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새 생명의 삶
감추어진 생명
골로새서 3장에는 이상한 명령이 등장합니다.
3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과 두 절 뒤에는 「땅에 있는 여러분의 지체들」을 「죽이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이미 죽었다고 했는데, 무엇을 다시 죽이라는 것일까요?
이 모순처럼 보이는 표현이 골로새서 3장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죽어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전 삶에 속한 것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자신을 바꾸려는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죽음과 부활에 참여했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실제 생활을 저절로 완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에는 이처럼 이미 일어난 일과 지금 계속 이루어져야 할 일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 이미 죽었지만, 죽여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 이미 새 사람을 입었지만, 그 새 사람은 계속 새로워져 갑니다.
·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지만, 그 생명에 걸맞은 행동은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러한 역설은 추상적인 신학 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곧 분노와 거짓말, 용서와 사랑, 공동체의 노래를 이야기하고, 마지막에는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버지, 노예와 주인의 관계까지 들어갑니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삶이 되는가.
이것이 3장 전체의 질문입니다.
3:1–4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 있으며 언제 드러나는지를 설명합니다. 3:5–11에서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변화가 욕망과 말, 공동체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줍니다. 3:12–17에서는 새 사람이 입어야 할 성품과 공동체의 생활을 제시하고, 3:18–25에서는 그 변화가 당시 가정의 구체적인 권력관계 안에서 어떻게 요구되는지를 다룹니다. 마지막 단락은 4:1까지 이어지지만, 여기서는 3장의 문장이 도달하는 자리까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찾으십시오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면, 위에 있는 것들을 찾으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골로새서 3: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묻히고 함께 살아난 사람들의 새로운 소속을 이야기했습니다(2:12–13). 이제 그 사실로부터 삶의 방향을 이끌어 냅니다. 「위에 있는 것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하늘의 사물이나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바울은 천상 세계의 구조나 비밀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는 그곳에 누가 계신지를 말합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찾는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명령의 중심은 공간적인 위아래보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생활을 포기하고 하늘의 비밀만 탐구하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분이 누구신지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표현에는 시편 110:1이 중요한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높여진 권위를 주셨음을 나타내는 왕권의 이미지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아직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계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것들을 찾으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 새로운 권위를 획득하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이미 높여지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라는 요청입니다.
마음을 위에 둔다는 것은 땅을 외면하는 일인가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는 두지 마십시오.골로새서 3:2 · 본디새김
이 구절을 문자적인 공간 구분으로만 읽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 자신은 이 장에서 말과 행동, 용서와 갈등, 가정과 노동에 관한 명령을 매우 구체적으로 내립니다. 그가 땅에 있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고 했다면, 뒤의 모든 권면이 이상해집니다.
핵심은 「마음을 두다」라는 표현입니다. 이 동사는 단순히 머릿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 일을 넘어, 어떤 관점과 태도를 품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5에서도 같은 동사가 예수님 안에 있는 마음가짐을 품으라는 권면에 사용됩니다. 문제는 생각의 대상만이 아니라 생각을 지배하는 방향입니다.
이 사실은 5절부터 분명해집니다. 바울이 죽이라고 명령하는 「땅에 있는」 것은 산이나 강, 음식이나 가정 자체가 아니라 음행과 악한 욕망과 탐욕입니다. 그는 창조된 세계를 혐오하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의 삶을 옛 욕망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위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땅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예수님께 맞추는 일입니다.
감추어진 생명
3절은 왜 그런 삶이 가능한지를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3:3 · 본디새김
「감추어져」는 감추어진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감추어진 것은 골로새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그 생명이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전부 드러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4절에서는 그 감추어진 생명이 장차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생명은 지금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여전히 약함이 있고, 죄와 싸워야 하며, 외부에서 보기에 그들이 지닌 생명의 영광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새로운 생명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현재 눈에 보이는 상태가 그리스도인에 관한 최종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예수님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드러날 것입니다.골로새서 3:4 · 본디새김
바울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람과 그 생명 자체가 되는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예수님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었으므로 이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설명하지 않고, 그들의 생명이 예수님과 결합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드러나심과 신자들의 드러남이 서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장차 예수님을 구경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결된 그들의 생명이 영광 가운데 드러난다는 약속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그 일이 언제 일어날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현재 감추어진 생명이 어떤 미래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외형과 사회적 평가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있으며, 예수님의 드러나심과 함께 그 정체성이 온전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장래 영광을 더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다시 땅으로 돌아옵니다. 정확히는, 땅에 있는 신자들의 몸과 욕망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0편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왕으로 이해되는 인물에게 자신의 오른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시고, 그의 원수들을 발아래 두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시편의 본래 문맥은 왕의 권위와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승리에 관한 것이며, 신약은 이 왕권의 언어를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설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마가복음 12:35–37, 사도행전 2:34–36, 히브리서 1:13에서도 이 시편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3절의 「감추어져」는 완료 수동형입니다.
이미 죽었으므로 죽이십시오
죽음에 관한 두 가지 문장
5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여러분의 지체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격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골로새서 3:5 · 본디새김
이 명령은 3절의 「여러분은 죽었고」와 의도적으로 부딪힙니다. 그리스어에서도 3절은 일어난 죽음을 진술하고, 5절은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앞의 선언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이전의 삶에 속한 모든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 삶의 지배력이 결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지배력에 속한 행동을 더 이상 자신의 삶에서 살아 있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것과 그 정체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지만, 같은 순간에 모든 과정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죽여야 할 것은 몸인가, 욕망인가
「땅에 있는 여러분의 지체들」이라는 표현은 다소 거칩니다. 「지체」는 몸의 부분이나 구성원을 가리킬 수 있지만, 바울은 곧바로 그 지체들을 음행과 더러움과 격정과 악한 욕망과 탐욕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신체의 일부를 실제로 해쳐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죄의 활동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 대목은 로마서 6:12–13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로마서에서는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내주지 말라고 합니다. 골로새서는 몸의 지체와 죄의 활동을 한 문장에 겹쳐 놓음으로써, 죄가 추상적인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지니셨고, 그리스도인은 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생명도 실제 몸으로 살아가는 생활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탐욕이 우상 숭배인 이유
바울의 죄 목록은 「탐욕」에서 끝나고, 탐욕에만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탐욕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나 자신의 몫을 넘어 끊임없이 더 얻으려는 욕망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탐욕이 우상 숭배인가?
바울은 이 절에서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탐욕은 무언가를 얻고 소유하는 일을 삶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선택과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소유하려는 대상이 사실상 궁극적인 가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신상을 만들어 절하는 행위와 형태는 다르지만, 하나님께 속해야 할 삶의 중심을 다른 것에 내준다는 점에서 우상 숭배와 연결됩니다.
탐욕은 가진 것의 절대적인 양보다 욕망이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과 관계됩니다. 이 절의 앞부분이 성적인 욕망과 관련된 항목들로 시작되므로, 탐욕을 오직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킬 대상으로 삼고 끊임없이 더 소유하려는 태도 역시 이 목록의 흐름 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진노
6절에서는 이 죄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온다고 말하고, 8절에서는 신자들에게 「진노와 노여움과 악의」를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6절의 「진노」(ὀργή)와 8절의 「진노」는 같은 낱말입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둘의 역할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심판과 관련되고, 인간의 진노는 다른 사람을 해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죄의 목록에 들어 있습니다.
이 대조를 통해 바울은 신자들이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과 쉽게 동일시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자기 분노를 마음껏 행사할 권리를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은 자기 분노를 벗어야 합니다.
욕망에서 말로
5절의 목록은 성적인 욕망과 탐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의 목록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도 이 모든 것을, 곧 진노와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상스러운 말을 벗어 버리십시오.골로새서 3:8 · 본디새김
진노와 노여움은 타인을 향해 폭발할 수 있는 감정이고, 악의는 상대방을 해치려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비방과 상스러운 말은 그 마음이 입을 통해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앞의 죄 목록이 개인의 내면과 욕망을 다루었다면, 이제는 공동체를 깨뜨리는 행위를 다루며, 이는 다음 절의 「서로 거짓말하지 마십시오」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의 새로운 삶이 가장 먼저 드러나야 할 곳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쁜 말을 삼가라고 명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그런 행동을 벗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거짓말이 왜 옛 사람의 문제인가
서로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골로새서 3:9 · 본디새김
바울은 거짓말을 금지하면서 그 이유를 곧바로 새로운 정체성에서 찾습니다. 거짓말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옛 사람을 벗었기 때문입니다. 「벗어 버리고」(ἀπεκδύομαι)는 옷을 벗는 이미지를 지닌 동사이고, 옛 사람은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린 것으로 묘사됩니다.
거짓말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이 우연히 지키지 못한 예절 정도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옛 사람에게 속한 행동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버리는 것은 말의 습관을 고치는 일을 넘어, 이미 벗어 버린 옛 사람의 행동을 다시 입지 않는 일입니다.
「서로」라는 말에서 보듯 바울의 관심은 공동체 안의 신뢰입니다. 서로 거짓말하면 사람들이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되고, 진실이 무너지면 공동체를 하나로 엮는 관계도 무너집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새 사람은 이미 입었지만 여전히 새로워진다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이의 형상을 따라 앎에 이르도록 새로워져 갑니다.골로새서 3:10 · 본디새김
여기에도 앞에서 살펴본 역설이 다시 나타납니다.
새 사람을 이미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새 사람은 계속 새로워져 갑니다.
그리스어에서 「입었기 때문입니다」(ἐνδύω)는 이미 일어난 일을 가리키는 부정과거 분사이고, 「새로워져 갑니다」(ἀνακαινόω)는 현재 수동 분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전 상태와 아무 차이 없이 살아가다가 조금씩 더 착해지는 과정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미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났지만, 그 전환이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데에는 계속적인 새로워짐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새로워지라고 명령하지 않고, 새 사람이 「새로워져 갑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수동형이므로 새롭게 하는 주체는 문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지만, 이 절의 동사가 직접 행위자를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옛 행실을 벗으라고 명령하면서도, 새 사람의 새로워짐은 단순한 자기 개조 이상의 일로 묘사합니다.
누구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가
10절의 「자기를 지으신 이의 형상을 따라」라는 표현은 창세기 1:26–27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십니다. 골로새서는 새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진다고 말하며 창조의 언어를 다시 꺼냅니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전 행동을 몇 가지 고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지으신 분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이것을 처음 창조와 연결하면, 구원이 창조의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골로새서 1:15에서는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셨습니다. 두 구절은 같은 형상의 언어로 예수님께서 누구신가 하는 문제와 새로운 인간이 어떻게 변화되는가 하는 문제를 연결합니다. 다만 3:10의 「자기를 지으신 이」가 문법적으로 반드시 예수님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지 전체의 그리스도론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는 인간이 본래 지어진 목적과 단절된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뜻하신 형상을 따라 인간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 새로워짐은 「앎에 이르도록」 이루어집니다. 앎은 지식을 많이 축적한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주와 그분의 뜻을 알아 가는 방향으로 새로운 사람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아 가도록 새로워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옛 행실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은 한 개인인가, 새로운 공동체인가
그런데 10절의 「새 사람」을 오직 한 개인의 내면적 변화로만 읽으면 11절의 전환이 갑작스러워집니다.
거기에는 그리스 사람도 유대 사람도, 할례받은 사람도 할례받지 않은 사람도, 그리스어를 하지 않는 이도 스키타이 사람도, 노예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골로새서 3:11 · 본디새김
왜 새 사람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민족과 문화와 사회적 신분을 나열할까요? 새 사람이 개인의 변화뿐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의 정체성과도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의 「새 사람」은 단수이지만, 그 표현이 개별 신자 안에서 새로워지는 인간을 강조하는지, 예수님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강조하는지, 또는 양쪽을 함께 포괄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11절의 목록은 새 사람이 공동체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전에 사람들을 나누던 구분들이 더 이상 공동체의 근본적인 자격을 결정하지 못하며,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 사람과 유대 사람, 스키타이 사람
11절의 목록은 서로 다른 집단을 골고루 언급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 사람도 유대 사람도」는 민족적·종교적 구분을, 「할례받은 사람도 할례받지 않은 사람도」는 언약의 표징에 관한 구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그리스어를 하지 않는 이도 스키타이 사람도」는 그리스 문화권에서 낮춰 보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낯선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스키타이 사람을 언급할까요? 예수님 안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인간에게는 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문화적 지위도, 사회가 멸시하는 출신도 궁극적인 자격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자신이 속한 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더 낮은 사람으로 취급할 근거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목록의 마지막에는 가장 날카로운 사회적 구분, 「노예도 자유인도」가 나옵니다. 노예와 자유인은 단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는 다른 사람의 소유권 아래 놓여 있었고, 자유인은 그러한 법적 지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새 사람 안에서 이 구분이 더 이상 결정적인 자격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긴장이 생깁니다.
바울은 18절 이후에 다시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버지, 노예와 주인을 구별해서 각각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11절의 「없습니다」는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구분이 사라졌다는 것과 사회적 구조가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인가
11절을 당시 사회에서 실제로 민족적 차이와 법적 신분이 모두 폐지되었다는 보고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뒤의 가정 규정 자체가 그 구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선언을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만 모두 같으며 현실의 관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고, 곧이어 서로 참아 주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새 사람의 정체성은 실제 공동체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11절의 선언은 사회적 구분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사람의 가치와 소속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가장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지, 특히 노예제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뒤의 가정 규정에서 다시 어려운 질문이 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회적 구분의 무효화를 선언하지만, 그 구분들을 당장 어떤 제도로 대체해야 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긴장을 지우지 않고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11절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이 문장은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평등의 구호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모두 같은 문화와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관계되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요구하는 공동체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차별하지 말라는 도덕적인 요구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와 함께 계시는가 하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예수님께 속한 다른 사람을 자신의 문화나 신분을 기준으로 낮춰 볼 수 있는가?
이제 바울은 새 사람이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옷을 입으라고 명령하기 직전에 먼저 말하는 것은 옷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를 하지 않는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바르바로스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던 말에서 출발했지만,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문화적으로 뒤떨어지거나 야만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스키타이 사람」은 흑해 북쪽과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 살던 여러 집단과 관련된 명칭으로, 그리스 문헌에서는 종종 거칠고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표현들이 그리스 문화 중심주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민족적·종교적 우월의식을 비판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도 있고, 특히 스키타이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문화적 고정관념이 이 표현 안에 실제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해석은 강조점이 다르지만, 이 표현에 당시의 문화적 위계와 편견이 배경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들이 입어야 할 옷
거룩해지기 전에 먼저 거룩하다고 불린 사람들
12절은 새로운 명령을 시작하면서 먼저 골로새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다시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뽑으신 이들, 거룩하고 사랑받는 이들로서 속에서 우러나는 자비와 친절과 낮은 마음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처럼 입으십시오.골로새서 3:12 · 본디새김
바울은 자비롭고 친절하며 온유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뽑으신 사람들이고,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이 세 표현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부르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7:6–8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시며, 그 선택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많거나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셨기 때문이라고 설명됩니다. 골로새서 3:12도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선택과 거룩함과 사랑을 한자리에 놓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는 공동체에는 이방 출신 신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과 유대 사람, 할례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을 이룬다고 말한 직후,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던 언어가 이제 예수님 안에서 형성된 공동체 전체를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왜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가
바울은 속에서 우러나는 자비, 친절, 낮은 마음,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다섯 가지 성품을 제시합니다. 모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는 성품입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마음이 움직이는 태도이고, 친절은 그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낮은 마음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려 하지 않는 태도이고, 온유는 자신의 힘과 감정을 상대방을 누르는 데 사용하지 않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성급하게 관계를 끊거나 분노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 성품들은 상대방이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일 때보다 어려움과 부족함이 있을 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공동체라고 해서 사람들 사이의 모든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 공동체에서도 서로 참아 주어야 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 문제를 다룹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그대로
13절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서로 참아 주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거저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거저 용서해 주신 그대로 여러분도 그리하십시오.골로새서 3:13 · 본디새김
바울은 새 사람을 입은 공동체에는 서로 불만을 품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불만」은 개인적인 기분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제기할 만한 불평이나 문제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거저 용서하다」(χαρίζομαι)는 은혜와 관계된 동사로, 용서와 너그럽게 베푸는 일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용서가 좋은 일이므로 서로 용서하라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이미 그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용서하라고 합니다. 용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고상한 덕목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사람들 사이로 이어지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이유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도 용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명령을 잘못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잘못을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덮어야 한다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이 위험한 관계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관심은 용서받은 공동체가 서로를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있으며, 이것을 가해자의 책임을 면제하는 명령으로 바꾸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사랑은 무엇을 하나로 묶는가
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매는 줄입니다.골로새서 3:14 · 본디새김
바울은 사랑을 여러 성품 가운데 하나로 덧붙이지 않고 「이 모든 것 위에」 입으라고 합니다. 「매는 줄」은 묶거나 연결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으며, 2:19에서 몸의 「인대」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거기서는 몸의 각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성장하는 모습이었고, 여기서는 여러 성품을 하나로 묶는 사랑이 등장합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제각기 훌륭한 덕목을 소유한 사람들의 집합만은 아닙니다. 그 성품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몸을 이루어야 하고, 그 관계를 묶는 것이 사랑입니다.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매는 줄」(σύνδεσμος)이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사랑이 여러 성품을 묶어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도, 사랑 자체가 온전함의 결속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제시된 본문은 첫 번째 방향을 택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사랑을 다른 성품과 무관한 별도의 감정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랑은 자비와 친절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실제로 공동체를 세우도록 하나로 묶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한 몸 안에서 평화가 다스리고 말씀이 머물게 하십시오
평화가 판단하게 하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한 몸 안에서 그 평화에 이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골로새서 3:15 · 본디새김
「다스리게 하십시오」(βραβεύω)는 경기에서 판정하는 사람의 역할과 관계된 낱말이며, 더 넓게는 결정하거나 지배한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판단을 내리도록 하라는 뜻으로도, 그 평화가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해석은 긴밀하게 연결되지만, 전자는 결정의 기준을, 후자는 마음을 다스리는 지배적인 상태를 강조합니다.
골로새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종교적 평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개인의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몸 안에서」 그 평화에 이르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서로 다른 출신과 신분의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는 실제 관계를 다스려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가 모든 갈등을 피하거나 불의를 문제 삼지 않는 태도라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바울 자신은 같은 장에서 거짓말과 악의를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진실과 정의를 무시한 채 겉으로 조용하게 지내는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의 몸이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는 곳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갖 지혜 가운데 여러분 안에 넉넉히 머물게 하십시오. 찬양시와 찬송과 영에 속한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며, 은혜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하십시오.골로새서 3:16 · 본디새김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다스려야 했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도,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두 가지를 분리할 필요가 없지만, 속격 자체가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만을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잠깐 방문했다가 떠나는 손님처럼 취급되지 않고, 공동체 안에 거주해야 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 머묾은 「넉넉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주변부로 밀어 두지 말고, 공동체의 생각과 행동과 관계 속에 풍성하게 자리 잡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가르치고 서로 노래하는 공동체
16절은 가르침과 노래를 한 문장 안에 놓습니다. 바울은 교사가 강단에서 지식을 전달하는 장면만이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노래하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신자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되새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찬양시」와 「찬송」과 「영에 속한 노래」를 반드시 서로 구분되는 세 종류의 음악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어 표현들이 의미상 겹칠 수 있으므로, 이 절은 음악 장르를 분류하기보다 노래를 통한 말씀의 풍성한 거주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온갖 지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혜는 개인의 특별한 능력을 증명하는 데가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 하나님께 노래하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사용됩니다.
배움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서로를 가르치는 일이 됩니다.
세 번 등장하는 감사
15–17절에는 한 가지 표현이 반복됩니다.
15절에서는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라고 합니다.
16절에서는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노래하라고 합니다.
17절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감사는 이 단락의 시작과 끝을 붙들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를 만들어 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뽑으시고 사랑하신 사람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근본적인 태도는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울러 말이나 행위로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골로새서 3:17 · 본디새김
「말이나 행위로 무엇을 하든지」라는 말에서 바울은 종교적인 활동과 일상적인 활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와 기도와 성경 공부의 시간에 제한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하는 말, 공동체에서 내리는 결정, 가족을 대하는 태도, 노동과 일상의 행동까지 포괄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도 어떤 행동을 시작하거나 끝낼 때 예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라는 뜻으로 좁힐 수 없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권위와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권위와 뜻에 합당하게 행동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이 질문을 추상적인 원칙으로 남겨 두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매일 살아가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오늘날의 이상적인 가족 공동체가 아닙니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버지, 노예와 주인이 함께 존재하는 고대 사회의 집입니다.
새 사람은 옛 사회의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갑자기 등장하는 위계질서
18절부터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이 있고, 그 안에서는 노예도 자유인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자녀에게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노예에게 「모든 일에서 육의 관계로 주인 된 이들에게 순종하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들을 읽을 때 생기는 불편함을 서둘러 없애서는 안 됩니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버지, 노예와 주인은 법적·사회적으로 동등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사회의 위계적인 관계를 전제하고, 그 관계들을 즉시 폐지하는 대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행동을 명령합니다. 이 사실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하며, 동시에 그가 이러한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대 가정 규정의 배경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가정을 하나의 사회적·경제적 질서로 이해했고, 가정 안의 관계를 다스리는 규범을 중요한 윤리적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골로새서 3:18–4:1은 세 관계를 차례로 다룬다는 점에서 고대의 가정 윤리 전통과 형식적인 유사성을 보입니다. 그 형식의 유래와 의도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려, 고대의 법률적·철학적 가정 규정들과의 관련성을 살필 수도 있고, 당시 사회 관습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적용하는 방식에 주목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기존의 가정 구조를 무시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며, 여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각 관계에서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도 말을 겁니다. 아내에게 말하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자녀에게 말하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노예에게 말하고, 이 규정이 이어지는 4:1에서는 주인에게도 말합니다. 그다음으로 그 모든 관계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합니다.
이것을 당시의 위계질서가 그대로 정당화되었다는 뜻으로만 읽는 것도, 그 위계질서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으로 읽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존재하는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하면서 그 관계 안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행동하도록 요구하며, 그 요구가 사회적 질서를 어디까지 변화시키는지에는 해석의 문제가 남습니다.
아내에게는 복종을, 남편에게는 사랑을
아내 여러분, 주 안에서 마땅한 대로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골로새서 3:18 · 본디새김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모질게 굴지 마십시오.골로새서 3:19 · 본디새김
아내에게 사용된 동사 휘포탓소(ὑποτάσσω)는 자신을 어떤 질서 아래에 두거나 복종한다는 뜻이고, 뒤에서 자녀와 노예에게 사용되는 동사 휘파쿠오(ὑπακούω)는 말을 듣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두 동사는 모두 복종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지만 같은 단어는 아니며, 바울은 아내와 자녀와 노예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차이만으로 아내에게 주어진 명령이 사실상 평등한 상호 존중만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원문은 분명히 복종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 명령에는 「주 안에서 마땅한 대로」라는 한정 표현이 붙습니다. 바울은 남편이라는 지위 자체가 무제한적인 권위를 준다고 말하지 않고, 아내의 행동을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합니다. 다만 이 표현이 복종의 범위를 어디까지 제한하는지 본문은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18절 하나만으로 모든 시대와 문화에 적용되는 부부의 권력구조를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남편에게는 사랑을 명령합니다. 「모질게 굴다」는 상대방에게 쓰라림을 주거나 거칠고 냉혹하게 대하는 행동과 관계됩니다. 이 명령은 남편의 권력 행사를 아무런 제한 없이 허용하는 것과 거리가 있지만, 당시의 남녀 권력관계가 이미 완전한 평등으로 바뀌었다는 선언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두 명령 사이에는 분명히 비대칭성이 있습니다.
아내에게는 복종을, 남편에게는 사랑과 모질지 않은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 비대칭성을 인정하면서도, 남편의 행동 역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아래에서 판단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 구절을 결혼 관계에 적용할 때 본문의 복종 명령을 폭력이나 강압, 학대를 정당화하는 권위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사랑의 명령과 모질게 굴지 말라는 금지, 그리고 3장 전체에서 요청하는 자비와 온유와 사랑을 함께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낙심하게 만드는 아버지
자녀 여러분,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 안에서 기쁨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3:20 · 본디새김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낙심하지 않도록 그들을 성나게 하지 마십시오.골로새서 3:21 · 본디새김
바울은 부모가 자녀를 화나게 하면 가정이 시끄러워진다고 말하지 않고, 자녀가 낙심하게 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낙심하다」는 기운이나 용기를 잃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는 방식이 자녀의 마음을 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합니다.
20절에서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21절에서 부모의 권위는 자녀를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권한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현대적인 아동 권리 체계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부모의 권위를 전제하지만, 동시에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자녀의 마음을 꺾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을 묻습니다.
자비와 친절과 온유와 오래 참음은 교회 안에서 서로 인사할 때만 필요한 태도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자신보다 권력이 약한 사람을 대할 때 드러나야 하는 성품입니다.
노예에게 가장 긴 명령을 내린다는 것
노예 여러분, 모든 일에서 육의 관계로 주인 된 이들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이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십시오.골로새서 3:22 · 본디새김
이것은 오늘날 독자가 가장 신중하게 읽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노예는 오늘날 자유롭게 고용계약을 맺고 그만둘 수 있는 노동자와 다릅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노예제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유권과 지배 아래 놓이는 제도였습니다. 노예의 실제 생활은 가정과 주인의 성격, 맡은 일, 법적 환경에 따라 달랐지만, 근본적인 권력의 불평등은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곧바로 현대 직장인에게 상사의 지시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바꾸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지우는 일입니다. 또한 바울이 노예들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며 노예제도의 폐지를 직접 명령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은 불편하더라도 본문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 주인과 주님
22절의 「주인」과 「주님」은 그리스어로 같은 낱말 퀴리오스(κύριος)입니다. 그런데 앞의 주인에게만 「육의 관계로」라는 한정 표현이 붙습니다. 노예를 소유한 사람은 실제로 사회적·법적 권력을 가진 주인이지만, 그 주인 됨이 노예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궁극적인 권위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노예들에게 사람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서만 행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해야 할 분은 인간 주인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것은 노예들이 처한 제도적 현실을 즉시 없애지는 않지만, 그들의 도덕적 책임과 신앙적 정체성이 전적으로 인간 주인의 소유물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사람의 지배 아래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목숨을 다해 일하라는 말의 대상
무엇을 하든지 목숨을 다해 일하십시오. 주님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마십시오.골로새서 3:23 · 본디새김
「목숨을 다해」는 말 그대로 영혼이나 생명에서부터 한다는 표현으로, 진심으로 온 힘을 기울여 행동한다는 관용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 명령은 22절의 노예들에게 계속 주어지고 있으므로 직접적인 대상은 고대의 노예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사람의 눈을 속이거나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 근거한 성실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일하라는 명령이 강제노동이나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본문은 노예들이 이미 존재하는 사회 구조 안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지만, 그 구조 자체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노예들에게 현재의 조건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요구할 뿐, 그 조건을 만든 제도적 불의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이 가정 규정이 실제 노예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그 가정의 구성과 주인의 신앙 여부, 노예들이 처한 구체적인 환경에 따라 달랐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명령을 추상적인 윤리 규칙으로만 읽으면, 실제로 그 말을 들어야 했던 노예들의 복잡하고 불평등한 현실을 놓치게 됩니다.
노예에게 약속된 상속 재산
24절에는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주님에게서 상속 재산이라는 보상을 받을 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노예로 섬기는 분은 주 그리스도이십니다.골로새서 3:24 · 본디새김
고대의 노예는 자유인과 같은 법적 지위를 가진 상속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노예들에게 상속 재산이라는 보상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열심히 일하면 품삯을 받는다는 말과 다릅니다. 상속은 가족과 소속의 언어입니다.
골로새서 1:12에서는 아버지께서 성도들이 받을 몫에 참여할 자격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 몫의 약속이 이제 노예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물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속의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들의 사회적 지위를 당장 폐지하는 선언은 아니지만, 인간 주인이 그들의 삶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노예로 섬기는 분은」에 해당하는 동사 둘류에테(δουλεύω)는 형태상 직설법과 명령법이 같아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 그리스도를 노예로 섬기고 있습니다」라는 진술로도, 「주 그리스도를 노예로 섬기십시오」라는 명령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제시된 본문은 앞의 읽기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바울은 새로운 명령을 추가하기보다 그들이 실제로 누구를 섬기는 사람인지 선언하는 셈입니다.
인간 주인은 자신의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노예들의 더 근본적인 소속을 그리스도께 둡니다.
불의를 저지른 사람은 누구인가
불의를 저지르는 이는 자기가 저지른 불의의 대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아 주는 편파적인 일은 없습니다.골로새서 3:25 · 본디새김
「불의를 저지르는 이」가 누구인지는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노예들에게 말하고 있으므로 노예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를 경고한다고 읽을 수 있고, 바로 뒤에서 주인들에게도 말하므로 주인까지 포함하여 불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노예의 행동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데, 두 번째는 사회적 지위가 불의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지 못한다는 데 무게를 둡니다. 어느 쪽이 직접적인 강조점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이 둘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아 주는 편파적인 일은 없습니다」라는 표현은 로마서 2:11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행위자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앞의 주님에 관한 표현과 연결하여 하나님 또는 주님의 공정한 판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주인이든 노예든 불의는 불의입니다.
인간의 권력관계가 하나님의 판단까지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앞의 「노예도 자유인도 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인간과 옛 제도 사이에 남아 있는 긴장
3:11에서는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이 새 사람 안에서 더 이상 결정적인 구분이 아니라고 선언하지만, 3:22에서는 노예에게 인간 주인을 향한 순종을 명령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선언하지만, 그것을 당시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 명령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변화시키는 씨앗을 품고 있는가?
한쪽에서는 이 가정 규정이 당시의 가부장적 질서를 상당 부분 받아들이고, 공동체가 그 질서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기능을 했다고 봅니다. 다른 쪽에서는 바울이 각 집단을 직접 도덕적인 주체로 대하고, 인간 주인보다 높은 주님을 강조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회적 신분의 구분을 상대화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본문에는 당시의 위계질서를 전제하는 명령과 그 질서를 상대화하는 신학적 선언이 함께 있기 때문에, 두 관점이 반드시 한쪽만 참일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직접 말하지 않은 노예제 폐지 선언을 그의 입에 넣을 필요도 없고,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정체성이 불평등한 인간관계에 던지는 질문을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하는 것은, 사람의 신분과 권력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궁극적인 정체성과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1권에서도 가정은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됩니다. 24절과 관련하여, 고대의 노예가 재산을 관리하거나 특별한 방식으로 재산상의 혜택을 얻는 경우는 있었지만, 독립적인 법적 인격과 소유권에 큰 제약이 있었습니다.
감추어진 생명이 사람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골로새서 3장은 위에 있는 것들을 찾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감추어진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 계속 하늘을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로 내려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먼저 올바르게 살아서 새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고, 이미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그에 어울리게 살라고 합니다. 새 사람의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입학시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맞추어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서로」 거짓말하지 않고, 「서로」 용서하고, 「한 몸 안에서」 평화를 이루는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하늘의 그리스도와 땅의 윤리 사이에는 단절이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사람, 서로 불만을 품은 사람, 함께 모여 노래하는 사람, 자녀를 성나게 하는 아버지, 아내에게 모질게 구는 남편, 사람 주인의 눈치를 보며 일하는 노예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상의 관계 속에서 새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에 어울리는 삶은 사람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진노를 벗고 오래 참음을 입는 순간, 거짓말을 버리고 진실하게 말하는 순간, 불만을 품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순간,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모질게 대하지 않는 순간이 그렇습니다.
이 모든 행동이 완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새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의 형상을 따라 앎에 이르도록」 여전히 새로워져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들을 자신을 완성한 사람들로 부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고 이제 새로워져 가는 사람들로 부릅니다.
그들이 입어야 할 옷은 사랑입니다.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함께 노래하고, 일상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따르며 살아갑니다.
그들의 생명은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입은 사랑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