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마지막 당부와 인사

내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

골로새서의 마지막 장에는 작은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매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골로새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할 문을 열어 주시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해 주십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갇힌 사람이 열린 문을 구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열어 달라고 구하는 것은 감옥의 문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말씀을 전할 문」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얽매고 있는 사슬보다, 자신이 전해야 할 말씀이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장의 후반부에는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골로새로 향합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와 누가와 데마는 문안을 전합니다. 에바브라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골로새의 편지는 라오디게아에서도 읽혀야 하고,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는 골로새에서도 읽혀야 합니다.

바울 자신은 매여 있지만, 그를 둘러싼 복음의 소식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4장은 단순한 맺음말이 아닙니다. 앞선 장들에서 바울이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했다면, 마지막 장에서는 그 삶이 어떤 사람들의 손과 발, 목소리와 관계를 통해 이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거대한 신학적 논증 대신 기도와 말, 여행과 편지, 사람들의 이름과 안부가 있고, 바로 그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앞선 가르침이 구체적인 형태를 얻습니다.

이 장은 네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 4:1 — 땅의 주인도 하늘의 주인 앞에 서 있습니다.

· 4:2–6 — 매여 있는 바울과 세상 속의 신자들에게 필요한 기도와 말.

· 4:7–14 — 복음을 전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실제 사람들의 관계.

· 4:15–18 — 여러 교회 사이를 오가는 편지와 바울의 마지막 친필 인사.

4장 처음에서 바울은 주인들에게 그들도 하늘의 주인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끝에서는 골로새 사람들에게 「내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자신보다 높으신 예수님,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고난받는 형제입니다.

그 사이에서 골로새서의 마지막 장이 펼쳐집니다.

읽는 시간 32분소단락 94장 본문 읽기 →

주인에게도 주인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4:1 본문 →

가정 규정의 마지막 말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4장 1절은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3장 18절부터 이어진 가정 규정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울은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버지, 노예를 차례로 부른 뒤 이제 마지막으로 주인들에게 말합니다.

주인 여러분, 노예들에게 옳고 공평한 대우를 베푸십시오. 여러분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신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골로새서 4:1 · 본디새김

바울은 주인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근거를 그들보다 높은 권위에 둡니다. 원문은 앞의 인간 주인과 하늘의 주인에게 같은 그리스어 퀴리오스(κύριος)를 사용합니다. 한 집안에서 주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에게도 주인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권력을 상대화하는 표현입니다. 주인은 노예에게 명령할 수 있는 법적·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을 가진 사람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는 책임을 지는 존재이므로,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을 최종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공평한 대우」는 어느 정도를 요구하는가

「공평한 대우」의 그리스어는 이소테스(ἰσότης)입니다. 이 낱말은 기본적으로 동등함이나 균등함을 나타내며, 문맥에 따라 공평함 또는 공정한 대우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바울이 노예제도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주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법적 신분의 평등이 아니라 정당하고 공평한 대우라고 봅니다. 반면 이 단어를 「정의와 동등함을 베풀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도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를 명령하지 않으면서 노예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도록 요구하는 표현이 가능했고, 사회적 지위가 다르더라도 노예를 동등한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본문은 여기서 노예해방을 직접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아무런 제한 없는 지배권을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 안에서는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이 사람의 근본적인 소속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선언한 사실을 생각하면, 4:1의 명령을 단지 친절한 주인이 되라는 권면으로 축소하기 어렵습니다.

옳고 공평한 대우는 주인의 선택적인 선행이 아니라 하늘의 주인 앞에서 지켜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나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어떤 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권력이 제한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옳고 공평하게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가정 규정이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모든 신자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열린 문을 구하는 기도

골로새서 4:2–4 본문 →

기도에 끈질기게 매달리라는 말

기도에 끈질기게 매달리십시오. 감사하며 그 안에서 깨어 있으면서 말입니다.골로새서 4:2 · 본디새김

「끈질기게 매달리십시오」는 무언가에 계속 전념하거나 꾸준히 힘을 쏟는다는 뜻입니다. 이 낱말은 사도행전 1:14에서 제자들이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에도, 사도행전 2:42에서 초기 공동체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에도 쓰입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기도를 일시적인 열심이 아니라 계속 붙들어야 할 공동체의 삶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태도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감사하며, 깨어 있으면서.

「깨어 있으면서」는 잠들지 않고 깨어 있거나 경계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이 눈을 감고 하나님께 말하는 시간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분별하며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일을 기억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깨어 있음은 서로 반대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을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계속 기도합니다.

바울이 먼저 구하는 것은 석방이 아니다

3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이 뜻밖입니다.

우리를 위해서도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할 문을 열어 주시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매여 있는 것도 그 비밀 때문입니다.)골로새서 4:3 · 본디새김

이 사실은 바울이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거나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자신의 위험과 고난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구원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빌립보서 1:19; 빌레몬서 1:22).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가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계속 감당할 기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 때문에 복음까지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은 전도의 기회와 관련된 이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6:9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크고 효과적인 문이 열렸다고 말하고, 고린도후서 2:12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골로새서 4:3은 같은 비유를 사용하되, 이번에는 바울이 그 문을 열어 달라고 직접 기도를 요청합니다.

이것은 사역의 성공을 평가하는 관점을 바꿉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일이 잘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형편이 편해지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가 어려운 형편에 있더라도 예수님의 비밀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그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왜 이미 드러난 비밀을 다시 드러내야 하는가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이 이미 드러났으며, 그 비밀의 중심이 예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이렇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내가 마땅히 말해야 할 방식으로 그 비밀을 드러내게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4:4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비밀을 드러내셨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그 비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비밀은 이미 드러났지만,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드러내다」(φανερόω)는 감추어진 것을 나타내거나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뜻으로, 골로새서 1:26에서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드러났다고 할 때도 쓰인 낱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비밀을 바울이 다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둘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계시가 바울의 선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단지 말을 많이 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말해야 할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복음의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는지도 중요합니다.

이 표현은 곧 골로새 사람들에게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도록 말하라는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기도와 복음을 받은 사람의 대화가 서로 연결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게 대답하십시오

골로새서 4:5–6 본문 →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

5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의 시선을 공동체 밖으로 돌립니다.

밖에 있는 이들을 대할 때에는 기회를 최대한 살리며 지혜로 걸으십시오.골로새서 4:5 · 본디새김

「밖에 있는 이들」은 이 문맥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5:12–13에서도 바울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에서는 그들을 피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그들을 대할 때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교회 안의 새로운 정체성을 강조하지만, 그 정체성이 교회 밖의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실제로 만나고 대화하는 상황을 예상합니다. 그 사람들은 질문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으며,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의 정해진 문장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롭게 걸으라고 합니다.

기회를 사들인다는 표현

「기회를 최대한 살리며」(ἐξαγοράζω)로 옮긴 동사는 값을 치르고 사들인다는 뜻과 관련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시간을 사들인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 시간이란 시계로 측정하는 시간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16에도 같은 표현이 등장하지만, 골로새서에서는 그 기회를 살려야 할 자리가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자리로 명확합니다.

골로새 사람들은 모든 만남을 자신들의 신앙을 강요할 기회로 바꾸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일상의 순간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흘려보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상황을 분별하고 적절한 때에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여기서 앞의 기도 요청과 연결이 생깁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구하고, 골로새 사람들에게는 이미 주어진 기회를 지혜롭게 살리라고 명령합니다. 바울과 골로새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 있지만, 둘 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일에 참여합니다.

은혜와 소금

6절은 말에 관한 명령입니다.

여러분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고 있도록, 여러분의 말이 언제나 은혜 가운데 있게 하고 소금으로 간이 맞게 하십시오.골로새서 4:6 · 본디새김

말이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말이 호의와 너그러움을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맥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의미도 연결됩니다.

왜 하필 소금일까요?

소금은 음식의 맛을 살려 그 특징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고대 그리스어권에서 소금은 재치 있고 생동감 있는 말의 비유로 사용되기도 했고, 이 문맥에서는 지혜롭고 적절하며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말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원하는 말은 부드럽기만 하거나 무조건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는 말이 아니라, 은혜를 지니면서도 분별력이 있고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표현된 말입니다.

문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대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질문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세한 설명이, 어떤 사람에게는 먼저 충분히 들어 주는 태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오해를 바로잡는 말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그럴듯한 논변으로 사람들을 속여 넘기는 가르침을 경계했던 내용과 대조됩니다. 바울은 상대방을 무조건 설득하여 이기라고 하지 않고, 은혜와 지혜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알맞게 대답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사람을 제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전달하고 관계를 세우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이제 교훈의 언어가 사람들의 이름과 안부로 바뀝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논증의 중단이 아니라, 바울이 앞에서 말한 섬김과 은혜가 실제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 — 편지는 사람을 통해 도착한다

골로새서 4:7–9 본문 →

바울이 편지에 쓰지 않은 이야기

나의 모든 사정은 두기고가 여러분에게 알려 줄 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형제이고 믿음직한 섬기는 이이며 주 안에서 동료 노예입니다.골로새서 4:7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사정을 편지에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편지는 완결된 기록인 동시에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골로새서를 한 권의 책 안에 보존된 문서로 읽기 때문에,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문서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처음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도 만났을 것이고, 그에게 바울의 형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7절과 9절이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이곳의 사정을 알려 줄 것이라고 두 번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믿음직한 섬기는 이, 동료 노예

두기고는 단순히 우편물을 운반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울이 신뢰하는 동역자입니다. 사도행전 20:4에는 두기고가 바울의 여행 동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하고, 에베소서 6:21–22에서도 골로새서와 매우 비슷하게 바울의 형편을 알리고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할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바울은 두기고를 자신의 부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동료 노예」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사도이고 두기고는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어서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예수님을 섬기는 관계에서는 같은 예수님께 속한 동료입니다.

이 표현은 앞서 주인과 노예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직후이기에 더욱 의미 있게 들립니다. 바울은 노예라는 말을 없애지 않고 자신과 동역자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 말은 사람 사이의 소유권이 아니라 예수님께 함께 속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위로를 전달하는 사람

내가 그를 여러분에게 보낸 것은 바로 여러분이 우리 형편을 알게 되고, 그가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4:8 · 본디새김

두기고의 임무는 소식을 전하는 것과 마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형편을 정확히 아는 것이 골로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사본에 따라 이 절은 골로새 사람들이 바울 쪽의 형편을 알게 되는 읽기와 두기고가 골로새 사람들의 형편을 알아보게 되는 읽기로 갈리지만, 어느 쪽이든 두기고는 단순히 편지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를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믿음이 정확한 교리적 설명만으로 세워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형편을 알고 위로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오네시모 — 뜻밖의 동행자

믿음직하고 사랑하는 형제 오네시모와 함께 그를 보냈습니다. 오네시모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이곳의 일을 모두 여러분에게 알려 줄 것입니다.골로새서 4:9 · 본디새김

이 이름은 빌레몬서에도 등장합니다. 빌레몬서 1:10–16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이 갇혀 있는 동안 얻은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가 한때 쓸모없었지만 이제는 자신과 빌레몬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를 노예와 형제의 관계 속에서 다룹니다.

그 때문에 두 편지의 오네시모를 동일 인물로 이해하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다만 이 결론은 본문들 사이의 관계에 근거한 역사적 판단이며, 골로새서 4:9 자체가 그의 과거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연결을 받아들이면 9절의 소개는 더욱 특별해집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믿음직하고 사랑하는 형제」라고 합니다. 그의 노예 신분을 먼저 말하지 않고, 그의 과거 잘못을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두기고를 소개할 때 사용한 표현과 비슷하게, 그를 신뢰할 수 있고 사랑받는 형제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그가 골로새 공동체 출신이거나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본문에 직접 나타나지만, 정확한 출생지나 과거의 모든 행적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를 낯선 방문객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골로새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고, 이제 그들의 형제로서 소식을 전할 사람입니다.

형제라는 호칭이 사회적 관계에 던지는 질문

오네시모를 빌레몬서의 인물과 연결하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노예였던 사람이 같은 공동체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맞아들여야 합니까? 골로새서 자체는 이 질문에 자세히 답하지 않지만, 빌레몬서 1:16에서는 오네시모를 더 이상 단지 노예로만 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방향의 권면이 나옵니다.

두 편지를 함께 읽으면 바울의 말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실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바울이 오네시모의 법적 해방을 이미 성취했다고 말한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이후 어떤 법적 지위를 얻었는지, 빌레몬이 실제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이 구절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알려 주는 것은 그보다 제한적이면서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오네시모는 신뢰받는 형제라고 불리고, 바울은 그를 두기고와 함께 공동체에 소식을 전할 사람으로 보냅니다. 그는 편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편지를 전달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앞에서 말한 예수님 안의 새로운 관계가 한 사람의 이름과 호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사본 차이를 조금 더 보면, 일부 사본은 골로새 사람들이 「우리 형편을 알게」 되는 읽기를 따르고, 다른 사본에는 두기고가 골로새 사람들의 형편을 알아보게 된다는 읽기가 전승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에서는 바울의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이, 두 번째에서는 골로새 사람들의 상황을 살피는 역할이 강조됩니다.

이름들 사이에 드러나는 복음의 관계

골로새서 4:10–11 본문 →

갇힌 바울 곁의 사람들

10절부터는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문안이 이어집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사촌 마가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그에 관해 여러분이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오거든 맞아 주십시오.)골로새서 4:10 · 본디새김

아리스다고는 사도행전 19:29에서 에베소의 소동 가운데 바울의 동행자로 나타나고, 사도행전 20:4에서는 바울의 여행에 함께하는 사람들 가운데, 27:2에서는 바울이 로마로 향하는 항해에 동행하는 인물로 언급됩니다. 그는 바울의 사역과 여러 시기에 걸쳐 연결된 동역자입니다.

「함께 갇힌」 상태가 정확히 어떤 법적 구금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표현은 바울과 같은 감옥에 실제로 갇혀 있었다고 읽을 수 있지만, 바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동역자라는 의미를 포함할 가능성도 논의됩니다. 본문이 분명히 하는 것은 그가 바울의 고난과 가까이 연결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사슬 곁에는 혼자가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가를 맞아 주십시오

바울은 마가를 「바나바의 사촌」이라고 소개하고, 「그가 여러분에게 오거든 맞아 주십시오」라고 덧붙입니다. 이 짧은 명령을 읽으면 사도행전 15:37–40이 떠오릅니다. 그곳에서는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려 하지만 바울이 반대하며, 결국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집니다.

그 배경을 생각하면 마가가 바울의 동역자들 가운데 등장하는 일은 특별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 4:10은 바울과 마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관계를 회복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사건과 이 구절을 연결하여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구체적인 대화나 과정까지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를 경계하거나 거부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맞아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이 명령은 앞에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묶인 공동체를 이루라는 권면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유스도라 하는 예수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문안합니다. 할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는 이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나의 동역자이고, 이들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골로새서 4:11 · 본디새김

「유스도라 하는 예수」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을 지녔고 유스도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다른 사람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이름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이름이었습니다.

「이들만」이라는 표현을 바울에게 유대인 동역자가 오직 세 사람밖에 없었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상 현재 바울과 함께 있거나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동역자들 가운데 할례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출신만을 강조하지 않고, 그들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두기고는 골로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사람이고,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는 바울에게 위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위로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사도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자신은 아무런 위로도 필요로 하지 않는 초인적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사역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위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 이름들에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관계가 들어 있습니다.

에바브라 — 멀리서 기도로 싸우는 사람

골로새서 4:12–14 본문 →

다시 등장한 에바브라

12절에서 편지의 처음에 등장했던 인물이 다시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바브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그는 언제나 기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또 굳은 확신을 지닌 사람으로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4:12 · 본디새김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들이 복음을 배운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1:7).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의 현재 모습은 복음을 가르치는 장면이 아니라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싸우고 있습니다」(ἀγωνίζομαι)로 옮긴 동사는 힘을 다해 싸우거나 분투한다는 뜻으로, 운동 경기의 치열한 경쟁이나 고된 싸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의 기도를 느슨한 의례처럼 묘사하지 않고 싸움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바울 자신도 골로새 사람들을 위해 큰 싸움을 치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2:1). 이제 에바브라가 그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매여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멀리 있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둘의 행동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목적은 같습니다. 골로새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는 것입니다.

에바브라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적 체험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하고 확신 있게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모든 행동을 감독할 수 없고 매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지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합니다.

에바브라의 관심은 자신이 없으면 골로새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스스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자리에서도 그들을 위해 싸웁니다.

그 싸움의 방식이 기도입니다.

한 도시를 넘어서는 돌봄

사실 나는 그를 두고, 그가 여러분과 라오디게아에 있는 이들과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이들을 위해 많이 애쓰고 있다고 증언합니다.골로새서 4:13 · 본디새김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는 소아시아의 리쿠스 계곡 지역에 서로 가까이 있었으며, 로마 시대에도 지역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그의 돌봄은 골로새에서 끝나지 않고 인근의 다른 공동체들까지 향합니다.

바울은 각 교회가 서로 독립적으로 경쟁하는 조직처럼 존재한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공동체를 위해 애쓰고, 편지는 서로 오가며, 사람들은 다른 도시의 형편을 기억합니다. 교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지막 인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누가와 데마 — 길지 않은 문안

사랑하는 의사 누가와 데마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골로새서 4:1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누가를 의사로 직접 소개하는 신약의 분명한 본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누가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이해해 왔지만, 골로새서 4:14는 그의 직업을 언급할 뿐 두 책의 저자라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저자 동일성은 별도의 역사적·문헌적 판단에 속합니다.

데마에 관해서는 더욱 적게 말합니다. 빌레몬서 1:24에서도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들 가운데 언급되지만, 디모데후서 4:10에서는 그가 현세를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 데마는 바울 곁에 있으며 골로새 사람들에게 문안을 전하는 사람이고, 그의 내면 상태나 장래 선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인사는 사람들에 관해 서로 다른 정도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아리스다고는 함께 갇힌 사람입니다. 마가는 맞아들여야 할 사람입니다. 유스도는 위로가 된 사람입니다. 에바브라는 기도 가운데 싸우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사랑하는 의사이고, 데마는 문안을 전합니다.

그 차이를 그대로 읽으면, 바울의 사역이 하나의 역할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섬김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한 집의 교회에서 다른 도시의 교회로

골로새서 4:15–17 본문 →

눔파의 집에 모이는 교회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파와 눔파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문안해 주십시오.골로새서 4:15 · 본디새김

여기서 우리의 시선은 도시 전체에서 한 집으로 좁혀집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과 같은 전용 예배당을 언제나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집에서 모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서 16:5와 고린도전서 16:19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가, 빌레몬서 1:2에도 집에 모이는 교회가 나옵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초기 교회가 특정 건물의 이름이 아니라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눔파는 여자였는가, 남자였는가

이 구절에는 중요한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눔파의 집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어떤 사본에서는 「그녀의 집」이라는 여성형으로, 다른 사본에서는 「그의 집」이라는 남성형으로, 또 다른 사본에서는 「그들의 집」이라는 복수형으로 전해집니다. 이에 따라 눔파를 여성으로 보는 읽기와 남성으로 보는 읽기가 존재합니다.

여성형 대명사가 원래의 읽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본의 차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판단은 구별해야 합니다. 본디새김은 「눔파의 집」이라고 옮겨 성별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눔파가 그 교회의 공식적인 지도자였는지, 집을 제공하는 후원자였는지, 혹은 두 역할을 함께 맡았는지도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집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하지만, 그 역할의 정확한 범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한 도시의 교회만을 추상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이름과 그 집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은 실제 누군가의 집이었고, 공동체의 생활은 누군가가 자신의 공간을 열어 주는 구체적인 행동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이 집의 교회보다 더 넓은 장면이 나타납니다. 편지들이 도시 사이를 오갑니다.

편지는 한 교회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 편지가 여러분 가운데서 읽히고 나거든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히게 하십시오. 그리고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는 여러분도 읽으십시오.골로새서 4:16 · 본디새김

이 문장에는 두 방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받은 공동체가 그 편지를 자기들만 가지고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편지는 특정 교회에 보내진 글이면서도, 다른 교회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말씀의 전달 수단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개별 공동체의 사적인 문제에만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골로새 사람들에게 전한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은 인근의 다른 교회에도 도움이 될 수 있고, 골로새 사람들 역시 다른 교회가 받은 편지를 읽어야 합니다.

서로 배우는 관계가 성립합니다.

편지는 눈으로만 읽히는 글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 편지가 「여러분 가운데서」 읽히고,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히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편지는 개인이 혼자 읽기 위한 문서로만 보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읽힐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각자 자신의 책이나 화면에서 읽지만, 처음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누군가가 읽어 주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노예와 주인에게 한 명령도, 에바브라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도, 오네시모가 사랑하는 형제라는 소개도 공동체 안에서 소리 내어 읽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소개하는 문장이 공동체 앞에서 읽힌다면, 그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평가에 머물지 않고 그 공동체가 오네시모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 읽었고, 오네시모가 그 자리에 있었으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공동체 안에서 읽히도록 지시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합니다.

바울의 말은 개인적인 편지 안에 갇혀 있는 말이 아닙니다. 모임 가운데서 전달되는 말입니다.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는 무엇인가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는 어떤 편지일까요? 견해는 바울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냈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별도의 편지라는 읽기, 오늘날의 에베소서라는 읽기, 빌레몬서라는 읽기로 갈립니다. 현재의 자료만으로 그 편지가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으므로, 골로새서 4:16을 근거로 잃어버린 특정한 편지의 내용을 복원하거나 현재의 특정 서신과 반드시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불확실성 때문에 본문의 중요한 사실을 놓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들은 서로 편지를 나누고 함께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이야기한 한 몸의 성장을 실제 공동체들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게 해 줍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사실은 각 교회가 자기만의 지식과 경험에 갇혀 있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의 소식을 듣고, 서로의 편지를 읽으며,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아킵보 — 맡은 섬김을 온전히 이루도록

그리고 아킵보에게 말하십시오. 「주 안에서 그대가 맡은 섬김을 온전히 이루도록, 그 섬김에 유의하게.」골로새서 4:17 · 본디새김

아킵보는 빌레몬서 1:2에도 등장하며, 그곳에서 바울은 그를 「우리의 동료 군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가 골로새 교회에서 정확히 어떤 직무를 맡았는지, 목회자였는지, 특별한 선교적 사역을 감당했는지, 다른 형태의 섬김을 맡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 직무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그가 「주 안에서」 맡은 섬김을 온전히 이루도록 유의하라고만 합니다. 「유의하게」는 맡은 일을 주의 깊게 살피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사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 말은 아킵보에게 직접 주어진 편지 형식이 아니라, 골로새 사람들이 그에게 전하는 말입니다. 아킵보의 섬김은 그 사람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일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알고 격려할 수 있는 일로 제시됩니다. 바울의 말이 공동체 안에서 전달되듯, 한 사람의 사명도 그 공동체의 관심 안에 놓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까닭이 아킵보의 실패 때문인지, 그가 낙심했기 때문인지, 새롭게 맡은 직무를 수행하도록 격려하려는 것인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특정한 문제를 책망하는 말로 확정하기보다, 그가 맡은 섬김을 온전히 이루도록 주의를 환기하는 명령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제 편지의 모든 사람과 교회에 대한 인사가 끝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자신의 손으로 문안을 적습니다.

조금 더 깊이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를 오늘날의 에베소서로 보는 견해는 에베소서가 여러 교회에서 읽히도록 작성된 회람 편지였을 가능성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빌레몬서와 관련짓는 견해도 있으나, 그 편지가 이 구절의 요구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는 별도의 논증이 필요합니다.

내 손으로 적는 마지막 문안

골로새서 4:18 본문 →

누가 편지를 쓰고 있었는가

나 바울이 내 손으로 문안을 적습니다. 내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골로새서 4:18 · 본디새김

이 말은 편지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필기 행위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마지막 문안은 바울 자신의 손으로 적었다고 밝힙니다.

골로새 사람들은 편지의 긴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그분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서로 어떻게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지, 또 다른 교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은 편지를 보낸 사람의 개인적인 인사를 만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적습니다.

그다음 남기는 말은 놀랍도록 짧습니다.

내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사슬이 어떤 형태인지, 얼마나 불편한지, 언제 풀려날 것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표현은 이 편지가 추상적인 신학 논문이 아니라 실제 고난을 겪는 사람이 공동체에 보낸 편지라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일깨웁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만물의 주님이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앎의 모든 보물이 있다고 말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자신은 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는 사람이 세상의 권력 앞에서 아무런 고난도 겪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높여지셨다는 사실이 그의 사도에게 즉각적인 자유와 안락함을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슬을 그리스도의 주권이 실패했다는 증거로 제시하지 않고, 매여 있는 상태에서도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요청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지만, 앞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생각하면 바울의 사슬을 기억하는 일은 그를 공동체의 관심과 기도 속에 두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를 위한 기도를 잊지 말고, 그가 처한 고난을 잊지 말라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다시 은혜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슬로 편지를 끝내지 않습니다. 은혜로 끝냅니다. 1:2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빌었고, 4:18에서는 은혜가 그들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그 사이에 긴 설명과 많은 명령이 있었지만, 편지의 시작과 끝에 놓인 것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에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모든 문장을 직접 쓰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말하여 기록하게 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손으로 인사를 적을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1, 갈라디아서 6:11, 데살로니가후서 3:17, 빌레몬서 1:19에서도 친필과 관련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앞의 모든 구절을 누가 받아 적었는지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이 친필 인사만으로 편지의 저작 문제에 관한 현대의 모든 논쟁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슬을 지닌 손으로 적은 은혜

골로새서 4:1–18 본문 →

사슬을 지닌 손으로 은혜를 적기까지, 골로새서 4장은 앞선 장들의 신학을 사람들 사이에서 보여 줍니다. 하늘의 주인 앞에서 인간의 권력은 제한되고, 복음은 은혜와 소금으로 간이 맞은 말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지며, 교회는 서로 소식을 듣고 위로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관계로 드러납니다. 복음은 이름 없는 추상적인 집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바울은 갇혀 있습니다. 그는 골로새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라오디게아의 교회도, 히에라폴리스의 사람들도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기고가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있습니다. 에바브라가 있습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가 있습니다. 누가와 데마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편지를 가지고 떠나고, 누군가는 소식을 전하며, 누군가는 기도로 싸우고, 누군가는 위로를 건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4장의 첫 기도, 「말씀을 전할 문을 열어 주시어」 달라는 부탁이 다시 떠오릅니다. 바울이 원한 것은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었고,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그 말씀이 사람들을 통해 움직이는 모습을 봅니다. 누가 실제로 편지를 읽었는지, 오네시모를 어떻게 맞아들였는지, 아킵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본문이 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적습니다. 그리고 「내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슬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슬을 지닌 손이 남긴 마지막 말은 원망도 아니고 자기 연민도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혀 있는 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현실이 자신의 사역과 골로새 사람들의 삶을 최종적으로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매여 있는 사람의 마지막 인사가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인사는 두기고와 오네시모의 손을 거쳐, 멀리 떨어진 골로새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