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새 언약의 일꾼
마음에 쓰인 편지, 너울이 벗겨진 얼굴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놓는 증거는 뜻밖입니다. 추천서도, 사도라는 직함도, 자신이 이루어 낸 업적도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증명해 줄 문서를 찾는 대신, 「여러분이 곧 우리의 편지」라며 자신을 의심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삶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자신의 사역을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 편지는 먹으로 쓰이지 않았고, 돌판에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쓰였습니다.
이 작은 비유에서 출발한 바울의 이야기는 편지를 쓰는 일에서 돌판에 계명을 새기는 일로, 돌판에서 시내산의 모세로 이어집니다. 모세의 얼굴에 빛났던 영광이 등장하고, 그 얼굴을 가렸던 너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는 너울로 바뀝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자 모두가 너울이 벗겨진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면에 이릅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단순히 옛 언약과 새 언약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말씀을 받는 사람은 그 내용을 알기만 합니까, 아니면 그 말씀에 의해 변화됩니까? 바울은 그 질문을 자신이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풀어 갑니다.
추천서 대신 살아 있는 사람들을 내놓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안에서 말씀을 전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또다시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이든 여러분이 써 주는 것이든, 우리를 내세워 주는 편지가 필요합니까?고린도후서 3:1 · 본디새김
추천서는 당시 낯선 공동체를 방문하는 사람의 신원과 신뢰성을 확인해 주는 수단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도 이런 편지가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27에서는 아볼로가 아가야로 가려고 할 때 형제들이 그곳 제자들에게 그를 받아 달라는 편지를 써 줍니다. 따라서 바울이 추천서라는 관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고 그곳 공동체의 형성에 깊이 관여한 사람이며, 고린도인들은 이미 그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고린도인들에게 추천서를 제출해야 한다면, 이 관계에서 무엇인가 뒤집힌 셈입니다.
바울은 그 모순을 파고듭니다.
편지의 수신자가 곧 편지가 되다
여러분이 곧 우리의 편지, 우리 마음에 쓰여 있고 모든 사람이 알아보고 읽는 편지입니다.고린도후서 3:2 · 본디새김
자신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고린도인들 자신이 바울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 편지는 「우리 마음에 쓰여」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자기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는 단순히 사역 실적의 목록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알아보고 읽는 편지」입니다. 마음에 쓰여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까닭은, 바울의 마음에 새겨진 공동체가 그들의 실제 삶을 통해 바깥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맡아 전했고, 먹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돌판이 아니라 살로 된 마음이라는 판에 쓰인 편지입니다.고린도후서 3:3 · 본디새김
2절에서는 「우리의 편지」였는데, 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인들을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편지의 진정한 작성자는 예수님이시고, 바울 일행은 그 편지를 「맡아 전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섬기는 일이지,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뜻대로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편지가 쓰이는 방법은 일반적인 편지와 다릅니다.
먹 대신 하나님의 영이 사용됩니다.
종이나 돌판 대신 사람의 마음이 사용됩니다.
돌판에서 살로 된 마음으로
3절의 「살로 된 마음」이라는 표현에는 구약의 두 예언이 겹쳐 있습니다. 먼저 예레미야 31:31–34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바벨론의 위협과 유다의 심판, 그리고 백성의 회복을 둘러싼 예언 속에 등장합니다.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신 새 언약을 약속하십니다. 그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백성의 마음에 기록되고,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에스겔 36:26–27입니다. 에스겔은 유배와 회복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백성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여 살로 된 마음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백성 안에 두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예레미야에게서 마음에 기록되는 새 언약을, 에스겔에게서 돌 같은 마음이 살로 된 마음으로 바뀌고 하나님의 영이 주어지는 모습을 가져와 고린도인들의 삶에 적용합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마음에 쓰인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여기서 「살로 된 마음」은 죄 많은 육체적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의 비유처럼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바깥에 기록된 모습을 보여 주고, 살로 된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직접 역사하시는 새로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새 언약의 놀라움은 사람이 이전보다 더 좋은 규칙을 받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규칙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그 약속의 성취에 참여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그의 추천서입니다.
감당할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런데 여기서 바울에게 한 가지 위험이 생깁니다.
고린도인들이 예수님의 편지라고 말한다면, 그 편지를 맡아 전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곧바로 그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이런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3:4 · 본디새김
자신감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바울이 믿는 것은 자기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무엇을 우리에게서 나온 것으로 헤아리는 일을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의 감당할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고린도후서 3:5 · 본디새김
여기에는 앞 장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2:16에서 복음 사역의 무게를 생각하며 「그러니 이런 일들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의 「감당하다」와 3:5의 「감당할 힘」(ἱκανότης), 3:6의 「감당할 힘을 주셨습니다」(ἱκανόω)는 그리스어에서 모두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로, 충분한 자격이나 능력을 지닌 상태를 뜻합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바울 자신에게서는 그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이것은 사도가 무능하다는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했지만, 고린도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을 주신 분은 자신이 아니므로 그들의 변화도 자신의 공로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사역의 결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결과를 자기 소유로 삼기를 거부합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또한 우리에게 새 언약을 섬기는 이로서 감당할 힘을 주셨습니다. 문자를 섬기는 이가 아니라 영을 섬기는 이입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6 · 본디새김
흔히 「문자」를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영」을 글자 너머에 감춰진 영적인 뜻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사람과 영적으로 읽는 사람을 비교하고 있지 않습니다. 3절의 돌판과 하나님의 영을 이어받아, 문자로 기록된 옛 언약의 섬김과 성령으로 생명을 주시는 새 언약의 섬김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문자는 죽인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계명이 악하기 때문입니까? 로마서 7:7–13에서 바울은 율법 자체를 죄라고 부정하지 않고,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는 그 선한 계명을 이용하여 죽음을 가져옵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지만, 죄 아래 있는 인간을 그 자체로 생명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날수록 그것을 어긴 인간의 죄도 드러나고, 그 결과 정죄가 발생합니다. 새 언약의 영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어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대조를 ‘문자적인 성경 공부는 죽이고 영적인 감동은 살린다’는 뜻으로 읽으면 바울의 논점에서 벗어납니다. 성경을 기록한 문자와 성경을 이해하는 지적인 노력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변화이며, 그 중심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을 섬기는 일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바울은 그 답을 찾기 위해 시내산으로 돌아갑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그런데 돌에 문자로 새겨진 죽음의 섬김이 영광 가운데 나타나서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얼굴에 어린, 없어져 가는 그 영광 때문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면,고린도후서 3:7 · 본디새김
바울은 앞절에서 「문자는 죽이고」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 죽음의 섬김이 「영광 가운데」 나타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옛 언약의 섬김이 영광이 없었기 때문에 새 언약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옛 언약에도 참된 영광이 있었음을 인정한 다음, 새 언약의 영광이 얼마나 더 큰지를 설명합니다.
시내산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이 대목의 배경은 출애굽기 34:29–35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언약의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모세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은 그 빛나는 얼굴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전했고, 말씀을 전한 뒤에는 얼굴을 너울로 가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 말씀을 나눌 때에는 너울을 벗었으며, 다시 나와 백성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은 모세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빛났고, 그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이 모세였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영광을 「없어져 가는」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출애굽기 34장은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고 말하지만, 그 빛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그 장면을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안에서 다시 읽으며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을 사라져 가는 것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설명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새 언약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바울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영광을 부정하지 않고 영광을 비교하다
그렇다면 영의 섬김은 어찌 더욱 영광 가운데 있지 않겠습니까?고린도후서 3:8 · 본디새김
그도 그럴 것이, 정죄의 섬김에 영광이 있었다면 의의 섬김에는 훨씬 더 영광이 넘칩니다.고린도후서 3:9 · 본디새김
바울은 옛 언약의 섬김을 죽음의 섬김, 정죄의 섬김, 없어져 가는 것이라는 세 가지 표현으로 부릅니다. 이에 대응하는 새 언약의 섬김은 영의 섬김, 의의 섬김, 남아 있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왜 바울은 정죄의 반대편에 용서나 무죄라는 말 대신 「의」를 놓았습니까? 「의」는 의로움, 올바른 관계와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바울의 편지들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과 하나님의 구원에 속한 올바른 삶의 관계를 함께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3:9만으로 그 의미를 한 가지에 한정하기는 어렵고, 여기서는 정죄의 섬김과 대비되는 새 언약의 결과를 넓게 가리킵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죄가 드러나고 정죄가 발생했다면,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의의 관계 안으로 이끄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구원과 성령의 생명 주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따라서 두 섬김의 차이는 단순히 율법은 엄격하고 복음은 관대하다는 식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옛 언약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면서 인간의 죄를 밝혀 주었다면, 새 언약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세우는 구원의 현실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차이를 영광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더 큰 영광 앞에서 이전의 영광이 희미해지다
실은 영광스럽게 되었던 것이 이 점에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영광 때문에 영광스럽게 되지 않았습니다.고린도후서 3:10 · 본디새김
바울은 앞에서 모세의 섬김에도 영광이 있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제 그 말을 취소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광스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비교의 결과로, 더 큰 영광 앞에서 이전의 영광이 상대적으로 빛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어두운 밤에 밝게 빛나던 등불도 해가 떠오르면 더 이상 주변을 밝히는 중심적인 빛이 되지 못합니다. 등불에 원래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빛이 그 영광을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없어져 가는 것이 영광을 띠고 왔다면, 남아 있는 것은 훨씬 더 영광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1 · 본디새김
이제 대조는 영광의 크기뿐 아니라 지속성으로 옮겨 갑니다. 바울에게 옛 언약의 섬김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실제로 영광스러운 역할을 수행했지만,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언약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새 언약의 섬김은 남아 있는 영광에 속합니다.
이런 주장은 이스라엘의 성경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역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주장과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은 옛 언약의 영광이 실제로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인정하고, 예레미야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약속했던 새 언약을 근거로 자신의 사역을 이해합니다. 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어떻게 새롭게 이루셨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영광을 맡은 사람은 어떤 태도로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제 다시 모세의 얼굴로 돌아갑니다.
너울은 누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소망을 지니고 있기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고린도후서 3:12 · 본디새김
「거리낌 없이」는 숨기지 않고 말하는 태도, 공개적으로 담대하게 말하는 자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새 언약의 소망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하고, 곧바로 모세와 자신을 대조합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얼굴을 너울로 가리곤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없어져 가는 것의 끝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3:13 · 본디새김
모세는 무엇을 가렸는가
출애굽기 34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보고 두려워한 일을 말하지만, 모세가 너울을 쓴 목적을 바울과 똑같은 말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해석은 출애굽기 본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가 「없어져 가는 것의 끝」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렸다고 말합니다.
「끝」에 해당하는 텔로스(τέλος)는 어떤 것이 그치는 지점일 수도 있고, 그것이 향하는 목적이나 귀결을 뜻할 수도 있어 해석이 두 방향으로 갈립니다. 한쪽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다른 쪽은 옛 언약의 섬김이 궁극적으로 향하던 목적, 곧 예수님 안에서 드러날 귀결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앞절에서 「없어져 가는 것」과 「남아 있는 것」을 비교했기 때문에 첫 번째 해석은 직접적인 문맥의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곧바로 예수님 안에서 너울이 없어지는 일을 말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해석도 신학적 흐름에 어울립니다.
그런데 14절에서 너울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까지도 옛 언약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이 벗겨지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야 없어지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4 · 본디새김
실은 오늘까지도 모세의 글이 읽힐 때마다 너울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3:15 · 본디새김
얼굴을 가리던 너울이 마음을 가리는 너울이 되었습니다.
보는 문제에서 이해하는 문제로
모세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덮는 너울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울의 설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글을 읽습니다. 본문 자체가 사라진 것도, 읽는 행위가 멈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너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 의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3절과 이어지는 대조가 있습니다. 고린도인들의 마음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예수님의 편지가 쓰였는데, 15절에서는 모세의 글이 읽힐 때 마음에 너울이 놓여 있습니다. 문제의 중심이 글의 존재 여부에서 사람의 마음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14절에는 또 하나의 해석상 갈림이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야 없어지기 때문입니다」에서 그리스어 원문은 ‘없어지는 것’의 주어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너울이 없어진다고 읽을 수도 있고, 앞서 반복된 옛 언약의 없어져 가는 섬김이 예수님 안에서 끝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문맥상 앞에 놓인 너울을 주어로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의 가려진 이해가 열리는 일이 강조되고, 다른 읽기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옛 언약의 섬김이 그 목적에 이르렀다는 점이 부각됩니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든 바울의 논증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 전체에 대한 판단인가
이 대목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굳어졌습니다」라는 말과 마음에 놓인 너울은 바울이 자신의 시대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의 성경 이해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 날카로운 대조를 없었던 것처럼 완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시대의 모든 유대인이 본성적으로 어리석거나, 성경을 올바르게 읽을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본문을 넘어선 일반화입니다. 바울 자신이 유대인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인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백성의 미래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11:1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중요한 논쟁입니다. 바울의 언약 이해가 유대교의 지속적인 정당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혹은 고린도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기 위해 얼마나 강한 대조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놓고 판단이 갈리며, 이 문제를 단순히 해결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성경 이해가 새롭게 열렸다고 주장하며, 그 경험을 새 언약의 영광과 연결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설 때
그러나 주님께로 돌아설 때에는 그 너울이 벗겨집니다.고린도후서 3:16 · 본디새김
출애굽기 34:34에서는 모세가 여호와야훼 앞에 들어가 말씀을 나눌 때 너울을 벗었습니다. 바울은 그 구절의 문장 구조를 거의 그대로 활용하지만, 누가 돌아서는지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원래의 출애굽기 이야기에서처럼 모세를 주어로 읽을 수도 있고, 앞절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으며, 누구든지 주님께로 돌아서는 사람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문맥을 이어받으면 이스라엘의 회심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문장 자체는 주어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 의미를 한 사람이나 집단으로 반드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울이 벗겨지는 조건은 더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성경의 숨겨진 뜻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돌아설 때」입니다. 지적 탐구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일이 단순한 정보 처리로 완성되지 않으며,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그 이해에 결정적으로 관련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바울은 너울이 벗겨진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합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
그런데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린도후서 3:17 · 본디새김
여기서 주님은 누구인가
바울은 출애굽기의 말씀을 따라 「주님께로 돌아설 때」라고 말한 다음, 곧바로 「주님은 영이십니다」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17절은 따로 떨어진 신학적 선언이 아니라, 16절의 「주님」이 누구이며 그분께 돌아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주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주님을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나아갔던 여호와야훼로 보는 읽기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보는 읽기가 있고, 「주님은 영이십니다」를 주님과 영의 관계를 밝히는 직접적인 선언으로 보는 읽기와 앞절의 「주님」을 새 언약의 상황에서 풀이하는 말로 보는 읽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하나만을 근거로 예수님과 성령이 구별 없는 동일한 인격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 문장에서 「주님의 영」이라고 말하며 주님과 영을 구별하여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 돌아서는 일, 생명을 주시는 영의 사역, 그리고 자유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이 자유를 일반적인 의미의 자기결정권이나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권리로 읽으면 앞뒤 문맥과 어긋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문자의 섬김과 영의 섬김, 정죄와 의, 없어져 가는 영광과 남아 있는 영광,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너울에 관해 말해 왔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자유는 우선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새 언약의 현실과 연결됩니다.
정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는 자유입니다.
마음을 가리는 너울이 벗겨져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볼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얼굴을 가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자유입니다.
로마서 8:1–4에서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죄가 없으며, 생명을 주시는 영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자유롭게 했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논증을 전개하지만, 예수님과 성령의 사역이 정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사람을 해방한다는 주제에서 연결됩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3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너울이 벗겨진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주님」을 출애굽기의 여호와야훼로 보는 해석에서는 바울이 옛 언약에서 여호와야훼 앞에 나아가는 일을 새 언약에서 영의 사역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주님을 예수님으로 보는 해석에서는 예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생명을 주시는 영의 사역에 참여하는 일이 됩니다. 실제로 주석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나뉘어, 어떤 해석은 출애굽기의 여호와야훼를, 다른 해석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모두가 너울이 벗겨진 얼굴로
그러나 우리는 모두 너울이 벗겨진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바라보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바로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영이신 주님께로부터 오는 변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고린도후서 3:18 · 본디새김
고린도후서 3장의 마지막 절은 앞에서 펼쳐진 모든 이미지를 하나로 모읍니다. 모세의 얼굴, 너울, 영광, 주님의 영, 그리고 새 언약의 삶이 이 한 문장 안에서 만납니다.
모세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 앞에 들어가 너울을 벗었던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고, 그의 얼굴에는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모세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우리는 모두」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만이 아니라, 새 언약과 영의 사역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모든 신자가 모세와 동일한 직분을 받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모세에게만 주어졌던 특별한 장면이 새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설명하는 이미지가 됩니다.
새 언약의 영광은 한 사람의 얼굴에만 나타나는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단지 더 밝게 빛나는 영광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관계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영광입니다.
바라보는 것인가, 비추는 것인가
「거울로 보듯 바라보며」는 신자들이 거울에 비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뜻으로도, 주님의 영광을 거울처럼 비추어 드러낸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본디새김은 바라본다는 뜻을 선택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신자들은 주님의 영광과 관계없이 스스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거나 비추는 가운데, 그 영광과 관련된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영광을 보는 사람이 그 형상으로 변화된다
바울은 「바로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의 형상입니까? 문장 안에서 직접 언급된 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4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고, 4:6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3:18의 형상을 예수님의 형상과 연결하는 이해는 바로 뒤의 문맥에서 뒷받침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변화는 단순히 이전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일입니다. 로마서 8:29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아지도록 미리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외모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과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18에서는 무엇보다 변화의 주체가 중요합니다. 「변화되어 갑니다」(μεταμορφόομαι)라는 동사는 수동형입니다. 신자들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이신 주님께로부터 오는 변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그 근원을 밝힙니다. 이 문장은 「영이신 주님에게서」로도 「주님의 영에게서」로도 읽힐 수 있어 세부적인 문법 해석은 갈리지만, 변화가 인간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과 성령의 사역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울 자신에게 새 언약을 감당할 힘이 하나님에게서 오듯(5–6절), 신자들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일도 자신의 내면에서 저절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십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바울은 이 변화를 「영광에서 영광으로」라고 표현합니다. 영광에서 출발하여 영광에 이르는 움직임으로, 변화가 점점 더 깊어지고 확장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신자가 매 순간 이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상태로 발전한다는 식의 단순한 성장 공식은 아닙니다.
바울의 앞선 대조를 고려하면, 여기에는 없어져 가는 영광과 다른 성격의 변화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바울의 해석에서 없어져 가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변화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새 언약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자신의 뜻에 맞게 변화시키시는 지속적인 사역에 속합니다.
조금 더 깊이
「거울로 보듯 바라보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카토프트리조마이(κατοπτρίζομαι)는 거울과 관련된 동사로, 문맥에 따라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본다는 뜻으로도, 거울처럼 어떤 모습을 비춘다는 뜻으로도 이해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반복되었으므로 신자들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첫 번째 해석은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모세의 얼굴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새 언약의 신자들도 영광을 비추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두 번째 해석이 문맥과 어울립니다. 두 해석 모두 오랜 주석 전통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영이신 주님에게서」, 「주님의 영에게서」, 「주이신 영에게서」 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본디새김은 앞절의 「주님은 영이십니다」와 이어 읽어 「영이신 주님께로부터」라고 옮겼습니다.
너울이 벗겨진 얼굴
고린도후서 3장에는 두 개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은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에 빛났지만, 그는 얼굴을 너울로 가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18절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은 어느 한 위대한 지도자의 얼굴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는 모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너울이 벗겨진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는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영광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보는 주님의 영광에서 비롯됩니다.
처음에 바울에게 제기된 문제는 ‘그가 정말 사도인가?’였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관심의 중심은 자신의 자격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옮겨 갑니다. 바울과 고린도인들은 모두 같은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사도는 그 은혜를 전하는 일을 맡았고 교회는 그 은혜를 받아 변화되는 공동체이지만, 어느 쪽도 하나님의 일을 자기 공로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사역의 증거는 사역자가 얼마나 권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알고, 성령의 생명 주시는 역사에 참여하며,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가에 있습니다. 변화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때, 사람은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거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소망을 버리는 두 극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감당할 힘이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힘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고린도인들을 편지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마음에 쓰신 편지였고, 그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서 고린도인들은 더 이상 읽히는 존재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바라보는 동안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쓰신 편지는 그렇게 사람의 삶이 됩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은, 이제 얼굴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