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4–15장 · 니카노르와 마지막 승리

하늘의 권세자와 땅의 권세자

마카베오기 하권의 마지막 장에는 여러 사람이 손을 뻗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니카노르는 성전을 향해 손을 뻗으며 위협했습니다(14:33). 죽임당한 대제사장 오니아스는 꿈속에서 두 손을 뻗어 백성을 위해 기도합니다(15:12). 예레미야는 오른손을 뻗어 유다에게 금으로 된 칼을 건네줍니다(15:15). 전투를 앞둔 유다는 두 손을 하늘로 들어 하나님을 부릅니다(15:21).

이 장의 중심 질문은 누가 더 강한 군대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가 참으로 권세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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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둘러싼 충돌 — 누구의 명령이 더 높은가

마카베오기 하권 15:1–5 본문 →

니카노르는 유다와 그의 부하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안식일을 공격할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그가 안식일을 선택한 이유는 종교적인 존중이 아니라 군사적인 계산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거룩하게 지키는 날이므로 방어에 소극적일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본문은 그가 「아무 위험 없이」 공격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계획에 처음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은 유다의 군사들이 아닙니다. 니카노르의 군대에 강제로 동행하던 유대 사람들입니다.

강제로 그를 따라가던 유대 사람들이 말했다. 「결코 그렇게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죽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살피시는 분께서 거룩하게 높이신 날에 영예를 돌려 주십시오.」마카베오기 하권 15:2 · 본디새김

무장한 지휘관 앞에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날의 권위입니다. 니카노르에게는 적이 방어하지 못하는 날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날 벌어지는 일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의 눈에 유리한 상황이 하나님의 눈에도 정당한 상황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그 극악한 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 권세자가 하늘에 있느냐고 물었다.마카베오기 하권 15:3 · 본디새김

이에 유대 사람들은 하늘에 살아 계신 주가 계시며, 그분이 일곱째 날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권세자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니카노르가 말했다. 「나도 이 땅의 권세자다. 무기를 들고 왕의 일을 수행하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흉악한 뜻을 이루지 못했다.마카베오기 하권 15:5 · 본디새김

본문은 같은 표현을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니카노르에게 사용합니다. 이 반복은 의도적인 대조를 만듭니다. 하늘에 권세자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땅에서 실제로 명령하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자신에게 명령할 힘이 있으므로 자신이 옳고, 자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실행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문제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권력이 자신보다 높은 어떤 판단에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안식일 논쟁은 결국 두 권위의 충돌로 발전합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안식일에는 어떤 경우에도 무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39–41에서는 안식일에 공격받고도 저항하지 않아 사람들이 죽은 뒤, 공동체가 안식일에 공격받으면 방어하기로 결정합니다.

따라서 15장의 쟁점은 모든 전쟁 행위의 금지가 아닙니다. 니카노르가 유대인의 거룩한 날을 이용해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학살하려 하고, 그날을 정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조롱한다는 데 있습니다.

출애굽기 20:8–11에서 안식일은 창조주가 구별하신 날입니다. 신명기 5:12–15에서는 종과 여종까지 쉬게 하는 날이며,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기억과 연결됩니다. 힘없는 사람까지 쉼을 누려야 할 날을, 니카노르는 힘없는 사람을 공격하기 좋은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가 실패했다는 5절의 짧은 설명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미리 보여 줍니다. 스스로 땅의 권세자라고 선언한 사람은 정작 자신이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방패와 창보다 먼저 사람을 무장시키는 것

마카베오기 하권 15:6–11 본문 →

니카노르와 유다는 모두 전투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준비하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니카노르는 자신만만하게 적을 처리할 계획을 세웁니다. 6절의 그리스어는 읽기에 따라 조금 다르게 이해됩니다. 한 읽기는 유다의 무리를 한꺼번에 처리할 방도를 세운다는 뜻이며, 다른 읽기는 그들을 이긴 뒤 승전 기념물을 세우려 한다는 뜻입니다.

차이는 있지만, 어느 경우든 니카노르가 전투의 결과를 이미 자기 손에 넣은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는 전투에 들어가기도 전에 승리를 자신의 미래로 확정해 놓습니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온전한 소망을 품고 주에게서 도움을 얻으리라고 끊임없이 확신했다.마카베오기 하권 15:7 · 본디새김

유다의 확신은 자기 군대가 더 강하다는 계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이전에 하나님에게서 받은 도움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도우시기를 기대합니다.

유다는 과거의 승리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실제로 치러 낸 싸움도 기억하게 합니다.

그가 공동체를 격려하는 데 사용하는 재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온 공동체 자신의 경험입니다.

이 둘이 결합하면서 과거의 기억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현재의 두려움을 견디는 힘이 됩니다.

그는 방패와 창이 주는 안전보다는 좋은 말로 주는 격려로 그들 각 사람을 무장시켰다. 또 믿을 만한 꿈을 들려주어 모두를 더없이 기쁘게 했다.마카베오기 하권 15:11 · 본디새김

말이 무기가 됩니다.

방패는 몸을 보호하지만 사람이 왜 싸워야 하는지는 말해 주지 못합니다. 창은 적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지만 승리와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못합니다. 유다의 격려는 군사들에게 자기들이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누구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지를 다시 알게 합니다.

이 꿈은 전투를 앞두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일반적인 전쟁의 꿈과 다릅니다. 승리한 영웅이나 강력한 군대가 먼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죽임당한 대제사장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먼저 등장합니다.

죽임당한 대제사장과 예언자가 다시 등장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15:12–16 본문 →

오니아스의 두 손

꿈에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오니아스입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3장에서 오니아스는 성전과 백성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대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4장에서 그는 정치적 음모와 부패 속에 죽임당합니다(4:33–34).

이제 그가 마지막 장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가 본 광경은 이러했다. 전에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는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대할 때 공손하고 성품이 온화하며 말도 알맞게 하고, 어릴 때부터 덕에 속한 모든 것을 몸에 익힌 사람이었다. 그가 두 손을 뻗고 유대 사람들의 온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마카베오기 하권 15:12 · 본디새김

책의 앞부분에서 성전이 위기에 빠진 원인 중 하나는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권력 다툼과 탐욕이었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자격보다 권력을 얻는 능력이 앞서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오니아스는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에서 오니아스의 성품을 다시 소개하는 것은 그가 어떤 지도자였는지를 독자에게 기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오니아스는 자신을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온 공동체」를 향합니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필요한 것은 전투를 이끌 용기만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 전체를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예레미야의 등장

이어서 백발과 위엄을 지닌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니아스가 말을 꺼냈다. 「이분은 동족을 사랑하며 백성과 거룩한 도성을 위해 많이 기도하시는 분, 하나님의 예언자 예레미야이십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5:14 · 본디새김

마카베오기 하권 2:1–8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을 앞두고 성막과 언약궤와 분향단을 숨겼다는 전승을 전합니다. 그 전승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다시 백성을 모으시고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 그 장소가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과거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를 기억하게 하는 인물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라는 희망과 연결된 인물입니다.

오니아스와 예레미야의 등장은 지금 싸우는 세대가 자기들만의 싸움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난 세대의 신실함과 고난, 예언과 소망이 현재의 공동체와 연결됩니다. 유다의 싸움은 이스라엘이 오래도록 하나님 앞에서 겪어 온 역사의 연장선에 놓입니다.

금으로 된 칼

꿈의 마지막에는 예레미야가 오른손을 뻗어 유다에게 금으로 된 큰 칼을 건네줍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인 이 거룩한 큰 칼을 받아라. 너는 이 칼로 적들을 부술 것이다.」마카베오기 하권 15:16 · 본디새김

본문은 그것을 꿈속에서 하나님에게서 오는 선물로 제시합니다.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묘사와 「거룩한」이라는 표현은 이 무기가 평범한 전리품이나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유다에게 칼을 건네는 사람은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예레미야입니다. 성전의 몰락을 목격하고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가, 이제 성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에게 칼을 건넵니다.

꿈속의 칼은 유다가 실제 전장에서 들어야 할 무기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무기의 의미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으로 싸우는 독립적인 영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공동체를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서의 예언자는 성전이 어떤 상황에서도 파괴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 7:1–15에서는 성전의 존재를 안전의 보증처럼 믿으면서 불의를 행하는 백성을 꾸짖었습니다. 따라서 이 꿈에 등장한 예레미야를 무조건적인 성전 보호의 상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이 장면은 해석상 중요한 갈림길이기도 합니다. 오니아스와 예레미야가 죽은 뒤에도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죽은 의인들의 중보를 보여 주는 본문으로 읽는 전통이 있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유다에게 주어진 꿈의 형식과, 과거의 신실한 인물들이 현재의 공동체를 지지한다는 문학적·신학적 기능을 더 강조합니다. 본문 자체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이것이 유다가 본 꿈이라는 사실이며,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만으로 죽은 이들의 상태나 중보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상세하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전투를 앞둔 두려움 — 성소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카베오기 하권 15:17–24 본문 →

꿈을 들은 군사들은 곧바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은 유다의 매우 훌륭한 말, 곧 용맹을 북돋우고 젊은이들의 마음을 굳세게 할 수 있는 말에 격려를 받았다. 그래서 군사 작전을 펼치지 않고 용감하게 돌진하여, 온 용맹을 다해 맞붙어 결판을 내기로 했다. 도성과 거룩한 것들과 성전이 모두 위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마카베오기 하권 15:17 · 본디새김

여기서 도성과 거룩한 것들과 성전이 함께 나오는 것은 그들이 지키려는 것이 단순한 군사적 거점 하나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은 백성이 사는 도성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구별된 성전이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의 삶과 예배가 함께 위협받고 있다고 여깁니다.

18절은 가족에 대한 걱정보다 성소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가족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다는 선언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본문은 가족에 대한 염려가 없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염려보다 거룩하게 구별된 성소에 대한 염려가 더 컸다고 말합니다.

19절에서는 예루살렘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몹시 불안해한다고 기록합니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두려움을 겪습니다. 성 안에는 결과를 알지 못한 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 역시 공동체가 감당하는 고난의 일부입니다.

유다가 실제로 본 것

적군은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군대는 전열을 갖추었고, 짐승들은 알맞은 위치에 배치되었으며, 기병대는 측면에 자리 잡았습니다.

마카베오는 몰려온 무리와 갖가지 무기의 준비 상태, 알맞은 자리에 있는 짐승들의 사나움을 살펴보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기적을 행하는 주에게 부르짖었다. 그는 승리가 무기에 달려 있지 않고, 주가 자기 판단에 따라 합당한 이들에게 승리를 얻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카베오기 하권 15:21 · 본디새김

유다는 위험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군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정확하게 바라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 판단에 따라」 승리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승리의 최종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믿음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 반드시 받아 낼 수 있다는 확신과는 다릅니다. 그는 자기 군대의 힘이나 자신의 신앙적 열심을 승리의 결정적 원인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시대를 기억하는 기도

유다는 기도하면서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인이시여, 당신은 유대의 히스기야 왕 때에 당신의 천사를 보내셨고, 그 천사가 산헤립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5:22 · 본디새김

이것은 열왕기하 19:35–36과 이사야 37:36–37에 기록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유다는 그 사건을 토대로 지금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실 수 있다고 기도합니다. 그의 요청은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 적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을 일으키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하늘의 권세자」라고 부릅니다(15:23). 이것은 니카노르가 조롱하던 바로 그 권세자입니다. 앞에서는 권위를 둘러싼 논쟁의 말이었고, 여기서는 기도의 호칭이 됩니다.

그리고 유다의 기도는 24절에서 적들의 모독을 언급하며 끝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향해 쏟아지는 모독이 더는 권세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본문이 「합당한 이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유다의 공동체가 거룩한 것을 지키려 하고, 니카노르는 그것을 모독한다는 도덕적 대조를 분명히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판단은 선악의 구별과 무관한 임의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한 구절을 모든 전쟁의 승패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긴 사람은 의롭고 진 사람은 불의하다고 판단하는 원리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니카노르가 성전을 모독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가면서 승리가 칼과 창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장면(사무엘상 17:45–47), 히스기야가 강대한 군대 앞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장면(열왕기하 19:14–19), 전쟁을 앞둔 여호사밧이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본 장면(역대하 20:12)은 모두 인간의 힘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장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이 모든 신앙적 전쟁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본문마다 구체적인 위협과 역사적 상황이 있으며, 마카베오기 하권 15장 역시 성전 파괴를 공언한 니카노르와 그 위협에 맞선 유대 공동체라는 상황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나팔 소리와 기도 소리

마카베오기 하권 15:25–29 본문 →

이제 양쪽 군대가 움직입니다.

니카노르와 그의 부하들은 나팔을 불고 승전가를 부르며 다가왔다.마카베오기 하권 15:25 · 본디새김
유다와 그의 부하들은 부르짖고 기도하며 적들과 맞붙었다.마카베오기 하권 15:26 · 본디새김

저자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의 확신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소리로 보여 줍니다. 한쪽은 승리를 이미 자기들의 것처럼 노래합니다. 다른 한쪽은 아직 승리를 얻지 못했으므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들은 손으로는 싸우고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삼만 오천 명 이상을 쓰러뜨렸고, 하나님의 돌봄에 크게 기뻐했다.마카베오기 하권 15:27 · 본디새김

기도와 행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기를 내려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싸운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전투 전에 거쳐야 하는 의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싸우는 동안에도 이어집니다.

전투가 끝난 뒤에도 한 가지 일이 남습니다.

군사들은 돌아오다가 쓰러진 니카노르를 발견합니다. 그는 갑옷과 무기를 그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니카노르는 땅의 권세자라고 자처했습니다. 무기를 들도록 명령할 수 있었고, 왕의 일을 수행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무기조차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있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조상들의 말」로 권세자를 찬송합니다(15:29). 처음에 니카노르가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호칭을, 마지막에는 공동체가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저자는 이 승리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전투 장면을 보면, 앞서 기도한 대로 천사가 전장에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했다는 구체적인 서술은 없습니다. 실제로 묘사되는 것은 유다의 군사들이 손으로 싸우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별도로 묘사된 천사의 군사 행동과 동일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전투를 서술하면서 그 승리 안에 하나님의 도움과 나타나심이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잘린 손과 보존된 성소

마카베오기 하권 15:30–36 본문 →

전투가 끝났지만 이야기는 곧바로 평화로운 축제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유다는 니카노르의 머리와 팔을 잘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어 그의 혀까지 잘라 새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현대 독자에게 이 장면은 잔혹하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본문은 적의 시신을 훼손하고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행위를 묘사합니다.

니카노르가 성전으로 뻗었던 손

14:33에서 니카노르는 성전을 향해 오른손을 뻗어 위협했습니다. 유다를 넘겨주지 않으면 성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세우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는 더러운 니카노르의 머리와, 그 모독자가 전능한 이의 거룩한 집을 향해 뻗어 큰소리치던 손을 보여 주고,마카베오기 하권 15:32 · 본디새김

따라서 그의 손을 잘라 보여 주는 것은 단순한 전리품 전시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저자는 성전을 향해 오만하게 뻗었던 손이 결국 성전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의 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조롱했고, 성전 파괴를 맹세했으며, 자기 권세를 과시했습니다. 저자는 그런 말을 쏟아 낸 혀가 수치를 당하는 것으로 그의 결말을 묘사합니다.

이 장면은 성소를 향한 모독이 모독자의 수치로 돌아왔다는 문학적인 역전을 보여 줍니다.

본문이 유다의 행위를 승리의 일부로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행위가 모든 시대의 신자에게 모범으로 제시된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적장의 신체를 훼손하고 전시하는 행위는 고대 전쟁과 승전 기념의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잔혹성을 감추거나, 종교적인 목적이 있다면 폭력의 모든 방식이 정당하다는 일반 원리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앞 장의 기도가 마지막 장에서 응답되다

34절에서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찬송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자신을 드러낸 주를 찬송하며 말했다. 「자신의 처소가 더럽혀지지 않게 지키신 분은 찬송받으실 분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5:34 · 본디새김

니카노르가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한 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집을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14:36의 기도)

앞 장에서 요청한 일이 마지막 장에서 찬송의 이유가 됩니다. 제사장들이 두 손을 들어 간구했던 내용이, 이제 공동체 전체가 하늘을 향해 감사하는 내용으로 바뀝니다.

마지막 승리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적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처소를 지키셨다는 데 있습니다.

도성의 승리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35절에서 유다는 니카노르의 머리를 성채에 매달아 모두가 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승리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표징이 됩니다. 군사들만이 아니라 도성의 주민들도 그들이 어떤 위협에서 벗어났는지 알게 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13:49–50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채의 적대 세력이 항복하는 일은 훨씬 뒤에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15:37에서 히브리 사람들이 도성을 장악했다고 말하는 것을 모든 요새가 완전히 정복되었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달 열셋째 날

사람들은 이 승리를 매년 기념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결의하여, 이 날을 결코 기념하지 않은 채 지나가지 않기로 했다. 열두째 달, 곧 그들 고유의 말로 아달이라 불리는 달의 열셋째 날을 기념일로 지키기로 했다. 그날은 모르드개의 날 하루 전이었다.마카베오기 하권 15:36 · 본디새김

모르드개의 날은 에스더기 9:17–22에 기록된 부림절과 연결됩니다. 유대 사람들이 자신들을 없애려는 위협에서 벗어난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은 니카노르를 이긴 날을 그 전날에 배치합니다.

서로 다른 시대에 일어난 두 사건이 달력 안에서 나란히 놓입니다.

에스더기의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멸절을 꾀한 계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의 유대 사람들은 성전을 파괴하겠다는 위협에서 벗어났습니다. 상황과 이야기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큰 위협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억이 두 절기에 공통으로 담겨 있습니다.

유다가 8–9절에서 전에 받은 하나님의 도움을 기억하도록 군사들을 격려했던 것처럼, 이제 그들 자신의 승리도 후대가 기억할 사건이 됩니다. 이렇게 그날의 승리는 하루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기억 속에 자리 잡습니다.

저자는 왜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는가

마카베오기 하권 15:37–39 본문 →

36절에서 니카노르의 날이 제정되자, 갑자기 이야기의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니카노르에 관한 일이 마무리되고 그때부터 히브리 사람들이 도성을 장악했으므로, 저도 바로 여기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5:37 · 본디새김

마카베오기 상권의 기록을 보면 니카노르를 이긴 뒤에도 전쟁은 계속됩니다. 상권 9:1–18에는 또 다른 군사적 위협이 등장하고, 마침내 유다가 전투에서 죽는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카베오기 하권의 결말은 마카베오 전쟁 전체가 끝난 시점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저자는 더 많은 사건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끝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2:19–32에서 저자는 키레네 사람 야손이 다섯 권에 기록한 내용을 한 권으로 줄여 쓰려 한다고 밝힙니다. 그는 모든 세부 사항을 빠짐없이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사건의 중요한 의미를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정리하려 합니다.

책의 처음에는 성전이 위협받고 제사장직이 부패하며 백성의 신앙과 삶이 흔들리는 일이 기록됩니다. 그 뒤에는 박해와 순교, 성전의 정결함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한 사람이 패배하고, 백성은 성소를 지키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한 하나님의 구원과 성전의 보존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포도주와 물을 섞는 사람

저자는 자신의 글이 훌륭하다면 바라던 일이고, 부족하다면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만큼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글을 쓰는 일을 포도주와 물을 섞는 일에 비유합니다.

포도주만 마시는 것은 해롭고, 마찬가지로 물만 마시는 것도 해롭습니다. 그러나 포도주를 물과 섞으면 즐거운 맛을 내듯이, 이야기를 짜는 솜씨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합니다. 여기서 끝을 맺겠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5:39 · 본디새김

고대 지중해 문화에서는 포도주에 물을 섞어 마시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저자는 익숙한 음료를 예로 들어 이야기를 잘 구성하는 일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본문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여러 요소를 알맞게 결합했을 때 생기는 즐거움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사건을 시간순으로 옮겨 놓는 것만으로 좋은 역사 서술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듣고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구성하는 솜씨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일을 내려놓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기 이름을 남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기쁨과 유익을 주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닫습니다.

하늘의 권세를 믿는 공동체

마카베오기 하권 15:1–39 본문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이 아무리 커져도 그것을 궁극적인 권위로 삼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살피는 것입니다. 오늘날 독자가 이 본문에서 먼저 살펴야 할 것도 자신의 적을 니카노르에 대응시키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 전투가 끝났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니카노르의 머리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한때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큰소리치던 권세자의 결말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찬송한 대상은 그 전리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향했습니다.

「자신의 처소가 더럽혀지지 않게 지키신 분은 찬송받으실 분입니다.」

땅의 권세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위협했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살아남은 성소 앞에서 하늘의 권세자를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