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장 · 주님의 날

밤이 깊어도 낮에 속한 사람들

주님의 날은 밤에 찾아오는 도둑처럼 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이상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날이 도둑처럼 여러분을 덮칠 일이 없습니다」(5:4).

도둑처럼 온다면서,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그날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시간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들이 날짜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글이 쓰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날짜가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두 빛의 자녀이고 낮의 자녀」입니다(5:5). 바울의 관심은 주님의 날이 언제 오는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주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반전이 있습니다.

바울은 깨어 있으라고 권하면서도, 그들이 구원받는 궁극적인 근거를 깨어 있는 자신의 능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 깨어 있는 삶의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 냅니다.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고, 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기도하고, 예언을 분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편지의 마지막에 이르면 처음의 도둑과 어둠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표현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을 온전히 지켜 주실 것을 믿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은 그 차이를 따라가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37분소단락 105장 본문 읽기 →

주님의 날은 왜 도둑처럼 오는가

데살로니가전서 5:1–3 본문 →

한편 형제 여러분,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글이 쓰일 필요가 없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바울은 먼저 죽은 신자들도 주님의 오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날이 언제 오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는 날짜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이유는 다음 절에 나옵니다.

여러분 스스로 주님의 날이 밤에 찾아오는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 · 본디새김

「주님의 날」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을 가리키는 새로운 이름만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여호와야훼의 날」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모스 5:18–20을 보면, 당시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날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자신들에게 승리와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 기대를 뒤집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날이 그들에게 빛이 아니라 어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의를 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오심을 무조건 자신들의 승리로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1:14–18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날은 심판의 날로 묘사됩니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여호와야훼의 날은 단순히 미래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악을 심판하고 자신의 통치를 드러내시는 결정적인 때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전통적인 표현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결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의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을 완성하시는 사건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도둑에 비유했을까요? 도둑은 방문 날짜를 미리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온다는 말의 핵심은 도둑의 성격이 아니라 예고되지 않은 도착입니다. 주님의 날이 사람들이 정해 놓은 일정에 따라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어서 사용하는 비유도 같은 사실을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이라고 말할 때, 갑작스러운 무너짐이 임신한 여자에게 산고가 오듯 그들에게 닥치고, 그들은 결코 피하지 못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3 · 본디새김

이 문장에는 두 종류의 확신이 충돌합니다.

사람들은 「평화와 안전」을 말하며 자신들의 삶이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무너짐이 찾아옵니다.

도둑의 비유는 정확한 도착 시점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산고의 비유는 이미 시작된 일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두 비유를 함께 놓으면 바울이 말하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피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평화와 안전」은 누구의 말일까?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로마는 자신의 통치를 통해 평화와 안정이 유지된다는 주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내세웠고, 로마의 평화, 곧 Pax Romana라는 이념은 제국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화폐, 비문, 기념물, 문헌의 증거를 바탕으로 바울의 「평화와 안전」이 로마 제국의 정치적 선전과 연결된다고 보는 읽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조합이 당시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고정된 로마의 구호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 이념과 그리스 도시 사회의 안전에 대한 열망이 함께 배경을 이루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 제국의 공식 구호를 그대로 인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당시의 독자들이 제국의 질서와 도시의 안정 속에서 안전을 찾으려는 사회적 분위기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 정말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정치적 질서나 사회적 안정이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평화와 안전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최종적인 보장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인간이 구축한 어떤 질서도 스스로를 궁극적으로 보장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하는 바로 그때,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날이 닥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모든 사람을 동일한 두려움 속에 남겨 두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때와 시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크로노이(χρόνος) 카이 카이로이(καιρός)입니다. 두 단어는 각각 시간의 경과와 특정한 시기 또는 결정적인 때를 나타낼 수 있지만, 여기서 둘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함께 사용되어 그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간의 문제를 폭넓게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6–7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지금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신 때와 시기를 그들이 아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을 하나의 직접 인용 관계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미래를 인간이 시간표로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합니다. 3절은 예레미야 6:14의 거짓된 평화에 대한 비판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공동체의 깊은 상처를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서 평화가 있다고 말하는 지도자들을 책망합니다. 그 본문에서 문제는 평화 자체가 아니라, 실제로는 평화가 없는데 평화가 있다고 선언하는 거짓된 확신입니다.

날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낮에 속한 사람

데살로니가전서 5:4–5 본문 →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니, 그날이 도둑처럼 여러분을 덮칠 일이 없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4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의 도둑 비유를 뒤집습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오지만,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날짜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소속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고 낮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5 · 본디새김

바울은 여기서 두 번이나 「자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어떤 것의 자녀라는 표현은 그것에 속하거나 그 특징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언제 밤이 끝날지 아는가가 아니라, 어느 쪽에 속해 있는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여전히 밤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고난도 있고, 불확실성도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밤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직 주님의 날이 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낮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에 속한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그들에게 전혀 낯선 사건이 아니며, 그들은 그날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도둑처럼 덮칠 일이 없다」는 말을 신자들이 그날의 모든 사건을 미리 알고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차이는 시간에 대한 정보의 차이가 아니라, 그날을 맞는 사람의 상태와 소속의 차이입니다.

이 점이 바로 다음 권면을 이해하게 합니다.

낮에 속한 사람이 왜 깨어 있어야 할까

데살로니가전서 5:6–8 본문 →

그러므로 우리는 나머지 사람들처럼 자지 말고, 깨어 있고 정신을 차립시다.데살로니가전서 5:6 · 본디새김

바울은 조금 전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낮에 속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깨어 있으라고 권합니다. 이미 빛의 자녀라면 왜 다시 깨어 있으라고 해야 할까요?

바울은 먼저 신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고, 그다음 그 정체성에 어울리게 살라고 권합니다.

낮에 속했으니 낮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때 「자지 말고」라는 표현을 앞 장의 「잠든 이들」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4장에서 잠은 죽은 신자들을 가리키는 비유였지만, 5:6에서 잠은 영적인 무관심이나 방심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주님의 날을 잊고 살아가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졸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이고,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취하지 않고 분별력을 유지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이 이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7 · 본디새김

여기서 밤은 잠과 취함의 시간으로 묘사됩니다. 바울은 모든 밤의 활동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지 못하고 분별력을 잃는 상태를 밤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들이니 믿음과 사랑이라는 가슴 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를 쓰고서 정신을 차립시다.데살로니가전서 5:8 · 본디새김

이제 비유가 다시 바뀝니다.

밤과 낮의 이야기에서 가슴 갑옷과 투구를 입은 군인의 모습으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깨어 있는 사람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위험을 감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을 앞두고 방어 장비를 갖춘 사람처럼 묘사합니다.

그 장비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가슴 갑옷,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입니다. 1장에 등장했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다시 나타난 자리이지만, 역할이 달라졌습니다. 1장에서는 믿음이 일을 낳고, 사랑이 수고하게 하며, 소망이 견디게 했습니다. 5장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신자를 지키는 무장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자신을 지킬까요?

미래의 날짜를 정확히 알아내는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는 확신으로 무장하지도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무장합니다.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날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장이 신자들의 무장이 되다

가슴 갑옷과 투구의 이미지는 이사야 59:1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본문에서 여호와야훼는 의를 가슴 갑옷처럼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십니다. 이사야 59장의 문맥은 사회의 불의와 정의의 부재이며, 여호와야훼는 정의를 실현할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직접 구원과 심판을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바울은 이 이미지를 신자들의 삶에 적용합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의를 나타내던 이미지가, 이제 그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장으로 사용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속한 사람들이 그 구원의 성격에 어울리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힘은 공격적인 지배력이나 폭력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있습니다.

특히 사랑이 갑옷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경계하고, 마음을 닫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신자를 보호하는 무장의 일부로 제시합니다.

물론 사랑이 모든 현실적 위험을 제거하거나 모든 폭력을 막아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두려움이나 적대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삶을 유지하게 하는 덕목입니다.

이 무장이 궁극적으로 무엇에 근거하는지는 다음 절에서 밝혀집니다.

구원이 약속된 이유는 깨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10 본문 →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9 · 본디새김

바울은 여기서 앞의 모든 권면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밝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깨어 있어야 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하고 구원의 소망을 품어야 하는가에 대해, 그들이 진노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 부름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바울은 깨어 있고 정신을 차려야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깨어 살라고 권합니다.

물론 이 구절만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믿음, 구원의 확신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구원의 출발점이 인간의 경계심이나 능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의 근거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고,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다 같이 그분과 함께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0 · 본디새김

그리스도의 죽음은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죽음에는 사람들을 자신과 함께 살게 하시는 구원의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는 주님의 날이 갑작스럽게 오니 깨어 있어야 한다고 권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깊은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음은 그 구원에 어울리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 자체는 인간의 깨어 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있습니다.

「깨어 있든지 자든지」는 무슨 뜻일까?

6절에서 바울은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읽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깨어 있음과 잠듦을 영적인 상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과 잠든 삶을 대조했으므로, 그 표현을 계속 같은 의미로 읽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그리스도의 구원이 인간의 한결같지 못한 경계심이나 영적 상태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금 잠들지 말라고 강하게 권했으므로, 영적으로 잠들어 있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읽으면 앞선 권면과 긴장이 생깁니다.

두 번째는 깨어 있음과 잠듦을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10절은 앞 장에서 시작된 문제로 돌아가, 주님이 오실 때 살아 있든 그 전에 죽었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모두 그분과 함께 살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다만 4장의 「잠든 이들」에는 주로 코이마오마이가, 5장의 「자는 이들」에는 카튜도(καθεύδω)가 사용되어 그리스어 동사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가 반복된다는 이유만으로 10절을 죽음에 관한 표현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그분과 함께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결론은 4:17의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와 밀접하게 연결되므로, 10절을 살아 있는 신자들과 죽은 신자들 모두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강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앞 문맥과의 직접적인 연결은 영적인 깨어 있음의 해석을 뒷받침하지만, 4장에서 시작된 문제와의 연결은 삶과 죽음의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바울이 확실하게 전하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 목적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 누려야 할 확신의 중심은 자신의 준비가 얼마나 완벽한가에 있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권면도 구원받지 못할까 두려워 매 순간 자신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어울리게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소망을 혼자 간직하지 말라고 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구원을 얻도록」에도 작은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페리포이에시스(περιποίησις)는 얻거나 획득하는 일, 또는 제 것으로 삼는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 신자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얻으신다는 의미를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신자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읽기를 택했습니다. 뒤의 읽기를 취하더라도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중심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서로를 세우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5 본문 →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듯이 서로 위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세워 주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1 · 본디새김

이 문장은 5장 전반부의 결론이면서, 후반부를 시작하는 연결점입니다. 주님의 날과 빛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설명의 마지막에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세워 주다」(οἰκοδομέω)에 해당하는 낱말은 본래 집을 건축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낱말을 사람과 공동체를 견고하게 만드는 일을 나타내는 데 사용합니다. 또 바울은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지 않고, 서로 마주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세웁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지도자들과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지도자를 알아주되, 그들의 일 때문에 존중하십시오

그런데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여러분을 이끌며 여러분을 타이르는 이들을 알아주고, 그들이 하는 일 때문에 사랑으로 그들을 넘치도록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2–13 · 본디새김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이끄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세 가지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수고합니다.

주 안에서 이끕니다.

타이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에게 감독이나 장로와 같은 공식 직함을 붙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어떤 직제와 임명 절차가 있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동체가 형성된 초기부터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지도하는 역할이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는 일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지위 자체를 높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공동체를 위해 감당하는 수고 때문에 귀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끌다」(προΐστημι)에 해당하는 낱말은 앞에 서거나 이끄는 일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돌보고 책임지는 의미도 가지므로, 지도자의 권한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감당하는 책임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도자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방식으로 문장을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이 권면의 대상은 공동체 전체이며, 지도자들의 수고를 존중하는 일은 권위 경쟁이나 갈등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이 공동체를 돌보는 일을 맡고 있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돌봄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곧바로 그 생각을 넘어섭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또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이들을 타이르고, 낙심한 이들을 위로하고, 약한 이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오래 참으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4 · 본디새김

바울은 이 일을 지도자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형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공동체를 돌보는 책임은 지도자들의 수고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서로 다른 형편에 놓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라고 말합니다.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타이릅니다.

낙심한 사람은 위로합니다.

약한 사람은 붙들어 줍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오래 참습니다.

자기 책임을 회피하거나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타이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한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책망을 쏟아 낸다면 그 사람은 더욱 낙심할 수 있고, 약한 사람에게 스스로 강해지라고 요구하기만 한다면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상황에 맞는 돌봄을 요구합니다.

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라」는 말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멀리서 충고만 하는 모습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도록 곁에서 붙드는 모습입니다. 오래 참음도 단순히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미숙함이나 어려움 때문에 돌봄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의 성숙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형편에 맞게 돌볼 줄 아는 데서 드러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을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이들에게는 엄하게 말씀하셨고, 죄책과 절망에 눌린 이들에게는 용서와 회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도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도록 권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남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서로를 위해, 또 모든 사람을 위해 언제나 선한 것을 뒤쫓으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5 · 본디새김

이 절에서는 공동체의 돌봄이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이 말하는 것은 내가 받은 악이 앞으로 내가 행할 행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악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나도 악하게 행동할 정당한 이유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라고만 하지 않고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공동체가 서로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수심은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는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악을 갚지 않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뒤쫓다」는 적극적으로 추구하거나 힘써 따라가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선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선한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선의 대상은 공동체 내부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이릅니다. 환난을 겪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가볍지 않은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부당한 폭력을 방치하거나 피해자가 아무런 보호도 요청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피해자의 정당한 보호나 공동체의 책임을 폐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금하는 것은 악에 대한 응답이 또 다른 악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7–21에서도 바울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합니다. 미래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의 손으로 복수와 심판을 완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정의를 이루실 것을 믿으며, 현재에는 선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이들」에 해당하는 아탁토이(ἄτακτος)는 질서에서 벗어나거나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앞 장의 노동에 관한 권면과 데살로니가후서 3:6–12가 그 해석을 뒷받침하지만, 이 단어만으로 그들이 모두 일을 그만둔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낙심한 이들」에 해당하는 올리고프쉬코이(ὀλιγόψυχος)는 문자적으로는 마음이 작거나 기운이 꺾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죽은 신자들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이나 박해 앞에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구체적인 대상은 명시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기뻐하라는 말은 슬퍼하지 말라는 뜻일까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본문 →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쉬지 않고 기도하십시오. 어떤 형편에서든 감사하십시오.」 이 세 문장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너무 익숙한 나머지 문장의 어려움을 놓치기 쉽습니다.

언제나 기뻐하라니,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쉬지 않고 기도하라면 일상적인 일을 멈추고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떤 형편에서든 감사하라는 말은 아무리 끔찍한 일을 겪어도 그것 자체를 좋은 일이라고 인정하라는 뜻일까요?

이 질문들에 대답하려면 먼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환난을 겪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낙심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 타이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권면을 언제나 즐거운 감정을 유지하라는 요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기쁨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6 · 본디새김

바울 자신도 슬픔과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10에서는 자신을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늘 기뻐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근심과 기쁨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바울은 슬퍼하는 신자들에게 슬픔 자체를 금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의 슬픔이 소망 없는 사람들의 슬픔과 같지 않도록 부활의 소망을 알려 주었습니다. 5장의 기쁨 역시 그 소망과 분리해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가 아니라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기쁨은 현실의 모든 상황을 좋게 평가하는 일이 아니라,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소망을 붙드는 태도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

쉬지 않고 기도하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7 · 본디새김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매 순간 소리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해한다면 앞뒤의 권면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자기 손으로 일하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선한 일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끊임없이 기도문만 반복하라는 뜻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쉬지 않고」는 기도가 삶에서 계속되고 중단되지 않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기도는 특정한 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적 의식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며, 기쁨과 염려를 그분 앞에 가져가는 삶의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직접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의 형편을 걱정하며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가 권하는 기도는 자신이 살아온 관계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감사는 악을 선하다고 부르는 일이 아니다

어떤 형편에서든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8 · 본디새김

「어떤 형편에서든」은 모든 상황이나 형편 가운데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본래 좋은 일이므로 그 자체를 감사하라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악을 악이라고 부르고, 불의한 행동을 경계하며, 고난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고통을 고통이 아닌 것으로 꾸미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잊지 않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고통 중인 사람에게 억지로 감사의 감정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릅니다.

바울의 권면은 현실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현실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행동을 기억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세 가지 명령의 마지막에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4:3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했고, 여기서는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어떤 형편에서든 감사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몸을 거룩하게 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 가운데 살아가는 삶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 명령들을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이러한 삶이 가능하도록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신 분이십니다.

영을 끄지 말라 — 그러나 모든 것을 가려 보라

데살로니가전서 5:19–22 본문 →

「영을 끄지 마십시오」에서 「악의 온갖 모양을 멀리하십시오」까지 이어지는 네 문장은 짧지만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의 영이 공동체 가운데 역사한다면, 사람들은 그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무조건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오지 않도록 모두 의심하고 막아야 할까요?

바울은 두 극단을 모두 피합니다.

먼저 영을 끄지 말고 예언의 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한 뒤, 곧바로 모든 것을 가려 보라고 말합니다.

영을 끈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을 끄지 마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9 · 본디새김

「끄다」(σβέννυμι)는 불을 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영의 역사를 불과 연결하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바울은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억누르거나 무시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예언이 등장합니다.

예언의 말들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0 · 본디새김

이 연결을 보면 바울이 특히 염두에 둔 성령의 활동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전해지는 예언적 말씀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예언은 공동체를 권면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활동과 관련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3에서 바울은 예언하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고 권하고 위로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 실제로 어떤 예언이 선포되었는지, 왜 그들이 예언을 업신여길 위험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부 신자들이 예언을 불신했을 가능성도 있고, 예언의 역할을 둘러싼 긴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은 구체적인 사건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예언을 무조건 배척하지 말라고 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려 보고 좋은 것을 굳게 붙드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1 · 본디새김

영을 끄지 않는다는 것이 분별하지 않고 모든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가려 보다」(δοκιμάζω)는 앞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신다고 말할 때 사용했던 동사로, 무언가를 시험하고 판별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4:29에서도 바울은 예언하는 사람들이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분별하도록 권합니다.

예언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검토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말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경험이나 예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말을 모두 거부한다면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이 행하시는 일을 경시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런 말을 모두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가르침이나 인간의 주장까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존중한다는 것과 그 역사를 분별한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에 진지하게 응답하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가려 보고」라는 명령은 예언의 말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차적으로 예언을 비롯한 공동체의 영적 발언들을 분별하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원칙을 가르침과 삶의 여러 영역에 적용할 수는 있지만, 본문에서 출발한다면 먼저 예언을 분별하는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악의 온갖 모양」은 무엇을 피하라는 뜻인가?

악의 온갖 모양을 멀리하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2 · 본디새김

「모양」(εἶδος)으로 번역된 낱말은 눈에 보이는 모습이나 형태를 뜻하며, 종류나 갈래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모든 종류의 악을 피하라는 뜻으로도, 악하게 보이는 모든 것을 피하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라면 악으로 분별된 것을 멀리하라는 명령이고, 두 번째라면 어떤 행동이 실제로 악한지와 별도로 악해 보이는 모습까지 피하라는 명령이 됩니다.

바울은 21절에서 먼저 무엇이 좋은지 가려 보라고 하고, 이어서 악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이 연결은 실제로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을 붙들며 악을 피하라는 읽기, 곧 「모든 종류의 악」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반면 악해 보이는 모습이라는 의미를 고려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피상적인 인상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모든 낯선 표현을 악하다고 선언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는 먼저 가려 보라고 합니다. 분별이 없는 수용도, 분별이 없는 거부도 경계하고, 분별의 결과로 좋은 것을 붙들고 악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공동체에 영적인 열정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열정이 진리와 선을 분별하는 능력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신중하게 분별하고 선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거룩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바울은 마지막 기도에서 그 문제에 대답합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24 본문 →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온갖 면에서 거룩하게 하시기를,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여러분의 영과 목숨과 몸이 온전한 채로 흠 없이 지켜지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 본디새김

바울은 이제 길게 이어진 권면을 마치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앞의 권면들을 단순히 되풀이하지 않고, 그 권면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지 드러냅니다.

앞에서는 신자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서로를 세우고, 오래 참고, 선을 추구하고, 영을 끄지 말며, 모든 것을 가려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들의 힘으로 그 모든 일을 완성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실제로 행동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 행동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온갖 면에서」와 「온전한 채로」라는 표현은 각각 완전함과 온전함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삶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구하지 않고, 사람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보존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영과 목숨과 몸」을 나누어 말할까?

「영과 목숨과 몸」에 해당하는 세 낱말은 각각 영, 목숨 또는 생명, 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세 가지를 나열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래전부터 인간의 본성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이루어졌고, 특히 인간이 영과 혼과 몸이라는 서로 다른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삼분설의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삼분설의 관점에서는 바울이 세 낱말을 구별하여 말한 사실에 주목해, 각각이 인간의 서로 다른 측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바울이 여기서 인간을 세 부분으로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온전히 보존되기를 기도한다고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절의 중심에 놓인 표현은 「온갖 면에서」와 「온전한 채로」이고, 바울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정의하거나 각 부분의 기능을 설명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맥 때문에 이 세 낱말이 빠지는 부분 없이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수사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 낱말 사이에 아무런 의미 차이도 없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절만으로 인간 존재의 정확한 구성 방식을 확정하는 것은 본문의 목적을 넘어섭니다.

여기서 바울이 특별히 언급하는 또 하나의 대상은 「몸」입니다. 앞 장에서 죽은 신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을 전한 뒤, 이제 편지의 마지막에서 신자들의 몸까지 온전히 지켜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인간의 내면만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 아니며, 몸을 포함한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속합니다.

사람들이 말한 평화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평화

5장 앞부분에서 사람들은 「평화와 안전」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의 확신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날 앞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을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두 표현이 동일한 의미의 평화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3절의 평화는 사람들이 안정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상태와 관련되고, 23절의 평화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그분이 이루시는 구원에 연결됩니다. 그럼에도 한 장의 처음과 마지막에 평화라는 표현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심판과 구원의 현실을 외면하는 거짓된 안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일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바울은 그 평화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상태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24절에서 그 기도에 대한 확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이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4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막연한 위로의 표현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신자들의 거룩함과 보존을 위해 기도했고, 이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의 미래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능력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깨어 있어야 하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무장해야 하며, 서로를 세우고 선을 추구하며 모든 것을 가려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종의 끝에서 그들은 자신의 완전함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합니다.

그렇다고 이 선언을 앞선 모든 권면이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오히려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응답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확신하는 것은 신자들이 결코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도 기도가 필요하다

데살로니가전서 5:25–28 본문 →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5 · 본디새김

바울은 지금까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굳게 서기를 바랐고, 사랑이 자라기를 기도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 방향으로 요청합니다.

사도 역시 다른 사람들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기도와 돌봄을 베푸는 위치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도 공동체의 기도를 받는 사람이 됩니다. 지도자만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아니며, 가르치는 사람 역시 공동체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인사하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6 · 본디새김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입맞춤은 가족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인사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도 서로의 소속과 친밀함을 나타내는 인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한 애정 표현을 넘어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맞이하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이 절에서 특히 중요한 낱말은 「모든」입니다. 어느 일부 사람에게만 인사하라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며, 이것은 뒤따르는 마지막 명령에서 다시 강조됩니다.

나는 주님을 두고 여러분에게 엄히 명합니다. 이 편지가 모든 형제에게 낭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7 · 본디새김

「엄히 명합니다」는 맹세와 관련된 엄숙한 요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모든 형제에게 읽어 주는 일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명령하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편지를 읽지 못하도록 막을 위험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도, 주님의 날에 관한 가르침도, 서로를 세우라는 권면도,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라는 명령도 일부 사람들만의 지식으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8 · 본디새김

이것으로 편지가 끝납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에게 거룩함과 사랑, 노동과 깨어 있음, 기도와 감사와 분별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명령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명령들을 모두 완벽하게 수행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보상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끝까지 붙드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은 안전을 말하지만,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말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28 본문 →

3절에서 사람들은 「평화와 안전」을 말했고, 23–24절에서 바울은 「평화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십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둘의 차이는 단순히 세상에는 평화가 없고 교회에는 평화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도 환난을 겪으며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나 자신의 능력에만 맡기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과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현재의 고난을 모두 제거한다는 약속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도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오심을 향해 지켜 가시리라는 소망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바울의 논리는 인간의 노력에서 출발하여 예수님께 도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깨어 있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삶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를 믿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자신들을 부르신 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가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신자들이 모였고, 누군가가 그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환난을 겪은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도,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는 지도자도, 낙심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며 타이름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참으라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이 돌봐야 할 이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의 날에 관한 말씀을 들으며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지막에 듣는 말은 미래의 날짜도, 새로운 경고도 아닙니다.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선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라는 인사입니다.

주님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은혜 가운데 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세워 주면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