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새 언약의 일꾼
죽음을 삼키는 생명과 화해
바울은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집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집을 떠나는 것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익숙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키게 하려고」 덧입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죽음이 인간을 삼키는 대신, 생명이 죽을 존재를 삼킵니다.
이 대담한 역전에서 고린도후서 5장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장은 부활의 소망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고, 새 창조가 등장하며, 마침내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에 이릅니다.
이 일들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마지막 운명만 바꾸는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까지 새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장에는 두 선언이 함께 등장합니다. 하나는 죽을 존재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지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화해입니다. 두 선언 모두 인간이 무엇을 이루어 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가에서 출발합니다.
무너지는 집을 떠나 어디로 가는가
그도 그럴 것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건물, 곧 하늘에 있는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5:1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살고 있는 몸을 장막 집에 비유합니다. 장막은 영구적인 건물이 아닙니다. 세웠다가 거둘 수 있고, 오래 사용하면 낡거나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앞 장에서 겉사람이 허물어져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허물어짐이 결국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죽음입니다.
현재의 장막은 「땅에 있는」 집이고, 장차 받을 건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입니다. 하나는 무너질 수 있지만, 다른 하나는 영원합니다.
하늘에 있는 집은 무엇인가
이 비유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 이후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늘의 거처, 곧 장막을 떠나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으로 들어간다는 그림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실 부활의 몸, 곧 현재의 죽을 몸과 달리 영원한 생명에 속한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1절만 보면 거처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나 2–4절에서 바울이 집을 옷처럼 ‘덧입는다’고 말하고,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일을 소망한다는 점은 부활의 몸과 연결하는 해석을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고린도전서 15:42–54에서 바울은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으로 일으킴받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다고 설명합니다.
「하늘에 있는」이라는 표현도 반드시 하늘이라는 장소에서 영원히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늘은 장차 받을 생명의 근원과 성격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의 세부적인 시간표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바울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생명을 소망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집을 입는다는 이상한 표현
2절에서 바울은 비유를 바꿉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 장막 안에서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거처를 덧입기를 간절히 바라며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5:2 · 본디새김
사람은 집 안에 들어가지, 집을 입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서로 다른 두 이미지를 하나로 겹쳐 놓습니다. 집은 보호받고 거주하는 장소를, 옷은 현재의 몸에 새로운 것을 입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몸을 벗어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덧입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위에 덧입는다는 뜻으로, 옷을 벗는 것과 구별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죽을 몸을 벗어 버리고 몸 없는 존재로 남는 것을 궁극적인 소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어 죽을 존재가 새롭게 되는 일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4절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막 안에 있는 우리가 짐에 눌린 채 신음하는 것은 우리가 벗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덧입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키게 하려고 말입니다.고린도후서 5:4 · 본디새김
바울의 신음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탄식이 아닙니다. 그는 죽을 존재가 겪는 무게를 알고 있지만, 그가 바라는 해결은 몸을 완전히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키는 일입니다.
이 구절은 기독교의 부활 소망과 단순한 영혼 불멸 사상을 구별하게 합니다. 바울은 죽음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영혼만을 참된 인간으로 여기고 몸을 버려야 할 껍데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몸을 지닌 인간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바로 그 죽을 현실이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3절은 이 이미지의 긴장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참으로 우리가 벗고 나서도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고린도후서 5:3 · 본디새김
이 절은 사본에 따라 「벗고 나서」와 「입고 나서」로 갈립니다. 위 본문처럼 「벗고 나서」로 읽으면 바울의 소망에는 긴장이 남습니다. 그는 현재의 몸을 벗는 죽음의 가능성을 알고 있지만, 몸을 벗는 것 자체가 그가 바라는 완성이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벌거벗은 상태로 남지 않는 것,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입는 일입니다.
바울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몸을 벗는 일과 생명을 덧입는 일 사이의 긴장을 비유로 표현합니다. 이 긴장을 지나치게 매끄럽게 풀어 버리면 2–4절의 신음이 지닌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는 죽을 몸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면서도,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킨다
4절의 마지막 문장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키게 하려고 말입니다」는 이 모든 이미지가 향하는 곳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을 끝내는 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을 인간에게 닥치는 최후의 승리자로 놓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이 죽음을 삼킨다고 말합니다.
죽음보다 더 큰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의 막연한 바람일까요? 5절은 소망의 근거를 밝힙니다.
우리를 바로 이 일을 위해 빚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증으로 영을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5:5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부활을 강하게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해 사람들을 「빚으셨고」, 그 약속의 보증으로 영을 주셨기 때문에 소망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할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미래를 알려 주는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지금부터 경험하게 하시는 선물입니다.
아직 죽을 몸을 지니고 있지만, 이미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완성의 보증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이 두 현실 사이에서 신음하면서도 소망합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사본 차이는 바울이 무엇을 우려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줍니다. 「입고 나서」라고 읽으면 하나님의 새 생명을 입고 벌거벗은 상태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고, 「벗고 나서」라고 읽으면 현재의 몸을 벗은 다음에도 벌거벗은 채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사후의 중간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4절은 이사야 25:8과 연결됩니다. 심판과 회복, 하나님의 통치를 노래하는 이사야 24–27장 가운데 이 절은 하나님께서 죽음을 없애시고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선포하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4에서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부활의 승리를 설명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4는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는 형식은 아니지만,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진다는 같은 신학적 그림을 사용합니다.
주님을 떠나 살고 있지만 마음은 든든하다
6절부터 바울의 어조가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신음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마음이 든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사는 동안에는 주님을 떠나 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5:6 · 본디새김
어떻게 신음하면서 동시에 마음이 든든할 수 있을까요? 신음의 원인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망의 근거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을 떠나 산다는 말
이 표현을 그리스도인이 현재 주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미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떠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7절이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걷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5:7 · 본디새김
차이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누리고 있는가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대면하지 않고 믿음으로 걷습니다.
「걷다」는 일상적인 삶의 방향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믿음으로 걷는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이 아니라, 눈앞에 나타난 것만을 궁극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고난과 쇠약함을 경험하지만, 그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 전체를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삶을 이끄는 것은 직접 보는 일이 아니라 그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몸에서 떠나 주님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
우리는 마음이 든든하며, 차라리 몸에서 떠나 주님 곁에 머물러 사는 편을 좋게 여깁니다.고린도후서 5:8 · 본디새김
바울은 4절에서 몸을 벗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제는 몸에서 떠나 주님 곁에 머무는 편이 좋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4절은 궁극적으로 바라는 생명의 상태, 곧 죽을 몸을 벗은 채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덧입는 일을 말합니다. 8절은 몸 안에 머물며 주님을 직접 보지 못하는 상태와 몸에서 떠나 주님 곁에 머무는 상태를 비교합니다. 그가 선호하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 곁에 있는 일입니다.
빌립보서 1:21–24에서도 바울은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육체 안에 머물러 사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만 고린도후서 5장은 죽음과 최종적인 부활 사이의 시간적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몇 절만으로 사후의 존재 상태나 부활의 정확한 시점을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죽음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현재의 삶을 하찮게 만들지 않습니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하나의 목표
그러므로 우리는 몸에 머물러 살든 몸에서 떠나 살든 그분의 마음에 들려고 힘씁니다.고린도후서 5:9 · 본디새김
바울은 현재의 몸 안에 머무는 상태를 무의미한 대기 시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미래만 중요하고 지금은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상태에 있든 그분의 마음에 들려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는 미래의 생명을 믿기 때문에 오늘의 삶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절에 있습니다.
저마다 몸으로 행한 것을, 선한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에 따라 돌려받게 하려고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5:10 · 본디새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다
바울이 말하는 심판대는 로마 관리의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모두」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인들에게만 심판을 경고하지 않고, 사도인 자신도 함께 그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드러나다」는 법정에 출석한다는 뜻을 넘어 삶의 진상이 밝혀지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 심판은 「몸으로 행한 것」과 연결됩니다. 몸이 무너지는 장막과 같다고 했지만, 그 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부활 소망은 윤리적 책임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행위의 공로만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전체적인 구원론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통한 의롭다 하심을 분명히 말합니다(로마서 3:21–26). 여기서 그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이 심판을 상급의 크기를 결정하는 자리로만 한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선한 것이든 나쁜 것이든」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소망은 몸의 가치를 지우지 않고, 지금 몸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 영원한 의미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엄중한 책임을 알고 있는 바울은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까요?
조금 더 깊이
「심판대」는 재판이나 공적인 판결이 이루어지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고린도인들에게 낯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8:12–17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총독 갈리오의 재판대 앞에 고발된 적이 있습니다. 고대 고린도의 광장에는 공적 판단을 위한 높은 단상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의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알고 있기에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의 양심에도 드러나 있기를 바랍니다.고린도후서 5:11 · 본디새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모든 사람이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여기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삶을 판단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려는 마음이고, 그 두려움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실제 행동을 낳습니다.
하나님께는 이미 드러나 있다
11절 후반에서 바울은 두 종류의 인정을 구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바울의 진실이 숨겨져 있지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그의 행동과 동기를 둘러싼 오해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만으로 고린도인들의 오해를 무시하지 않고, 그들이 자신의 진실을 알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진실성을 사람들의 인정에 종속시키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정교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이 있지만, 그 평가를 얻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꾸미려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
12절에서 갈등의 한 측면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다시 여러분에게 우리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를 두고 자랑할 거리를 여러분에게 주는 것입니다. 겉에 근거하여 자랑하고 마음에 근거하여 자랑하지 않는 이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고 말입니다.고린도후서 5:12 · 본디새김
그들의 구체적인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는 이 절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뒤의 10–13장에는 바울과 경쟁하는 이들의 자기 과시와 사도직을 둘러싼 논쟁이 등장하지만, 그 모든 내용을 여기에 그대로 대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평가 기준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이 따뜻한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11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진실한 내면과 동기를 포함합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몸으로 행한 일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실을 온전히 보여 주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3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정신이 나갔다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제정신이라면 여러분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5:1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바울이 지나치게 열광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다만 실제로 누가 어떤 말로 그를 비난했는지, 바울이 특정한 황홀경이나 종교적 체험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정신이 나갔는지 제정신인지를 논쟁의 중심에 놓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거나 고린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왜 그런 방식으로 사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외적인 모습보다 그를 움직이는 힘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그 힘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몰아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몰아갑니다. 우리가 한 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판단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고린도후서 5:14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막연한 따뜻함이 아니라, 한 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구체적인 사건에 근거합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제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누구의 사랑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문법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일 수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설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중심에 두는 해석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헌신도 그 결과로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몰아갑니다」는 어떤 것을 붙들거나 압박하여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바울은 그 사랑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랑이 자신의 행동을 붙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선택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한 뒤에는 자신만을 위해 사는 길을 정당화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삶을 움직이는 기준이 바뀐 것입니다.
한 분이 죽으셨는데 왜 모든 사람이 죽었는가
14절의 가장 어려운 문장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한 분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대리적 성격과 대표적 성격을 구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리라는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다는 점이, 대표라는 관점에서는 한 분의 죽음이 그분과 연결된 사람들 모두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두 의미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라는 결론을 이해하려면 대표적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대표하시는 사람들의 죽음이 그 죽음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은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희생적인 행동에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를 모든 인류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 죽음의 보편적인 범위를 말하지만, 곧이어 그 죽음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설명하고, 20절에서는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간청까지 등장합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과 모든 개인이 이미 화해를 받아들였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죽음의 목적은 새로운 삶이다
그분은 살아 있는 이들이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고린도후서 5:15 · 본디새김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이타적으로 살라는 도덕적 교훈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새로운 삶의 방향을 먼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서 찾습니다. 그분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그분께 속한 사람들의 삶도 이전과 같은 중심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삶에서 벗어나는 근거입니다. 바울은 이 변화를 강요된 의무로만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이 자신의 삶을 붙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13절의 수수께끼도 풀어 줍니다. 바울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든 제정신인 것처럼 보이든, 그가 하나님과 고린도인들을 위해 살아가는 이유는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바꾸는 것은 삶의 목적만이 아닙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까지 바꿉니다.
조금 더 깊이
「~을 위해」로 옮긴 전치사 휘페르는 대리, 대표, 유익이라는 여러 의미를 함께 함축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3–11에서도 바울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일을 설명합니다.
이제부터 아무도 이전의 기준으로 알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을 따라 알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을 따라 알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5:16 · 본디새김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으므로, 이제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달라집니다.
육을 따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육을 따라」는 바울의 편지에서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며, 여기서는 사람의 육체적인 외모를 본다는 뜻으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겉에 근거하여 자랑하는 사람들과 마음에 근거한 진실을 대조했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삶을 새롭게 규정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육을 따라 안다는 것은 그 죽음과 부활이 만들어 낸 새로운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기존의 인간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사회적 지위나 혈통, 능력, 외적인 성취만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지만, 바울이 이 구절에서 그런 기준들을 하나하나 나열한 것은 아닙니다. 문맥상 확실한 것은 평가의 기준이 그리스도 안에서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육을 따라 알았던 일까지 언급합니다. 이 말이 바울이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그분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는 증거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읽기는 둘로 갈립니다. 「육을 따라」가 바울이 알았던 방식을 가리킨다고 읽으면, 그는 과거에 그리스도를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 표현을 알려지는 대상과 연결하면, 육신을 입고 사셨던 예수님을 아는 방식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는 방식을 대조한다고 보게 됩니다. 앞의 「아무도 육을 따라 알지 않습니다」와 평행을 이루므로,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의 변화에 무게를 두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고,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셨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기준도 달라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인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인가
17절은 이 흐름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생겨났습니다.고린도후서 5:1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개인의 변화에 대한 말씀으로 읽힙니다. 이 해석은 본문의 중요한 측면을 담고 있지만, 바울의 표현에는 그것보다 더 큰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어는 매우 압축적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과 ‘새 창조’라는 명사구만 있고, ‘~이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따로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로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거기에 새 창조가 있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새로운 정체성을,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현실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변화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참여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사람이 이전보다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생겨났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더 큰 현실로 확장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새 창조
「옛것」과 「새것」, 「새 창조」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회복 약속과 강한 주제적 연결을 보입니다. 바울이 이사야의 특정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야에서 새 창조는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새롭게 하시는 구원과 회복의 일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개인의 죄책감을 해결하는 사건에 머물지 않고, 옛 삶의 질서가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하고 새로운 삶의 현실이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세상에서 죄와 죽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이 장의 앞부분에서 여전히 신음하며 죽을 몸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새 창조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여전히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이 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합니다. 몸이 생명을 덧입을 미래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관계를 낳는다
16절과 17절을 함께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이므로 다른 사람을 육을 따라 알지 않습니다. 새 창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에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까지 바꿉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다른 사람은 내가 가진 기준으로 분류하고 평가할 대상이 아니라 그 죽음과 부활 앞에서 다시 바라보아야 할 사람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갈등을 다루는 바울의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가운데서도, 고린도인들을 자신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누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전제하며 관계를 회복하려 합니다. 물론 바울의 선언은 그 갈등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관계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18절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3:18–19에서 하나님은 유배와 회복의 상황에 있는 백성에게 이전의 일들에만 머무르지 말고, 자신이 새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 말씀의 본래 역사적 배경에는 포로 생활에서의 회복과 새로운 출애굽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사야 65:17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를 시작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섬김을 주신 분입니다.고린도후서 5:18 · 본디새김
바울은 17절까지의 모든 변화의 근원을 다시 하나님께 돌립니다. 새 창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새로운 삶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바울은 그 일의 핵심을 「화해」라고 부릅니다.
화해가 필요한 관계
화해는 관계가 깨어졌을 때 필요한 일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화해는 인간의 죄로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행동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인간을 받아 달라고 간청한 뒤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을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 화해는 인간이 하나님을 설득하여 얻어 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이루신 일입니다. 이 사실은 19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고 계셨으며 사람들의 잘못을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말입니다.고린도후서 5:19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화해의 주체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십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동등한 두 당사자의 오해 정도로 다루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잘못을 저질렀지만, 바로 그 하나님께서 관계의 회복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잘못을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는 화해가 적대감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실제 잘못을 다룬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죄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인간과의 관계를 영원히 단절하는 마지막 근거로 남겨 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 문제를 다루시며 화해의 길을 여십니다.
로마서 5:6–11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두 본문 모두에서 인간이 먼저 돌아와 자신을 바로잡은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셨는가
19절의 그리스어 문장은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고 계셨다」는 읽기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화해의 사건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으며,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다는 두 진술로 나누어 읽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진술을 더 독립적으로 드러냅니다.
문법적으로 어느 쪽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화해가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메시지만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구원 사건의 중심에 계십니다.
화해를 받은 사람이 화해를 전한다
18절은 「화해의 섬김」을 주셨다고, 19절은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화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지만, 그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섬김은 바울에게 맡겨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만들어 내는 주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능력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신 화해를 전할 수는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화해를 대신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화해를 알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보면 새 창조와 화해는 서로 떨어진 두 주제가 아닙니다. 새 창조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현실을 시작하셨다는 선언이라면, 화해는 그 새로운 현실이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화해는 세상을 향하여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사절이 되어 간청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권하시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절로 나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합니다—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고린도후서 5:20 · 본디새김
사절은 자신을 보낸 이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자격으로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명령만 전달하지 않습니다.
간청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간청하는 이유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권하신다는 말은 대단히 높은 권위에 대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에게 복종하라고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이고, 그것도 간청의 형태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받은 권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과의 화해로 초대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미 화해시키셨는데 왜 다시 화해하라고 하는가
18–19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셨다고 했는데, 왜 20절에서는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간청할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화해 행위와 그 화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셨다는 것이 먼저이고, 그 화해의 소식이 선포되어 사람들은 그 관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요청받습니다.
「화해하십시오」(καταλλάσσω)는 그리스어로 수동 명령형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화해를 만들어 내라는 뜻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화해를 받아들이고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게 하라는 요청의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인간의 응답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응답할 길을 엽니다.
이 간청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편지를 받는 고린도인들에게 직접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18–20절이 바울이 맡은 화해의 사역 자체를 설명하므로 세상을 향한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두 읽기는 반드시 대립하지 않습니다. 화해의 말씀은 세상을 향하지만, 편지를 읽는 고린도인들도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과 관계를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간청은 추상적인 신학적 선언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20절의 직접적인 명령은 사람들끼리 서로 화해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회복은 그 말씀에서 나오는 중요한 적용이지만, 본문의 중심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이 화해를 이루셨습니까? 바울은 마지막 절에서 가장 압축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대답을 내놓습니다.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을 우리를 위해 죄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5:21 · 본디새김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님의 화해를 설명하면서 왜 이렇게 강한 표현을 선택했을까요?
죄를 알지 못하신 분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은 죄가 무엇인지 지식으로 알지 못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죄에 참여하시거나 죄를 범하신 경험이 없으셨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15는 예수님께서 모든 면에서 시험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고, 베드로전서 2:22는 예수님께서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을 우리를 위해 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그분이 실제로 죄를 범하신 사람이나 악한 존재가 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죄와 관련된 인간의 현실을 우리를 위해 담당하셨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죄로 삼으셨다」는 무슨 뜻인가
여기서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는 그분이 죄를 담당하시고 죄인들을 대표하는 위치에 놓이셨다, 곧 인간의 죄와 그 결과를 자신에게 지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를 「속죄 제물」로 이해하는 해석입니다. 이 낱말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일반적으로 죄를 뜻하지만 구약의 속죄 제물을 가리키는 용도로도 쓰이므로, 그분이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앞의 해석은 같은 절에 「죄」가 두 번 등장하고 뒤에 「하나님의 의」가 대조된다는 사실을, 뒤의 해석은 구약의 제사 언어와 그분의 죽음이 지닌 속죄적 의미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두 방향은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으며, 주석 전통에서도 서로 다른 판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훌륭한 희생의 모범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인간의 죄를 실제로 다루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왜 그분을 죄로 삼으셨는가
21절 후반은 그 목적을 밝힙니다. 바울은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뜻, 곧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새로운 지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 행위가 드러나는 사람들이 된다는 뜻,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사역에 참여하는 삶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1–26에서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연결되고, 고린도후서 5장의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바울이 화해의 섬김과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표현은 두 의미를 함께 고려하게 하므로, 어느 하나로만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중심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독립적으로 만들어 낸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현실입니다.
「죄」와 「의」 사이에 있는 예수님
여기서 그분께 일어난 일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맞물립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없던 우리의 죄와 연결되시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하나님의 의와 연결됩니다.
이것을 흔히 ‘놀라운 교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와 의가 장부에서 이동하는 거래로만 묘사하지 않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그 변화의 자리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21절은 앞의 14–20절과 떨어진 독립적인 속죄 공식이 되고 맙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하나의 논증을 전개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 마지막 절은 그 새 삶과 새 창조, 화해의 가장 깊은 근거를 밝히는 문장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절은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종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며, 그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본문의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문학적 해석의 논의가 있지만, 신약 저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설명할 때 이 본문을 중요한 배경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예: 베드로전서 2:22–25). 고린도후서 5:21이 이사야 53장의 특정 문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 없는 이의 고난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라는 주제는 긴밀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화해를 간청하시는 하나님
무너지는 장막에서 시작한 이 장은 화해를 간청하는 사절에서 끝납니다. 장 앞부분에서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죽음이고, 후반부에서 인간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은 죄입니다. 두 문제는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바울에게는 하나의 그리스도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죄와 화해의 문제를 다루고, 그분의 부활은 죽음보다 강한 생명의 소망을 열어 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미래를 바라볼 수 있고,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0절의 심판과 19절의 은혜도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무시하시므로 심판이 의미 없다고도, 인간이 완전한 삶을 살아 자격을 갖추어야만 화해가 가능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화해의 근거이고, 그 화해를 받은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야 할 삶입니다. 은혜는 책임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삶이 가능하도록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화해는 실제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그 잘못을 다루시며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화해를 이루셨다는 사실은 상대방이 완벽하게 달라진 뒤에야 화해를 생각할 수 있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관계 회복을 위해 무엇을 먼저 할 수 있는지 묻게 합니다. 다만 이 원칙을 모든 인간관계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의 잘못이 계속되고 있거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화해를 이유로 피해자에게 무조건 관계를 회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바를 넘어섭니다. 고린도후서 5장의 직접적인 초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과 화해하시는 구원 사건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사절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보내신 분이 있고, 전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관계를 깨뜨린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화해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이야기에서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행동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시고, 사람들의 잘못을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그 화해의 말씀을 바울에게 맡기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절로 사람들 앞에 섭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신을 인정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 간청 뒤에는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죄로 삼아지신 하나님의 행동이 있기에, 그 말은 빈말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세상을 향해, 화해를 이루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맡은 사절로 서서, 사람들에게 간청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