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죄를 고백하는 기도
다시 말씀 앞에 모인 백성
바룩서 1장은 뜻밖에도 한 권의 책을 읽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함락되어 불탔고, 왕과 백성은 낯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나라의 중심이었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바룩서는 이 재난을 군사적 패배나 정치적 실패로 설명하는 대신, 바벨론의 강가에 모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듣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일련의 행동을 이해하는 열쇠는 ‘듣는다’는 말에 있습니다.
바룩은 왕과 백성의 귀에 책의 글을 읽어 줍니다(1:3–4). 1장의 처음에는 말씀을 듣는 백성이 있고, 마지막에는 말씀을 듣지 않았던 백성의 고백이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다시 읽히는 책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
책은 바룩의 계보를 길게 소개합니다. 네리야의 아들, 마흐세야의 손자이며, 그 위로 시드기야와 하사댜와 힐기야의 이름이 이어집니다.
이 가운데 네리야와 마흐세야라는 이름은 예레미야서 32:12에 나오는 바룩의 계보와 연결됩니다. 바룩서가 독자에게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예레미야의 말을 기록했던 바로 그 서기관 바룩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에게 받은 말씀을 바룩에게 받아 적게 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성전에서 그 말씀을 읽게 합니다(예레미야 36:4–10). 그 말씀에는 유다에 닥칠 재앙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경고를 듣고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습니다(36:3).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듣고 그것을 칼로 잘라 화로에 던져 버립니다. 그는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신하들도 옷을 찢지 않았습니다(36:23–24).
예레미야서에서 두루마리를 불태웠던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가 이제 바룩의 책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책이 불타는 대신, 청중이 울고 금식합니다.
바룩서는 여고냐 개인이 회개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을 함께 읽으면 분명한 문학적 대조가 형성됩니다. 앞선 세대가 거부했던 말씀을 포로 공동체가 다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해에 벌어진 일인가
1:2는 사건의 시간을 「오 년째, 그달 이레째」라고 밝힙니다. 동시에 갈대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불태운 때였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신앙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성읍이 불타고 나라가 무너진 현실 속에서, 그 일이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기 위해 모였습니다.
왕에서 작은 사람까지
여고냐 왕이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과 왕들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장로들이 있고, 「작은 이부터 큰 이까지」 모든 백성이 있습니다.
신분과 지위는 여전히 구별되지만,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는 그들 모두가 하나의 청중을 이룹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은 후반부의 죄 고백을 준비합니다. 1:15–16에 이르면 기도문은 왕들과 지도자들뿐 아니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 조상들까지 책임의 범위에 넣습니다.
바룩서가 그리는 회개는 몇몇 개인의 잘못을 고발하는 일이 아닙니다. 한 백성이 자기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서 43:6–7은 예레미야와 바룩이 유다의 남은 사람들과 함께 이집트로 끌려간 일을 기록합니다. 반면 바룩서는 바룩이 바벨론에서 책을 썼다고 소개합니다. 두 기록을 연결하여 바룩의 이동 경로를 확정할 자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룩서의 첫 장면을 바룩의 행적을 그대로 기록한 역사 일지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예레미야의 서기관이라는 인물을 통해 포로 공동체의 회개를 이야기하는 서술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1:2는 어느 사건부터 다섯 해를 세었는지, 일곱째 날이 어느 달에 속하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25:8–10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사건을 느부갓네살 통치 십구 년째 다섯째 달 이레의 일과 연결하고, 예레미야서 52:12는 같은 파괴의 시기를 다섯째 달 열흘로 기록합니다. 바룩서의 「오 년째」를 예루살렘 함락 이후 다섯째 해로 이해할 수도 있고, 파괴 사건과 관련된 날짜 전승이 현재의 문장에 남아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 원래 의도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눈물이 예루살렘을 향한 행동으로 바뀌다
형편이 닿는 대로 돈을 모으다
책을 들은 사람들은 울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여기까지라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종교적 집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행동이 예상 밖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형편이 닿는 대로 돈을 모았다.바룩서 1:6 · 본디새김
「저마다 형편이 닿는 대로」라는 표현은 신명기 16:1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복에 따라 각자의 힘이 닿는 만큼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받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약속의 땅에서 절기를 지키는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룩서에서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헌금을 모읍니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방식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본문은 총액도, 가장 많이 낸 사람의 이름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가 형편에 맞게 참여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공동체는 정치적으로 무너졌지만,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를 돌보는 책임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울음은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보여 주고, 헌금은 그들이 아직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보여 줍니다.
바벨론과 예루살렘 사이에 놓인 관계
그들은 모은 돈을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요야김과 다른 제사장들, 남아 있는 백성에게 보냅니다.
한쪽에는 바벨론에 끌려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 살지만 여전히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백성입니다.
포로들이 예루살렘에 보내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지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자신들도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던 중심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바벨론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도, 예루살렘의 예배를 위해 예물을 보냅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공동체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되돌아오는 성전 기물의 문제
1:8–9에는 성전 밖으로 옮겨졌던 은 기물들을 유다 땅으로 되돌려 보내는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빼앗겨 간 사람들이 있고, 예루살렘에서 밖으로 옮겨졌던 기물들이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돈과 기물들이 다시 유다 땅을 향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시선이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아무 의미도 없는 폐허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기물들이 시드기야 왕이 만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드기야는 여고냐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뒤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열왕기하 24:12–17). 따라서 1:9의 포로 사건은 예루살렘의 최종 파괴 이전에 있었던 여고냐의 유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1:2는 예루살렘이 불탄 일을 언급하며, 뒤의 1:10은 제단에서 제사를 드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열왕기하 25:9–17이 전하는 성전 파괴와 기물 반출의 기록, 그리고 에스라 1:7–11이 전하는 페르시아 시대의 기물 반환 기록을 함께 고려하면, 이 장의 모든 사건을 하나의 정확한 연대기로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1:8에서 기물들을 받아 든 「그」가 바룩인지 요야김인지도 문법상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성전 기물의 반환 시점이나 당시 성전의 운영 상태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서 41:5는 예루살렘 파괴 이후에도 사람들이 곡식 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향했다고 전하지만, 그것이 성전 전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들을 정복한 왕을 위해 기도하다
제물과 함께 보내는 놀라운 부탁
포로 공동체는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번제물과 속죄 제물, 유향과 곡식 제물을 마련해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생명과 그의 아들 벨사살의 생명을 위해, 그들이 땅에서 누리는 날들이 하늘의 날들과 같도록 기도하십시오.」바룩서 1:11 · 본디새김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왕입니다. 유다 사람들을 고향에서 끌어낸 제국의 통치자입니다.
이것은 정복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의 통치를 선한 것으로 평가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패배한 백성이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1:12는 자신들이 왕의 그늘 아래 살며 오랫동안 그를 섬기고 호의를 얻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늘」은 보호와 의존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본문은 바벨론 왕의 권력 아래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의 그늘 아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자신들에게 힘을 주시고 눈을 밝히실 분은 여호와야훼라고 고백합니다.
왕이 그들의 생존 조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가르친 삶
이러한 태도는 예레미야서 29:7과 직접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 성읍을 위해 여호와야훼께 기도하라고 명합니다. 그 성읍이 평안해야 포로들도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곧 돌아갈 것이라는 거짓된 기대에 사로잡히지 말고, 실제로 바벨론에서 살아가야 할 시간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눈앞의 정치적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이 자신들의 신앙 전체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입니다.
후대의 에스라 6:10에도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만 에스라서에서는 페르시아 왕실이 성전 예배를 지원하는 상황에서 나온 명령이고, 바룩서에서는 포로들이 직접 예루살렘에 보내는 요청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왕을 위한 기도에서 자신들을 위한 기도로
1:13에서 기도의 방향이 바뀝니다.
「또 우리를 위해 주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주의 격분과 그의 분노가 이날까지 우리에게서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바룩서 1:13 · 본디새김
그들은 바벨론의 지배를 받는 자신들의 상황을 단순히 군사력의 차이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바룩서의 포로 공동체는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난을 이야기할 때, 외부의 적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읽어서 고백하게 하는 책
이제 책의 역할이 다시 등장합니다.
1:14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보낸 책을 명절과 정해진 날에 읽으며 고백하라고 요청합니다. 처음에 책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읽혔습니다. 이제 그 책은 예루살렘으로 보내져 그곳 사람들에게도 읽힐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행위는 단순한 낭독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는 예배의 일부가 됩니다.
말씀을 듣는 일과 하나님께 응답하는 일이 연결된 것입니다.
바룩서 1:15에서 시작하는 고백은 2장과 3장 앞부분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1장 끝의 고백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기도의 첫 부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1:11은 벨사살을 느부갓네살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이는 다니엘서 5:2의 서술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왕 나보니두스의 원통 비문은 벨사살을 나보니두스 자신의 맏아들로 기록합니다. 따라서 바룩서의 표현을 당시 왕실의 정확한 부자 관계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께, 낯부끄러움은 우리에게
회개는 누구의 잘못인지 밝히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의로움은 주 우리 하나님께 있고, 오늘처럼 낯부끄러움은 우리에게, 곧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에게,」바룩서 1:15 · 본디새김
여기서 의로움은 단순히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는 추상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기도에서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고,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 결과 모세의 율법에 경고된 저주를 겪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로움은 언약에 따라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공정함을 포함합니다.
반면 「낯부끄러움」은 실패한 사람이 느끼는 막연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얼굴을 통해 다른 사람과 마주합니다.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떳떳하게 변호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이 표현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라 9:6의 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에스라는 자신들의 죄가 너무 크기에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기가 부끄럽다고 고백합니다. 두 기도 모두 단순히 일이 잘못되어 슬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잘못에 대한 자기 책임을 인정합니다.
지도자들만의 죄가 아니다
1:16은 낯부끄러움이 누구에게 있는지 자세히 밝힙니다. 왕들과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 조상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백성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을 전한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예레미야를 비롯한 모든 참된 예언자가 똑같이 죄를 지었다고 판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장은 공동체 전체의 역사를 고백하는 언어입니다. 동시에 유다 역사에는 거짓된 평안을 선포하거나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끈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예레미야 23:9–22; 28:1–17). 고백의 목적은 개별 인물의 죄를 일일이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층도 공동체의 실패를 남의 문제로만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의 고백은 느헤미야 9장과 다니엘서 9:4–19의 기도에서도 발견됩니다. 특히 다니엘서 9:7은 주께 의로움이 있고 자신들에게는 얼굴의 수치가 있다는 구도를 매우 가깝게 보여 줍니다.
죄는 듣지 않는 것이었다
1:17–18은 고백의 내용을 더 정확하게 밝힙니다. 그들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죄목을 나열하는 것이라기보다, 한 가지 불순종을 여러 측면에서 드러냅니다.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으며, 주가 우리 앞에 둔 명령을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바룩서 1:18 · 본디새김
구약에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는 표현은 삶의 방향과 행동을 가리킵니다. 신명기 5:33과 8:6에서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길을 걷는 것이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말소리를 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닙니다. 들은 말씀을 자신의 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책을 읽는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들은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삶을 다시 살펴야 합니다.
과거의 문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들은 목소리를 따라 걷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읽다
기도문은 이제 시선을 더 멀리 돌립니다.
「주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줄곧 주 우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도 개의치 않았다.」바룩서 1:19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뒤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앞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든 첫 사건은 자신들이 이룬 정치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금도 그들은 그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은혜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자신들의 불순종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구원하셨는데,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외면했습니다.
1:19의 「줄곧」이라는 고백을 모든 시대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한결같이 악했다는 역사적 통계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이후 거듭 나타난 공동체의 불순종을 되돌아보는 포괄적인 고백입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배교와 구원, 열왕기에서 왕들과 백성이 보인 불순종, 예언자들의 계속된 경고가 그 고백의 역사적 배경을 이룹니다.
그들은 지금 겪고 있는 패배를 우연한 한순간의 재난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뒤늦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달라붙은 저주
1:20에서는 강렬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살아야 할 백성에게는 재앙들과 저주가 달라붙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8에서 이미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백성을 구원하여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사용하신 말입니다. 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지만,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언약의 요구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길게 설명합니다. 특히 땅을 잃고 다른 민족들 가운데 흩어지는 재난이 불순종의 결과로 경고됩니다(레위기 26:33; 신명기 28:64).
바룩서의 포로 공동체는 지금 자신들이 겪는 일을 그 언약의 언어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 백성을 멸망시키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행동은 구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룩서가 말하는 심판은 바로 그 구원의 역사와 언약의 요구를 저버린 백성에게 닥친 결과입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개인적 고난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바룩서의 고백은 모세의 언약 아래 살았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신들의 역사적 파국을 해석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늘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특정한 죄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기는 바로 그러한 단순한 인과관계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주가 우리에게 보낸 예언자들의 모든 말에 담긴 주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고,」바룩서 1:2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자들의 활동은 심판을 알리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백성에게 돌아설 기회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 7:25–26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나온 날부터 계속해서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백성이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레미야서 25:3–7은 오랫동안 반복된 경고에도 백성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서 백성이 길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계속 주어졌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언자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불순종을 무시하지 않으셨지만, 경고 없이 심판만 선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각자 자기 마음의 생각을 따라가다
「저마다 자기의 악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을 따라가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한 일들을 저질렀다.」바룩서 1:22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명령을 따라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저마다 자기 마음에서 나온 생각을 따라갔습니다.
자기 마음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언제나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 마음이 이미 악한 것으로 규정되고, 그 결과가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와 하나님 앞에서 악을 저지르는 일로 나타납니다. 예레미야서 7:24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의 악한 마음의 고집을 따라갔다고 지적합니다.
바룩서가 이야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의무 몇 가지를 지키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누구의 말을 기준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마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에서는 공동체가 함께 죄를 고백했지만, 여기에서는 그 죄가 각자의 선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공동의 회개는 개인의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자신이 그 역사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인정하게 합니다.
무너진 나라에서 다시 세워지는 관계
바룩서에서 회개가 가능해지는 것은 백성에게 아직 훌륭한 종교적 능력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역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그들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룩서의 공동체는 심판의 현실 한가운데서도 여호와야훼를 「주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바룩서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언어가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다」가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고백입니다.
바벨론의 수드 강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왕족도 있고 장로도 있으며,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한때 자신들이 의지하던 성읍은 불탔습니다.
바룩이 책을 펼쳐 읽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백성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가다가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그 말씀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합니다.
그 울음이 곧 모든 것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잃어버린 땅이 돌아오지도 않고, 무너진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다시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한때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외면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이 외면했던 일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바벨론의 강가에서 시작된 변화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