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새 언약의 일꾼

질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흔들리지 않는 사람, 언제나 확신에 차 있는 사람,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면 그 능력을 전하는 사람도 강하고 당당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반대의 그림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담고 있습니다.」 보물은 귀하지만 그것을 담은 그릇은 쉽게 깨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는 사방에서 짓눌리고, 앞이 막막하며, 박해를 받고, 내던져집니다. 심지어 언제나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자신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붙들고 있는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고린도후서 4장 전체를 꿰뚫는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약함이 사라진 뒤에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 사람이 여전히 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이 역설을 세 개의 이미지로 발전시킵니다. 어둠에 비치는 빛, 보물을 담은 질그릇, 그리고 쇠약해지는 겉사람과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입니다. 이 이미지들을 따라가면 바울이 왜 자신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지, 또 그 고난 가운데 무엇을 바라보았는지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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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왜 가려져 있는가

고린도후서 4:1–4 본문 →

바울은 4장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새 언약의 영광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일을 하나님께 맡았기에 이제 자신이 어떤 태도로 복음을 전하는지 밝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비로 맡겨 주신 이 일을 하면서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1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뛰어난 자격을 갖추었기에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 이 일을 맡겨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15:9, 갈라디아서 1:13).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은 자신의 과거와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은 처음부터 자기 자격을 증명하는 사업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것과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다르다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부끄러워 숨기는 일들을 버렸습니다. 속임수를 쓰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바꾸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것을 분명히 드러내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임을 모든 사람의 양심에 보여 줍니다.고린도후서 4:2 · 두루새김

이 문장에서 맞서는 것은 감추는 일과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설명이나 설득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편지들 자체가 꼼꼼한 논증과 권면으로 가득합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전하는 내용을 왜곡하거나 듣는 사람을 속여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으려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믿게 만들기 위해 그 말씀을 거짓되게 바꾼다면, 그는 이미 말씀의 진실성을 훼손한 셈이 됩니다.

양심은 여기서 진리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사람들 앞에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함께 써서, 자신의 행동을 궁극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라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하나님의 빛과 깊이 연결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진리를 감추지 않는 까닭은, 그가 전하는 복음 자체가 감춰진 것을 밝히는 하나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진리를 드러냈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이 가려졌다면 누구에게 가려진 것인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해도, 그것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3 · 두루새김

바울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자신의 말에 숨겨진 비밀이나 일부러 감추는 태도에서 찾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려져 있다」는 표현은 앞 장의 너울 이야기를 이어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읽히지만 그 의미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이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만 그 영광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설명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이 시대의 신이 그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눈멀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는 복음의 빛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4 · 두루새김

복음이 가려지는 일은 지식이나 설명의 부족 때문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의 생각이 눈멀게 되는 영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은 지능이나 사고 능력이 아니라, 앞 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와 연결되어 예수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능력이 가려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의 신」은 누구인가

이 표현은 해석이 갈립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사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서 2:11에서 사탄이 공동체의 갈등을 이용할 위험을 말했고, 11:14에서는 사탄이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문맥에서 이 시대의 신이 사람들의 생각을 눈멀게 한다는 표현은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활동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그 해석은 앞 장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굳어졌다고 말한 것과 연결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가운데 사람들의 이해를 가리셨다고 읽습니다. 이 해설은 문맥상 사탄을 가리키는 읽기를 따르지만, 다른 견해의 존재를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바울은 사탄에게 하나님과 대등한 창조주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지금의 세상 질서입니다. 사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과 동등한 권세를 가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둠을 설명하는 일이 이 단락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 어둠 속에 어떤 빛이 비치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보이는가

고린도후서 4:5–6 본문 →

4절 후반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특별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입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창세기 1:26–2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의 본래 문맥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책임을 맡은 존재라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결정적으로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15에서도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이 사실이 영광과 연결됩니다. 복음의 빛은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빛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보게 하는 빛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를 드러내야 하는가

5절에서 바울은 이 논증을 자신이 하는 일에 적용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세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님이시라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은 예수 때문에 여러분의 노예라고 말합니다.고린도후서 4:5 · 두루새김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바울 자신은 고린도인들의 노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신 사도입니다. 그런데 사도로서 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자신을 공동체의 주인이 아니라 그들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노예는 친절한 봉사자를 뜻하도록 부드럽게 돌려 쓴 표현이 아닙니다. 이 말은 주인에게 속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을 가리키며, 고대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법과 사회 안에서 자유인과 크게 구별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낮은 지위를 나타내는 말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그렇다고 고린도인들이 바울의 궁극적인 주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때문에」 그들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섬깁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전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영광을 자신이 차지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자신을 복음의 중심에 세운다면, 그가 말로는 예수님을 전하더라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 가능성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원하시는 영광은 무엇인가요? 6절이 대답합니다.

창조의 첫 빛이 마음속에 비치다

「어둠에서 빛이 비칠 것이다」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을 주시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6 · 두루새김

바울은 갑자기 창조의 장면을 불러옵니다.

그 배경은 창세기 1:3입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창조의 빛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창조의 장면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옮겨 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게 되는 일을 새로운 주장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 속에 빛을 창조하셨듯,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을 비추신 사건, 곧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4절과 6절은 정확하게 맞섭니다. 4절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눈멀게 되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십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추는 곳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특정한 장소나 물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로

앞 장에서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영광을 없어져 가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너울이 벗겨진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영광이 어디에서 드러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영광은 하나님과 만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이것은 모세보다 더 밝은 빛이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영광을 예수님의 삶에서 분리하지 않습니다. 이후 10–11절에서 그가 말할 것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과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걸으셨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분리된 눈부신 위대함이 아닙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셨고, 하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토록 귀한 영광을 맡은 사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요? 바울은 보물을 담은 질그릇을 꺼내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어둠에서 빛이 비칠 것이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1:3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그 창조 사건을 다시 그려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보물이 귀할수록 그릇은 초라해 보인다

고린도후서 4:7 본문 →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담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7 · 두루새김

이 장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이지만, 앞절과 연결하여 읽으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 보물」은 바로 앞에서 말한 빛, 곧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과 연결됩니다. 바울이 지닌 보물은 자신의 신앙적인 열정이나 뛰어난 지식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일이며 그 영광을 전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담은 그릇은 질그릇입니다.

왜 하필 질그릇인가

고대의 질그릇은 물을 담거나 음식을 보관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였습니다. 금속으로 만든 귀한 그릇과 달리 비교적 값이 싸고 깨지기 쉬웠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릇을 사람의 약함에 비유합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보물이 맡겨졌지만, 그 자신은 여전히 약하고 쉽게 상처받으며 죽을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는 보물의 가치와 그것을 담은 그릇의 약함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만들어, 보물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히 합니다. 보물이 아름다운 것은 그릇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보물 자체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약한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귀한 것을 맡기실 수 있다고만 말하지 않고, 이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능력으로 오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언제나 강하고 성공적이며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이 지닌 힘을 바울 자신의 뛰어남에서 찾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일을 이어 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이 전해지는 일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힘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약함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은 아니다

바울은 약함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약해지면 자동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약한 사람 안에서 실제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입니다.

그 안에 보물이 있다고 해서 깨지기 쉬운 성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릇이 약하다고 해서 보물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인들이 사도를 평가할 때 강함과 성공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면, 바울은 그 기준을 뒤집습니다. 참된 사도의 증거는 인간적인 약점이 모두 사라졌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약한 인간을 통해 일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질그릇이 얼마나 약한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무너지지만 끝나지는 않는다

고린도후서 4:8–9 본문 →

바울은 네 쌍의 대조를 빠르게 이어 갑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짓눌려도 빠져나갈 길이 막히지는 않습니다. 앞이 막막해도 희망마저 잃지는 않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내던져져도 망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8–9 · 두루새김

먼저 고난을 말하고, 그다음 그 고난이 자신을 어디까지 몰아넣지는 못하는지 말합니다. 그런 리듬이 네 번 반복됩니다. 바울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사방에서 짓눌려도 빠져나갈 길이 막히지는 않는다

바울은 여러 방향에서 압박을 받지만, 완전히 빠져나갈 길이 없는 상태로 몰리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어려움이든 자신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7절에서 이미 모든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짓눌리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붙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앞이 막막해도 희망마저 잃지는 않는다

여기서 바울은 비슷한 두 동사를 씁니다. 앞의 동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거나 막막한 상태를 나타내고, 강조의 의미가 더해진 뒤의 동사는 더욱 심하게 막막하여 희망마저 잃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막막함은 경험하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절망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고린도후서 1:8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아시아 속주에서 당한 고난 때문에 살아남을 희망마저 잃었다고 고백했는데, 원문에서는 같은 어근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1장에서는 희망을 잃었다고 하고, 4장에서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두 진술은 서로 다른 측면을 말합니다. 1장에서 바울은 특정한 사건 속에서 자신의 힘과 생존 가능성에 대한 희망마저 잃었던 경험을 고백했고, 그때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4장에서는 자신이 겪는 고난 전체를 돌아보며, 그런 위기들이 자신을 궁극적인 파멸로 끝내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희망찬 마음을 유지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희망을 잃을 만큼 심한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이 그의 절망보다 더 깊은 근거가 되었기에 다시 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4:8을 근거로 참된 신앙인은 절대로 막막하거나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는다

세 번째 대조에는 관계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거부하고 공격할 수 있지만, 그는 버림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그를 버리지 않는 이가 누구인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앞뒤 문맥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돌보심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버리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내던져져도 망하지 않는다

마지막 대조는 마치 싸움에서 땅에 쓰러진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실제로 쓰러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네 대조를 함께 읽으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분명해집니다. 그 능력은 고난이 바울에게 닿지 못하도록 만드는 보호막이 아닙니다. 고난이 실제로 그를 짓누르고 혼란스럽게 만들며 쓰러뜨리는 가운데서도, 그가 하는 일과 소망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힘입니다.

질그릇은 강철로 바뀌지 않습니다.

여전히 깨지기 쉬운 그릇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약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난을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어려움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길을 걷고 있는지 예수님과 연결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을 몸에 지닌다는 것

고린도후서 4:10–12 본문 →

우리는 언제나 예수께서 겪으신 죽음을 우리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10 · 두루새김

바울은 죽음을 생각한다거나 죽음의 위험을 겪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인데 왜 지금 몸에 지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사건은 바울이 반복해서 이루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을 지니고 다닌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10절과 11절을 함께 읽으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 때문에 늘 죽음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몸에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11 · 두루새김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예수님 때문에 겪는 실제적인 고난과 죽음의 위험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박해를 받고, 생명의 위협을 겪으며, 자신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 경험합니다. 그런 삶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길과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두루새김이 「예수님께서 겪으신 죽음」으로 옮긴 원문의 네크로시스(νέκρωσις)는 죽어 가는 상태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신의 삶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말을 모든 종류의 고통에 구별 없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특별히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분을 섬기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이 직접적인 문맥입니다. 따라서 모든 질병과 사고, 부당한 폭력과 고통이 그 자체로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신성한 사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 죽음과 생명을 함께 말하는가

10절과 11절은 거의 같은 구조를 두 번 반복합니다. 두 절 모두 예수님 때문에 겪는 죽음을 말한 뒤, 예수님의 생명이 몸에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잇습니다.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아닙니다.

여기서 「생명」을 바울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뜻으로만 좁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과 연결됩니다. 동시에 바울은 그 생명이 지금 자신의 「몸」과 「죽을 몸」에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미래의 소망일 뿐 아니라 현재 사도의 약한 삶 가운데서도 일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몸이 이미 죽지 않는 몸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죽을 몸을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질그릇의 비유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죽음은 우리 안에서,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는 고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고린도인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는 죽음이, 여러분 안에서는 생명이 일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4:12 · 두루새김

이것은 바울이 고생했으니 고린도인들이 혜택을 받았다는 뜻 이상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고, 그 복음을 통해 고린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난과 고린도인들의 생명은 복음을 전하는 일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구별이 있습니다. 바울의 고난 자체가 고린도인들을 죄에서 건져 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을 이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대신하거나 보충하여 죄를 씻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일에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고난 자체가 능력의 원천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생명을 전하는 길은 자신을 보호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길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12절은 처음의 질그릇 비유보다 더 깊은 역설을 보여 줍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릇은 상처를 입고, 그 보물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믿었으므로 말한다

고린도후서 4:13–15 본문 →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여전히 복음을 전합니까? 13절에서 바울은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성경에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믿음의 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기에 말합니다.고린도후서 4:13 · 두루새김

고난 가운데서 말했던 시편의 화자

바울이 가져온 구절은 시편 116:10입니다. 시편 116편은 죽음의 위협에서 건짐받은 사람이 여호와야훼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사람은 죽음의 줄에 얽매였지만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고, 그분께서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뒤 그는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시편을 인용하는 이유는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사람과 바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둘 다 죽음의 위협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기에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이 끝난 뒤에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믿고, 그 믿음 때문에 계속 말하는 사람입니다.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이다

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믿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밝힙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자기 앞에 세워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14 · 두루새김

바울의 믿음은 자신이 하는 일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께서 자신과 고린도 사람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소망에 근거합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이 끝내 하나님의 부활 능력을 이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설명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자들의 부활 소망과 분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도 바울은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 남아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고린도 사람들을 함께 다시 살리시리라고 말합니다.

바울 혼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14절에는 「여러분과 함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부활만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소망을 말합니다.

이것은 앞의 12절을 다시 보게 합니다. 죽음은 바울 안에서, 생명은 고린도 사람들 안에서 일한다고 했지만, 부활의 소망에서는 바울과 고린도 사람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같은 그리스도께 속하며, 같은 하나님의 부활 약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일은 자기만 구원을 얻는 사업도 아니고, 고린도 사람들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생명에 함께 참여하는 일입니다.

은혜가 많아질수록 감사도 많아진다

15절은 이 흐름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으로 연결합니다.

이 모든 일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고, 더 많은 사람을 통해 감사가 넘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4:15 · 두루새김

바울이 겪는 고난과 복음을 전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더 많은 사람을 통해」라는 표현이 앞의 은혜와 연결되는지 뒤의 감사와 연결되는지가 문법적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은혜가 더 많은 사람에게 미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더 많은 사람을 통해 감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더 많은 사람을 통해 감사가 넘쳐」라고 옮겨, 이 표현을 감사와 연결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은혜와 감사가 개인의 경험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로 퍼져 나간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제 바울은 다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갑니다.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시편 116:10과 그리스어의 표현은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구약의 시편 115:1은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했다」라는 구조를 사용하고, 바울은 이 그리스어 표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믿음과 말함 사이의 연결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관해 번역상의 논의가 있지만, 시편에서 말하는 사람이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한다는 전체 흐름은 유지됩니다.

겉사람은 쇠약해져도 속사람은 새로워진다

고린도후서 4:16 본문 →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쇠약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고린도후서 4:16 · 두루새김

4장은 1절과 16절에서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라는 같은 선언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두 선언 사이에서 바울은 질그릇과 고난, 죽음에 넘겨지는 삶과 예수님의 생명,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16절의 선언은 처음보다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이 약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겉사람은 쇠약해져도」라고 말하며 몸이 약해지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은 몸과 영혼을 뜻하는가

이 대조는 인간이 몸과 영혼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뉘고, 몸은 가치가 없지만 영혼은 중요하다는 뜻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난다고 말했고,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고린도 사람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뒤이은 5장에서는 죽을 존재가 생명에 삼켜지는 소망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몸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의 완성으로 제시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겉사람은 고난과 쇠약함, 죽음의 위협에 놓인 인간의 현재 모습과 연결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워지는 인간의 내면을 가리킵니다.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따로 존재하는 두 부분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겪는 서로 다른 현실을 표현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방향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겉사람은 쇠약해지고,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속사람이 한 번 완전히 새로워졌다고 말하지 않고,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 안에서 계속 일하시는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 장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닮아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변화가 고난과 쇠약함을 겪는 현실 속에서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매일 자신이 더 좋아지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는 마음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모든 날에 기분이 좋아지거나 자신감이 커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겉사람이 실제로 쇠약해져 가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일이 자신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은 몸의 쇠약함과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바울을 용기 잃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두 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고난을 아주 뜻밖의 말로 부릅니다. 「가벼운 어려움」입니다.

가벼운 어려움과 영광의 무게

고린도후서 4:17 본문 →

지금 잠시 겪는 우리의 가벼운 어려움이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을 이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고린도후서 4:17 · 두루새김

바울이 겪은 어려움이 정말 가벼웠습니까?

그는 앞에서 살아남을 희망마저 잃었던 경험을 말했습니다. 심하게 짓눌렸고, 죽을 것 같았으며, 늘 죽음에 넘겨지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고난을 「가벼운 어려움」이라고 부릅니다.

고난 자체가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어려움의 무게를 따로 떼어 평가하지 않고, 영광의 무게와 비교합니다. 가벼운 어려움과 무거운 영광을 나란히 놓고, 그 둘이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지도 대조합니다. 어려움은 잠시뿐이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이것은 힘든 시간이 끝난 뒤에 더 좋은 일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광이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가벼워집니다. 고난 자체가 작아서가 아니라 비교하는 대상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 대조는 로마서 8:18에서도 나타납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과 앞으로 드러날 영광을 비교합니다. 두 본문에서 바울은 고난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 고난이 마지막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광의 무게」라는 독특한 표현

히브리어 카보드, 곧 영광은 무겁다는 의미와 관련된 말에서 나왔으며, 중요함과 존귀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바울이 이 말뜻 사이의 연관성을 의식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 문장 자체에서 가벼운 어려움과 영광의 무게가 맞서는 것은 분명합니다.

원문에서 바울은 이 영광을 표현하면서 지나칠 만큼 크거나 뛰어넘는다는 뜻의 말을 거듭 씁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조금 더 큰 영광이 아니라, 비교의 범위를 계속 뛰어넘는 영광입니다. 그에게 미래의 영광은 고난에 대한 적당한 보상이 아니라,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려움이 영광을 이루어 준다는 말

바울은 어려움이 끝나면 영광이 시작된다고 말하지 않고, 어려움이 영광을 「이루어 준다」고 말합니다. 고난과 영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모든 고통이 저절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법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겪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난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자신도 다시 살리시리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런 부활의 소망 안에서 어려움이 영광과 연결됩니다.

이 구절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고난을 가볍게 여기라고 요구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가볍다고 부를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고통을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통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고린도후서 4:18 본문 →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18 · 두루새김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다시 시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앞부분에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별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

여기서 「바라봅니다」(σκοπέω)로 옮긴 동사는 어떤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살피고, 관심을 집중하고, 목표로 삼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반면 「보이는 것」은 눈에 드러나 있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과 자신이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을 구별합니다.

고난과 박해, 쇠약해지는 몸, 내던져지는 현실은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활 약속과 영원한 영광은 아직 같은 방식으로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현실이 자신의 시선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더 참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보이는 세계가 거짓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만 참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앞에서 자신의 죽을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난다고 말했고, 자신과 고린도 사람들이 부활하리라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부활은 몸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 놓인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물질과 비물질이라는 구분이 아닙니다.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현재의 고난과 쇠약함이 마지막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미래의 부활을 믿는 것은 현재의 삶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복음을 계속 전하고, 고난을 견디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광에 대한 소망이 보이는 현실 속에서의 삶을 지탱합니다.

질그릇에 담긴 빛

고린도후서 4:1–18 본문 →

빛은 하나님에게서 오고, 보물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지만, 그것을 담은 그릇은 여전히 약합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가려진 복음의 빛(4절), 마음에 비치는 빛(6절), 질그릇에 담긴 보물(7절)을 차례로 보여 준 뒤, 그 그릇이 얼마나 연약한지(8–12절), 그 생명을 전하는 일이 무엇에 근거하는지(13–15절), 이 모든 경험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바뀌는지(16–18절)를 이어 갑니다.

이 흐름 전체에서 바울은 한 번도 자신이 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자신의 약함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없애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약함 속에서도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 자체가 그런 모습을 지닙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패배와 수치였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장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 뛰어난 말솜씨, 눈에 보이는 성과가 진실성을 증명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 고난을 자랑거리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 장은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본문이 모든 고난의 원인을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고통이 언제 끝날지까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대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고난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에게 소망의 근거는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의 처음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눈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어둠에서 빛이 비치게 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추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입니다.

바울은 그 빛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으로 만든 등잔이나 찬란한 그릇을 꺼내 놓지 않습니다. 값비싼 보물을 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을 꺼내 놓습니다.

바울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사방에서 짓눌리고, 앞이 막막하며, 박해받고, 내던져집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질그릇이 얼마나 훌륭한가가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이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내려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질그릇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이 바로 그 연약한 사람 안에 비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