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거짓 가르침 경계
이미 충만한 사람에게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골로새서 2장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18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겸손」을 내세웁니다. 자신을 낮추고, 천사와 관련된 종교적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별한 영적 세계를 탐구하는 듯합니다. 23절에 이르면 그들은 몸을 아끼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사람이 「자기 육의 생각 때문에 근거 없이 우쭐해합니다」라고 평가합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사람이 오히려 우쭐해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이 골로새서 2장의 핵심적인 문제를 드러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고 욕망을 억제하면서도, 그 종교적 성취 때문에 자기 자신을 크게 여길 수 있습니다. 더 거룩해지려고 시작한 일이 오히려 자신을 남들과 구별하고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행위들이 아무런 매력도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23절에서 그것들이 「지혜로워 보입니다」라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말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이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반박은 규칙이 너무 많다거나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비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몸을 지닌 모습으로 온전히 머물러 있」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2:9–10). 바울은 아직 얻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 나서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이미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고 합니다.
이것이 2장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채워져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 밖에서 무엇을 더해 주겠다는 것입니까?
전체 흐름을 따라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 2:1–5 —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가 있는데 왜 다른 가르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가
· 2:6–10 —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왜 예수님 안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 2:11–15 —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들에게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2:16–19 — 그러므로 왜 다른 사람의 종교적 판단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가
· 2:20–23 —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이 왜 여전히 세상의 규정에 얽매이려 하는가
8절에서는 「사로잡아 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16절에서는 아무도 여러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20절에서는 왜 다시 「규정에 얽매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사이에 11–15절이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종교적 요구를 하나씩 반박하기 전에,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억압하던 관계가 이미 어떻게 끝났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자유는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자유입니다.
감추어진 모든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싸움
2장은 바울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의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힘써 싸우고 있는지」 밝히는 말로 시작합니다.
1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수고하고 싸운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밝히는데, 특별히 자신을 직접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골로새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바울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그 사실이 바울의 관심을 줄이지 않습니다. 같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면 직접 만나지 못했어도 그들의 믿음을 위해 싸웁니다.
그런데 이 싸움의 목표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 모든 사람이 마음에 힘을 얻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깊이 깨달아 온전한 확신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2:2 · 두루새김
바울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는 것,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집단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욱 확실하게 아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싸웁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다른 가르침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 가르침은 특별한 지식이나 종교적 체험을 내세워 사람들의 자격을 평가하지만, 바울이 구하는 앎은 공동체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어떤 가르침이 정말 지혜로운지 판단하려면 그것이 얼마나 신비로운 설명을 제공하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어떤 관계로 이끄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앎의 목적지는 그리스도다
2절에서 바울이 밝힌 앎의 대상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입니다. 이어지는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감추어져 있습니다.골로새서 2:3 · 두루새김
바울은 보물이 모두 드러나 있다고 말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골로새 사람들은 그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다시 특별한 비밀 지식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 모든 보물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지혜를 향한 탐구 자체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분리된 다른 권위가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인 것처럼 제시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예수님 안에 감추어진 보물이라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 가는 일에는 끝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예수님 밖에 있는 다른 중개자에게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배움의 중단이 아니라 배움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럴듯한 말이 왜 위험한가
4절에서 바울은 이 말을 하는 목적을 직접 밝힙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무도 그럴듯한 말로 여러분을 속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2:4 · 두루새김
「그럴듯한 말」은 설득력 있게 들리는 말이나 논증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을 위협하는 가르침이 조잡하고 터무니없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듣는 사람을 납득시킬 만큼 그럴듯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떤 말이 앞뒤가 맞고, 복잡한 영적 세계를 설명해 주고, 더 높은 단계의 성숙을 약속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깊은 지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설득력 있는 말과 참된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말이 얼마나 그럴듯한가보다, 그 말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게 합니까?
5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질서를 지키며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모습」을 보며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이미 무너졌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서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도록 돕고자 합니다.
바울의 경고는 실패한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아니라, 이미 서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보호의 말입니다.
이미 받아들인 그리스도 안에서 걸으십시오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같은 분 안에서의 계속되는 걸음
6절에는 이 장 전체의 중심 명령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인 대로,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골로새서 2:6 · 두루새김
바울은 처음 받아들인 복음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종교적 단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바로 그 예수님 안에서 계속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것은 어떤 가르침이 아니라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들은 종교적 지식의 한 묶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삶은 그 관계를 버리고 다른 가르침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구체화되는 과정입니다.
뿌리내린 채 세워져 가는 사람들
7절에서 바울은 이 삶을 서로 다른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그분 안에 뿌리내린 채, 그분 위에 계속 세워져 가십시오. 배운 대로 믿음에 굳게 서며 감사가 넘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7 · 두루새김
먼저 식물의 이미지입니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어디에서 생명을 공급받는지가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건축의 이미지입니다. 세워져 간다는 것은 이미 시작된 일이 아직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뜻입니다. 원문에서도 「뿌리내린 채」(ῥιζόομαι)는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계속 세워져 가십시오」(ἐποικοδομέω)는 계속 진행되는 세워짐을 나타냅니다.
골로새 사람들은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장한다는 것이 매번 뿌리를 뽑아 다른 곳에 옮겨 심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뿌리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 뿌리에서 자라기 때문에 세워짐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감사가 넘치게 하십시오」라는 말이 붙습니다. 바울이 기대하는 성장의 표지는 능력이나 지식의 증가만이 아닙니다. 감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자랑하는 태도와 다릅니다. 이미 받은 것을 선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사로잡아 가는 철학
8절은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사로잡아 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런 가르침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기초 요소들을 따르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골로새서 2:8 · 두루새김
「사로잡아 가는」은 전리품처럼 빼앗아 가거나 포로로 잡아가는 이미지를 지닌 말로, 신약에서는 이 절에만 등장합니다. 7절에서 골로새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워져 가는 사람들인데, 8절에서는 누군가가 그들을 사로잡아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한쪽에는 뿌리내림이 있고, 다른 쪽에는 붙잡혀 끌려감이 있습니다.
이 표현만으로 철학이라는 지적 활동 전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기초 요소들」을 따르며,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논증의 핵심은 철학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무엇을 따르는 가르침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기초 요소들」은 무엇인가
8절의 「세상의 기초 요소들」(스토이케이아)은 해석이 쉽지 않은 표현으로, 갈라디아서 4:3과 4:9에도 나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크게 두 읽기가 중요합니다.
첫째, 세상을 지배하거나 그 운행에 관여한다고 여겨지는 영적 세력들로 읽는 견해입니다. 10절과 15절의 「통치자와 권력자」, 18절의 천사 관련 표현이 근거가 됩니다. 둘째, 예수님 이전의 세상에 속한 기본적인 종교 원리나 규범으로 읽는 견해입니다. 20–23절에 나오는 음식과 접촉에 관한 금지 규정들이 근거가 됩니다.
두 가능성은 서로 완전히 분리될 필요도 없지만, 어느 한쪽이 유일한 의미라고 확정할 만한 분명한 설명은 이 장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요소들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아니며(2:20),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든 예수님보다 높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온전히 머문다
바울은 9절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몸을 지닌 모습으로 온전히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2:9 · 두루새김
왜 다른 가르침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온전히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신적인 성질을 막연히 지녔다는 표현보다 강하게, 하나님이심과 관련된 충만을 나타냅니다.
「몸을 지닌 모습으로」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 두 가지로 읽힙니다. 예수님께서 실제 몸을 지니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읽기와, 그 충만이 그림자나 겉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머문다는 뜻을 강조한다는 읽기입니다. 17절에서 그림자와 몸이 대조되는 것이 두 번째 읽기의 근거이지만, 9절의 표현이 예수님의 실제 몸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은 부족한 부분을 다른 존재가 보충해야 하는 불완전한 충만이 아닙니다. 이것이 10절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통치자와 권력자의 머리이십니다.골로새서 2:10 · 두루새김
원문에서 9절의 충만을 뜻하는 말과 10절의 「가득 채워져」(πληρόω)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온전히 머뭅니다. 그리고 골로새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본성의 충만을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소유한다는 뜻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 자체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본성이 온전히 머무는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채워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충만함은 독립적인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충만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완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들을 더 충만하게 만드는 길이 아니라, 그 충만의 근원에서 멀어지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채워졌다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할례와 세례, 죽음과 부활, 지워진 문서와 십자가의 승리 행렬이 등장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났습니다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
11절은 뜻밖에도 할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분 안에서 여러분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육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골로새서 2:11 · 두루새김
할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창세기 17:9–14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몸에 할례를 받아 언약에 속한 백성임을 나타내도록 명령받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이 이미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입니다.
이 표현에는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신명기 10:16은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고, 신명기 30:6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예레미야 4:4 역시 마음의 할례를 요구합니다. 골로새서는 이 전통과 이어지면서, 마음이라는 표현 대신 「육의 몸을 벗어 버리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이 「육의 몸」을 단순히 물질적인 육체로 이해하여, 구원이 몸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묻히고 다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강조점은 육체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존재 상태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속한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누구에게 일어난 일인가
11절의 「그리스도의 할례」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할례로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할례, 곧 예수님의 죽음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골로새 사람들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자신의 몸에 어떤 표지를 추가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 결정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습니다.
세례 —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함께 살아남
여러분은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 세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골로새서 2:12 · 두루새김
두 사건을 잇는 말은 「함께」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개인이 새로운 종교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의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절은 이미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새로운 현재를 강조합니다.
믿음은 자기 안에 부활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일으키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어 있던 사람들은 자신을 살릴 수 없다
여러분은 죄 가운데서 몸에 할례받지 않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골로새서 2:13 · 두루새김
골로새 사람들은 조금 부족하거나 영적으로 덜 발달한 상태였다고 묘사되지 않습니다.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설명할 때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이 사실은 다른 종교적 요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요구하는 종교적 절차를 추가해야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계산하여 보상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용서를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우리를 고발하던 문서가 사라졌다
14절은 이 장에서 가장 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규정들이 담겨 있어 우리에게 불리했던 빚 문서를 지우셨습니다. 우리에게 맞서 있던 그 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 버리셨습니다.골로새서 2:14 · 두루새김
이 문서가 정확히 무엇을 기록했는지는 읽기가 갈리지만, 그 역할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불리한 위치에 세우고, 우리와 맞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서를 지우시고, 없애 버리셨습니다. 「지우셨습니다」라는 말은 기록을 지워 문서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못 본 척하시는 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고발하던 문서 자체가 처리됩니다. 그 장소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누구인가
십자가는 원래 죄인으로 판단받은 사람을 처형하고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는 장소였습니다.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십자가에 우리를 불리하게 만들던 문서가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판단받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판단하던 문서가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가 죄인으로 판단하는 장소에서 그 판단을 제거하는 장소가 됩니다.
다만 14절을 모든 하나님의 계명이 무의미해졌다는 선언으로 넓혀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장에서 바울은 여전히 구체적인 윤리적 명령을 제시합니다.
패배의 장소가 개선 행렬의 장소가 되다
또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풀어 버리시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승리를 거두시고 그들을 승리의 행렬에 끌고 가신 것입니다.골로새서 2:15 · 두루새김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이 이제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패배한 자들처럼 취급됩니다. 「승리의 행렬에 끌고 가신」은 로마 세계에서 승리한 장군의 개선 행렬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그 행렬에서 장군은 승리를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포로들이 그 승리의 증거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로마 세계에서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로 보이셨습니다. 십자가는 명예의 장소가 아니라 수치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가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이 패배한 장소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패배라고 부른 사건을 바울은 승리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모든 권력자보다 더 강하시다는 말로만 줄이면 십자가라는 장소의 의미를 놓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승리를 얻으셨다고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승리의 자리로 제시됩니다.
십자가에서 문서가 제거되고 권력자들이 패배했다면,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그리스도의 할례」(11절)는 세 방향으로 읽혀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할례(그들이 받은 영적 할례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 예수님께서 겪으신 할례(예수님의 죽음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며 신자들이 그 죽음에 참여함),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할례입니다. 문법과 문맥상 모두 가능하며, 특히 앞의 두 읽기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12절은 로마서 6:3–5와 이어집니다. 로마서에서도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묻힘으로 설명되지만, 함께 살아나는 일은 새로운 삶의 걸음과 장차 이루어질 부활의 전망으로 이어집니다. 골로새서가 장차 이루어질 부활에 관한 전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14절의 「빚 문서」(케이로그라폰)는 문자적으로 손으로 쓴 문서로, 오래전부터 빚진 사람이 작성한 차용증과 관련하여 설명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고대 파피루스에서는 계약서, 선언문, 서약 문서 등 다양한 자필 문서에도 쓰였고, 이 절을 종교적 규정을 지키겠다는 서약 문서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는 대안이지 확정적인 결론은 아닙니다. 문서에 담긴 「규정들」은 모세 율법의 규정들로, 인간을 죄인으로 판단하는 빚과 의무의 기록으로, 사람을 얽매는 종교적 규범으로 읽혀 왔습니다. 15절의 「무장을 풀어 버리시고」는 원문의 형태상 그 권력자들을 자기에게서 벗어 버렸다는 방향으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두루새김은 뒤따르는 구경거리와 승리 행렬 장면에 맞추어 그들의 무장을 풀어 힘을 잃게 했다는 쪽을 택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의 판단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는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에서 나오는 첫 번째 결론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 초하루, 안식일을 지키는 일을 두고 아무도 여러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16 · 두루새김
바울은 먼저 개인의 자유나 취향을 주장하고 나서 종교 규정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을 설명한 다음, 그 결과로 다른 사람의 판단에 얽매이지 말라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날짜를 지키는 일은 겉으로 보면 생활의 작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지, 누가 더 높은 영적 자격을 얻었는지를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 위에 또 다른 자격 심사를 세우는 것이 됩니다.
절기와 초하루와 안식일
명절은 해마다 지키는 축제들을, 초하루는 달마다 돌아오는 날을, 안식일은 일곱 날마다 지키는 날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이 셋이 함께 등장하므로, 16절은 이스라엘의 예배 관습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안식일이나 명절을 지키는 모든 행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금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러한 일들을 기준으로 골로새 사람들을 판단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날을 지키는 일과,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판정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스라엘의 모든 예배 전통을 업신여기는 말로 읽는 것은 문맥을 넘어섭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의 지위를 다른 종교적 기준에 매이게 하는 일입니다.
그림자와 몸
17절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골로새서 2:17 · 두루새김
그림자는 어떤 물체가 빛을 가릴 때 생겨납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그와 관계된 실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명절과 날짜에 관한 규정들을 그림자라고 부르지만, 거짓이나 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을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실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문에서 실체를 가리키는 말은 「몸」(σῶμα)이고 동사가 없어서, 「실체는 예수님이십니다」로도, 「몸은 예수님께 속합니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앞의 읽기는 그림자와 실체의 대조를, 뒤의 읽기는 실체가 예수님께 속한다는 관계를 강조하며, 두루새김은 뒤의 읽기를 따랐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예수님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들이 도리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는 독립적인 권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자가 자신이 가리키는 실체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천사를 섬기는 종교와 낮은 마음
18절에서는 더욱 낯선 문제가 등장합니다.
겸손과 천사 숭배를 내세워 여러분의 상을 빼앗는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본 것에 깊이 빠져들고, 자기 육의 생각 때문에 근거 없이 우쭐해합니다.골로새서 2:18 · 두루새김
「천사 숭배」는 두 방식으로 읽힙니다. 사람들이 천사를 경배의 대상이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특별한 중개자로 대우한다는 읽기와, 천사들이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에 사람들이 참여하려 한다는 읽기입니다. 두 읽기는 모두 문법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두루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따랐습니다.
바울은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고, 상대방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그러한 종교적 실천을 근거로 다른 사람에게서 상을 빼앗으려는 태도입니다. 「상을 빼앗는」에는 경기에서 심판이 누군가의 자격을 빼앗거나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 것에 깊이 빠져들고」라는 표현도 쉽지 않아, 그들이 어떤 환상을 보았고 어떤 의식을 행했는지까지 되살려 낼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종교적 체험을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들 위에서 판단할 권한을 행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겸손」을 내세우지만 「우쭐해합니다」.
낮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풀어 있는 마음
여기서 처음의 역설로 돌아오게 됩니다.
같은 낱말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이 2:18과 2:23에서는 비판의 대상에 등장하지만, 3:12에서는 신자들이 입어야 할 태도로 제시됩니다. 바울은 겸손 자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겸손이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아래에 둡니다. 자신이 더 많이 절제하고, 더 특별한 경험을 하고, 더 깊은 지식을 얻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겸손은 어느새 자신이 더 낫다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행위를 통해서조차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높게 만들 수 있습니다.
머리를 붙들지 않는 사람들
19절은 이러한 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그런 사람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습니다. 온몸은 머리로부터 관절과 인대를 통해 필요한 것을 공급받고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랍니다.골로새서 2:19 · 두루새김
그들은 어떤 체험을 했습니까?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규칙을 지켰습니까? 바울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머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여기서 머리는 명령을 내리는 최고 권위자에 그치지 않고, 온몸이 공급받고 자라나는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18절의 사람들은 특별한 지식과 체험을 통해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머리를 붙들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격한 수행을 해도 몸 전체를 자라게 하는 근원에서 떨어져 있는 셈입니다.
「관절과 인대」라는 표현은 한 개인이 머리에서 직접 능력을 공급받는 모습이 아니라, 온몸이 서로 연결되어 공급받고 자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바울이 2절에서 구했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공동체가 여기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장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대안은 규칙을 줄이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머리로 붙들고, 예수님께 공급받으며,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장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처럼 절기와 초하루와 안식일이 함께 언급되는 자리는 에스겔 45:17, 역대하 2:4와 31:3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5–6도 어떤 날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과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의 차이를 다루며 각자 예수님을 향하여 행동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종교적 실천의 차이가 다른 신자의 자격을 판단하는 권위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이어집니다. 17절의 「몸」을 교회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논의가 있지만, 문맥에서 가장 직접적인 대조는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 있습니다. 18절의 「깊이 빠져들고」는 이 절에만 나오는 드문 동사로, 환상에서 본 것을 깊이 살펴본다는 뜻으로도, 특별한 종교적 영역이나 의식에 들어간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그 앞부분에는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사이의 사본 차이도 있으며, 두루새김은 「자기가 본 것」을 따랐습니다. 19절의 「하나님의 자람」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성장, 하나님에게서 오는 성장, 하나님을 향한 성장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두루새김은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죽은 사람이 왜 다시 규정에 얽매이는가
함께 죽었다면 무엇이 달라졌는가
20절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세상의 기초 요소들에서 벗어났다면, 왜 여전히 세상에 속해 사는 사람처럼 다음과 같은 규정에 얽매입니까?골로새서 2:20 · 두루새김
바울은 8절의 「세상의 기초 요소들」을 다시 언급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무엇인가보다 골로새 사람들이 그 요소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그러므로 그 요소들에서 벗어났습니다. 앞의 세례 설명처럼, 예수님과의 죽음과 부활은 이전에 사람들을 지배하던 권위와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지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었는데도 마치 그 죽음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옛 권위에 매이는 태도입니다. 이미 새로운 관계에 들어선 사람이, 이전의 관계가 여전히 자신의 자격을 결정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세 가지 금지 명령
「붙잡지 마라. 맛보지 마라. 손대지 마라.」골로새서 2:21 · 두루새김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명령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얽매여 있는 규정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줍니다. 손으로 붙잡는 일, 입으로 맛보는 일, 무언가에 손대는 일. 가장 기본적인 몸의 활동까지 규정의 대상이 됩니다.
문제는 단순히 불편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규정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권위로 주장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자격 조건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쓰면 없어지는 것들
그 규정들이 금하는 것들은 모두 쓰면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런 규정은 사람들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골로새서 2:22 · 두루새김
음식은 먹으면 없어지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도 사용할수록 소모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대상과의 접촉 여부를 자신들의 궁극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잠시 사용하고 사라질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를 좌우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람들의 명령과 가르침」은 이사야 29:13과 이어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입술로는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사람들이 가르친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지적하십니다. 두 본문이 같은 역사적 상황을 다루지는 않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람이 세운 종교적 기준에 매이게 하는 문제를 함께 드러냅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모든 종교적 전통이나 규칙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비판 대상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대신하거나 그 관계 위에 군림하는 규정들입니다.
몸을 아끼지 않는 일이 왜 지혜가 아닌가
이런 규정은 스스로 정한 종교 행위와 겸손,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일 때문에 지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육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골로새서 2:23 · 두루새김
자신이 선택한 방식의 종교적 실천, 자신을 낮추는 태도,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억제하는 일. 이 셋은 당시에도 진지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해 보일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것들이 「지혜로워 보입니다」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겉모습이 실제로 무엇을 이루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23절의 마지막 표현은 원문이 압축적이어서 해석이 크게 갈립니다. 엄격한 수행이 육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 효과가 없다는 읽기, 오히려 육적인 자만을 채운다는 읽기, 몸을 마땅히 돌보는 일을 무시한다는 읽기가 있으며, 원문의 형태만으로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따랐습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엄격한 규정이 욕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이, 두 번째 읽기에서는 엄격한 삶이 오히려 영적인 교만을 키울 수 있다는 역설이 드러납니다.
두 읽기는 모두 18절의 「자기 육의 생각 때문에 근거 없이 우쭐해합니다」와 이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을 극도로 억제하면서도, 그 고행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몸을 절제하는 모든 행위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25–27에서 바울은 운동선수의 절제를 비유로 자신의 몸을 훈련하고 다스리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그 행위가 무엇을 근거로 행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대신하여 자신의 엄격함으로 새로운 영적 자격을 얻으려 한다면, 그 행위는 겉으로 지혜로워 보여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자기를 혹독하게 다스리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몸
이제 19절과 23절을 함께 읽어 봅니다.
19절의 몸은 공급받습니다.
23절의 사람은 자신을 억누릅니다.
19절의 몸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3절의 사람은 자신의 엄격함을 내세웁니다.
19절에서 성장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23절에서 내세워지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낸 종교적 규정입니다.
참된 성장은 자신을 얼마나 강하게 억누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누구에게서 생명을 공급받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 끝부분의 세 읽기는 원문의 낱말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다르게 이해한 결과입니다. 첫째는 엄격한 종교 규정과 몸을 억제하는 일이 실제로 육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읽습니다. 둘째는 그러한 수행이 겉으로는 몸을 낮추는 것 같지만 오히려 육적인 자기만족이나 자만을 채운다고 읽습니다. 셋째는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수행이 몸을 마땅히 존중하거나 돌보는 일을 무시한다고 읽습니다.
붙잡지 마라. 맛보지 마라. 손대지 마라.
골로새서 2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붙잡지 마라. 맛보지 마라. 손대지 마라」라는 금지 명령 세 개가 남습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골로새 사람들이 마주한 문제를 단순한 규정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와 소속의 문제로 다루었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날을 지킬지, 얼마나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릴지가 하나님 앞에서 누가 완전한 사람인지 결정하는 기준으로 바뀌면,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교적 판단에 얽매이지 말라고 명령하기 전에, 예수님과 함께 묻히고 살아난 일과 용서받은 일을 먼저 설명했습니다. 자유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자율성의 선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에서 나오는 결과이며, 아무런 삶의 책임도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절제하고, 예배의 전통을 존중하는 일 자체는 비판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정하는 자격 조건으로 바뀌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불안을 만들어 내는 순간, 좋은 실천도 다른 성격을 띠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명령들 속에서는 삶이 점점 좁아집니다. 손이 무엇을 붙잡아도 되는지, 입이 무엇을 맛보아도 되는지, 무엇에 손을 대면 안 되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앞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리했던 빚 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 버리시는 장면입니다.
그 문서가 없어졌는데, 왜 다시 새로운 문서를 만들어 자신을 얽매려 합니까?
또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온몸이 머리에서 생명을 공급받고, 관절과 인대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는 모습입니다. 이 몸은 성장하기 위해 다른 머리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온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충만함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라, 처음 받아들인 예수님 안에서 계속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뿌리내린 채 예수님 위에 계속 세워져 가며,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게 하면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