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으뜸이신 그리스도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해

골로새서 1장을 읽다 보면 뜻밖의 장면을 만납니다.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몇몇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느닷없이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왕좌와 권력, 심지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까닭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이야기가 끝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16절)라고 말한 뒤, 곧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20절)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면, 모든 권력보다 앞서 계신 분이시라면, 왜 예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마지막 말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일까요?

이 질문을 붙들면 골로새서 1장의 독특한 흐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설명한 다음, 그 위대한 분이 겸손하게 죽으셨다고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평화를 이루신 바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목적이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골로새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합니다.

골로새는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의 리쿠스 계곡에 있던 도시입니다. 한때 번영했지만 로마 시대에는 인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에 비해 중요성이 줄어들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직접 방문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으며, 골로새서 2:1 역시 그가 편지를 받는 사람 상당수를 직접 만나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 편지가 바울 자신에게서 나왔는지 바울의 전통을 이어받은 제자에게서 나왔는지는 서로 다른 해석이 있지만, 편지는 한결같이 바울의 목소리로 전개됩니다.

골로새서 1장의 전체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 1:1–8 — 골로새 사람들 가운데 이미 열매를 맺고 있는 복음

· 1:9–14 — 그 복음에 어울리게 살아가도록 구하는 기도

· 1:15–20 — 모든 것의 근원이자 화해의 중심이신 예수님

· 1:21–23 — 온 세상의 화해가 골로새 사람들에게 가져온 변화

· 1:24–29 —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고난받는 사역

바울은 먼저 예수님의 위대함을 말하고 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골로새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에서 시작하여 그 근원이신 예수님께 이르고, 다시 예수님에게서 출발하여 골로새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사역으로 돌아옵니다.

우주의 중심에 관한 이야기가 한 공동체의 생활을 설명하고, 한 공동체의 생활이 다시 우주의 중심을 가리키는 구조입니다.

읽는 시간 36분소단락 71장 본문 읽기 →

복음은 이미 여러분 가운데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8 본문 →

두 장소에 속한 사람들

편지는 바울과 디모데의 인사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지키는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소속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들은 골로새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골로새 사람들은 여전히 골로새에 삽니다. 자신들이 처한 사회와 문화, 인간관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더 근본적인 관계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 관계는 13절에서 「어둠의 지배」로부터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말로 발전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다른 도시로 이주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이제 다른 주님께 속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어디에서 왔는가

3–5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모든 성도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가지의 원인을 뜻밖의 곳에서 찾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소망에서 나옵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말씀인 기쁜 소식, 곧 복음을 통해 이 소망에 관해 이미 들었습니다.골로새서 1:5 · 두루새김

흔히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서로 나란한 세 가지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는 소망이 믿음과 사랑의 근거처럼 제시됩니다. 골로새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다리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을 믿고 서로 사랑합니다.

소망은 단순히 어려운 현실을 견디게 해 주는 미래에 대한 낙관이 아닙니다. 현재의 행동을 만들어 내는 힘입니다.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이라는 표현도 반드시 신자가 죽은 뒤 하늘에서 살아간다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문맥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 소망이 하나님께 안전하게 맡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골로새 사람들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소망에 관해 그들이 「이미 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소망을 알려 준 것은 「진리의 말씀인 기쁜 소식, 곧 복음」이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비밀스러운 소망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처음 들었던 복음 안에 이미 소망이 있었습니다.

복음이 하는 일과 신자들이 하는 일

그 복음은 여러분에게 전해졌고,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 참되게 깨달은 날부터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렇게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골로새서 1:6 · 두루새김

여기서 열매를 맺고 자라는 것은 골로새 교회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정보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들어와 실제로 무언가를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10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6절에서는 복음이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고, 10절에서는 골로새 사람들이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두루새김은 뒤의 성장을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것으로 풀었지만, 원문에서는 열매를 맺는다와 자란다는 같은 동사들이 반복됩니다.

복음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는 방식은 그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성장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성격에 맞는 열매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에바브라 — 한 사람을 통해 찾아온 복음

바울은 이 모든 일이 에바브라를 통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사람이며, 그들의 사랑을 바울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편지는 그를 「우리와 함께 주님을 섬기는 종」이며 「그리스도를 충실히 섬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복음은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골로새 사람들은 그 복음을 한 사람에게서 배웠습니다.

세계적인 사건이 한 사람의 충실한 사역을 통해 한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의 역할을 작게 여기지 않고, 그를 향한 신뢰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골로새 교회가 받은 복음이 바울과 동떨어진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 인사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제대로 받았다면, 앞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조금 더 깊이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는 모습은 창세기 1:28의 창조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이 번성하고 세상을 채우도록 명하십니다.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창조의 생명력이 복음이 일하는 가운데 새롭게 나타난다는 주제의 연결을 읽을 수 있고, 이 연결은 곧 등장할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라는 선언을 준비합니다. 또 7절에서 에바브라가 「여러분을 위해」 섬긴다는 읽기와 「우리를 위해」 섬긴다는 읽기는 사본에 따라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에바브라가 예수님을 섬기며 골로새 공동체와 바울 사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걷는가

골로새서 1:9–14 본문 →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걸어갈 길을 아는 것

9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의 소식을 들은 날부터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소식을 들은 날부터 여러분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되기를 구합니다.골로새서 1:9 · 두루새김

「온전히 알게」에 담긴 앎을 단순한 지식보다 깊은 이해로 구분해야 하는지, 아니면 문맥에 따라 앎을 강조하는 말로 보아야 하는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자리에서 어떤 앎을 구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10절을 읽으면 답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주님께 어울리는 삶을 살아 모든 면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골로새서 1:10 · 두루새김

골로새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유는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지식에 도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뜻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원문에서는 바울이 걸어간다는 말을 통해 지식과 삶을 연결하고, 두루새김은 이 말을 「삶을 살아」(περιπατέω)가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걷는 사람에게는 방향이 있고, 길이 있고, 실제로 옮기는 걸음이 있습니다. 어디를 향하는지 아는 것과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는 정보가 늘어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래서 바울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선한 일과 열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그분께 어울리게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갑니다.

앎이 삶을 만들고, 삶은 다시 앎을 깊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

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온갖 힘을 얻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끈기 있게 견디고 오래 참게 되기를 기도합니다.골로새서 1:11 · 두루새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온갖 힘을 얻는다면, 놀라운 일을 해내거나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는 모습이 뒤따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로 구하는 것은 「끈기 있게 견디고 오래 참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모든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힘을 구하지 않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으며, 계속해서 주님께 어울리게 살아갈 힘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지를 새롭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끈기 있게 견디고」와 「오래 참게」는 서로 가까운 표현이지만 강조점이 조금 다릅니다. 앞의 것은 어려운 형편 아래에서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뒤의 것은 특히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성급하게 포기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1장에서 곧 등장할 바울 자신의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 기뻐하고, 사람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수고하고 싸웁니다. 바울이 남들에게 요구하는 삶은 자신이 고난 없이 멀리서 설명하는 이상이 아닙니다.

이미 자격을 주신 아버지

12절에서 기도는 감사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아버지께 감사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빛 가운데서 성도들이 물려받을 몫을 여러분도 함께 받을 자격을 주셨습니다.골로새서 1:12 · 두루새김

앞에서는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성장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장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격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그 자격을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물려받을 몫」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나누어 받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문에는 제비로 받은 몫을 가리키는 표현이 쓰였고, 민수기 26:52–56과 여호수아 14장 등에서는 땅의 몫을 제비로 나누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에서 땅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만들어 낸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유산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몫을 주신다는 상속의 주제가 여기에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몫을 받는 사람들은 골로새의 신자들이고, 그 가운데에는 유대 사람이 아닌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도 이제 하나님 백성이 받는 몫을 함께 받을 자격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새로운 소속은 그들이 스스로 이루어 낸 업적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한 권세에서 다른 나라로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지배에서 건져 내시고,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로새서 1:13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동작이 있습니다. 먼저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고 옮기셨습니다. 단순히 어둠에서 빠져나오게 하신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에 속하도록 하셨습니다.

「옮기셨습니다」(μεθίστημι)는 사람이나 어떤 것을 다른 자리로 옮기는 데 쓰이는 말로, 정치적 권력이나 지배 관계의 변화에도 어울리는 낱말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죄책감이 사라지는 개인의 마음속 경험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지배 아래 사는지가 달라지는 일로 말합니다. 본문이 밝히는 대조는 어둠의 지배와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사이입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속한 나라로 사람들을 옮기셨습니다.

구원의 목적지는 막연한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속량,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골로새서 1:14 · 두루새김

속량은 얽매인 상태에서 풀려나는 일과 관계된 표현이며, 여기서는 곧바로 「죄의 용서」로 설명됩니다. 어둠의 지배에서 건져 내시고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일은 죄의 용서가 있기에 가능하고, 이 모든 일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이제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교리 설명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설명하던 바울이 그 구원을 이루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자리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골로새서 1:15–17 본문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15절부터 문체가 달라집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창조된 모든 것의 맏아들이십니다.골로새서 1:15 · 두루새김

15–20절은 반복과 대칭이 두드러져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불립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던 찬양을 편지에 가져왔다는 견해도 있지만, 따로 쓰이던 찬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첫 표현부터 역설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형상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창세기 1:26–27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직접 불리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형상으로 제시되십니다. 골로새서 3:10에서는 새로운 인간이 자신을 지으신 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되는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됩니다. 골로새서 1장은 이 관계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중심에 예수님께서 놓이시게 되는 방향은 이미 제시합니다.

「창조된 모든 것의 맏아들」이라는 말

15절의 두 번째 표현은 오랫동안 해석이 갈렸던 말입니다. 「맏아들」은 프로토토코스(πρωτότοκος), 곧 먼저 태어난 이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창조된 모든 것의」와 결합하면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존재이시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창조된 모든 것에 앞서 계시며 그 위에 우선권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입니까? 구약에서 맏아들이라는 말은 출생 순서를 넘어 높은 지위와 통치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로새서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6절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왕좌와 지배 세력, 통치자와 권력자까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골로새서 1:16 · 두루새김

15절의 「맏아들」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창조된 존재이시라고 말하면서 나머지 것들의 창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의 창조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문맥은 「맏아들」을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앞서 계시며 통치권을 지니신다는 말로 읽도록 강하게 이끕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 가운데 단순히 첫째 자리를 차지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창조의 세 가지 관계

16절은 예수님과 창조의 관계를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 그분 안에서

· 그분을 통해

· 그분을 위해

이 표현들을 모두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하나의 문장으로 줄이면 중요한 차이가 사라집니다. 「그분 안에서」는 모든 것의 창조가 예수님과 맺고 있는 폭넓은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할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창조가 예수님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분을 통해」는 창조가 예수님을 거쳐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분을 위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 또는 방향을 나타내며, 원문에는 그분을 향한다는 방향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창조에 관여하셨다는 말만으로는, 예수님께서 과거의 창조 사건과 관련된 분으로 머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창조의 시작뿐 아니라 창조의 목적과도 관계되십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자기 목적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하도록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골로새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적 소속만을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지어진 목적과 자신들의 삶이 다시 연결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권세들도 지어진 것들이다

16절에서 바울은 창조된 모든 것의 범위를 반복해서 넓힙니다.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왕좌와 지배 세력, 통치자와 권력자.

마지막 네 표현은 통치와 지배의 여러 형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정치적 권력을 나타낼 수도 있고, 앞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초인간적 권세까지 포함한다고 읽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네 표현 각각이 어떤 영적 존재의 정확한 계급이나 이름을 가리키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그 권세들을 분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에 관하여 같은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들도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위협적이고 높아 보이는 권세라도 예수님과 나란히 존재하는 독립적인 최종 권력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후 골로새서 2:10과 2:15에서 통치와 권세에 관한 논의가 다시 등장할 때 바탕이 됩니다. 골로새 사람들이 어떤 권세를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지만, 편지가 예수님과 여러 권세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상은 왜 흩어지지 않고 존재하는가

17절은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현재로 가져옵니다.

그분은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며,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함께 유지되고 있습니다.골로새서 1:17 · 두루새김

앞에서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계속해서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함께 유지되고 있습니다」(συνίστημι)는 함께 결합하거나 유지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말로, 원문에서는 이미 이루어져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꼴로 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생겨나는 처음 순간에만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모든 것이 지금 존재하는 일과도 관계되어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없이도 완전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편지가 제시하는 세계 이해 전체와 어긋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유지된다면, 그 모든 것 속에 생겨난 죄와 소외와 죽음은 어떻게 됩니까? 이제 바울은 창조에서 부활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89:27(히브리어 성경의 절수로는 89:28)에서 하나님은 다윗 계열의 왕을 맏아들로 삼고 땅의 왕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두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맏아들이라는 지위는 출생 순서를 넘어 왕권과 우선권을 나타냅니다. 다윗 자신도 가족 가운데 첫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사무엘상 16:10–13). 골로새서가 이 다윗 왕권의 전통을 강하게 반영한다는 해석이 있으며, 창조에 관여하는 지혜의 전통을 더 강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배경은 서로 하나만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쪽이 직접적인 배경인지는 논의됩니다.

창조의 맏아들이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맏아들

골로새서 1:18–20 본문 →

같은 맏아들, 다른 시작

18절은 갑자기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맏아들이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시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18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 함께 유지되는 중심으로 제시되셨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몸이라고 설명됩니다. 모든 것과 예수님의 관계가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로 초점을 좁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를 창조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특별히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공동체이며, 예수님과의 관계가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결정합니다.

15절의 「맏아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창조된 모든 것의 맏아들」이었고, 두 번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맏아들」입니다. 첫 번째 표현은 창조와 관련되고, 두 번째 표현은 부활과 관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모든 것의 시작과 관계되실 뿐 아니라, 죽음을 넘어 시작된 생명과도 관계되시는 분이십니다.

「시작」이라는 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부활이라는 사건을 경험하신 분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이루시는 분으로 제시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으뜸됨은 창조의 과거에 머물지 않고, 부활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생명의 질서에도 미칩니다.

예수님께 으뜸이라는 자리는 여러 분야 가운데 하나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도, 부활도, 교회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함이 그 아들 안에 머무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19절은 짧지만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함이 그 아들 안에 머무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1:19 · 두루새김

무엇의 충만함인지 본문은 여기서 명시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2:9에 가면 신성의 모든 충만함을 말하는 표현이 등장하므로, 1:19도 예수님 안에 머무는 하나님의 충만함을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2:9가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내용을 1:19의 문장 자체에 미리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기뻐했는지도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님을 주어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충만함을 예수님 안에 머물게 하기를 기뻐하셨다는 뜻이 되며, 이 읽기는 문맥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강조합니다. 모든 충만함 자체를 주어로 보면 충만함이 예수님 안에 머물기를 기뻐했다는 뜻이 되며, 이 읽기는 명시되지 않은 주어를 보충하지 않는다는 문법적 장점이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께서」를 주어로 밝혀 첫 번째 읽기를 따릅니다.

두 읽기 모두 예수님의 특별한 지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충만함과 무관한 여러 중개자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지 않으십니다. 모든 충만함이 바로 예수님 안에 머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충만함이 무엇을 위해 중요합니까? 20절이 대답합니다.

모든 것의 화해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집니다

또 그 아들을 통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을 자신과 화해시키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골로새서 1:20 · 두루새김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

예수님의 우주적인 지위와 십자가는 서로 모순되는 두 이야기가 아닙니다. 16절에서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 창조되었고, 20절에서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 화해하게 됩니다.

창조를 이루신 분께서 화해를 이루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십자가는 단지 몇몇 개인의 죄책감을 처리하기 위한 사건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창조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화해와 관계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자신과 화해시키기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구원받는다는 뜻입니까? 이 구절은 실제로 매우 넓은 표현을 사용하며, 「모든 것」을 인간만이나 교회만으로 좁히면 앞의 창조에 관한 말과 연결되는 힘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화해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며, 20절만으로 이 논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루는 평화의 범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인적인 구원보다 훨씬 넓게 제시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바울은 그 거대한 우주의 이야기를 갑자기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적용합니다.

하늘과 땅을 이야기하던 문장이 「여러분도 한때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라는 말과 함께 골로새 사람들의 과거로 내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15:20–23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잠든 이들의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골로새서 1:18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뒤따를 생명의 시작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20절의 「모든 것」의 화해에 대해서는, 모든 존재의 최종적인 회복을 강조하는 읽기가 있는가 하면, 적대적인 세력까지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놓이는 우주적인 질서의 회복을 포함한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골로새서 2:15에서 통치와 권세들을 이기신다는 표현이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또 이 구절은 로마서 8:19–22의 창조된 것들이 해방을 기다리며 신음하는 모습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두 본문이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 세계의 앞날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공통된 전망을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의 화해가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

골로새서 1:21–23 본문 →

한때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

여러분도 한때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악한 일을 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적대했습니다.골로새서 1:21 · 두루새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 상태에 있었고, 그 멀어짐은 생각과 행동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9–10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주님께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 연결되었던 것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앎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상태 역시 삶으로 나타납니다.

한때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여러분.

그러나 이제는.

실제로 죽으신 몸으로 이루어진 화해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으로 죽으신 일을 통해 여러분을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비난받을 데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22 · 두루새김

18절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으로 죽으신 일」에서 말하는 몸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신 실제 몸입니다.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충만함이 그분 안에 머무는 예수님의 화해는 인간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영적 사건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가에 관한 가장 높은 말과 예수님께서 몸으로 죽으셨다는 가장 구체적인 말이 한 문맥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위대함을 예수님께서 몸으로 죽으신 일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화해의 목적은 그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비난받을 데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흠이 없으며」라는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흠 없어야 한다는 표현(레위기 1:3)을 떠올리게 하지만, 골로새서가 신자들을 문자 그대로 제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로 세워진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흠 없게 만들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화해가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근거가 됩니다.

화해의 선물과 믿음에 머무르는 일

그러려면 여러분은 단단한 기초 위에 굳게 서서 그 믿음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창조된 모든 것에 전해졌으며, 나 바울은 이 복음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골로새서 1:23 · 두루새김

앞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화해를 말했는데, 이제는 믿음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화해가 불완전해서 인간이 무언가를 보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화해를 들은 사람이 복음에서 떠나는 것을 중요하지 않은 일로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에 머무르는 일은 자신들을 예수님과 연결한 복음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일입니다. 「단단한 기초 위에 굳게 서서」라는 표현처럼, 신자들은 기초를 계속 새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기초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을 「복음의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5절의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소망」과 연결됩니다. 골로새 사람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알게 된 소망이 바로 지금 끝까지 붙들어야 할 소망입니다.

편지는 더 높은 단계의 소망을 찾아 나서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처음 들었던 복음의 소망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후 2장에서 예수님 밖의 가르침과 관습을 경계하는 논의를 준비합니다.

창조된 모든 것에 전해진 복음

23절 끝에서 바울은 복음이 「하늘 아래 창조된 모든 것에 전해졌으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에게 개별적으로 복음이 전달되었다는 실제 보고라기보다, 복음이 모두에게 미치는 범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16절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이제 23절에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일이 창조된 모든 것이라는 넓은 범위 안에서 언급됩니다.

창조의 범위와 복음의 범위가 서로 호응합니다.

예수님께서 특정 민족이나 도시만의 주님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에 관한 복음 역시 특정 민족이나 도시만의 소유물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을 말하던 바울은 이제 자신을 그 복음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이 섬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마지막 단락에서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21절의 문장이 그 자리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먼저 내세운 뒤, 문장이 앞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고 22절에서 새롭게 이어집니다. 이 끊김 자체를 특별한 심리적 효과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21절을 완성된 문장으로 옮기지만, 「한때는」과 「그러나 이제」가 분명한 대비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는 말

골로새서 1:24–29 본문 →

화해를 전하는 사람에게 왜 고난이 있습니까

24절은 골로새서에서 가장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겪으면서 기뻐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을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새서 1:24 · 두루새김

예수님의 고난에서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2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평화를 이루셨다고 말했고, 22절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예수님의 십자가가 충분하지 않았고 바울의 고난이 구원에 필요한 나머지 공로를 제공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까?

본문의 흐름을 보면 두 종류의 고난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2절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화해이고, 24절의 중심은 바울이 교회를 위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의 피를 대신 흘린다고 말하지 않으며, 죄의 용서를 위해 추가적인 희생을 제공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여러분을 위해」,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몸」은 곧 교회라고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문맥은 바울이 맡은 일과 교회입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수님께서 직접 겪으신 고난으로도, 예수님을 섬기며 겪는 고난으로도, 예수님의 몸에 속한 사람들이 겪는 고난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과 연결하여 대표적인 해석은 두 방향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교회가 겪을 고난 가운데 아직 역사 속에서 겪어야 할 몫이 남아 있으며, 바울이 자신의 고난으로 그 몫에 참여한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복음의 일이 전달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고난이 계속 따르며, 바울이 그 일을 감당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읽기입니다.

두 해석은 강조점이 다르지만, 모두 바울의 고난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대체하는 별도의 죄 씻는 행위로 보지 않습니다. 24절만으로 어느 해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25–29절을 읽으면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어떤 일과 연결하고 있는지는 분명해집니다. 그는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수고하며, 그의 고난은 바로 그 일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렇게 읽으면 24절은 예수님의 죽음에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왜 고난을 감당하는지를 설명하는 문장이 됩니다.

바울이 그 고난 가운데서 기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난이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위한 자신의 섬김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내게 일을 맡기셨기에, 나는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25 · 두루새김

두루새김이 「내게 일을 맡기셨기에」(οἰκονομία)로 풀어 옮긴 원문의 말은 집이나 재산 등을 맡아 관리하는 일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뜻대로 일을 선택하고 운영하는 독립적인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복음을 맡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오랜 시대와 여러 세대 동안 감추어져 있던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골로새서 1:26 · 두루새김

오늘날 우리는 비밀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는 정보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26절의 비밀은 끝까지 감추어 두려는 정보가 아니라,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 드러난 것입니다.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특별한 자격을 가진 몇 사람만 숨겨진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비밀을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그 비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

27절에서 비로소 그 비밀의 내용이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 있는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려 주려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로새서 1:27 · 두루새김

15–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신 분이셨습니다. 18절에서는 교회의 머리이셨고, 19절에서는 모든 충만함이 예수님 안에 머문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유지된다고 말했던 편지가, 이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너무도 위대하셔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위대한 예수님께서 골로새 사람들의 삶 속에 계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드러난 비밀로 선언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복수형인 엔 휘민입니다. 그래서 각 신자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도, 골로새 공동체 가운데 계신 예수님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 안에 머무심을 강조하는 읽기는 신자와 예수님께서 친밀하게 하나 되는 관계를 부각하고, 공동체 가운데 계심을 강조하는 읽기는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 형성된 교회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부각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라는 말이 무게를 지닙니다. 이 구절을 신자 개개인의 내면에 관한 설명만으로 좁히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이 이제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역사적인 새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개개인과 예수님의 관계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이 둘 사이를 문법만으로 완전히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으로 읽든 공동체로 읽든 핵심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 있는 골로새 신자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의 소망이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1장의 처음에서 바울은 하늘에 마련된 소망에서 골로새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이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27절에서는 그 소망이 누구와 관련되는지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처음에는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소망이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사실이 「영광의 소망」으로 선언됩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영광의 약속과 지금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서 서로 연결되십니다.

미래의 소망은 현재의 예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형편이 좋아지는 날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약속된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근거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은 골로새 사람들이 더 높은 단계의 영적 완성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온전하게 세우려고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모든 지혜를 다해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28 · 두루새김

「모든 사람」이 세 번 반복되고, 앞서 나온 지혜가 다시 등장합니다. 9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이 모든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기도했고, 이제 자신이 모든 지혜를 다해 모든 사람을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지혜는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온전한」은 완성되거나 성숙한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운다는 것은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만 제한할 수 없으며,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숙과 완성을 향합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의 화해는 골로새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절에서 바울이 맡은 일은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원문에서도 두 구절은 앞에 세우거나 내보인다는 같은 동사를 사용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일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해의 목적을 위해 섬깁니다.

그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그 목적에 어울리게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안에서 힘 있게 일하시는 예수님

이 일을 위해 나도 수고하며 온 힘을 다해 싸웁니다. 내 안에서 힘 있게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렇게 합니다.골로새서 1:29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의 노력을 감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일하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노력만으로 이 일을 해낸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11절의 기도와 호응합니다. 앞에서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힘을 얻어 견디고 오래 참게 되기를 기도했고, 이제 자신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수고하고 싸운다고 고백합니다. 골로새 사람들에게 필요한 능력과 바울 자신이 맡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바울의 수고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 수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

골로새서 1:1–29 본문 →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면 왜 그 위대함을 설명하는 마지막 말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일까요? 골로새서 1장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서로를 설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것의 창조와 유지에 관계된 분께서, 바로 그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화해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화해는 골로새 사람들을 세상에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골로새에 살며, 서로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고, 어려움을 견딥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일상생활을 하찮게 만들지 않고, 일상생활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골로새 사람들은 바울에게 직접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에바브라에게서 복음을 배웠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관한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것의 창조와 유지, 부활과 십자가의 화해를 이야기하고, 마침내 감추어져 있던 비밀을 밝힙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편지는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유지된다고 말했고, 이제 바울은 「내 안에서 힘 있게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 사이에 작은 도시의 교회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고 사랑하며, 아직 자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더 큰 권력을 찾아 나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안에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