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인사와 위로
바뀐 약속과 변하지 않는 신실함
사도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했지만, 계획을 바꾸었고 결국 오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그의 말과 행동을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의 결정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행 계획부터 해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신이 죽을 것 같았던 일을 털어놓고, 고린도인들이 자기와 함께 고난과 위로를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뒤에야 방문 계획을 바꾼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회복하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평판이 아닙니다. 고린도인들이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권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장의 첫머리에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고, 마지막에는 「여러분의 기쁨을 위한 동역자」가 서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고난을 겪고, 구원을 경험하고, 오해를 받으며, 자신의 행동을 변호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보내는 사도의 편지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고린도전서 1:1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 편지에서는 그 말이 특별한 무게를 지닙니다. 뒤이어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행동을 변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라는 지위는 바울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받는 공동체 역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도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왔지만, 교회의 소유권이 사도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균형은 마지막 절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얻게 됩니다.
편지에는 디모데의 이름도 함께 올라갑니다. 그는 단순한 수행원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뒤의 1:19에서는 디모데가 바울과 실루아노와 함께 고린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람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수신자는 고린도 교회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도 편지가 보내집니다. 고린도가 속한 아가야는 로마의 속주였으며, 바울이 다루는 문제는 고린도라는 한 도시의 사적인 갈등을 넘어 다른 신앙 공동체에서도 읽힐 수 있는 내용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이 인사말은 곧이어 나오는 이야기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고 말할 것이며(1:12), 그 은혜를 따라 고린도인들을 대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사로 주어진 은혜가, 뒤에서는 사도의 행동을 설명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위로하시는가
바울의 첫 번째 본격적인 문장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찬양받으실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자 아버지, 곧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후서 1:3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나 만물의 창조주라고 소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자비와 위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제거하시는 분으로 먼저 소개되지 않습니다.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로하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위로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3절부터 7절까지 그리스어 본문에는 ‘위로하다’와 ‘위로’를 뜻하는 같은 어근의 말이 열 번 등장합니다. 바울은 같은 단어를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되풀이함으로써 위로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네는 위로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았던 바로 그 위로입니다.
4절의 「이는 … 위로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는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목적을 설명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이 위로받는 것은 그 자체로 귀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위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환난 앞에서 무력하게 서 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위로는 개인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받는 위로도 넘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5 · 본디새김
고난도 넘치고 위로도 넘칩니다. 바울은 고난을 겪는 양만큼 자동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계산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겪는 삶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로가 풍성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앞뒤 문맥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바울과 고린도인들에게도 실제로 닥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때문에 신자들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보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반복하여 구원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는 과정에서 고난을 나누는 일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고, 위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겪으신 분일 뿐 아니라,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위로도 함께 나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고,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의 위로를 위한 것입니다. 곧 우리도 겪는 바로 그 고난을 견디어 내는 가운데 작용하는 위로입니다.고린도후서 1:6 · 본디새김
이것은 자신의 고난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겪는 바로 그 고난」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인들도 고난을 겪습니다. 바울만 고생하고 고린도인들은 그의 희생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견디어 내는」이라는 표현은 위로의 효과가 고난의 즉각적인 소멸로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위로는 고난 속에서 작용하며 사람을 견디게 합니다. 단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도록 붙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돌보심입니다.
7절의 「동반자」는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자기 고난에 동정을 표하는 관객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소망은 굳건합니다. 그들이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난을 이겨 낼 능력을 증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고난을 나누듯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에도 참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3–7절에 되풀이되는 말은 동사 ‘위로하다·격려하다’와 명사 ‘위로·격려’입니다. 이사야 40:1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하시고, 이사야 49:13에서는 고난받는 백성을 위로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 말씀들은 원래 유배와 회복을 둘러싼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에 속하며, 바울이 여기서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당하는 백성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주제는 이어집니다. 다만 바울은 그 위로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흘러온다고 말합니다. 5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그리스어 표현은 그리스도와 고난 사이의 관계를 하나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겪으신 고난,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고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나누는 고난이라는 해석들이 가능합니다. 문맥상 단순히 예수님의 과거 고난을 떠올리는 것보다, 신자들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살아남을 희망마저 잃었던 사람
앞에서 바울은 위로에 관하여 풍성하고 확신에 찬 언어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가장 무력했던 경험을 털어놓습니다.
사실, 형제 여러분, 아시아 속주에서 우리에게 닥친 환난을 여러분이 모르고 지나가기를 우리는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견딜 힘을 넘어설 만큼 심하게 짓눌렸고, 그래서 살아남을 희망마저 잃었습니다.고린도후서 1:8 · 본디새김
바울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견뎌 냈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실제로 있었다
여기서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라 에베소 등을 포함하는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을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종류보다 바울이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입니다.
그는 「견딜 힘을 넘어설 만큼」 짓눌렸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죽을 것 같았습니다.
도리어 우리 자신이 마음속에 사형 선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1:9 · 본디새김
그에게 죽음은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그런데 9절 후반에는 뜻밖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살아남을 희망마저 잃었던 경험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험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왜 하필 부활인가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는 단순히 더 강한 힘이나 더 뛰어난 대처 능력이 충분한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적 가능성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소망을 둘 수 있는 분은 죽음 자체를 넘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낙관적 구호가 아닙니다. 자신에게서 소망을 찾을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에게 소망을 둘 근거입니다.
10절에는 「건져 내다」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건져 내셨습니다. 또 건져 내실 것입니다. 바울은 앞으로도 건져 내실 것이라는 소망을 그분께 두었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울이 앞으로 어떤 죽음의 위기도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 신앙은 고난이 없으리라는 확신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최종적으로 제한하지 못한다는 확신입니다.
기도가 만들어 내는 공동의 감사
여러분도 간구로 우리를 함께 돕는 가운데 말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을 두고, 많은 사람에게서 우리를 위한 감사가 많은 이를 통해 드려지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1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 내셨다고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기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린도인들이 기도로 자신의 사역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며, 그 결과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이 됩니다.
「많은 사람에게서」가 은혜의 선물과 연결되는지, 뒤의 감사와 연결되는지는 문법적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바울의 경험이 공동체의 간구와 감사에 연결된다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이제 3절의 찬양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혼자만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위로와 구원이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감사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아시아 속주의 환난을 사도행전 19:23–41에 기록된 에베소의 소요와 연결하는 해석이 있고, 심각한 질병이나 다른 박해를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사건을 특정할 단서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습니다. 8절은 고린도전서 10:13과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시험과 그것을 견딜 길에 관해 말하는데, 그 구절을 모든 종류의 고난이 반드시 개인의 현재 능력 안에 머문다는 뜻으로 일반화하면 여기서 바울 자신이 하는 고백과 충돌합니다. 9절의 「사형 선고」로 옮긴 그리스어는 판정이나 결정을 뜻하며 여기서는 사형 선고를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다만 바울은 그것을 「우리 자신이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고 말하므로, 실제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12절부터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이제 자기 행동의 진실성을 변호합니다. 그런데 그가 내세우는 첫 번째 근거는 자신의 성공적인 사역이나 수많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자랑은 우리 양심이 하는 다음과 같은 증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리고 육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 처신해 왔으며, 여러분을 대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2 · 본디새김
여기서 대조는 「육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략이나 판단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을 지배한 원리가 사람을 교묘하게 다루는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18–2:5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를 대조했습니다. 거기서는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의 지혜와 성공의 기준을 뒤집었습니다.
이제 그 대조가 사도의 인간관계에 적용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만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계산과 조작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읽는 것과 알아보는 것
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써 보내는 것이 고린도인들이 읽고 알아보는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도 그의 진심을 의심한다면, 문제는 글자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 뒤에 감춰진 다른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자랑의 방향이 바뀝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어느 정도 알아본 것처럼 말입니다. 곧 우리 주 예수의 날에 우리가 여러분의 자랑이며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4 · 본디새김
이것은 서로의 명성을 높여 주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의 날, 곧 그분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날 때 서로가 서로의 기쁨과 감사의 이유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랑은 상대방을 눌러서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온전히 서 있을 때에야 가능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면서도 고린도인들을 이겨야 할 상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구체적인 문제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가 왜 약속했던 대로 고린도에 오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순전함」에는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순전함·꾸밈없음」이, 다른 사본에는 「거룩함」이 실려 있습니다. 전자는 행동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성격을, 후자는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성격을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어느 쪽이든 뒤따르는 「진실함」과 「육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설명이 바울의 논점을 뒷받침합니다.
바울의 「예」와 「아니요」
15–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세웠던 여행 계획을 밝힙니다. 먼저 고린도를 방문한 다음 마케도니아로 가고,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 유대로 떠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차례 고린도를 방문하여 「두 번째 은혜」가 있게 하려 했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좁은 의미보다, 바울의 방문을 통하여 고린도인들이 누릴 유익이나 호의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계획은 그대로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상황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린도인들이 제기할 만한 질문을 스스로 던집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하려고 했을 때 설마 가볍게 처신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계획하는 일을 육을 따라 계획해서, 내게서 「예, 예」와 「아니요, 아니요」가 함께 나오게 하려는 것입니까?고린도후서 1:17 · 본디새김
「예, 예」와 「아니요, 아니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쪽은 동일한 문제를 두고 긍정과 부정을 오가는 변덕스러운 태도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다른 쪽은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요」라는 단호하고 일관된 말을 가리킨다고 읽습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 바울이 「「예」이면서 「아니요」인 것이 아닙니다」라고 해명하기 때문에, 앞의 물음도 자신의 말이 모순된다는 비난을 다루는 것으로 읽는 편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그 자체로 다른 읽기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약속 불이행을 넘어선 문제를 건드립니다. 바울이 방문 일정을 마음대로 바꾸는 사람이라면, 그가 전한 복음의 말씀도 믿을 수 있는가요? 그래서 다음 절에서 바울은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이시다
우리를 통해,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통해 여러분 가운데 선포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이면서 「아니요」가 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분 안에는 「예」가 있게 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9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이 완벽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고린도인들에게 처음부터 선포해 온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상황에 따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수가 얼마이든 다 그분 안에서 「예」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해,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아멘」도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20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복을 약속하셨고(창세기 12:1–3), 다윗에게 왕조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으며(사무엘하 7:12–16),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예레미야 31:31–34). 이 약속들은 각각 본래의 역사적 상황과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약속이 같은 시기에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많은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이 자신의 계획을 반드시 실행한다는 사실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은 바로 그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응답하는가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약속에 「예」라고 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아멘」은 히브리어에서 온 말로, 진실함을 인정하고 확증하는 응답입니다. 「우리를 통해」라는 표현은 이 응답이 바울 일행의 복음 선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대목을 바울 자신의 방문 문제에 적용할 때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신실한 그리스도를 선포했다고 해서 그의 모든 개인적 결정이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야 하며, 실제로 23절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의 여행 계획처럼 변경 가능한 인간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 복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16:5–7에서는 마케도니아를 먼저 지나 고린도로 가겠다는 계획(「마케도니아 → 고린도」)이 나오고, 고린도후서 1:15–16에서 회고한 계획은 「고린도 → 마케도니아 → 고린도 → 유대」입니다. 두 편지에서 확인되는 여행 계획에는 이런 차이가 있어 바울이 방문 순서를 바꾸는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실제 방문의 세부 순서에는 재구성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15절의 「은혜」 대신 「기쁨」이라는 읽기를 싣는 사본도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인 로마서 15:8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확증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20절의 연결은 단순한 후대의 적용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신학적 진술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까닭
바울은 이제 시선을 자기 자신과 고린도인들의 공동 토대로 옮깁니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굳게 세우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후서 1:21 · 본디새김
바울은 자기 사도직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중이므로, 자신이 그리스도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굳게 세우신다고 말합니다.
사도와 교회가 서로 다른 주인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라는 명칭과 「기름을 부으신」(χρίω)이라는 동사는 그리스어에서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뜻을 지닌 명칭이며,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정한 의식이나 모든 신자에게 동일한 사도직이 주어졌다는 결론을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함께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인을 치시고 보증으로 영을 우리 마음에 주신 분입니다.고린도후서 1:22 · 본디새김
인을 치는 일은 어떤 것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와 관련됩니다. 「보증」(ἀρραβών)으로 옮긴 말은 거래에서 약속의 이행을 담보하는 첫 지급분, 곧 계약금의 뜻으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보증은 별도의 문서나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 자체가 보증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무엇을 주시겠다는 약속만 멀리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들 마음에 자신의 영을 주심으로써 약속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에는 현재와 미래가 함께 있습니다. 신자들은 지금 그리스도께 속하여 굳게 세워지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그 미래에 대한 보증은 현재 그들 안에 주어진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예」가 되었다면, 하나님은 그 약속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세우시고 영을 주심으로써 자신의 신실하심을 그들의 삶에 실제로 나타내십니다. 바울과 고린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 관계의 가장 깊은 토대는 어느 한쪽의 능력이나 권위가 아닙니다.
그들을 함께 그리스도께 속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은 고린도후서 5:5에서도 같은 보증의 이미지를 다시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바울과 고린도인들이 함께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도의 권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제 바울은 마침내 방문 계획을 변경한 직접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그런데 나는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내가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고린도후서 1:23 · 본디새김
이 말은 다음 장을 함께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고린도후서 2:1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다시 슬픔을 안겨 주는 방문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2:3–4에서는 깊은 괴로움과 눈물 가운데 편지를 썼다는 사실도 밝힙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는 실제로 고통스러운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갈등을 모른 체하지 않았지만, 또다시 직접 찾아가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방문을 미룬 일은 관계를 버린 것이 아니라 관계를 더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가 고린도인들을 엄하게 대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믿음을 통제할 권리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곧바로 그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믿음을 주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여러분의 기쁨을 위한 동역자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4 · 본디새김
믿음을 주관하는 사람과 기쁨을 위해 일하는 사람
「주관하다」는 주인으로서 다스리거나 지배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가르치고 책망하며 권면할 책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한 소유권으로 바꾸는 것은 거부합니다.
그는 자신을 「여러분의 기쁨을 위한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사도직을 증명하기 위해 고린도인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도록 자신이 섬기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에 대한 신뢰도 흔들렸고, 바울은 그들을 방문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고린도인들이 믿음으로 서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완전히 동의하거나 그의 판단과 계획에 복종하기 때문에 서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서 있는 근거는 믿음입니다.
이 말은 21절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고린도인들을 함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굳게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믿음 위에 세워 놓은 주인인 것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사도의 권위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의존하는지를 통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도록 섬기는 가운데 그 목적을 이룹니다. 이 말은 바울의 권위를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가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지를 분명하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이 사람들 위에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지적하시며, 제자들 가운데 큰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권위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두 본문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섬김의 방식과 무관하게 자기 권위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나누는 관계에서 기쁨을 위한 관계로
고린도후서 1장을 관통하는 것은 바울과 고린도인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그들이 자신의 고난과 위로를 함께 나누는 동반자라고 말하고, 그들의 기도가 자신의 구원과 감사에 참여한다고 밝히며, 주 예수님의 날에 서로가 서로의 자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그들의 기쁨을 위한 동역자라고 선언합니다.
위로는 단순히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좋은 말을 건네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붙드시는 방식이며, 그 위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상대방의 믿음을 대신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 자신의 권위가 상처를 더 깊게 만들 수 있을 때 그것을 절제하는 것, 오해를 받더라도 상대방의 기쁨을 위해 행동하려는 것 역시 그 위로와 연결됩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된 인간적 미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예」이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가 넘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사역은 사람들을 사역자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돌보는 위치에 있다면, 자신이 가진 권위가 상대방을 실제로 무엇으로 이끌고 있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더 강한 의존인가요,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는 믿음과 기쁨인가요?
바울은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어려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정당성을 선포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고린도로 향하려던 길을 바꾼 이유를 밝힌 뒤, 그는 「우리가 여러분의 믿음을 주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라며 자기 권위의 경계를 분명히 합니다.
고린도에 가지 않았던 사도는 편지 안에서 다시 그들 곁에 섭니다. 그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미 믿음으로 서 있는 자리를 인정하면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