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하나님을 기쁘게

먼저 잠든 사람도 뒤처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오래 기다려 온 주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오실 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분을 맞이할 수 있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은 그 영광스러운 만남에서 제외되는 것일까요? 주님을 믿고 기다리다가 죽었다면, 그 믿음과 기다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후반부에는 이런 물음이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계산해 주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 영혼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이 놓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잠든 이들보다 결코 앞서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먼저 죽은 사람들도 주님과 함께할 미래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13절부터 시작됩니다. 그 앞에는 성적인 절제와 형제 사랑, 조용히 지내며 자기 손으로 일하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전혀 다른 두 주제를 한 장에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에게는 둘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리고 그 기다림이 끝나기 전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4장은 이 두 질문에 차례로 대답합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114장 본문 읽기 →

이미 걷고 있지만, 더욱 풍성히 걸어가라

데살로니가전서 4:1–2 본문 →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이제 남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청하고 권합니다. 어떻게 걷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지를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받은 대로 — 또 실제로 그렇게 걷고 있듯이 — 더욱 풍성히 그리하라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 · 본디새김

바울은 여기서 편지의 방향을 바꿉니다.

지금까지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과 사랑을 기뻐하고, 그들의 형편을 걱정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걷고 있듯이 — 더욱 풍성히」라는 짧은 표현이 4장 전반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신앙을 제대로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단순하게 나누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기준에 도달한 뒤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걷다」는 앞서 2:12에 나왔던 삶의 비유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합당하게 걷도록 사람들을 권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걸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통해 여러분에게 어떤 말을 일러 주었는지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2 · 본디새김

두 절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반복됩니다. 바울의 권면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생활 방식을 강요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께 속한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앞으로 나오는 명령들은 그저 종교적인 도덕 규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부르셨습니다(2:12). 바울은 새로운 삶을 통해 주님께 속할 자격을 얻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그 첫 번째 주제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다 — 그런데 왜 성적인 문제부터 말할까

데살로니가전서 4:3–5 본문 →

하나님의 뜻은 이것, 곧 여러분이 거룩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여러분이 음행을 삼가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3 · 본디새김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매우 단정적으로 말하고, 이어서 음행을 삼가라고 합니다. 이 문맥에서 하나님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원하시는 삶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단순히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훌륭해지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구별된 삶과 관련됩니다.

왜 하필 성적인 문제일까요?

데살로니가는 그리스·로마 세계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사회의 성적 관습은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친 윤리와 여러 면에서 달랐고, 특히 남성의 성적 행동과 여성의 정절에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관습이 널리 존재했습니다. 물론 그리스·로마 세계에도 절제와 정절을 높이 평가하는 철학적·도덕적 전통이 있었으므로, 이방 사회 전체를 하나의 모습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이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방식 가운데 새롭게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변화가 성적인 삶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음행」(πορνεία)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성적으로 부도덕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가리키는 폭넓은 표현이어서 정확한 범위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성적 행동이 거룩함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여러분 각 사람이 자기 그릇을 거룩함과 존귀함 가운데서 얻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전체에서 번역과 해석이 특히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 그릇」의 원문 스큐오스(σκεῦος)는 본래 그릇이나 도구를 가리키며, 사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데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자기 몸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앞뒤 문맥이 음행과 욕정을 이야기하므로, 성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몸을 존중하며 살아가라는 의미가 됩니다.

두 번째 해석은 자기 아내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얻다」에 해당하는 동사 크타오마이(κτάομαι)가 무언가를 획득한다는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아내를 맞는 일을 거룩함과 존귀함 가운데 행하라는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과 그리스어 표현에 근거를 가지고 있어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으로 읽으면 자신의 몸과 성적 욕망을 다루는 일이, 아내로 읽으면 결혼 관계를 맺는 방식과 그 안에서의 거룩함과 존귀함이 강조됩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그릇」이라는 비유를 다른 사람을 소유하거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다음 절과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처럼 욕망에서 나온 욕정으로는 그릇을 얻지 않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5 · 본디새김

바울이 말하는 거룩함은 몸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몸과 성적인 관계를 하나님께 속한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는 태도입니다.

몸 역시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리고 그 몸은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의 미래에서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4장 후반부에서 바울이 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지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부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점은 고린도전서 6:12–20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바울은 신자의 몸이 주님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것처럼 신자들도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의 몸이 거룩한 영의 성전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몸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거나 영적인 삶과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는 생각과 다릅니다.

거룩함의 문제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데살로니가전서 4:6–8 본문 →

또 여러분이 이 일에서 도를 넘거나 각자 자기 형제를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에 대해 보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에 말하고 엄히 경고해 둔 그대로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6 · 본디새김

앞에서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였습니다. 음행을 삼가고, 자신의 그릇을 거룩함과 존귀함 가운데 다루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성적인 문제를 개인의 욕망이나 절제력에 관한 문제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거나 이익을 취하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해석이 갈립니다. 「이 일에서」를 앞의 성적 윤리와 연결하면, 성적인 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권리와 존엄을 침해하는 일, 특히 다른 사람의 배우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일까지 금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일반적인 거래나 재산상의 부당한 이득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넘어간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3–5절이 성적인 문제를 다루고 7절이 다시 더러움과 거룩함을 대조한다는 점에서 앞의 흐름 속에서 읽는 데 상당한 문맥적 근거가 있지만, 본문이 정확히 어떤 구체적 행위를 겨냥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에 대해 보응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바울이 두려움을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뜻일까요? 이 선언은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의미로 들립니다. 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해도 아무도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사랑과 신뢰는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거룩함은 개인이 자신의 도덕적 상태를 관리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들의 존엄을 지키는 일과도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더러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함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7 · 본디새김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바울은 거룩한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자신에게 관심 갖게 만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 부르심에 어울리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것을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자신의 거룩한 영을 또한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립니다.데살로니가전서 4:8 · 본디새김

이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바울 개인의 도덕적 취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거룩한 영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삶을 요구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삶을 살아가도록 자신의 영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단순히 인간의 절제력에 의존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분의 영을 주시는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36:25–27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깨끗하게 하고 새 마음을 주며,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어 자신의 규례를 따라 살아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의 말씀은 포로와 회복이라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주어졌고 바울이 이 본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며 그들 안에서 새로운 순종을 이루신다는 주제는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 배운 사랑은 손으로 일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데살로니가전서 4:9–12 본문 →

그런데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는 우리가 써 보내는 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9 · 본디새김

바울은 형제 사랑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면서, 뜻밖에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았다」(θεοδίδακτος)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낱말을 옮긴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그 가르침이 어떤 방식이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그들이 실제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에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형제를 더욱 풍성히 사랑하기를 권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0 · 본디새김

그들의 사랑은 자기 교회의 경계를 넘어 나타났습니다. 어떤 형태의 도움과 교류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더욱 풍성히」 살아가라고 했던 바울이, 10절에서는 형제 사랑을 「더욱 풍성히」 실천하라고 합니다. 그는 이미 이루어진 일을 인정하고, 그 일이 더욱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한 번 충분히 했으니 이제 끝내도 되는 과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이어 다소 의외의 권면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지내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여러분의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도록 권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일러 준 그대로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1 · 본디새김

조용히 살아가는 일을 힘쓰라

「힘쓰다」(φιλοτιμέομαι)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원래 명예를 추구하거나 어떤 일을 자신의 포부로 삼아 열심히 추구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바울이 힘써 추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조용히 지내는 일입니다. 큰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일에 전념하는 것을 포부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격이 내성적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담대히 말해야 했던 바울 자신도, 일상에서는 다른 사람의 삶에 불필요하게 간섭하지 않고 자기 책임을 감당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 가운데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 기대하며 일상적인 노동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6–12에는 실제로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4장만으로 그 원인을 확정할 수는 없고, 바울이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은 조용하고 책임 있는 삶입니다.

밖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품위 있게 걷고 아무것도 모자랄 것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2 · 본디새김

첫째 관심은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 맺는 관계입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아무리 깊은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일상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계속 부담을 준다면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둘째는 경제적 자립과 관련됩니다. 「아무것도 모자랄 것이 없게」는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연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고후 8–9장).

여기서 2장의 바울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했다고 했습니다(2:9). 바울이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것이 공동체의 생활 원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돕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지 않는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 나면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지금의 삶을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면, 그 기다림이 끝나기 전에 죽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잠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데살로니가전서 4:13 본문 →

그런데 형제 여러분, 우리는 잠든 이들의 일에 관해 여러분이 모르고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소망이 없는 그 밖의 사람들처럼 여러분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3 · 본디새김

이 절에서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 표현은 유대교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비유를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합니다. 잠든 사람은 다시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그저 가벼운 잠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뒤에서 그들을 분명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이라고 부릅니다(4:16). 그들은 실제로 죽었고, 그 사실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몰랐을까요?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14절에서 그 믿음을 논증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의 부활이 먼저 죽은 형제자매들의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일까요? 그는 「소망이 없는 그 밖의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슬픔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슬픔이 소망 없는 슬픔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비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죽음 이후에 관해 아무런 믿음도 갖지 않았다고 역사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도 죽음 이후의 삶을 다양하게 이해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대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슬퍼합니다. 함께하던 사람이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아프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그런 상실이 상실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슬픔 가운데 새로운 사실을 알려 줍니다.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면

데살로니가전서 4:14 본문 →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음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도 그와 같이 예수를 통해 잠든 이들을 예수와 함께 데려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4 · 본디새김

바울이 죽은 신자들의 미래를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내세우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는지가 아닙니다.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기다렸는지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13절에서는 죽은 신자들을 「잠든 이들」이라고 불렀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잠은 죽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비유이기도 하므로 이 차이를 암호처럼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바울의 논증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셨고, 실제로 살아나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될 수 있을까요? 단지 어떤 사람이 다시 살아났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예수님께 일어난 구원의 사건은 그분께 속한 사람들의 운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믿었던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를 이해하려면 죽음 자체보다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라는 말이 「잠든 이들」에 붙는지 「데려오실 것」에 붙는지는 갈리지만, 어느 쪽으로 읽든 중심은 같습니다. 죽은 신자들의 미래는 예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님과 함께 데려오실 것입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 죽은 사람들의 현재 위치나 부활 이전의 상태를 상세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예수를 통해」는 앞의 「잠든 이들」과 연결하면 예수님과 연결되어 죽은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뒤의 「데려오실 것」과 연결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잠든 사람들을 데려오신다는 뜻이 됩니다. 두 해석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며, 낱말 배열만으로 어느 한쪽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0–23에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라고 부르면서 이 관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가 뒤따라올 수확과 떨어져 있지 않듯,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분께 속한 사람들의 미래를 여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먼저가 아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5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곧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잠든 이들보다 결코 앞서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무엇을 염려했는지 보여 주는 단서입니다. 바울은 죽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살아날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살아 있는 신자들이 그들보다 앞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먼저 죽은 사람들이 주님의 오심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불리한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추측으로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말합니다. 이 말이 전승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인지, 알려지지 않은 말씀을 전하는 것인지, 주님께서 주신 계시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소망이 주님의 권위에 근거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바울은 「그때 살아 있을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신도 그날까지 살아 있으리라 기대했다는 견해와, 신자들을 대표해 말한 표현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본문은 그가 주님의 오심을 얼마나 가까운 미래로 예상했는지 확정할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날을 자신과 신자들의 삶에 직접 관계된 미래로 이야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대답하려는 질문은 그날이 언제 오는가가 아닙니다. 그날이 왔을 때 먼저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복음서에도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0–31에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고 천사들이 나팔 소리와 함께 선택받은 사람들을 모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신자들이 먼저 죽은 신자들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내용을 그와 똑같은 형태로 전하는 말씀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 관해서는, 바울이 자신을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포함하여 말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가 실제로 그날까지 살아 있을 가능성을 기대했다고 보는 견해와, 주님이 오실 때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대표적 표현일 뿐 바울 자신의 생존을 확신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호령과 나팔 소리 가운데 먼저 일어나는 사람들

데살로니가전서 4:16 본문 →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호령, 천사장의 목소리, 또 하나님의 나팔 소리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이 먼저 살아날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6 · 본디새김

호령이 울립니다.

천사장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십니다.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는 사건의 분위기는 없습니다. 「호령」은 지휘관이 군대에 명령할 때 쓰는 외침을 가리킬 수 있는 말로,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명령과 권위를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바울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소리의 정확한 수나 순서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 가운데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있는 나타나심을 연상시키는 장엄한 표현들이 예수님의 오심에 사용됩니다. 바울에게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인물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주님이시며 장차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사건의 중심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장엄한 장면 가운데 바울의 논증이 도달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이 먼저 살아날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죽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은 그 순서를 뒤집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납니다.

이것은 부활 사건의 시간표가 아니라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두려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죽었다는 이유로 주님의 구원에서 잊힌 사람들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실제였던 것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살리실 미래도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어딘가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소망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조금 더 깊이

본문은 누가 호령을 내리는지 밝히지 않으며, 호령과 천사장의 목소리와 나팔 소리가 독립된 세 소리인지 하나의 사건을 여러 표현으로 묘사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호령」에 해당하는 낱말은 배에서 노 젓는 사람들에게 지시할 때도 쓰이며,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출애굽기 19:16–19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시나이산에 나타나실 때, 이사야 27:12–13에서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야훼께 예배할 때 울립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역사적 문맥을 갖고 있고 바울이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백성의 모임을 알리는 나팔이라는 이미지는 주님의 오심을 이해하는 배경이 됩니다. 이 대목은 다니엘 12:2와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극심한 박해의 시대를 배경으로 땅의 티끌 가운데 잠든 많은 사람들이 깨어날 것이라는 소망이 선포되는데, 바울은 그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새롭게 설명합니다. 부활의 몸이 어떤 모습인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고린도전서 15:35–54에 나오지만,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그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함께 주님을 맞이하다

데살로니가전서 4:17 본문 →

그다음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같은 때에 함께 구름 가운데 주님을 맞으러 공중으로 잡아채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7 · 본디새김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가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와 함께 있게 되는가입니다.

「그들과 같은 때에 함께」

「그들」은 바로 앞 절에서 먼저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맞으러 올라간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원문에는 동시에, 그리고 함께라는 의미가 겹쳐 나타납니다.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납니다. 그다음 살아 있는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주님을 맞이합니다. 더 이상 두 집단은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죽음이 만들어 놓은 구분을 넘어서는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맞으러」라는 표현

「맞으러」(ἀπάντησις)에 해당하는 낱말은 존귀한 인물이 도착할 때 사람들이 나가 그를 맞이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만으로 주님을 만난 뒤의 이동 방향을 확정할 수는 없고, 본문도 그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설명이 도달하려던 곳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최종적인 거처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하지도, 주님의 오심을 둘러싼 모든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더 이상 그분과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7절의 「잡아채어질 것」은 흔히 휴거라는 말과 함께 읽히지만, 이 본문은 그 일이 대환난 이전인지 이후인지, 주님의 오심과 분리된 별도의 사건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질문은 언제 어떤 순서로 세상을 떠나는가가 아니라, 먼저 죽은 사람들도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들도 함께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 있는 신자들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먼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과 살아서 주님을 맞이한 사람들이 함께 포함됩니다. 죽음이 갈라놓았던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다시 하나의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맞으러」의 그리스어 아판테시스는 마태복음 25:6과 사도행전 28:15에도 쓰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신랑이 오자 그를 맞으러 나가는 사람들이, 사도행전 28장에서는 바울을 맞이하려고 도시 밖으로 나왔다가 함께 로마로 향하는 신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용례를 바탕으로 일부 해석자들은 신자들이 주님을 맞이한 뒤 주님과 함께 그분의 통치가 드러나는 곳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이해하지만, 이 구절만을 근거로 이후의 이동 경로나 사건의 자세한 순서를 완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잡아채어질 것입니다」는 강하게 붙잡아 끌어 올리거나 낚아채는 것을 뜻하는 동사의 미래 수동형이며, 라틴어 성경은 이를 rapiemur로 옮겼습니다. 영어의 rapture, 곧 휴거라는 말은 이 라틴어 계열의 표현과 연결됩니다. 일부 기독교 전통은 이 구절을 대환난 이전에 신자들이 들려 올라가는 사건으로, 다른 전통은 주님이 영광 가운데 오실 때 신자들이 그분을 맞이하는 하나의 종말 사건으로 해석하며, 각 입장은 마태복음 24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계시록 등을 어떻게 연결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본문에서 그런 시간표를 확정하는 것은 바울이 직접 대답하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것을 알았으니 서로 위로하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4:18 본문 →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데살로니가전서 4:18 · 본디새김

바울의 설명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지식을 더욱 정교하게 정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상세하게 상상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 한 문장이 앞의 긴 설명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냅니다. 바울은 종말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썼습니다.

「서로」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신만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으로 남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먼저 죽은 형제를 그리워하며 슬퍼할 때, 다른 사람이 그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그 사람이 주님의 오심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소망은 개인이 마음속에 간직하는 위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로하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슬픔을 억누르라고 하지 않고, 상실을 경험한 사람에게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 자신도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견딜 수 없다고 했을 만큼, 사람과 헤어지는 일은 그에게 깊은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 더 성숙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위로는 슬픔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슬픔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일입니다.

거룩한 일상과 부활의 미래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데살로니가전서 4:1–18 본문 →

3–12절은 몸을 거룩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이용하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고, 자기 손으로 성실하게 일하라고 가르칩니다. 13–18절은 죽은 신자들의 부활과 주님의 오심을 이야기합니다. 두 부분을 잇는 것은 하나의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셨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며, 이 사실이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과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을 함께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몸을 가진 인간을 구원하시고 죽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기에, 지금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버려야 할 준비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이용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장차 「그들과 같은 때에 함께」 주님 앞에 설 사람들입니다.

편지를 읽는 데살로니가 신자들 가운데는 먼저 잠든 형제자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기다리면서도, 그 사람이 그날에 함께하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

바울의 설명이 끝나는 자리에서 죽음은 여전히 슬픈 현실입니다.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고,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도 다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른 소망을 품고 슬퍼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먼저 잠든 사람들도 그 자리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들은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말씀을 서로에게 전해 주라고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