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장 · 주님의 날

밤이 깊어도 낮에 속한 사람들

주님의 날은 밤에 찾아오는 도둑처럼 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이상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날이 도둑처럼 여러분을 덮치지 않을 것입니다.」 도둑처럼 온다면서,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그날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시간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들이 날짜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날짜가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반전이 있습니다.

바울은 깨어 있으라고 권하면서도, 그들이 구원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깨어 있는 자신의 능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 깨어 있는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 냅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을 위로하고, 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기도하고, 예언을 잘 살펴보는 공동체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안전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을 온전히 지켜 주실 것을 믿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은 그 차이를 따라가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105장 본문 읽기 →

주님의 날은 왜 도둑처럼 오는가

데살로니가전서 5:1–3 본문 →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써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 · 두루새김

앞 장에서 바울은 먼저 죽은 신자들도 주님의 오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날이 언제 오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는 날짜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때와 시기」는 함께 쓰여 그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간의 문제를 폭넓게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6–7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신 때와 시기를 제자들이 아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이 정하신 미래를 인간이 시간표로 손에 넣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합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이 오듯 찾아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 · 두루새김

「주님의 날」은 구약성경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여호와야훼의 날」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모스 5:18–20에서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날을 자신들의 승리와 구원의 날로 기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그날이 그들에게 빛이 아니라 어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정의를 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오심을 무조건 자신들의 승리로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1:14–18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날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악을 심판하고 자신이 다스리심을 드러내시는 결정적인 때입니다. 바울은 이 오래된 표현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결합니다. 그날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을 완성하시는 사건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도둑에 비유했을까요? 도둑은 방문 날짜를 미리 알려 주지 않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도둑의 성격이 아니라 예고되지 않은 도착입니다. 주님의 날은 사람들이 정해 놓은 일정에 따라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고 안전해.」라고 말할 때, 임신한 여자에게 아이를 낳는 고통이 닥치듯 그들에게 갑자기 멸망이 닥칠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3 · 두루새김

이 문장에는 두 종류의 확신이 충돌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무너짐이 찾아옵니다.

도둑의 비유는 정확한 도착 시점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아이를 낳는 고통의 비유는 이미 시작된 일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피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평화롭고 안전해.」는 누구의 말일까?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에 속한 도시였고, 로마는 자신의 통치를 통해 평화와 안정이 유지된다는 이념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화폐, 비문, 기념물, 문헌의 증거를 바탕으로 이 말이 로마 제국의 선전과 연결된다고 보는 읽기가 있습니다. 반면 평화와 안전을 뜻하는 두 단어의 조합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고정된 로마의 구호였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그리스 도시 사회의 안전에 대한 바람이 함께 배경을 이루었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 제국의 공식 구호를 그대로 인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당시의 독자들이 제국의 질서와 도시의 안정 속에서 안전을 찾으려는 분위기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 정말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평화와 안전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최종적인 보장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인간이 세운 어떤 질서도 끝까지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두려움 속에 남겨 두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비판은 예레미야 6:14와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공동체의 깊은 상처를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서 평화가 있다고 말하는 지도자들을 책망합니다. 그 본문에서 문제는 평화 자체가 아니라, 실제로는 평화가 없는데 평화가 있다고 선언하는 거짓된 확신입니다. 한편 사도행전 1:6–7과 이 본문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직접 인용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날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낮에 속한 사람

데살로니가전서 5:4–5 본문 →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날이 도둑처럼 여러분을 덮치지 않을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4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앞의 도둑 비유를 뒤집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날짜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5 · 두루새김

성경에서 어떤 것의 「자녀」라는 표현은 그것에 속하거나 그 특징을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언제 밤이 끝날지 아는가가 아니라, 어느 쪽에 속해 있는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여전히 밤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고난도 있고, 불확실성도 있고,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의 날이 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낮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장차 완성될 것이지만, 그 구원에 속한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이 그날에 아무런 놀라움도 느끼지 않는다거나, 그날의 모든 사건을 미리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차이는 시간에 대한 정보의 차이가 아니라, 그날을 맞는 사람의 상태와 소속의 차이입니다.

낮에 속한 사람이 왜 깨어 있어야 할까

데살로니가전서 5:6–8 본문 →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어 있지 말고, 깨어서 정신을 차립시다.데살로니가전서 5:6 · 두루새김

이미 빛의 자녀라면 왜 다시 깨어 있으라고 해야 할까요? 바울은 먼저 신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고, 그다음 그 정체에 어울리게 살라고 권합니다. 낮에 속했으니 낮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4장에서 잠은 죽은 신자들을 가리키는 비유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잠은 주님의 날을 잊고 살아가는 영적인 무관심이나 방심을 가리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졸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이고,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취하지 않고 분별력을 유지하는 태도입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사람들은 밤에 취하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7 · 두루새김

바울은 모든 밤의 활동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있지 못하고 분별력을 잃는 상태를 밤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들이니 정신을 차립시다. 가슴에는 믿음과 사랑을 갑옷처럼 입고, 머리에는 구원의 소망을 투구처럼 씁시다.데살로니가전서 5:8 · 두루새김

이제 비유가 밤과 낮에서 군인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위험을 감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을 앞두고 몸을 보호할 장비를 갖춘 사람입니다.

1장에서는 믿음이 일을 낳고, 사랑이 수고하게 하며, 소망이 견디게 했습니다. 5장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신자를 지키는 무장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날짜를 정확히 알아내는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는 확신으로 무장하지도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무장합니다.

사랑이 갑옷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눈에 띕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을 지키려면 마음을 닫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울은 사랑을 신자를 보호하는 무장의 일부로 제시합니다. 물론 사랑이 모든 현실적 위험을 제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은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두려움이나 적대감에 사로잡히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이 무장은 궁극적으로 무엇에 근거할까요? 바울은 다음 절에서 그 근거를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가슴에 입는 갑옷과 투구의 이미지는 이사야 59:1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본문에서 여호와야훼는 사회에 정의를 실현할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의를 가슴 갑옷처럼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쓰신 채 직접 구원과 심판을 행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과 의를 나타내던 이 이미지를 그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장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속한 사람들이 그 구원의 성격에 어울리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힘은 공격적으로 지배하는 능력이나 폭력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이 약속된 이유는 깨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10 본문 →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하신 것은 진노를 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9 · 두루새김

그리스도인들은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바울의 대답은 그들이 진노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 부름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깨어 있어야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깨어 살라고 권합니다. 이 구절만으로 선택과 믿음, 구원의 확신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 문맥에서 구원의 출발점이 인간의 경계심이나 능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페리포이에시스(περιποίησις)는 얻거나 제 것으로 삼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뜻으로도,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 신자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얻으신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읽기를 택했지만,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중심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0 · 두루새김

이 문장은 5장의 중심을 이루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 구원에 어울리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 자체는 인간의 깨어 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잠들지 말라고 했는데, 10절에서는 깨어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깨어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는 영적으로 깨어 있거나 방심한 상태로 읽을 수도 있고, 살아 있거나 죽은 상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앞 문맥과의 연결은 앞의 읽기를, 4장에서 시작된 문제와의 연결은 뒤의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바울이 확실하게 전하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 목적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권면은 구원받지 못할까 두려워 매 순간 자신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어울리게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영적인 상태로 읽으면, 그리스도의 구원이 인간의 한결같지 못한 경계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방금 잠들지 말라고 강하게 권했으므로, 영적으로 잠들어도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읽으면 앞선 권면과 긴장이 생깁니다. 삶과 죽음으로 읽으면, 주님이 오실 때 살아 있든 그 전에 죽었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모두 그분과 함께 살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다만 4장에서 죽은 신자들을 잠든 사람들로 부를 때와 5장에서 잠자는 사람들을 말할 때 쓰인 그리스어 동사는 서로 다르므로, 같은 단어가 반복된다는 이유만으로 이 해석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라는 목적이 4:17의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과 밀접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이 읽기에는 강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서로를 세우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5 본문 →

그러므로 지금 하고 있는 대로 서로 위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굳게 세워 주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5장 전반부의 결론이면서 후반부를 여는 연결점입니다. 주님의 날에 관한 모든 설명의 끝에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세워 주십시오」(οἰκοδομέω)는 본래 집을 짓는다는 뜻의 낱말로, 바울은 이 낱말로 사람과 공동체를 굳게 만드는 일을 나타냅니다. 그는 공동체를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지 않고 서로 마주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세웁니다.

지도자를 알아주되, 그들의 일 때문에 존중하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애쓰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이끌고 타이르는 사람들을 알아주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 때문에 사랑으로 그들을 더없이 귀하게 여기십시오.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2–13 · 두루새김

바울은 이들에게 감독이나 장로 같은 공식 직함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만으로 어떤 직책과 임명 절차가 있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공동체가 형성된 초기부터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지도하는 역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지위 자체를 높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공동체를 위해 감당하는 수고 때문에 귀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이끌고」라는 말도 앞에 서는 일과 함께 돌보고 책임지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 권면은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로 끝나지 않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로 이어집니다. 지도자들의 수고를 존중하는 일은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돌봄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을 타이르고, 마음이 꺾인 사람들을 위로하고, 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오래 참으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4 · 두루새김

바울은 이 일을 지도자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합니다.

질서를 어기는 사람은 타이릅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은 위로합니다.

약한 사람은 붙들어 줍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오래 참습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사랑은 분별력 있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에게 책망을 쏟아 낸다면 그 사람은 더욱 낙심할 수 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 스스로 강해지라고 요구하기만 한다면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붙들어 주며」는 멀리서 충고만 하는 모습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도록 곁에서 붙드는 모습입니다. 오래 참음도 단순히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미숙함이나 어려움 때문에 돌봄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공동체의 성숙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강해지는 데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형편에 맞게 돌볼 줄 아는 데서 드러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이들에게는 엄하게 말씀하셨고, 죄책감과 절망에 눌린 이들에게는 용서와 회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도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도록 권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누구에게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서로에게, 또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좋은 일을 하려고 힘쓰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5 · 두루새김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받은 악이 앞으로 내가 행할 행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의하십시오」라는 말은 공동체가 서로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복수심이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는 갈등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쓰십시오」는 적극적으로 추구하거나 힘써 따라가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선의 대상은 공동체 내부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향합니다. 고난을 겪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을 하라는 이 권면은 가볍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부당한 폭력을 방치하거나 피해자가 아무런 보호도 요청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금하는 것은 악에 대한 응답이 또 다른 악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7–21에서도 그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합니다.

미래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의 손으로 복수와 심판을 완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정의를 이루실 것을 믿으며, 좋은 일을 하려고 힘쓰는 삶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은 질서에서 벗어나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고, 일상적인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앞 장의 노동에 관한 권면과 데살로니가후서 3:6–12가 그 해석을 뒷받침하지만, 이 단어만으로 그들이 모두 일을 그만둔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마음이 작거나 기운이 꺾인 사람들입니다. 죽은 신자들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이나 박해 앞에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체적인 대상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기뻐하라는 말은 슬퍼하지 말라는 뜻일까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본문 →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어떤 형편에서든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6–18 · 두루새김

이 세 문장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어려움을 놓치기 쉽습니다.

언제나 기뻐하라니,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끊임없이 기도하라면 일상적인 일을 멈추어야 할까요? 어떤 형편에서든 감사하라는 말은 끔찍한 일을 겪어도 그것 자체를 좋은 일이라고 인정하라는 뜻일까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도, 마음이 꺾인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권면을 언제나 즐거운 감정을 유지하라는 요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기쁨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10에서 자신을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늘 기뻐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근심과 기쁨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도 그는 슬픔 자체를 금하지 않고, 그 슬픔이 소망 없는 사람들의 슬픔과 같지 않도록 부활의 소망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근거하여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기쁨은 현실의 모든 상황을 좋게 평가하는 일이 아니라,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그 소망을 붙드는 태도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

바울은 신자들에게 자기 손으로 일하고 다른 사람을 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기도문만 반복하라는 뜻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는 기도가 삶에서 중단되지 않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기도는 특정한 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이 아니라, 기쁨과 염려를 그분 앞에 가져가는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바울 자신도 이 편지에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걱정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감사는 악을 선하다고 부르는 일이 아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은 모든 상황이나 형편 가운데서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악을 악이라고 부르고, 고난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고통을 고통이 아닌 것으로 꾸미는 일이 아니며, 고통 중인 사람에게 억지로 감사의 감정을 만들어 내라는 요구와도 다릅니다.

오히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잊지 않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현실을 부정하는 데서가 아니라, 현실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행동을 기억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4:3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어떤 형편에서든 감사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명령들을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이러한 삶이 가능하도록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신 분이십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 — 그러나 모든 것을 잘 살펴보라

데살로니가전서 5:19–22 본문 →

성령께서 공동체 가운데 일하신다면, 사람들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무조건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오지 않도록 모두 의심하고 막아야 할까요?

바울은 두 극단을 모두 피합니다.

성령의 불을 끈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19 · 두루새김

「끄다」(σβέννυμι)는 불을 끈다는 뜻으로 쓰이는 동사입니다. 바울은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억누르거나 무시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예언의 말을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0 · 두루새김

이 연결을 보면 바울이 특히 염두에 둔 성령의 활동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전해지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4:3에서 바울은 예언하는 사람이 사람들을 세우고 권하고 위로한다고 설명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실제로 어떤 예언이 전해졌는지, 왜 예언을 하찮게 여길 위험이 있었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잘 살펴보고, 좋은 것은 굳게 붙드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1 · 두루새김

성령의 불을 끄지 않는다는 것이 분별하지 않고 모든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잘 살펴보고」(δοκιμάζω)는 앞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신다고 말할 때 쓴 동사로, 시험하고 가려낸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4:29에서도 바울은 예언하는 사람들이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분별하도록 권합니다.

예언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살펴볼 수 없는 절대적인 말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말을 모두 거부하면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가볍게 여길 수 있고, 모두 받아들이면 인간의 주장까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진지하게 응답하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이 명령은 예언의 말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므로, 먼저 예언을 비롯한 공동체의 영적인 말들을 분별하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원칙을 가르침과 삶의 여러 영역에 적용할 수는 있지만, 본문에서 출발한다면 먼저 예언을 분별하는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악」은 무엇을 피하라는 뜻인가?

모든 종류의 악을 멀리하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2 · 두루새김

「종류」로 번역된 에이도스(εἶδος)는 눈에 보이는 모습이나 형태를 뜻하며, 종류나 갈래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모든 종류의 악을 피하라는 뜻으로도, 악하게 보이는 모든 것을 피하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앞의 읽기라면 악으로 분별된 것을 멀리하라는 명령이고, 뒤의 읽기라면 악해 보이는 모습까지 피하라는 명령이 됩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무엇이 좋은지 잘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이 연결은 실제로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을 붙들며 악을 피하라는 읽기를 뒷받침하며, 두루새김도 이 문맥에 맞게 「모든 종류의 악」이라고 옮겼습니다. 반면 악해 보이는 모습이라는 의미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모든 낯선 표현을 악하다고 선언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분별이 없는 수용도, 분별이 없는 거부도 경계합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영적인 열정이 진리와 선을 분별하는 능력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신중하게 분별하고 좋은 일을 하려고 힘쓴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거룩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24 본문 →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모든 면에서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지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 두루새김

바울은 이제 길게 이어진 권면을 마치고 기도합니다.

깨어 있으라고, 서로를 세워 주고 오래 참으라고, 모든 것을 잘 살펴보라고 했던 그가 이제는 자신들의 힘으로 그 모든 일을 완성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면에서」와 「온전하고」는 완전함과 온전함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삶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기도합니다.

왜 「영과 혼과 몸」을 나누어 말할까?

이 세 낱말 때문에 오래전부터 인간이 영과 혼과 몸이라는 서로 다른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삼분설의 근거로 이 절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관점은 바울이 세 낱말을 구별하여 말한 사실에 주목합니다. 반면 바울이 인간을 세 부분으로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온전히 지켜지기를 기도한다고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절의 중심 표현이 「모든 면에서」와 「온전하고」이고, 바울은 각 부분의 기능을 설명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낱말 사이에 아무런 의미 차이도 없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절만으로 인간 존재의 정확한 구성 방식을 확정하는 것은 본문의 목적을 넘어섭니다.

바울은 「몸」도 언급합니다. 앞 장에서 죽은 신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그는, 이제 신자들의 몸까지 온전히 지켜지기를 기도합니다. 몸을 포함한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속합니다.

사람들이 말한 평화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평화

5장 앞부분에서 사람들은 「평화롭고 안전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을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두 표현이 같은 의미의 평화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3절의 평화는 사람들이 안정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상태와 관련되고, 23절의 평화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그분이 이루시는 구원에 연결됩니다. 이 평화는 심판과 구원의 현실을 외면하는 거짓된 안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한결같이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4 · 두루새김

누가 이루실 것입니까?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왜 믿을 수 있습니까? 그분이 한결같이 믿을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미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능력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선언이 앞선 권면을 불필요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의 응답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확신하는 것은 신자들이 결코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한결같이 믿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도 기도가 필요하다

데살로니가전서 5:25–28 본문 →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5 · 두루새김

지금까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한 바울이 이제는 반대 방향으로 요청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기도와 돌봄을 베푸는 위치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역시 공동체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자매에게 인사하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6 · 두루새김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입맞춤은 가족과 친밀한 사람들 사이의 인사 방식이었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도 서로의 소속과 친밀함을 나타내는 인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부르며, 일부가 아니라 「모든」 형제자매에게 인사하라고 합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엄숙히 명합니다. 이 편지를 모든 형제자매에게 소리 내어 읽어 주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5:27 · 두루새김

「엄숙히 명합니다」는 맹세와 관련된 엄숙한 요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명령하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편지를 읽지 못하도록 막을 위험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편지의 내용이 일부 사람들만의 지식으로 남아서는 안 되고, 공동체 전체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8 · 두루새김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거룩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서로를 굳게 세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명령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은혜입니다.

이것은 명령들을 완벽하게 수행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끝까지 붙드는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세상은 안전을 말하지만, 바울은 한결같이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을 말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28 본문 →

3절에서 사람들은 「평화롭고 안전해.」라고 말했고, 23–24절에서 바울은 「평화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세상에는 평화가 없고 교회에는 평화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도 고난을 겪고 불확실한 미래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인간이 만든 질서나 자신의 능력에 맡기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을 한결같이 믿을 수 있다는 말은 고난을 모두 제거한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도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지켜 가시리라는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소모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를 믿기 때문에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일입니다. 바울의 논리는 인간의 노력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께 도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 편지가 공동체 안에서 소리 내어 읽히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고난을 겪은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도, 공동체를 위해 애쓰며 이끄는 사람도, 마음이 꺾인 사람도, 약한 사람도 같은 편지를 듣습니다.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온다는 말씀을 듣고, 자신들은 빛의 자녀라는 선언도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타이름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돌봐야 할 이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지막에 듣는 말은 미래의 날짜도, 새로운 경고도 아닙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한결같이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자신들을 부르신 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은혜 가운데 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굳게 세워 주면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