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새 언약의 일꾼

질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흔들리지 않는 사람, 언제나 확신에 차 있는 사람,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면 그 능력을 전하는 사람도 강하고 당당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반대의 그림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지니고 있습니다.」 보물은 귀하지만 그것을 담은 그릇은 쉽게 깨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는 환난을 당하고, 앞이 막막하며, 박해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심지어 언제나 예수님의 죽어 감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자신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붙들고 있는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고린도후서 4장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약함이 사라진 뒤에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 사람이 여전히 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이 역설을 세 개의 이미지로 발전시킵니다. 어둠에 비치는 빛, 보물을 담은 질그릇, 그리고 허물어지는 겉사람과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입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104장 본문 읽기 →

복음은 왜 가려져 있는가

고린도후서 4:1–4 본문 →

바울은 4장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새 언약의 영광과 성령의 사역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섬김을 하나님께 받았기에 이제 자신이 어떤 태도로 복음을 전하는지 밝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를 받은 그대로 이 섬김을 지니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1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뛰어난 자격을 갖추었기에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사역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15:9, 갈라디아서 1:13).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람이 된 것은 자신의 과거와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처음부터 자기 자격을 증명하는 사업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것과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다르다

도리어 우리는 수치스러운 은밀한 일들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간교하게 걷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도 않으며, 도리어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내세웁니다.고린도후서 4:2 · 본디새김

이 문장의 대조는 감추는 일과 드러내는 일입니다. 바울은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는 아무런 설명이나 설득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의 편지들 자체가 치밀한 논증과 권면으로 가득합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메시지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청중을 속여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으려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믿게 만들기 위해 그 말씀을 조작한다면, 그는 이미 말씀의 진실성을 훼손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숨김없이 내놓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를 덧붙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궁극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진리를 감추지 않는 까닭은, 그가 전하는 복음 자체가 감춰진 것을 밝히는 하나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진리를 드러냈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이 가려졌다면 누구에게 가려진 것인가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멸망해 가는 이들에게 가려져 있습니다.고린도후서 4:3 · 본디새김

바울은 그 원인을 자신의 메시지에 숨겨진 비밀이나 의도적인 은폐에서 찾지 않습니다. 「가려져 있다」는 표현은 앞 장의 너울 이야기를 이어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읽히지만 그 의미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이제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 영광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집니다.

그들 가운데서 이 시대의 신이 믿지 않는 이들의 생각을 눈멀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는 그 복음의 빛이 비쳐 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4 · 본디새김

복음이 가려지는 일은 단순히 지식이나 설명의 부족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의 생각이 눈멀게 되는 영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은 지능이나 사고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능력이 가려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의 신」은 누구인가

이 표현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사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11에서 사탄이 공동체의 갈등을 이용할 위험을 말했고, 11:14에서는 사탄이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문맥에서 생각을 눈멀게 한다는 표현은 사탄의 기만적인 활동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그 해석은 앞 장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굳어졌다고 말한 것과 연결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의 맥락에서 사람들의 이해를 가리셨다고 읽습니다. 이 해설은 문맥상 사탄을 가리키는 읽기를 따르지만, 다른 견해의 존재를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바울은 사탄에게 하나님과 대등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가리키는 것은 현재의 역사적 질서이며, 사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과 동등한 권세를 가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둠을 설명하는 일이 이 단락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 어둠 속에 어떤 빛이 비치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보이는가

고린도후서 4:5–6 본문 →

4절 후반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1:26–27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의 본래 문맥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책임을 맡은 존재라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결정적으로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15에서도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빛은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빛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보게 하는 빛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를 드러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우리 자신을 예수 때문에 여러분의 노예로 선포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5 · 본디새김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바울 자신은 고린도인들의 노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도직을 설명하면서 자신을 공동체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들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노예는 친절한 봉사자를 뜻하는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주인에게 속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법적·사회적으로 자유인과 크게 구별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고린도인들이 바울의 궁극적인 주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때문에」 그들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섬깁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영광을 자신이 차지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자신을 복음의 중심에 세운다면, 말로는 예수님을 선포하더라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원하시는 영광은 무엇인가요? 6절이 대답합니다.

창조의 첫 빛이 마음속에 비치다

「어둠에서 빛이 비칠 것이다」 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을 비추시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6 · 본디새김

바울은 갑자기 창조의 장면을 불러옵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3). 빛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창조의 장면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옮겨 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게 되는 일은 새로운 주장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둠 속에 빛을 창조하셨듯 직접 행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서 4절과 6절은 정확하게 맞섭니다. 4절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눈멀게 되어 복음의 빛이 비쳐 오지 못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십니다.

그 빛이 비추는 곳은 특정한 장소나 물건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로

앞 장에서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영광을 없어져 가는 것으로 묘사했고,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너울이 벗겨진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영광은 하나님과 만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모세보다 더 밝은 빛이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영광을 예수님의 삶에서 분리하지 않습니다. 이후 10–11절에서 그가 말할 것은 「예수의 죽어 감」과 「예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분리된 눈부신 위대함이 아닙니다.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셨고, 하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그토록 귀한 영광을 맡은 사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요?

바울은 보물을 담은 질그릇을 꺼내 놓습니다.

보물이 귀할수록 그릇은 초라해 보인다

고린도후서 4:7 본문 →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지니고 있습니다. 넘치는 힘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7 · 본디새김

「이 보물」은 바로 앞에서 말한 빛, 곧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과 연결됩니다. 바울이 지닌 보물은 자신의 신앙적인 열정이나 뛰어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일이며 그 영광을 전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담은 그릇은 질그릇입니다.

왜 하필 질그릇인가

고대의 질그릇은 물을 담거나 음식을 보관하는 데 흔하게 쓰였습니다. 금속으로 만든 귀한 그릇과 달리 비교적 값이 싸고 깨지기 쉬웠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릇을 사람의 약함에 비유합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보물이 맡겨졌지만, 그 자신은 여전히 약하고 쉽게 상처받으며 죽을 수 있는 인간입니다.

바울은 몸이 악하다거나 인간의 연약함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보물의 가치와 그릇의 연약함 사이에 대조를 만들어, 보물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히 합니다.

보물이 아름다운 것은 그릇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보물 자체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목적을 밝힙니다. 「넘치는 힘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능력으로 오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언제나 강하고 성공적이며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은 그의 사역이 지닌 힘을 바울 자신의 탁월함에서 찾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역을 이어 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이 전해지는 일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힘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약함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은 아니다

바울은 약함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약해지면 자동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약한 사람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그 안에 보물이 있다고 해서 깨지기 쉬운 성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릇이 약하다고 해서 보물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인들이 사도를 평가할 때 강함과 성공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면, 바울은 그 기준을 뒤집습니다. 참된 사도의 증거는 인간적인 약점이 모두 사라졌다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이 약한 인간을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무너지지만 끝나지는 않는다

고린도후서 4:8–9 본문 →

바울은 네 쌍의 대조를 빠르게 이어 갑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환난을 당하되 궁지에 몰리지는 않고, 앞이 막막하되 희망마저 잃을 만큼 막막하지는 않으며, 박해를 받지만 버림받지는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망하지는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8–9 · 본디새김

먼저 고난을 말합니다. 그다음 그 고난이 자신을 어디까지 몰아넣지는 못하는지 말합니다. 그런 방식이 네 번 반복됩니다. 바울은 고난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하지만 궁지에 몰리지는 않는다

바울은 여러 방향에서 압박을 받지만, 빠져나갈 길이 없는 상태로 몰리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어려움이든 자신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7절에서 이미 모든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앞이 막막하지만 희망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

바울은 막막함은 경험하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절망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고린도후서 1:8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아시아 속주에서 당한 환난 때문에 「살아남을 희망마저 잃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두 진술은 서로 다른 측면을 말합니다. 1장에서 바울은 특정한 사건 속에서 생존 가능성에 대한 희망마저 잃었던 경험을 고백했고, 그때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4장에서는 고난 전체를 돌아보며, 그런 위기들이 자신을 궁극적인 파멸로 끝내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희망찬 마음을 유지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희망을 잃을 만큼 심한 고난을 경험했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이 그의 절망보다 더 깊은 근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4:8을 근거로 참된 신앙인은 절대로 막막하거나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박해받지만 버림받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바울을 거부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를 버리지 않는 이가 누구인지 직접 밝히지 않지만, 앞뒤 문맥이 하나님의 능력과 돌보심을 강조하므로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버리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망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대조는 싸움에서 땅에 쓰러진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실제로 쓰러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고난이 그에게 닿지 못하도록 만드는 보호막이 아닙니다. 고난이 실제로 그를 압박하고 혼란스럽게 만들며 쓰러뜨리는 가운데서도, 그의 사역과 소망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힘입니다.

질그릇은 강철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난을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어려움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길을 걷고 있는지 예수님과 연결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번째 대조에서 바울은 비슷한 그리스어 동사를 씁니다. 아포레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거나 막막한 상태를 나타내고, 강조의 의미가 더해진 엑사포레오는 더욱 심하게 막막하여 희망마저 잃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1:8의 「희망마저 잃었습니다」에도 같은 어근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예수님의 죽어 감을 몸에 지닌다는 것

고린도후서 4:10–12 본문 →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어 감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10 · 본디새김

바울은 단순히 죽음의 위험을 겪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어 감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인데 왜 지금 몸에 지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사건은 바울이 반복해서 이루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10절과 11절을 함께 읽으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 때문에 늘 죽음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에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11 · 본디새김

바울이 말하는 죽어 감은 예수님 때문에 겪는 실제적인 고난과 죽음의 위험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박해받고 생명의 위협을 겪으며, 그런 삶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길과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 감」은 죽어 가는 상태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로, 예수님의 죽음이 지금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삶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말을 모든 종류의 고통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특별히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질병과 사고, 부당한 폭력과 고통이 그 자체로 예수님의 죽어 감에 참여하는 신성한 사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도적 삶에 있습니다.

왜 죽음과 생명을 함께 말하는가

10절과 11절은 거의 같은 구조를 두 번 반복합니다. 죽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으로 이어 갑니다.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생명이 지금 자신의 「몸」과 「죽을 육」에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미래의 소망일 뿐 아니라 현재 사도의 연약한 삶 가운데서도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몸이 이미 죽지 않는 몸으로 변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죽을 육을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죽음은 우리 안에서,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그래서 죽음은 우리 안에서,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일합니다.고린도후서 4:12 · 본디새김

지금까지 자신의 고난을 이야기하던 바울이 마지막에 고린도인들을 등장시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고, 그 복음을 통해 고린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난과 고린도인들의 생명은 복음 사역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구별이 있습니다. 바울의 고난 자체가 고린도인들의 죄를 속량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을 이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대체하거나 보충하는 속죄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사역이 어떤 대가를 수반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고난 자체가 능력의 원천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능력의 원천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그 과정에서 그릇은 상처를 입고, 그 보물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믿었으므로 말한다

고린도후서 4:13–15 본문 →

그런데 바울은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왜 여전히 복음을 선포합니까?

우리는 믿음의 영, 곧 같은 영을 지니고 있기에, 「내가 믿었다. 그러므로 말했다」라고 적힌 그대로 우리도 믿고, 그러므로 또한 말합니다.고린도후서 4:13 · 본디새김

바울이 가져온 것은 시편 116:10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말했던 시편의 화자

시편 116편은 죽음의 위협에서 건짐받은 사람이 여호와야훼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시편의 화자는 죽음의 줄에 얽매였지만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고, 그분께서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뒤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단순히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을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의 화자와 바울은 둘 다 고난 가운데 있고, 둘 다 죽음의 위협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기에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이 끝난 뒤에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믿고, 그 믿음 때문에 계속 말하는 사람입니다.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이다

주 예수를 일으키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일으키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우시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14 · 본디새김

바울의 믿음은 자신의 사역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께서 자신과 고린도인들도 일으키실 것이라는 소망에 근거합니다.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이 하나님의 부활 능력을 이길 수 없다고 믿기에, 그는 복음 선포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의 논증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자들의 부활 소망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으킴받으셨다면, 그분께 속한 사람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혼자 일으킴받는 것이 아니다

14절에는 「여러분과 함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부활만이 아니라 고린도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소망을 말합니다.

12절에서는 죽음은 바울 안에서, 생명은 고린도인들 안에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소망에서는 바울과 고린도인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같은 그리스도께 속하며, 같은 하나님의 부활 약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역은 자기만 구원을 얻는 사업도 아니고, 고린도인들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생명에 함께 참여하는 일입니다.

은혜가 많아질수록 감사도 많아진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불어난 은혜가 더 많은 사람을 통해 감사를 넘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15 · 본디새김

은혜가 불어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바울이 겪는 고난과 복음 선포의 목적은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통해」가 앞의 은혜와 연결되는지 뒤의 감사와 연결되는지는 문법적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은혜가 더 많은 사람에게 미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더 많은 사람을 통해 감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은혜와 감사가 개인의 경험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로 확장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제 바울은 다시 처음의 고백, 낙심하지 않는다는 고백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시편 116:10과 그리스어의 표현은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구약의 시편 115:1은 「내가 믿었다. 그러므로 말했다」라는 구조를 사용하고, 바울은 이 그리스어 표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믿음과 말함 사이의 연결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관해 번역상의 논의가 있지만, 시편 화자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한다는 전체 문맥은 유지됩니다.

겉사람은 허물어져도 속사람은 새로워진다

고린도후서 4:16 본문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겉사람은 허물어져 가더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고린도후서 4:16 · 본디새김

4장은 1절과 16절에서 같은 선언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두 선언 사이에서 바울은 질그릇과 고난, 죽어 감과 예수님의 생명,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16절의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처음보다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이 약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겉사람이 허물어져 간다고 인정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은 몸과 영혼을 뜻하는가

이 대조는 육체는 가치가 없고 영혼만 중요하다는 뜻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난다고 말했고,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고린도인들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뒤이은 5장에서는 죽을 존재가 생명에 삼켜지는 소망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몸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거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의 완성으로 제시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겉사람은 고난과 쇠약함,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인간의 현재적인 모습과 연결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워지는 인간의 내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 둘은 서로 독립된 두 실체라기보다, 한 사람이 겪는 서로 다른 현실을 표현합니다.

겉사람은 허물어집니다.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속사람이 한 번 완전히 새로워졌다고 말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앞 장에서 그는 신자들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변화가 고난과 쇠약함을 겪는 현실 속에서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매일 자신이 더 좋아지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는 심리적인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겉사람이 실제로 허물어져 가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역사가 자신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육체의 쇠약함과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두 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겪는 환난을 아주 뜻밖의 말로 부릅니다. 「가벼운 환난」입니다.

가벼운 환난과 영광의 무게

고린도후서 4:17 본문 →

잠시뿐인 우리의 가벼운 환난이 넘치고 넘치도록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우리에게 빚어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17 · 본디새김

바울이 겪은 환난이 정말 가벼웠습니까?

그는 앞에서 살아남을 희망마저 잃었던 경험을 말했고, 늘 죽음에 넘겨지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고난을 「가벼운 환난」이라고 부릅니다.

고난 자체가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환난의 무게를 독립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영광의 무게와 비교합니다. 가벼운 환난과 영광의 무게를 한 문장 안에 놓고, 그 둘의 지속성을 다시 대조합니다.

환난은 잠시뿐입니다.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가벼워집니다. 고난 자체가 작아서가 아니라 비교하는 대상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 대조는 로마서 8:18에서도 나타납니다. 두 본문에서 바울은 고난의 실재를 부정하지 않고, 그 고난이 마지막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영광을 표현하면서 「넘치고 넘치도록」이라는 말을 거듭합니다. 그에게 미래의 영광은 고난에 대한 적당한 보상이 아니라,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환난이 영광을 빚어낸다는 말

바울은 환난이 끝나면 영광이 시작된다고만 말하지 않고, 환난이 영광을 빚어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모든 고통이 자동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법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겪고,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자신도 일으키시리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런 부활의 소망 안에서 환난이 영광과 연결됩니다.

이 구절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고난을 가볍게 여기라고 요구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자신의 고통을 가볍다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통을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통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에서 환난은 엘라프론, 곧 가벼운 것이고 영광은 바로스, 곧 무게입니다. 히브리어 카보드, 영광은 무겁다는 의미와 관련된 어근에서 나온 말로, 중요함과 존귀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바울이 그 히브리어의 어원적 연관성을 의식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그리스어 문장 자체에서 가벼운 환난과 영광의 무게가 맞서는 것은 분명합니다. 「넘치고 넘치도록」에서는 과도함이나 뛰어넘음을 뜻하는 휘페르볼레가 반복되어, 비교의 범위를 계속 뛰어넘는 영광을 나타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고린도후서 4:18 본문 →

우리가 보이는 것을 눈여겨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여겨보는 가운데 말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18 · 본디새김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다시 시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앞부분에서는 사람들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여겨본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여겨본다는 것

「눈여겨보다」는 어떤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살피고 관심을 집중하고 목표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과 자신이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을 구별합니다.

환난과 박해, 쇠약해지는 몸,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현실은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활 약속과 영원한 영광은 아직 같은 방식으로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현실이 자신의 시선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더 참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보이는 세계가 거짓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만 참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을 육에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난다고 말했고, 부활의 소망을 밝혔습니다. 부활은 몸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에 놓인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물질과 비물질이 아닙니다.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기준은 지속성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바울이 미래의 부활을 믿는 것은 현재의 삶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복음을 계속 전하고 고난을 견디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광에 대한 소망이 보이는 현실 속에서의 삶을 지탱합니다.

질그릇에 담긴 빛

고린도후서 4:1–18 본문 →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면,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는 사람으로 강한 사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 장 전체에서 그는 한 번도 자신이 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자신의 약함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함을 없애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약함 속에서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본문이 모든 고난의 원인을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고난의 모든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 고난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에게 소망의 근거는 상황의 개선 가능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의 처음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눈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는 복음의 빛이 비쳐 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태초에 어둠에서 빛이 비치게 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추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입니다.

바울은 그 빛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으로 만든 등잔이나 찬란한 그릇을 꺼내 놓지 않습니다.

질그릇을 꺼내 놓습니다.

값비싼 보물을 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바울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환난을 당하고, 앞이 막막하며, 박해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질그릇이 얼마나 훌륭한가가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입니다. 「넘치는 힘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질그릇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이 바로 그 연약한 사람 안에 비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