 되돌리는 일’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이라는 두 극단을 동시에 넘어섭니다.

창조 세계는 이미 다양한 몸으로 가득하다

바울은 씨앗에서 시작하여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 하늘의 빛나는 천체들로 시선을 옮깁니다. 39절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살이, 40–41절에는 땅에 속한 몸과 하늘에 속한 몸,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등장합니다. 이 나열은 자연 세계가 다채롭다는 감상이 아니라, 창조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는 몸의 차이를 살펴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똑같은 몸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이 알고 있는 한 가지 몸의 형태만으로 하나님께서 앞으로 주실 몸을 제한할 근거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피조물에게 각기 다른 몸을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양한 몸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부활한 몸의 특징을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 몸이 어떤 상태로 살아나는지를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논증에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질서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빛나는 것들, 물고기, 새, 땅의 생물은 창조 이야기에서도 서로 구별됩니다. 바울이 창세기 1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조물에 다양한 형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있습니다.

썩을 몸으로 뿌려지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아난다

고린도전서 15:42–49 본문 →

부활은 무엇을 바꾸는가

42–44절은 네 쌍의 대조로 이루어집니다.

| 뿌려질 때 | 다시 살아날 때 | | --- | --- | | 썩을 몸 | 썩지 않을 몸 | | 부끄러운 몸 | 영광스러운 몸 | | 약한 몸 | 능력 있는 몸 | | 타고난 생명을 지닌 몸 | 영에 속한 몸 |

처음 세 쌍은 변화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썩어 없어질 수 있는 몸이 더는 썩지 않는 몸으로, 부끄러움과 무력함에 놓인 몸이 영광과 능력을 지닌 몸으로 살아납니다. 「부끄러운 몸」은 사람의 몸 자체가 부끄럽거나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앞뒤의 「썩을 몸」 「약한 몸」과 함께 죽음 아래 놓인 사람 몸의 초라함과 무력함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사람이 자기 몸을 버려야 한다는 선언이 아니라, 몸이 놓여 있던 죽음의 지배가 끝난다는 선언입니다.

네 번째 대조가 그 변화를 가장 깊이 설명합니다.

타고난 생명을 지닌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타고난 생명을 지닌 몸이 있다면, 영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5:44 · 두루새김

「타고난 생명을 지닌 몸」(σῶμα)은 그리스어 소마 프쉬키콘(ψυχικός), 「영에 속한 몸」은 소마 프뉴마티콘(πνευματικός)입니다. 이를 물질로 된 몸과 물질이 없는 영혼의 대조로 이해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은 두 경우 모두 「몸」이라는 같은 명사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한 몸」은 단순히 물질이 없는 존재를 뜻한다기보다, 영에 의해 새롭게 생명과 능력을 얻는 몸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 부활한 몸의 정확한 물질적 구성이나 형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 몸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보다, 죽음에 얽매인 현재의 몸과 어떤 점에서 달라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

바울은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아담을 불러냅니다.

성경에도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45 · 두루새김

이는 창세기 2:7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재이며,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첫 아담은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은 자신이 받은 생명을 통해 살아 있는 인류의 시작이 되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긴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는 분으로 제시되십니다. 그래서 부활의 몸을 이해하려면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영」이라는 표현을 예수님께서 성령과 완전히 같은 인격이라는 뜻으로 간단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며, 그 생명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생명의 조건을 넘어섭니다.

흙으로 된 사람의 모습과 하늘에 속한 분의 모습

47절에서 바울은 첫 사람을 「땅의 흙으로 된 사람」, 둘째 사람을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흙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이며 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 물질로 된 창조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셨다는 말도 예수님의 몸이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설명이 아니라, 그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사람의 모습을 입었듯이, 하늘에 속한 분의 모습도 입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49 · 두루새김

사람은 아담의 모습을 지닌 채 죽음에 놓여 있으나, 예수님의 모습을 입는 미래를 갖게 됩니다. 이 절의 동사는 사본에 따라 「입을 것입니다」라는 약속과 「입읍시다」라는 권면으로 갈리며, 두루새김은 미래의 약속으로 읽습니다.

부활은 단지 사람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닮은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2:14–15에서도 바울은 원문에서 같은 계열의 말로 타고난 생명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구별합니다. 그곳의 대조는 한쪽은 육체가 있고 다른 쪽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대한 관계와 삶의 성격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49절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26–27을 떠올리게 하지만, 두 본문이 정확히 같은 말을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사람의 창조와 존엄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주신 존엄과 사명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연결을 성경 전체의 흐름 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49절의 사본 차이는 미래형과 권유형의 차이입니다. 미래형을 따르면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질 변화를 약속하고, 권유형을 따르면 예수님의 모습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두 읽기 모두 문맥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변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0–53 본문 →

바울은 이제 부활의 몸에 관한 설명을 하나의 결론으로 모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5:50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근거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바울은 「영에 속한 몸」이 다시 살아난다고 했으므로, 50절을 몸 자체를 버린다는 선언으로 읽으면 그의 논증이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여기서 「살과 피」는 죽을 수밖에 없는 현재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뒤이은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의 대조가 그 뜻을 분명하게 합니다.

문제는 몸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몸이 썩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으려면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사람도 바뀌어야 한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말합니다. 우리가 모두 죽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변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51 · 두루새김

바울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아직 살아 있어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만약 부활이 단순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일이라면, 죽지 않은 사람에게는 별도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목적은 죽음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현재의 썩을 수 있는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과 살아 있는 사람이 변화되는 일은 모두 같은 목적을 향합니다.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한순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5:52 · 두루새김

「한순간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만큼 짧은 순간을 가리키고, 「눈 깜박할 사이에」가 그 짧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바울은 변화의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하지 않고,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결정적인 하나님의 행동으로 묘사합니다. 나팔은 개인적인 마음속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행동하시는 사건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53절은 이 사건을 옷 입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 썩을 몸은 썩지 않음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죽지 않음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5:53 · 두루새김

「이 썩을 몸」. 「이 죽을 몸」.

바울은 지금 썩고 죽는 존재를 가리키면서 바로 그 존재가 썩지 않음과 죽지 않음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전혀 관계없는 다른 존재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상태를 입는 것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표현은 그 변화가 이전에 없던 것을 받는 일임을 보여 줍니다. 죽지 않음은 사람이 자기 안에서 찾아낸 숨겨진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나팔 소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거나 백성을 모으시는 때, 결정적인 구원과 심판의 때를 알리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9:16–19에서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나팔 소리가 울리고, 이사야 27:13에서는 큰 나팔과 함께 흩어진 사람들이 돌아와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바울이 이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에게 묻다

고린도전서 15:54–57 본문 →

논증은 여기서 마침내 승리의 외침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승리를 선언하기 전에 그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이 썩을 몸이 썩지 않음을 입고, 이 죽을 몸이 죽지 않음을 입을 때,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이 삼켜져 승리가 이루어졌다.」고린도전서 15:54 · 두루새김

「입을 때」와 「이루어질 것입니다」가 이어지며, 원문은 ‘때’와 ‘그때’를 짝지어 그 시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살아나셨지만, 모든 사람이 썩지 않음을 입고 죽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아직 미래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승리와 그 승리의 최종 완성을 구별합니다.

이는 이사야 25:8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25장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시고, 죽음을 없애시며,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모습을 그립니다. 바울은 그 약속이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부활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고 읽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삼켜집니다.

지금까지 죽음은 모든 것을 삼켜 왔습니다. 왕도, 지혜로운 사람도, 강한 사람도 그 앞에서 끝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죽음 자신이 삼켜집니다.

삼키던 자가 삼켜지는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곧이어 죽음을 향해 외칩니다.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 두루새김

이 외침은 호세아 13:14를 반영하지만, 바울은 이를 죽음이 패배한 것을 비웃는 승리의 외침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 독침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이고,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고린도전서 15:5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죽음과 몸과 부활을 이야기했는데, 왜 여기서 죄와 율법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3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 죽음에 대한 승리라면, 그것은 죄의 문제와 분리된 승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어떻게 죄의 힘이 되는지는 이 한 구절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에 관한 또 하나의 긴 논쟁을 시작하지 않고, 곧바로 감사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린도전서 15:57 · 두루새김

바울은 사람이 마침내 죽음에 맞설 힘을 길러 승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 승리는 예수님을 통해 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처음과 끝이 다시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죽음의 승리를 묻는 외침은 사람의 용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죽음을 통과하여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 외침의 근거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13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심판에 직면하고, 그 문맥에서 죽음과 스올을 향한 물음은 심판을 수행할 죽음의 능력을 부르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이사야 25장의 죽음이 삼켜지는 약속과 결합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다시 읽었습니다.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해서는 로마서 7:7–13이 도움이 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율법 자체가 죄인 것은 아니지만, 죄가 계명을 기회로 삼아 사람 안에서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고려하면 15:56은 죽음이 죄와 율법의 문제를 통해 사람을 지배한다는 점을 짧게 모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 본문 →

이제 바울은 긴 논증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5:58 · 두루새김

「그러므로」는 앞의 모든 논증을 현재의 삶으로 가져옵니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기 때문에 현실에서 벗어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을 믿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에서 더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이 장에서는 「헛되다」라는 표현이 되풀이되었습니다. 2절은 「헛되이 믿은 것이 아니라면」이라고 했고, 10절은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으며, 14절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전하는 소식과 믿음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8절은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처음에는 바울 자신의 삶에서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는 고백이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확신이 됩니다.

바울은 모든 노력이 세상에서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성공을 거둔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일이 언제나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도, 실패나 고난이나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룬 일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세운 것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조차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결론짓지 않습니다. 자기 수고의 의미를 끝내 지켜 주시는 분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수고는 「주님의 일」이라는 구체적인 방향을 갖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수고는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하여 예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전체를 고려하면 공동체를 세우는 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일,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 등이 여기에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헛되지 않았습니다」, 14절의 「헛되고」와 「헛됩니다」, 58절의 「헛되지 않다는 것」에는 원문에서 비어 있다, 내용이 없다는 뜻의 같은 계열 표현이 쓰입니다. 또 10절에서 바울이 자신의 수고를 말할 때 쓴 동사와 58절의 「수고」는 같은 어근을 지닙니다.

부활은 무엇을 완성하는가

고린도전서 15:1–58 본문 →

바울이 설명하는 부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의 지배를 끝내시고 창조 세계를 회복하시는 일의 시작입니다. 부활한 몸의 정확한 형태, 죽은 모든 개인의 최종 운명, 마지막 때 사건들의 구체적인 순서는 이 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첫 열매로 살아나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도 그 생명에 참여하고, 이 일은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죽음을 이겨 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충분히 설명한 뒤에야 흔들리지 말라고 권합니다. 왜 부활에 관한 긴 논증이 수고에 관한 권면으로 끝날까요? 하나님께서 죽음을 끝내실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수고를 끝내 무의미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한 몸을 설명하면서 씨앗을 보여 주었습니다. 씨앗은 땅에 뿌려질 때 앞으로 생겨날 몸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자랄지, 어떤 영광을 지닐지, 씨앗의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씨앗에 몸을 주십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 하는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수고가 가져올 모든 결과를 현재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그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앗을 뿌리는 손은 멈출 필요가 없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