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거짓 가르침 경계
이미 충만한 사람에게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골로새서 2장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18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낮은 마음」을 내세웁니다. 자신을 낮추고, 천사와 관련된 종교적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별한 영적 세계를 탐구하는 듯합니다. 23절에 이르면 그들은 몸을 아끼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자기 육의 생각으로 까닭 없이 부푼 채」 있다고 평가합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사람이 오히려 부풀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이 골로새서 2장의 핵심적인 문제를 드러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고 욕망을 억제하면서도, 그 종교적 성취 때문에 자기 자신을 크게 여길 수 있습니다. 더 거룩해지려고 시작한 일이 오히려 자신을 남들과 구별하고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행위들이 아무런 매력도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23절에서 그것들이 「지혜롭다는 말」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말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이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반박은 단순히 규칙이 너무 많다거나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비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 안에 「신성의 온 충만이 몸으로 자리 잡아 살고」 있고, 골로새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2:9–10). 바울은 그들에게 아직 얻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 나서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이미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고 합니다.
이것이 2장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채워져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 밖에서 무엇을 더해 주겠다는 것입니까?
골로새서 2장은 외부의 가르침을 경계하는 말로 가득하지만, 실제 논증의 중심에는 금지 명령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놓여 있습니다. 전체 흐름을 따라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 2:1–5 —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가 있는데 왜 다른 가르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가
· 2:6–10 —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왜 예수님 안에서 계속 걸어야 하는가
· 2:11–15 —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들에게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2:16–19 — 그러므로 왜 다른 사람의 종교적 판단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가
· 2:20–23 —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이 왜 여전히 세상의 규정에 종속되려 하는가
8절에서는 「사로잡아 가지 못하게」 조심하라고 합니다. 16절에서는 아무도 여러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20절에서는 어찌하여 다시 「규정에 얽매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사이에 11–15절이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종교적 요구를 하나씩 논박하기 전에,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억압하던 관계가 이미 어떻게 끝났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자유는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자유입니다.
감추어진 모든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싸움
2장은 바울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의 사람들을 위해 치르는 「큰 싸움」으로 시작합니다.
1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수고하고 싸운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밝히면서, 특별히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골로새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바울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그 사실이 바울의 관심을 줄이지 않습니다. 같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면 직접 만나지 못했어도 그들의 믿음을 위해 싸웁니다.
그런데 이 싸움의 목표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이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그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엮이고, 깨달음이 주는 확신의 온 넉넉함에 이르고,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앎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그리스도입니다.골로새서 2:2 · 본디새김
바울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엮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집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더욱 확실하게 아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싸웁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다른 가르침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 가르침은 특별한 지식이나 종교적 체험을 내세워 사람들의 자격을 평가합니다. 반면 바울이 구하는 앎은 공동체를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엮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정말 지혜로운지 판단하려면 그것이 얼마나 신비로운 설명을 제공하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어떤 관계로 이끄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앎의 목적지는 그리스도다
바울이 바라는 앎은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앎」이고, 「그 비밀은 그리스도입니다」. 이어지는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지혜와 앎의 모든 보물이 감추어져 있습니다.골로새서 2:3 · 본디새김
바울은 지혜와 앎의 보물이 모두 드러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골로새 사람들은 그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다시 특별한 비밀 지식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 모든 보물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지혜를 향한 탐구 자체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알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알면 이제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과 분리된 다른 권위가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인 것처럼 제시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감추어진 보물이라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 가는 일에는 끝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예수님 밖에 있는 다른 중개자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배움의 중단이 아니라 배움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럴듯한 말이 왜 위험한가
4절에서 바울은 이 말을 하는 목적을 직접 밝힙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무도 그럴듯한 논변으로 여러분을 속여 넘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2:4 · 본디새김
「그럴듯한 논변」은 설득력 있게 들리는 말이나 논증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을 위협하는 가르침이 조잡하고 터무니없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듣는 사람을 납득시킬 만큼 그럴듯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떤 말이 앞뒤가 맞고, 복잡한 영적 세계를 설명해 주고, 더 높은 단계의 성숙을 약속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깊은 지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설득력 있는 말과 참된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말이 얼마나 그럴듯한가보다, 그 말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게 합니까? 이 질문이 뒤의 논증을 준비합니다.
5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질서 있게 선 모습」과 믿음의 굳건함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이미 무너졌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굳게 서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도록 돕고자 합니다.
바울의 경고는 실패한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아니라, 이미 서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보호의 말입니다.
이미 받아들인 그리스도 안에서 걸으십시오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같은 분 안에서의 계속되는 걸음
6절에는 이 장 전체의 중심 명령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인 그대로, 그분 안에서 걸으십시오 —골로새서 2:6 · 본디새김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받아들였고, 이제 예수님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바울은 처음 받아들인 복음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종교적 단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바로 예수님 안에서 계속 살아가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종교적 지식의 한 묶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삶은 그 관계를 버리고 다른 가르침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구체화되는 과정입니다.
뿌리내린 채 세워져 가는 사람들
7절에서 바울은 이 걸음을 서로 다른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그분 안에 뿌리내린 채 세워져 가며, 배운 그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로 넘쳐 나면서.골로새서 2:7 · 본디새김
먼저 식물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어디에서 생명을 공급받는지가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건축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세워져 간다는 것은 이미 시작된 일이 아직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뜻입니다. 「뿌리내린 채」는 이미 형성된 상태를, 「세워져 가며」는 계속 진행되는 세워짐을 나타냅니다.
자라는 일과 뿌리내리는 자리는 같은 방식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골로새 사람들은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장한다는 것이 매번 뿌리를 뽑아 다른 곳에 옮겨 심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뿌리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 뿌리에서 자라기 때문에 세워짐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감사로 넘쳐 나면서」라는 말이 붙습니다. 바울이 기대하는 성장의 표지는 능력이나 지식의 증가만이 아니라 넘쳐 나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획득했다고 자랑하는 태도와 다릅니다. 이미 받은 것을 선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사로잡아 가는 철학
8절은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사로잡아 가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고 세상의 기초 요소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골로새서 2:8 · 본디새김
「사로잡아 가지」는 전리품처럼 빼앗아 가거나 포로로 잡아가는 이미지를 지닌 말입니다. 7절에서 골로새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워져 가는 사람들인데, 8절에서는 누군가가 그들을 사로잡아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한쪽에는 뿌리내림이 있고, 다른 쪽에는 붙잡혀 끌려감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위험한 가르침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 철학이라는 지적 활동 전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고, 「세상의 기초 요소들」을 따르며,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평가를 받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논증의 핵심은 철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따르는 가르침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릅니까, 아니면 다른 원리와 권위에 종속시킵니까? 바울은 이 기준으로 골로새 사람들이 듣고 있는 가르침을 분별하게 합니다.
「세상의 기초 요소들」은 무엇인가
8절의 「세상의 기초 요소들」은 해석이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기본적인 구성 요소나 기초적인 가르침을 가리킬 수 있으며, 고대 세계의 우주적 질서나 영적 세력과 관련하여 이해되기도 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크게 두 읽기가 중요합니다. 첫째, 세상을 지배하거나 그 운행에 관여한다고 여겨지는 영적 세력들로 읽는 견해입니다. 이 경우 10절과 15절의 「통치와 권세」, 18절의 천사 관련 표현과 연결됩니다. 둘째, 예수님 이전의 세상에 속한 기본적인 종교 원리나 규범으로 읽는 견해입니다. 이 경우 20–23절에 나오는 음식과 접촉에 관한 금지 규정들이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두 가능성은 서로 완전히 분리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유일한 의미라고 확정할 만한 명시적인 설명은 이 장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의 중심 주장까지 불분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요소들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2:20). 그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든, 바울의 논증에서 그것들은 예수님보다 높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온 충만이 있다
바울은 9절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온 충만이 몸으로 자리 잡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2:9 · 본디새김
왜 다른 가르침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 안에 신성의 온 충만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신적인 성질을 막연히 지녔다는 표현보다 강하게, 하나님이심과 관련된 충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충만이 「몸으로」 거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실제 몸을 지니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충만이 그림자나 외형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거한다는 뜻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강조점을 택하든,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은 어떤 부족한 부분을 다른 존재가 보충해야 하는 불완전한 충만이 아닙니다.
이것이 10절의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 안에서 채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골로새서 2:10 · 본디새김
9절의 「충만」과 10절의 「채워져」는 같은 어근과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신성의 충만을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소유한다는 뜻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 자체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충만이 거하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채워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충만함은 독립적인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충만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완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들을 더 충만하게 만드는 길이 아니라, 그 충만의 근원에서 멀어지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채워졌다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그 설명에 등장하는 것은 할례와 세례, 죽음과 부활, 지워진 문서와 십자가의 개선 행렬입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두 동사는 그리스어에서도 형태가 구별됩니다. 「뿌리내린 채」는 완료 수동 분사로 이미 뿌리내려 형성된 상태를, 「세워져 가며」는 현재 수동 분사로 계속 진행되는 세워짐을 표현합니다. 8절의 「사로잡아 가지」(συλαγωγέω)에 해당하는 동사는 신약에서 이 절에만 등장합니다. 「세상의 기초 요소들」은 갈라디아서 4:3에도 나오고, 「기초 요소들」은 4:9에도 나옵니다. 9절의 「몸으로」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부사입니다. 17절에서 그림자와 몸이 대조되기 때문에 충만이 실제적으로 거한다는 의미를 고려할 근거도 있습니다. 다만 「몸으로」라는 표현이 예수님의 육체적인 실재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9절의 「충만」과 10절의 「채워져」는 같은 그리스어 어근 플레로오(πληρόω)와 관계됩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났습니다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
11절은 뜻밖에도 할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분 안에서 여러분은 할례도 받았습니다.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이고, 육의 몸을 벗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골로새서 2:11 · 본디새김
할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창세기 17:9–14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몸에 할례를 받아 언약에 속한 백성임을 나타내도록 명령받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이미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할례라는 말의 본래 뜻은 무엇인가를 잘라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실제 몸의 일부를 잘라 내는 행위보다 더 근본적인 벗어남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에는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신명기 10:16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명하고, 신명기 30:6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예레미야 4:4 역시 마음의 할례를 요구합니다. 이 본문들에서 할례는 단순히 몸에 표시를 남기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내적인 상태와 관계됩니다.
골로새서의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는 이 전통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바울은 마음이라는 표현 대신 「육의 몸을 벗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육의 몸」을 단순히 물질적인 육체로 이해하여, 구원이 몸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묻히고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고, 13절에서는 죽어 있던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고 선언합니다. 문맥의 강조점은 인간의 육체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존재 상태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속한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누구에게 일어난 일인가
11절에는 하나의 해석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무엇일까요?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할례로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할례로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할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앞의 두 읽기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것은 신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뒤의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신자들의 참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골로새 사람들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자신의 몸에 어떤 표지를 추가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 결정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습니다.
세례 —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함께 살아남
12절에서 바울은 그 변화를 세례와 연결합니다.
여러분은 세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 세례 안에서 또한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골로새서 2:12 · 본디새김
두 사건을 연결하는 말은 「함께」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단지 개인이 새로운 종교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의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로마서 6:3–5에서도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묻힘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는 일이 특히 새로운 삶의 걸음과 장차 이루어질 부활의 전망으로 이어집니다. 반면 골로새서 2:12는 이미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가 장차 이루어질 부활의 전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절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새로운 현재가 강조됩니다.
바울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의 대상도 밝힙니다.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기 안에 부활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일으키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어 있던 사람들은 자신을 살릴 수 없다
여러분은 잘못 가운데서, 또 육으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을 거저 용서해 주시고서 말입니다.골로새서 2:13 · 본디새김
골로새 사람들은 단지 조금 부족하거나 영적으로 덜 발달한 상태였다고 묘사되지 않습니다. 잘못 가운데서 죽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일어난 변화를 설명할 때 주어가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다른 종교적 요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요구하는 종교적 절차를 추가해야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다는 사실이 먼저입니다.
바울은 그 일을 죄의 용서로 설명합니다. 「거저 용서해 주시고」(χαρίζομαι)라는 동사는 은혜롭게 베풀거나 용서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잘못을 계산하여 보상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잘못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를 고발하던 문서가 사라졌다
14절은 이 장에서 가장 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규정들이 담긴, 우리에게 불리한 차용증, 곧 우리와 맞서던 그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 버리셨습니다.골로새서 2:14 · 본디새김
이 문서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읽기가 갈립니다. 모세 율법의 규정들과 연결하는 읽기, 인간을 정죄하는 채무와 의무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읽기, 종교적 규범과 관련된 구속력 있는 문서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문서가 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리한 위치에 세우고, 우리와 맞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서를 먼저 지우시고, 없애 버리셨습니다. 「지우시고」라는 말은 기록을 지워 문서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잘못을 못 본 척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고발하던 문서 자체가 처리됩니다.
그 처리 장소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누구인가
십자가는 원래 죄인으로 정죄받은 사람을 처형하고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은 독자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를 불리하게 만들던 문서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께서 정죄받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정죄하던 문서가 무력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가 정죄의 장소에서 정죄를 제거하는 장소가 됩니다.
다만 14절을 모든 종류의 하나님의 계명이 이제 무의미해졌다는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장에서 바울은 여전히 신자들의 삶에 관하여 구체적인 윤리적 명령을 제시합니다. 이 본문이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불리한 위치에 묶어 두던 문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제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패배의 장소가 개선 행렬의 장소가 되다
15절에서 바울은 그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다른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통치들과 권세들을 벗기시고 거리낌 없이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십자가에서 개선 행렬에 세워 이끄신 것입니다.골로새서 2:15 · 본디새김
이번에는 문서가 아니라 통치들과 권세들이 등장합니다. 「벗기시고」는 그들을 무장 해제한다는 쪽으로도, 권세들을 자기에게서 벗어 버렸다는 쪽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본디새김은 뒤따르는 개선 행렬의 장면에 맞추어 앞의 읽기를 택했습니다.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던 권세들이 이제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패배한 자들처럼 취급됩니다.
「개선 행렬에 세워 이끄신」은 로마 세계에서 승리한 장군의 개선 행렬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개선 행렬에서는 승리한 장군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포로들이 그 승리의 증거로 행렬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로마 세계에서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로 보이셨습니다. 십자가는 명예의 장소가 아니라 수치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가 통치들과 권세들이 패배한 장소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패배라고 부른 사건을 바울은 승리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단순히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보다 더 강하시다는 말로 축소하면 십자가라는 장소의 의미를 놓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권세들이 사용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승리를 얻으셨다고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승리의 자리로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골로새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권세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문서가 제거되고 권세들이 패배했다면,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11절의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리스도의」라는 속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읽기가 갈립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할례로 읽으면 골로새 사람들이 받은 영적인 할례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루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할례로 읽으면 할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며, 신자들이 그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이전의 존재 상태를 벗어났다고 이해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할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14절의 「차용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케이로그라폰(χειρόγραφον)은 문자적으로 손으로 쓴 문서를 가리키며, 고대 문헌에서 채무 관계를 증명하는 문서에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채무 증서와 관련하여 설명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고대 파피루스 문서를 보면 이 낱말은 계약서, 선언문, 서약 문서 등 다양한 자필 문서에 사용되었고, 골로새서 2:14를 종교적 규정의 준수에 관한 선언이나 서약 문서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채무 증서 해석에 대한 대안이지 확정적인 결론은 아닙니다. 「차용증」이라는 번역은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원어의 역사적 용법을 하나로 확정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15절의 「벗기시고」(ἀπεκδύομαι)는 그리스어 중간태 표현이어서 권세들을 자기에게서 벗어 버렸다는 방향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의 판단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는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에서 나오는 첫 번째 결론
16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로, 또는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두고 아무도 여러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16 · 본디새김
바울은 개인의 자유나 취향을 내세워 종교 규정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을 설명한 다음, 그 일의 결과로 다른 사람의 판단에 종속되지 말라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날짜를 지키는 일은 겉으로 보면 생활의 작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지, 누가 더 높은 영적 자격을 얻었는지를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러한 판단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 위에 또 다른 자격 심사를 세우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바로 그 판단의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
절기와 초하루와 안식일
절기는 해마다 지키는 중요한 축제들을, 초하루는 달마다 돌아오는 날을, 안식일은 일곱 날마다 지키는 날을 가리킵니다. 에스겔 45:17에서 절기와 초하루와 안식일이 함께 언급되고, 역대하 2:4와 31:3에서도 비슷한 배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은 이스라엘의 예배 관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안식일이나 절기를 지키는 모든 행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직접 금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러한 일들을 기준으로 골로새 사람들을 판단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날을 지키는 일과,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판정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로마서 14:5–6에서도 어떤 날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과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의 차이를 다루며, 각각 예수님을 향하여 행동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두 본문의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종교적 실천의 차이가 다른 신자의 자격을 판단하는 권위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스라엘의 모든 예배 전통에 대한 경멸로 읽는 것은 문맥을 넘어섭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의 지위를 다른 종교적 기준에 종속시키는 일입니다.
그림자와 몸
17절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고, 몸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골로새서 2:17 · 본디새김
그림자는 어떤 물체가 빛을 가릴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그 그림자와 관계된 실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절기와 날짜에 관한 규정들을 그림자라고 부르지만, 거짓이나 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과 관계된 그림자입니다.
이 표현을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 읽으면, 이스라엘의 절기와 예배 관습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실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는 원문에 동사가 없어 문법적인 여지를 남깁니다. 「실체는 예수님이십니다」라는 방향으로 읽으면 그림자와 실체의 대조가 강하게 드러나고, 「몸은 예수님께 속합니다」라는 방향으로 읽으면 그림자에 맞서는 실체가 예수님께 속한다는 관계가 강조됩니다. 본디새김은 두 번째 쪽으로 번역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예수님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들이 도리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는 독립적인 권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자가 자신이 가리키는 실체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천사를 섬기는 종교와 낮은 마음
18절에서는 더욱 낯선 문제가 등장합니다.
아무도 낮은 마음과 천사를 섬기는 종교를 내세우며, 본 것에 파고들고, 자기 육의 생각으로 까닭 없이 부푼 채 여러분에게서 상을 앗아 가지 못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18 · 본디새김
이 절은 골로새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할 때 자주 사용되지만, 가장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천사를 섬기는 종교」는 사람들이 천사를 숭배한다는 뜻으로도, 천사들이 드리는 천상의 예배에 사람들이 참여하려 한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앞의 읽기는 천사를 특별한 중개자로 대우하는 모습을, 뒤의 읽기는 신비적인 종교 체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읽기는 모두 문법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어느 쪽이냐에 따라 당시 상황에 대한 재구성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상대방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고, 천사에 관한 모든 관심 자체를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그러한 종교적 실천을 근거로 다른 사람에게서 상을 앗아 가려는 태도입니다.
「상을 앗아 가지」라는 표현에는 경기에서 심판이 누군가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내세워 골로새 사람들을 영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이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 것에 파고든다는 말
「본 것에 파고들고」는 환상에서 본 것을 탐구한다는 의미로도,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역이나 의식에 들어간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이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환상을 보았고 어떤 의식을 행했는지까지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종교적 체험을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들 위에 판단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낮은 마음」을 내세우지만 「부풀어」 있습니다.
낮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풀어 있는 마음
여기서 처음의 역설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 바울은 낮은 마음을 내세우는 사람을 부풀어 있다고 부릅니까? 낮은 마음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같은 낱말이 2:18과 2:23에서는 비판의 대상에 등장하지만, 3:12에서는 신자들이 입어야 할 태도로 제시됩니다. 문제는 그 겸손이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2:18에서 낮은 마음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종교적 체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의 자격을 판단합니다.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아래에 둡니다. 바울은 이를 「자기 육의 생각으로 까닭 없이 부푼」 상태라고 묘사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행위를 통해서조차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높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이 더 많이 절제하고, 더 특별한 경험을 하고, 더 깊은 지식을 얻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낮은 마음은 어느새 자기 우월성의 근거가 됩니다. 바울이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위선만이 아닙니다. 겸손이라는 좋은 이름을 지닌 행위조차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면 사람을 부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머리를 붙들지 않는 사람들
19절은 이러한 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런 이는 머리를 붙들지 않습니다. 온몸이 그 머리에서 마디와 인대를 통해 공급받고 하나로 엮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는데 말입니다.골로새서 2:19 · 본디새김
그들은 어떤 체험을 했습니까?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규칙을 지켰습니까? 바울은 그 모든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머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그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붙들지 않고도 얼마든지 종교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지적입니다.
여기서 「머리」는 명령을 내리는 최고 권위자에 그치지 않고, 온몸이 공급받고 자라나는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18절의 사람들은 특별한 지식과 체험을 통해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바울은 정작 성장의 근원이 예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머리를 붙들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격한 수행과 특별한 체험을 추구해도 몸 전체를 자라게 하는 근원에서 떨어져 있는 셈입니다.
「마디와 인대」라는 표현에서 보듯, 바울은 한 개인이 머리에서 직접 영적인 능력을 공급받는 모습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온몸이 서로 연결되어 공급받고 자랍니다. 예수님께 공급받는 생명은 공동체의 연결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모습은 2절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엮이고」와 이어집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구했던 공동체의 상태가 여기서 예수님의 몸이 머리에서 공급받아 하나로 엮이고 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장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대안은 단순히 규칙을 줄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붙들고, 예수님께 공급받으며,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장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천사를 섬기는 종교」는 「천사의 종교적 섬김」이라는 그리스어 표현으로, 천사가 경배의 대상인지 천상 예배의 수행자인지에 따라 앞의 두 읽기로 갈립니다. 「본 것에 파고들고」(ἐμβατεύω)에 해당하는 동사는 이 절에서만 나타나는 드문 말로, 어떤 곳에 발을 들여놓거나 들어가거나 특정한 영역을 탐색한다는 의미와 관련됩니다. 이 표현의 앞부분에는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사이의 사본 차이도 알려져 있으며, 본디새김은 「본 것」이라는 읽기를 따릅니다. 17절의 「몸」을 교회라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논의가 있지만, 문맥에서 가장 직접적인 대조는 그림자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 사이에 있습니다. 19절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는 그리스어로 「하나님의 자람」이라는 표현이어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성장, 하나님에게서 오는 성장, 하나님을 향한 성장이라는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죽은 사람이 왜 다시 규정에 얽매이는가
함께 죽었다면 무엇이 달라졌는가
20절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세상의 기초 요소들에서 떠났다면,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규정에 얽매입니까?골로새서 2:20 · 본디새김
바울은 8절의 「세상의 기초 요소들」을 다시 언급하지만, 이번에는 그것들이 무엇인지보다 골로새 사람들이 그 요소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그러므로 그 요소들에서 떠났습니다. 이 표현은 앞에서 예수님과 함께 묻히고 다시 살아났다는 세례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과의 죽음과 부활은 그저 내면적인 위로나 미래의 희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사람들을 지배하던 권위와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지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었는데도 마치 그 죽음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옛 권위에 종속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새로운 관계에 들어선 사람이, 이전의 관계가 여전히 자신의 자격을 결정한다고 여기는 모순입니다.
세 가지 금지 명령
21절에서는 짧은 명령이 연이어 나옵니다.
「붙잡지 마라, 맛보지 마라, 손대지 마라.」골로새서 2:21 · 본디새김
이 짧은 세 문장은 읽는 사람에게도 답답함을 줍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내려야 할 명령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종속되고 있는 규정의 목소리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손으로 붙잡는 일, 입으로 맛보는 일, 무언가를 만지는 일. 특별한 영적 체험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몸의 활동까지 규정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규정을 따르는 사람은 일상의 여러 순간에 계속해서 자신이 허용된 행동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불편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규정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권위로 주장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자격 조건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쓰면 없어지는 것들
22절에서는 그 규정들이 다루는 대상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금지의 대상은 어느 것이나 쓰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규정에 매이는 것은 사람들의 계명과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골로새서 2:22 · 본디새김
음식은 먹으면 없어지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도 사용할수록 소모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대상과의 접촉 여부를 자신들의 궁극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잠시 사용하고 사라질 것들이 사람의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를 좌우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계명과 가르침」은 이사야 29:13과 연결됩니다. 거기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사람들이 가르친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지적하십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마음을 잃어버린 채 외적인 종교적 행위에 의존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두 본문이 완전히 같은 역사적 상황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이 세운 종교적 기준에 종속시키는 문제를 공통적으로 드러냅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모든 종교적 전통이나 모든 규칙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비판 대상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대신하거나 그 관계 위에 군림하는 규정들입니다.
몸을 아끼지 않는 일이 왜 지혜가 아닌가
23절은 앞의 논의를 마무리합니다.
이런 규정들은 제멋대로 지어낸 종교 행위와 낮은 마음과 몸을 아끼지 않는 일로 지혜롭다는 말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육이 배부르는 것을 막는 데는 아무 값어치가 없습니다.골로새서 2:23 · 본디새김
자신이 선택한 방식의 종교적 실천, 자신을 낮추는 태도, 몸을 혹독하게 다루고 육체적인 필요를 억제하는 일. 이 셋은 당대의 종교적 환경에서도 상당히 진지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절제하고, 자신을 낮추고, 특별한 종교적 헌신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것들이 「지혜롭다는 말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것들에는 지혜의 외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양이 실제로 무엇을 이루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지막 문장의 어려움
「육이 배부르는 것을 막는 데는 아무 값어치가 없습니다」는 그리스어 문장 자체가 압축적이고 불명확하여 해석이 크게 갈리는 자리입니다. 엄격한 규정과 육체적인 억제가 육의 욕망을 제어하는 데 효력이 없다는 읽기, 그러한 수행이 오히려 육적인 자기만족이나 자만을 채운다는 읽기, 몸을 아끼지 않는 수행이 몸을 마땅히 존중하거나 돌보는 일을 무시한다는 읽기로 나뉩니다. 원문의 형태만으로 하나를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문맥에서는 앞의 두 읽기가 특히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첫 번째 읽기는 엄격한 규정을 지키는 일이 인간의 욕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두 번째 읽기는 스스로 엄격하게 살아가는 행위가 오히려 영적인 교만을 키울 수 있다는 역설을 강조합니다. 이 문제는 18절의 「자기 육의 생각으로 까닭 없이 부푼」 모습과 연결됩니다.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일이 반드시 자신을 낮추는 일과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행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몸을 절제하는 모든 행위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25–27에서 바울은 운동선수의 절제를 비유로 사용하며 자신의 몸을 훈련하고 다스리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골로새서 2:23을 모든 금식이나 절제나 자기 훈련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행위가 무엇을 이루며, 무엇을 근거로 행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대신하여 자신의 엄격함으로 새로운 영적 자격을 확보하려 한다면, 그 행위는 겉으로 지혜로워 보여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를 혹독하게 다스리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몸
이제 19절과 23절을 함께 읽어 봅니다. 두 장면은 모두 영적인 성숙과 관련되어 있지만, 성장의 방식이 다릅니다.
19절의 몸은 공급받습니다. 23절의 사람은 자신을 억누릅니다.
19절의 몸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3절의 사람은 자신의 엄격함을 내세웁니다.
19절에서 성장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23절에서 내세워지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낸 종교적 규정입니다.
이 대조를 은혜를 받는 사람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규정을 지키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힘만 믿는다는 식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장은 자신을 얼마나 강하게 억누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누구에게서 생명을 공급받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미 채워진 사람의 걸음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이 마주한 문제를 단순한 규정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와 소속의 문제로 다룹니다. 그는 지혜의 중심을 예수님께 돌려놓고, 예수님과 함께 묻히고 살아난 일과 지워진 문서를 설명한 다음에야 종교적 판단에 종속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성숙을 평가할 때 누가 더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보다 먼저 머리를 붙들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아무런 삶의 책임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채워졌다는 사실은 성장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성장의 근원과 방향이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절제하고, 예배의 전통을 존중하는 일 자체가 골로새서 2장의 비판 대상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정하는 자격 조건으로 바뀌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불안을 만들어 내는 순간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어도 그 행위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도 부풀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이미 채워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채워진 사람은 자신이 채워진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완성한 사람이라고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2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붙잡지 마라, 맛보지 마라, 손대지 마라」라는 금지 명령 세 개가 남습니다. 이 짧은 명령들 속에서는 삶이 점점 좁아집니다. 손이 무엇을 붙잡아도 되는지, 입이 무엇을 맛보아도 되는지, 무엇에 손을 대면 안 되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앞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리하게 만들던 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제거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문서가 제거되었는데, 왜 다시 새로운 문서를 만들어 자신을 얽매려 합니까?
또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온몸이 머리에서 생명을 공급받고, 마디와 인대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는 모습입니다. 이 몸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머리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온 충만이 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충만을 획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받아들인 예수님 안에서 계속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뿌리내린 채 세워져 가며,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로 넘쳐 나면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