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인사와 위로
사랑은 언제 징계를 멈추어야 하는가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공동체는 그를 징계했습니다. 바울도 그 문제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그런 사람에게는 다수가 내린 이 징계면 충분합니다」라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했던 사람이 이제는 징계를 멈추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며, 그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라고 권합니다.
왜 그럴까요?
잘못이 사소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 잘못이 공동체 전체에 슬픔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죄보다 공동체의 평화가 더 중요하니 덮어 두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징계가 이루어졌고, 바울은 그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합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다음에 일어날 일입니다.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징계가 한 사람을 삼켜 버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의 앞부분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릅니다. 사랑은 언제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어야 하며, 언제 그 아픔을 멈추어야 하는가?
그런데 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바울은 갑자기 로마의 개선 행렬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펼쳐 보입니다. 승리의 행렬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냄새가,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납니다.
눈물의 편지에서 개선 행렬까지. 두 장면은 얼핏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슬프게 하려고 쓴 편지가 아니었다
바울은 앞 장에서 고린도 방문을 미룬 까닭이 그들을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그 판단의 속사정을 들려줍니다.
내가 이것을 스스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곧, 다시 슬픔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2:1 · 본디새김
「다시」라는 말은 이미 그런 슬픈 만남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바울이 언제 그곳을 다시 방문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재구성하기 어렵지만, 그 만남이 서로에게 아픔을 남겼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는 관계
내가 여러분을 슬프게 한다면, 나 때문에 슬퍼지는 그 사람 말고 누가 나를 기쁘게 하겠습니까?고린도후서 2:2 · 본디새김
바울은 단순히 갈등이 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독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지만, 그들을 슬프게 만들고도 혼자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3절에서는 「나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공동체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면 만족하는 지도자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쁨이 그들의 기쁨과 연결되어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인들을 직접 찾아가는 대신 썼다는 편지는 무엇일까요?
큰 환난과 마음의 짓눌림 가운데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내가 여러분에게 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슬퍼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에게 더욱 넘치는 사랑을 지니고 있음을 여러분이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2:4 · 본디새김
이 편지는 고린도인들을 향한 심각한 책망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내용은 여기서 밝혀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편지의 정체보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썼는가입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썼습니다.
상대방에게 슬픔을 가져오는 행동과 상대방을 슬프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행동은 같지 않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실제로 고린도인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슬픔을 원하는 결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그들이 자신의 사랑을 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책망을 언제나 정당화하는 논리가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아프게 한다는 주장만으로 모든 행동이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도를 밝혔을 뿐 아니라, 뒤이어 그 의도가 실제로 어떤 결정을 요구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랑 때문에 슬픔을 감수할 수 있다면, 같은 사랑 때문에 슬픔을 멈추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8:1–18에는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머물며 사역한 일이 기록되어 있지만, 1절이 암시하는 고통스러운 방문은 사도행전에 별도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4절의 편지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고린도전서 이후에 보낸 별도의 편지, 흔히 ‘눈물의 편지’라고 부르는 편지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 편지가 현재 전해지지 않는 독립된 편지였는지, 고린도후서의 다른 부분에 보존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잘못한 사람의 이름을 지우다
5절에서 바울은 공동체에 슬픔을 가져온 사람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슬프게 했다면, 그는 나를 슬프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 여러분 모두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말입니다 — 여러분 모두를 슬프게 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2:5 · 본디새김
바울은 「누가」라고만 말합니다. 6–7절에서도 「그런 사람」, 「그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고린도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았겠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등장하는 성적 부도덕의 문제와 동일한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른 견해는 바울을 모욕하거나 그의 사도적 권위를 공격하여 공동체에 갈등을 일으킨 별도의 인물이라고 봅니다. 고린도후서 7:12의 「잘못한 사람」과 「잘못을 당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후자의 해석에 근거를 제공하지만, 피해자가 누구인지는 그 절에서도 명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일 인물이라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건의 정체보다 지금 바울이 그 사건을 말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상처를 공동체의 문제로 바라보다
바울은 그 사람이 자신을 슬프게 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슬프게 했다고 표현합니다. 앞의 1–4절에서 이 갈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고 밝혔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상처를 문제의 중심에 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이 모욕당했으므로 개인적인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공동체 전체가 입은 상처를 바라봅니다.
여기에 「어느 정도는」이라는 조심스러운 말까지 덧붙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말입니다」라는 삽입은 자기 표현을 스스로 조절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 영향을 과장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한꺼번에 정죄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은 문맥에서 드러납니다.
갈등이 생기면 누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명확히 밝히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건의 책임을 공동체 전체에 무차별적으로 돌리거나, 한 사람의 잘못을 필요 이상으로 부풀리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말의 무게를 조절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다수가 내린 이 징계면 충분합니다.고린도후서 2:6 · 본디새김
「다수」라는 표현은 공동체의 여러 구성원이 그 결정에 참여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구체적인 징계 방식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더 엄격한 처벌을 요구하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징계가 「충분합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잘못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징계가 그 목적에 비추어 더 이상 계속될 필요가 없다는 판단입니다.
이제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여러분 모두」가 슬픔의 대상인지, 바울이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대상인지 문법적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이 공동체 전체를 한꺼번에 정죄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슬픔에 삼켜지기 전에
7절은 「반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반대로 여러분이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혹시라도 지나친 슬픔에 삼켜질까 해서입니다.고린도후서 2:7 · 본디새김
그때는 잘못을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슬픔이 사람을 삼킨다는 이미지
「삼켜질까」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삼키거나 집어삼킨다는 뜻의 이 말은 단순히 괴로워하는 수준을 넘어, 슬픔에 압도되어 버리는 모습을 그립니다. 본문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회개했는지까지 알려 주지 않지만, 그의 슬픔이 위험한 수준으로 커질 수 있다는 바울의 우려는 분명히 보여 줍니다.
징계가 처음에는 잘못을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잘못의 무게를 충분히 경험했다면, 징계를 계속하는 것이 오히려 그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가 잘못에 관해 어떤 원칙을 선언해야 하는가만 묻지 않습니다. 그 결정 때문에 한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습니다.
징계의 정당성만큼이나 징계받는 사람의 미래가 중요합니다.
용서는 잘못한 사람에게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7절의 「용서하다」(χαρίζομαι)는 은혜나 호의를 베푸는 뜻에서 발전하여,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여기서는 바로 뒤의 「위로해야 합니다」와 함께 등장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향한 사랑을 여러분이 확증하기를 권합니다.고린도후서 2:8 · 본디새김
「확증하다」는 어떤 결정을 확정하거나 유효하게 한다는 뜻을 지니며, 법적 문서나 합의의 효력을 확정하는 데에도 쓰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사랑을 마음속으로만 품는 데 그치지 말고, 당사자가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표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그를 다시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행동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방식까지 본문이 정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까닭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실제로 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더 이상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징계가 끝났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용서는 단순한 내적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방향을 바꾸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고린도후서 2장은 회개와 용서의 모든 조건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바울이 내리는 구체적인 판단, 곧 이미 충분한 징계를 받은 사람을 이제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는 요청에 집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11–32에서 들려주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비유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겠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들을 맞아들이고 옷을 입히며 잔치를 엽니다. 바울이 이 비유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한 사람을 다시 공동체 안에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두 본문은 서로를 비추어 줍니다.
순종의 시험은 징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9절을 읽으면 바울이 앞서 보낸 편지의 또 다른 목적이 드러납니다.
내가 쓴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시험을 거쳐 드러난 여러분의 됨됨이, 곧 모든 일에 순종하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2:9 · 본디새김
고린도인들은 실제로 공동체의 잘못을 다루는 조치를 취했고, 바울은 이를 그들의 반응을 보여 주는 일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징계를 실행했다면 순종은 이미 끝난 것 아닙니까?
바울의 다음 말들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제 그는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권합니다. 앞서 받은 책망에 반응하여 징계를 실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황이 바뀌었을 때 징계를 멈추고 사랑을 확증하는 것 역시 순종의 문제로 놓입니다.
잘못을 단호하게 다루는 일보다 그 일을 멈추는 것이 더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징계를 결정한 공동체에는 자신의 판단을 계속 옳은 것으로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충분한 징계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을 계속하는 일은 더 이상 처음의 목적을 섬기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가 자신의 이전 지시에만 매달리지 않도록, 현재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시 보게 합니다.
바울 자신의 용서도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누구의 어떤 잘못이든 용서하면 나도 용서합니다. 내가 용서한 것이 있다면, 내가 용서한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 그리스도 앞에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2:10 · 본디새김
바울은 공동체의 용서를 먼저 언급합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공동체 전체가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또 자신이 용서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 한 일이라고 밝힙니다. 바울의 용서는 체면을 회복하거나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공동체에 유익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그리스도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무조건적인 용서 권한을 행사한다고 주장하기보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용서를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니라, 바울이 지금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결정지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에는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고린도후서 5:14–15, 21). 그러므로 바울의 사역은 잘못을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 앞에서 공동체를 위한 용서를 선택합니다.
사탄이 이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11절에서는 갑자기 사탄이 언급됩니다.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생각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2:11 · 본디새김
어떤 방식으로 사탄이 그들을 이용한다는 것일까요?
바로 앞 문맥에서 드러나는 위험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공동체가 이미 충분한 징계를 받은 사람을 계속 배척한다면, 그 사람은 지나친 슬픔에 삼켜질 수 있고 공동체 역시 잘못을 바로잡으려던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은 그러한 상황이 사탄에게 이용당할 위험을 경고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용당하다」(πλεονεκτέω)에 해당하는 동사는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거나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누군가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사탄이 공동체의 갈등을 이용하여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일을 경계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탄의 활동을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고린도인들이 지금 눈앞에서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용서를 미루는 동안 한 사람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관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공동체의 충실함은 잘못을 얼마나 엄격하게 처벌했는가로만 판단되지 않습니다. 징계의 목적을 기억하고,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사랑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눈물로 편지를 썼던 사도가 이제 징계를 끝내라고 말합니다. 그 편지가 낳기를 바랐던 것은 영원한 슬픔이 아니라 사랑의 회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문이 열렸지만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12절부터 장면이 바뀝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트로아스에 갔을 때, 주 안에서 나에게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2:12 · 본디새김
트로아스는 소아시아 북서부의 항구 도시로, 에게해를 건너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이동할 때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문이 열려 있었다」는 표현은 복음 사역의 기회를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9에서도 자신에게 큰 문이 열렸다는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이 뜻밖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영에 놓임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나의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나는 그곳 사람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났습니다.고린도후서 2:13 · 본디새김
왜 그랬을까요?
디도를 만나지 못한 바울
디도는 고린도 교회와 바울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동역자였습니다. 고린도후서 7:6–7을 보면, 나중에 디도가 마케도니아로 와서 고린도인들의 반응을 전해 준 일이 나옵니다. 이를 고려하면 바울이 트로아스에서 디도를 기다린 것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알고 싶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보냈던 편지를 고린도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갈등은 더 심해졌을까요, 아니면 관계가 회복되고 있을까요? 바울은 아직 그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디도가 왜 트로아스에 오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바울의 마음이 고린도인들의 소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주 안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놓이지 않았습니다.
사역의 기회가 분명하다고 해서 사역자의 마음에도 언제나 평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의 결정이 옳았는지 글렀는지를 직접 평가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를 거스른 사례라고 해석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그에게 복음 사역은 새로운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느냐의 문제로만 환원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복음을 전한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트로아스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멈춥니다.
이 이야기는 7:5–7에 가서야 이어집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뒤에도 안식을 얻지 못했지만, 디도의 도착으로 위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사이에 바울은 디도에 대한 소식을 뒤로 미루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먼저 들려줍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개선 행렬
마음에 놓임이 없어 트로아스를 떠났다는 이야기 바로 다음에 이런 문장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개선 행렬에 세워 이끄시고, 우리를 통해 그분에 대한 앎의 냄새를 곳곳에 드러내시는 분입니다.고린도후서 2:14 · 본디새김
바울은 방금 전까지 걱정과 불안에 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승리의 행렬을 이야기합니다.
무슨 일이 바뀐 것일까요?
로마의 승리 행렬에는 패배한 사람도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 개선식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는 공식적인 행사였습니다. 승리한 장군과 군인들, 전리품, 사로잡힌 포로들이 행렬에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개선 행렬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승리한 쪽에 서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면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승리자로 만들어 행진하게 하신다는 전통적인 읽기와,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바울이 행렬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보는 읽기입니다. 첫 번째에서는 바울이 승리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에서는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해 이끌려 가는 사람입니다.
후자의 그림을 따른다면 여기에는 더욱 뜻밖의 반전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승리한 장군처럼 행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혀 이끌려 가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사역이 승리의 행렬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곧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승리자의 모습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4절에는 두 가지 행동이 함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을 개선 행렬에 세워 이끄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앎의 냄새를 곳곳에 드러내십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여기서 「언제나」라는 말은 바울이 모든 상황에서 성공하거나 승리의 감정만 경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절의 불안과 걱정이 그것을 막아 줍니다. 바울은 트로아스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지만, 자신의 계획과 마음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이끄신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감사는 자신이 언제나 승리자처럼 살아간다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드러내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깃발이나 전리품이 아닙니다.
바울은 갑자기 냄새를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트리암뷰오(θριαμβεύω)로, 개선식을 거행하거나 누군가를 개선 행렬에 끌고 가는 일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바울 일행을 목적어로 삼아 이끄시는 문장입니다. 로마 개선식의 관습과 그리스어 용법을 고려하면 사로잡힌 사람으로 끌려가는 읽기가 동사의 일반적인 쓰임에 더 가까운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죽음에 넘겨진 사람들처럼 세상의 구경거리로 세우셨다는 고린도전서 4:9와도 잘 어울리지만, 그 구절이 2:14의 의미를 반드시 한 가지로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향기가 생명과 죽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구원받는 이들 가운데서도 멸망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는 그리스도의 향기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2:15 · 본디새김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에 퍼집니다. 사람이 이동하면 그 향기를 맡는 이들도 달라집니다. 로마의 개선식에는 종교적 행사가 뒤따랐고 향을 피우는 관습도 있었습니다. 행렬에 참석한 사람들은 같은 향기 속에 있었지만, 승리한 이와 사로잡힌 이의 처지는 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것
그런데 15절의 「하나님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은 개선 행렬의 향보다 더 깊은 울림을 지닙니다. 「향기」라는 말은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향기 이미지가 로마의 개선식에서만 유래했는지, 제사의 언어까지 함께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리며, 두 배경이 함께 울려 나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무엇을 하나님께 향기롭다고 말하는지는 분명합니다.
바울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바울이 지닌 개인적 매력이나 능력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통해 알려지시기에, 그의 사역이 예수님의 향기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향기를 맡는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하나의 냄새, 서로 다른 결과
멸망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냄새이고, 구원받는 이들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들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고린도후서 2:16 · 본디새김
바울은 두 종류의 향기를 전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향기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그 향기는 구원받는 이들과 멸망하는 이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결과를 드러냅니다. 같은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 섭니다.
고린도전서 1:18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구원받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의 대조도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듣는 사람마다 다른 진리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지만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와 반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근거로 특정한 개인의 최종 운명을 바울이 알고 있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복음의 서로 다른 효과를 말하지만, 누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는지를 개별적으로 판정하지 않습니다.
향기의 성패를 누가 결정하는가
15절에서 바울은 구원받는 이들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멸망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는 예수님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거부된다고 해서 복음을 전한 사역 자체가 반드시 거짓이거나 실패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역할을 청중의 긍정적인 반응만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16절 끝의 「그러니 이런 일들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는 자신감 넘치는 선언이 아닙니다. 복음이 생명과 죽음에 관련된 중대한 일이라면,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무게 앞에 서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1:9, 13, 17에서는 번제의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향기는 하나님이 실제로 냄새를 맡아 만족하신다는 물리적 설명이 아니라,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일을 묘사하는 제의적 언어입니다. 바울이 레위기의 특정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5:2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으로 내어 주셨다고 말하며 이 이미지를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명확하게 연결합니다. 고린도후서 2:15와 완전히 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역이 그분의 향기로 묘사되는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6절의 그리스어 표현은 각각 「죽음으로부터 죽음으로」, 「생명으로부터 생명으로」라는 구조로, 출발점과 도착점을 모두 죽음이나 생명으로 표현하여 그 성격을 강조합니다. 다만 출발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구원받는 이들」과 「멸망하는 이들」은 둘 다 현재 진행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분사로, 바울은 미래의 분류보다 지금 복음이 선포되는 가운데 나타나는 구원과 멸망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장사하지 않는 사람들
바울은 마지막 절에서 자신의 사역 방식을 다른 사람들과 대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익을 얻으려 장사하는 그 많은 이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진실함에서 우러나와, 도리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고린도후서 2:1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이런 일들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라는 바로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지 설명합니다.
복음을 상품처럼 다루는 태도
「장사하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카펠류오(καπηλεύω)입니다. 소매로 물건을 파는 행위와 관련된 말이지만,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는 상행위나 속임수를 통한 거래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의미에 무게를 두어 읽을 수도 있고, 이익을 위해 메시지를 변질시킨다는 의미까지 포함해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을 지목하는지 이 절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고린도에 있던 바울의 경쟁자들이나 다른 교사들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들의 신원과 구체적인 행위는 여기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거부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역자가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다른 편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권리를 인정합니다(고린도전서 9:4–14). 문제는 사람의 호감을 얻거나 이익을 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네 가지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진실함에서 우러나와」는 자신의 내적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로서」는 그 말의 근원과 사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말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책임을 지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가 어디에 속하여 말하는지를 밝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이며,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안에서 전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
6절의 「충분합니다」와 16절의 「누가 감당하겠습니까?」를 함께 읽으면 본문이 다루는 서로 다른 책임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을 징계하는 일에는 언제 충분한지 판단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 누가 충분한지 묻게 하는 무게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격을 인간적인 능력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말한다고 밝힙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카펠류오는 고대 문헌에서 상품을 속여 파는 행위와 연결되기도 하며, 이사야 1:22의 그리스어 번역에 나오는 포도주에 물을 섞는 장사꾼의 이미지와 비교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6절의 「충분합니다」는 그리스어로 히카논(ἱκανός)이고, 16절의 「감당할 만하다」는 히카노스로, 두 표현은 같은 형용사의 형태입니다. 하나는 징계가 충분하다고 선언하고, 다른 하나는 복음 사역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이 반복이 의도적인 문학적 장치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사랑을 확증하라
고린도후서 2장의 마지막에는 장엄한 개선 행렬이 펼쳐지지만, 그 광경을 이해하려면 앞부분의 작고 고통스러운 장면, 곧 사랑을 다시 확증하라는 요청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눈물의 편지와 그리스도의 향기, 두 장면은 서로를 제한하고 바로잡습니다. 앞부분만 읽으면 사랑이란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도록 언제나 부드럽게 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울은 필요할 때 고통스러운 편지를 썼습니다. 뒷부분만 읽으면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만 하면 그 말이 어떤 영향을 미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울은 한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삼켜질까 걱정하며 공동체의 용서와 위로를 요구했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의 진실함과 사람을 향한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감출 수도 없고, 진리를 전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프게 할 것을 알면서도 썼습니다. 그러나 징계가 충분해졌을 때는 그것을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부드러움과 엄격함 사이에서 적절한 정도를 찾으라는 일반적인 처세술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잘못한 사람은 그 잘못으로만 규정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안에서 다시 살아가도록 초대받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복음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그가 섬기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 잘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를 징계했습니다. 그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바울은 더 강한 처벌을 요구하지도,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징계가 충분하다고 말한 뒤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라고 요청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향한 사랑을 여러분이 확증하기를 권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누가 옳았는지를 끝까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때문에 무너진 관계 속에서 사랑이 다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공동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험받습니다.
이미 충분히 슬퍼한 사람 앞에서, 이제는 용서하고 위로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그 사랑을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말고, 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확증하라고 권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