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마지막 당부와 인사

내가 매여 있는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

골로새서의 마지막 장에는 작은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골로새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갇힌 사람이 열린 문을 구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열어 달라고 구하는 것은 감옥의 문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말씀을 전할 문」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얽매고 있는 사슬보다, 자신이 전해야 할 말씀이 사람들에게 닿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장의 후반부에는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골로새로 향합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와 누가와 데마는 안부를 전합니다. 에바브라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골로새의 편지는 라오디게아에서도 읽혀야 하고,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는 골로새에서도 읽혀야 합니다.

바울 자신은 매여 있지만, 그를 둘러싼 복음의 소식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입니다.

앞선 장들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했다면, 마지막 장에서는 그 삶이 어떤 사람들의 손과 발, 목소리와 관계를 통해 이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거대한 신학적 설명 대신 기도와 말, 여행과 편지, 사람들의 이름과 안부가 있습니다.

이 장은 네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 4:1 — 땅의 주인도 하늘의 주인 앞에 서 있습니다.

· 4:2–6 — 매여 있는 바울과 세상 속의 신자들에게 필요한 기도와 말.

· 4:7–14 — 복음을 전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실제 사람들의 관계.

· 4:15–18 — 여러 교회 사이를 오가는 편지와 바울의 마지막 친필 인사.

4장 처음에서 바울은 주인들에게 그들도 하늘의 주인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끝에서는 골로새 사람들에게 「내가 매여 있는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자신보다 높으신 예수님,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고난받는 형제입니다.

그 사이에서 골로새서의 마지막 장이 펼쳐집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주인에게도 주인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4:1 본문 →

가정 규정의 마지막 말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4장 1절은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3장 18절부터 이어진 가정 규정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울은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버지, 노예를 차례로 부른 뒤 마지막으로 주인들에게 말합니다.

주인 여러분, 노예들을 옳고 공정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골로새서 4:1 · 두루새김

바울은 주인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근거를 그들보다 높은 권위에 둡니다. 원문은 앞의 인간 주인과 하늘의 주인에게 같은 그리스어 퀴리오스(κύριος)를 사용합니다. 한 집안에서 주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도 주인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노예에게 명령할 수 있는 법적·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을 가진 사람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는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인간 주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을 가장 높은 권력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공정하게」 대하라는 말은 어느 정도를 요구하는가

「공정하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이소테스(ἰσότης)입니다. 기본적으로 동등함이나 균등함을 나타내며, 문맥에 따라 공평함 또는 공정한 대우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바울이 노예제도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주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법적 신분의 평등이 아니라 정당하고 공평한 대우라고 봅니다. 반면 이 단어를 정의와 동등함을 베풀라는 뜻으로 읽어, 사회적 지위가 다르더라도 노예를 동등한 존재로 대하라는 더 강한 요구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도 노예제도 자체의 즉각적인 폐지를 명령하지 않으면서 그런 요구를 하는 표현이 가능했습니다.

본문은 여기서 노예해방을 직접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아무런 제한 없는 지배권을 주지도 않습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 안에서는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이 사람이 근본적으로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한다고 선언한 사실을 생각하면, 4:1의 명령을 단지 친절한 주인이 되라는 권면으로 줄여 읽기 어렵습니다.

주인이 노예들을 옳고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마음 내킬 때 하는 좋은 일이 아니라 하늘의 주인 앞에서 지켜야 할 책임입니다.

여기서 가정 규정이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모든 신자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인간의 권력을 가진 사람도 하늘의 주인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 뒤, 이제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이끕니다.

열린 문을 구하는 기도

골로새서 4:2–4 본문 →

기도에 꾸준히 힘쓰라는 말

기도에 꾸준히 힘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어 기도하십시오.골로새서 4:2 · 두루새김

「꾸준히 힘쓰며」는 무언가에 계속 마음을 쏟는다는 뜻입니다. 같은 말이 사도행전 1:14에서 제자들이 기도에 힘쓰는 모습에, 사도행전 2:42에서 초기 공동체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모습에 쓰입니다. 기도를 잠깐의 열심이 아니라 계속 붙들어야 할 공동체의 삶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태도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어서.

「깨어」는 잠들지 않고 주의 깊게 살피는 태도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일을 기억하고, 깨어 있는 사람은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피며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깨어 있음은 서로 반대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을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계속 기도합니다.

바울이 먼저 구하는 것은 석방이 아니다

3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이 뜻밖입니다.

우리를 위해서도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갇혀 있는 것도 이 비밀 때문입니다.골로새서 4:3 · 두루새김

그가 직접 구하는 것은 감옥에서 풀려나는 일이 아니라 말씀을 전할 문입니다. 바울이 자유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구원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빌립보서 1:19; 빌레몬서 1:22).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가 먼저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계속 감당할 기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 때문에 복음까지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은 복음을 전할 기회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6:9와 고린도후서 2:12에서도 바울은 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그 문을 열어 달라고 직접 기도를 요청합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일이 잘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형편이 편해지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있더라도 예수님의 비밀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그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왜 이미 드러난 비밀을 다시 드러내야 하는가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이 이미 드러났으며, 그 비밀의 중심이 예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이렇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또 내가 마땅히 전해야 할 대로 그 비밀을 분명히 알리도록 기도해 주십시오.골로새서 4:4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비밀을 드러내셨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그 비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한다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비밀은 이미 드러났지만,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문에서 「분명히 알리도록」(φανερόω)은 골로새서 1:26에서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드러났다」고 할 때 쓴 단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비밀을 바울이 다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둘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것이 바울의 말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관계입니다.

바울은 단지 말을 많이 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전해야 할 대로」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복음의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는지도 중요합니다.

이 표현은 곧 골로새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지는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기도와 복음을 받은 사람의 대화가 서로 연결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게 대답하십시오

골로새서 4:5–6 본문 →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

5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의 시선을 공동체 밖으로 돌립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대하며,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골로새서 4:5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이들을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로 표현합니다(고린도전서 5:12–13 참고).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지혜롭게 대하라고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과 실제로 만나고 대화하는 상황을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질문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으며,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의 정해진 문장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사들인다는 표현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ἐξαγοράζω)는 원문에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다는 뜻과 관련된 동사로, 시간을 사들인다는 비유입니다(에베소서 5:16에도 같은 표현). 여기서 시간은 시계로 재는 시간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살릴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 기회를 살릴 자리가 분명합니다.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자리입니다. 모든 만남을 신앙을 강요할 기회로 바꾸라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일상의 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을 전할 문을 열어 주시기를 구하고, 골로새 사람들에게는 이미 주어진 기회를 지혜롭게 살리라고 합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있지만, 둘 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일에 참여합니다.

은혜와 소금

6절은 말에 관한 명령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친절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것 같아야 합니다.골로새서 4:6 · 두루새김

원문은 「친절하고」(χάρις) 자리에 은혜를 뜻하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의미도 문맥상 연결됩니다.

왜 하필 소금일까요?

소금은 음식의 맛을 살리고 그 특징을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고대 그리스어권에서 소금은 재치 있고 생동감 있는 말의 비유로 쓰이기도 했고, 이 문맥에서는 지혜롭고 적절하며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말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는 견해가 많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말은 무조건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는 말이 아니라, 은혜를 지니면서도 분별력이 있고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된 말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대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는 말은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질문이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세한 설명이, 어떤 사람에게는 충분히 들어 주는 태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오해를 바로잡는 말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속여 넘기는 가르침을 경계했던 내용과도 대조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사람을 제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전달하고 관계를 세우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편지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가르침의 말이 사람들의 이름과 안부로 바뀝니다. 그러나 앞선 설명이 끊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은혜가 실제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 — 편지는 사람을 통해 도착한다

골로새서 4:7–9 본문 →

바울이 편지에 쓰지 않은 이야기

7절부터 바울은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내 형편은 두기고가 여러분에게 모두 알려 줄 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형제이자 충실히 섬기는 사람이며, 주님 안에서 나와 함께 섬기는 종입니다.골로새서 4:7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의 사정을 편지에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두기고가 알려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골로새서를 한 권의 책 안에 보존된 문서로 읽기 때문에,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문서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처음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도 만났고, 그에게서 바울의 형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7절과 9절은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이곳의 사정을 알려 줄 것이라고 두 번 말합니다.

편지는 단지 문장을 전달하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두기고가 실제로 어떤 설명을 덧붙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본문은 그가 바울의 형편을 말로 알려 줄 역할을 맡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충실히 섬기는 사람, 함께 섬기는 종

바울은 두기고를 세 가지 표현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단순히 우편물을 운반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울이 신뢰하는 동료입니다. 사도행전 20:4에서 그는 바울의 여행 동료로 등장하고, 에베소서 6:21–22에서도 바울의 형편을 알리고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할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바울은 두기고를 자신의 부하라고 부르지 않고, 자신과 「함께 섬기는 종」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사도이고 두기고는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예수님께 속한 동료입니다.

주인과 노예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직후이기에 이 표현은 더욱 의미 있게 들립니다. 원문은 노예를 뜻하는 말을 자신과 동료의 관계에 적용하는데, 여기서 그 말은 사람 사이의 소유권이 아니라 예수님께 함께 속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위로를 전달하는 사람

내가 그를 여러분에게 보낸 것은 바로 여러분이 우리 형편을 알게 되고, 그가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4:8 · 두루새김

두기고의 임무는 소식을 전하는 것과 마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형편을 정확히 아는 것이 골로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믿음이 정확한 교리 설명만으로 세워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형편을 알고 위로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오네시모 — 뜻밖의 동행자

믿음직하고 사랑하는 형제 오네시모도 그와 함께 보냈습니다. 오네시모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 두 사람이 이곳의 모든 일을 여러분에게 알려 줄 것입니다.골로새서 4:9 · 두루새김

이 이름은 빌레몬서에도 등장합니다. 빌레몬서 1:10–16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이 갇혀 있는 동안 얻은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가 한때 쓸모없었지만 이제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두 편지의 오네시모를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다만 이것은 본문들 사이의 관계에 근거한 역사적 판단이며, 골로새서 4:9 자체가 그의 과거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연결을 받아들이면 9절의 소개는 더욱 특별해집니다. 바울은 그의 노예 신분도, 과거 잘못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두기고를 소개할 때와 비슷하게 「믿음직하고 사랑하는 형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그의 정확한 출생지나 과거의 행적까지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그를 낯선 방문객이 아니라 골로새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제 그들의 형제로서 소식을 전할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형제라는 호칭이 사회적 관계에 던지는 질문

노예였던 사람이 같은 공동체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맞아들여야 합니까?

골로새서 자체는 이 질문에 자세히 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서 1:16은 오네시모를 더 이상 단지 노예로만 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두 편지를 함께 읽으면 바울의 말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실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바울이 오네시모의 법적 해방을 이미 이루었다고 말한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이후 어떤 법적 지위를 얻었는지, 빌레몬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이 구절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알려 주는 것은 오네시모가 신뢰받는 형제라고 불리고, 두기고와 함께 공동체에 소식을 전할 사람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편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편지를 전달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앞에서 말한 예수님 안의 새로운 관계가 한 사람의 이름과 호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에는 사본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사본은 골로새 사람들이 「우리 형편을 알게」 되는 읽기를 따르고, 다른 사본은 두기고가 골로새 사람들의 형편을 알아보게 된다는 읽기를 전합니다. 첫 번째는 바울의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두 번째는 골로새 사람들의 상황을 살피는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두기고가 공동체를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이름들 사이에 드러나는 복음의 관계

골로새서 4:10–11 본문 →

갇힌 바울 곁의 사람들

10절부터는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전하는 안부가 이어집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사촌 마가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마가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오면 맞아 주십시오.골로새서 4:10 · 두루새김

아리스다고는 사도행전에서 에베소의 소동 가운데(19:29), 바울의 여행에서(20:4), 로마로 향하는 항해에서(27:2) 바울과 함께하는 동료로 등장합니다. 「함께 갇힌」은 실제로 같은 곳에 갇혀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바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동료라는 뜻을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이 분명히 하는 것은 그가 바울의 고난과 가까이 연결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사슬 곁에는 혼자가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가를 맞아 주십시오

바울은 마가를 「바나바의 사촌」이라고 소개하고 「맞아 주십시오」라고 덧붙입니다. 이 짧은 명령을 읽으면 사도행전 15:37–40이 떠오릅니다. 그곳에서는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집니다.

그 배경을 생각하면 마가가 바울의 동료들 가운데 등장하는 일은 특별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 4:10은 둘이 어떤 과정을 거쳐 관계를 회복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화해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대화나 과정까지 되살려 낼 수는 없습니다.

이 절에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마가를 경계하라고 하지 않고 「맞아 주십시오」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명령은 앞에서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묶인 공동체를 이루라는 권면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유스도라고도 하는 예수

유스도라고도 하는 예수도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유대 사람 출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는 이 세 사람뿐입니다. 이들은 내게 위로가 되었습니다.골로새서 4:11 · 두루새김

「유스도라고도 하는 예수」는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던 예수라는 이름을 지녔고 유스도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뿐」이라는 표현을 바울에게 유대 사람 동료가 어디서나 세 사람밖에 없었다는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상 지금 바울과 함께 있거나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동료들 가운데 유대 사람 출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두기고는 골로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사람이고, 이 세 사람은 바울에게 위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위로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사도는 아무런 위로도 필요로 하지 않는 초인적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일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위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마지막 안부의 이름들에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관계가 들어 있습니다.

에바브라 — 멀리서 기도로 싸우는 사람

골로새서 4:12–14 본문 →

다시 등장한 에바브라

12절에서 편지의 처음에 등장했던 인물이 다시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바브라가 안부를 전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늘 여러분을 위해 기도로 힘써 싸웁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모든 뜻에 맞게 온전하고 확신에 찬 사람으로 굳게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골로새서 4:12 · 두루새김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들이 복음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1:7).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는 가르치는 장면이 아니라 기도하는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힘써 싸웁니다」(ἀγωνίζομαι)는 운동 경기의 치열한 경쟁이나 고된 싸움을 표현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동사입니다.

바울은 그 기도를 형식적인 의식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싸움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바울 자신도 골로새 사람들을 위해 큰 싸움을 치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2:1). 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매여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멀리 있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둘의 행동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골로새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는 것입니다.

에바브라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적 체험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에 맞게 온전하고 확신에 찬 사람으로 굳게 서도록 기도합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모든 행동을 감독할 수도, 매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합니다.

에바브라의 관심은 자신이 없으면 골로새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스스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이끌 수 없는 자리에서도 그들을 위해 싸웁니다. 그 싸움의 방식이 기도입니다.

한 도시를 넘어서는 돌봄

실제로 나는 그가 여러분을 위해, 또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무척 애쓰고 있음을 증언합니다.골로새서 4:13 · 두루새김

세 도시는 소아시아의 리쿠스 계곡 지역에 서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이지만, 그의 돌봄은 골로새에서 끝나지 않고 가까운 다른 공동체들까지 향합니다.

각 교회는 서로 따로 경쟁하는 조직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공동체를 위해 애쓰고, 편지는 서로 오가며, 사람들은 다른 도시의 형편을 기억합니다.

누가와 데마 — 길지 않은 문안

사랑하는 의사 누가와 데마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골로새서 4:1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누가를 의사로 직접 소개하는 신약의 분명한 본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누가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이해해 왔지만, 골로새서 4:14는 그의 직업을 말할 뿐 저자라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데마는 빌레몬서 1:24에서도 바울의 동료로 언급되지만, 디모데후서 4:10에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고 기록됩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 데마는 바울 곁에서 안부를 전하는 사람이며, 그의 마음속 상태나 앞으로의 선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아리스다고는 함께 갇힌 사람입니다. 마가는 맞아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유스도는 위로가 된 사람입니다. 에바브라는 기도로 힘써 싸우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사랑하는 의사이고, 데마는 안부를 전합니다.

바울은 모두를 똑같은 분량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를 그대로 읽으면, 바울의 일이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섬김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한 집의 교회에서 다른 도시의 교회로

골로새서 4:15–17 본문 →

눔파의 집에 모이는 교회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눔파, 그리고 그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골로새서 4:15 · 두루새김

시선이 도시 전체에서 한 집으로 좁혀집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전용 예배당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집에서 모이기도 했습니다(로마서 16:5; 고린도전서 16:19; 빌레몬서 1:2). 교회는 건물의 이름이 아니라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눔파는 여자였는가, 남자였는가

그 집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사본에 따라 「그녀의 집」, 「그의 집」, 「그들의 집」으로 다르게 전해집니다. 두루새김은 「그녀의 집」으로 옮겨 눔파를 여성으로 보는 읽기를 따랐습니다. 이 구절에서 확실한 것은 눔파라는 인물의 집에서 교회가 모였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한 사람의 이름과 그 집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은 실제 누군가의 집이었고, 공동체의 생활은 누군가가 자신의 공간을 열어 주는 구체적인 행동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이 집의 교회보다 더 넓은 장면이 나타납니다.

편지는 한 교회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여러분의 모임에서 이 편지를 읽은 뒤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게 하십시오. 여러분도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를 읽으십시오.골로새서 4:16 · 두루새김

이 문장에는 두 방향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받은 공동체가 그 편지를 자기들만 가지고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골로새 사람들에게 전한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은 가까운 다른 교회에도 도움이 될 수 있고, 골로새 사람들 역시 다른 교회가 받은 편지를 읽어야 합니다.

서로 배우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편지는 눈으로만 읽히는 글이 아니었다

「여러분의 모임에서」 읽으라는 말은 이 편지가 공동체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읽힐 것을 예상합니다. 처음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누군가가 읽어 주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편지의 명령들이 새롭게 들립니다. 노예와 주인에게 한 명령도, 에바브라의 기도도, 오네시모가 사랑하는 형제라는 소개도 공동체 앞에서 소리 내어 읽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개는 바울의 개인적인 평가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가 오네시모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 읽었고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공동체 안에서 읽히도록 지시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합니다.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는 무엇인가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은 별도의 편지라는 견해, 오늘날의 에베소서라는 견해, 빌레몬서와 관련짓는 견해가 있습니다.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그 편지가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불확실성 때문에 본문의 분명한 사실을 놓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들은 서로 편지를 나누고 함께 배워야 합니다. 바울이 앞에서 말한 한 몸의 성장이 실제 공동체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아킵보 — 맡은 섬김을 온전히 이루도록

그리고 아킵보에게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맡은 섬김의 일을 온전히 이루도록, 그 일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골로새서 4:17 · 두루새김

아킵보는 빌레몬서 1:2에서 「우리의 동료 군인」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그가 골로새 교회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맡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 일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주의 깊게 살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킵보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고, 골로새 사람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한 사람의 섬김이 공동체가 함께 알고 격려할 수 있는 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까닭이 아킵보의 실패 때문인지, 낙심 때문인지, 새로 맡은 일을 격려하려는 것인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문제를 꾸짖는 말로 확정하기보다, 맡은 섬김을 온전히 이루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명령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조금 더 깊이

눔파에 관해서는 여성형 대명사 「그녀의 집」이 원래의 읽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있지만, 사본의 차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판단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눔파가 그 교회의 공식적인 지도자였는지, 집을 제공하는 후원자였는지, 두 역할을 함께 맡았는지도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를 에베소서로 보는 견해는 에베소서가 여러 교회에서 돌려 읽도록 쓰인 편지였을 가능성과 연결되며, 빌레몬서와 관련짓는 견해는 그 편지가 이 구절의 요구에 얼마나 들어맞는지 따로 근거를 살펴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을 근거로 잃어버린 편지의 내용을 되살리거나 현재의 특정 편지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슬을 지닌 손으로 적은 은혜

골로새서 4:18 본문 →

누가 편지를 쓰고 있었는가

모든 사람과 교회에 대한 인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바울이 자신의 손으로 인사를 적습니다.

나 바울이 내 손으로 이 인사를 적습니다. 내가 매여 있는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골로새서 4:18 · 두루새김

고대에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여 기록하게 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손으로 인사를 적는 경우가 있었습니다(고린도전서 16:21; 갈라디아서 6:11; 데살로니가후서 3:17; 빌레몬서 1:19). 본문은 앞의 구절을 누가 받아 적었는지 밝히지 않으며, 이 인사만으로 편지의 저자에 관한 현대의 논쟁이 모두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마지막 인사는 바울 자신의 손으로 적었다고 밝힙니다.

골로새 사람들은 편지의 긴 가르침을 들은 뒤, 마지막에 편지를 보낸 사람의 개인적인 인사를 만납니다. 그가 남기는 말은 놀랍도록 짧습니다.

내 사슬을 기억해 주십시오

바울은 어디에 갇혀 있는지, 사슬이 어떤 형태인지, 언제 풀려날 것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편지가 추상적인 신학 논문이 아니라 실제 고난을 겪는 사람이 보낸 편지라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일깨우는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만물의 주님이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자신은 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높여지셨다는 사실이 그분의 사도에게 곧바로 자유와 편안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슬을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실패했다는 증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요청하는지 밝히지 않지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생각하면 바울의 사슬을 기억하는 일은 그를 공동체의 관심과 기도 속에 두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다시 은혜로 돌아갑니다.

1:2에서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빌었고, 4:18에서는 은혜가 그들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그 사이에 긴 설명과 많은 명령이 있었지만, 편지의 시작과 끝에 놓인 것은 사람이 이루어 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은 사람들 사이를 움직인다

4장은 주인들에게 하늘에 주인이 계신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한계가 있으며 다른 사람을 옳고 공정하게 대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장의 끝에는 수많은 이름이 놓입니다. 누군가는 편지를 가지고 떠나고, 누군가는 기도로 싸우고, 누군가는 집을 열어 주고, 누군가는 위로를 건넵니다. 복음은 이름 없는 추상적인 집단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바울은 갇혀 있습니다.

그는 골로새 사람들도, 라오디게아의 교회도, 히에라폴리스의 사람들도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4장의 첫 기도에서 그가 구한 것은 「말씀을 전할 문」이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그 말씀이 사람들을 통해 움직이는 모습을 봅니다.

오네시모를 어떻게 맞아 주었는지, 아킵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본문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공동체 안에서 읽히고 다른 교회로 전달되도록 지시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의 사슬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슬을 지닌 손이 남긴 마지막 말은 원망도 아니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말도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갇혀 있는 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현실이 자신의 일과 골로새 사람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매여 있는 사람의 마지막 인사가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인사는 두기고와 오네시모의 손을 거쳐, 멀리 떨어진 골로새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