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11장 · 호렙에서 맺은 언약
옳은 말과 오래가는 마음
신명기 5장에서 가장 뜻밖의 장면은 열 가지 말이 선포된 다음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호렙산에서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지만, 더 이상 그 음성을 직접 듣는다면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백성의 말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과연 그 말대로 살아갈 마음을 계속 품을 것인지 염려하시는 듯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과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 질문에 답하려면 이 장의 중심에 놓인 열 가지 말을 처음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놀랍게도 명령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이미 행하신 일에서 시작합니다.
사십 년 전의 언약을 오늘의 언약으로 듣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말했다. 「이스라엘이여, 제가 오늘 여러분의 귀에 전하는 규정과 법규를 들으십시오. 그것들을 배우고 지켜 실행하십시오.」신명기 5:1 · 본디새김
하나님의 말씀은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완결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을 배우고, 보존하며,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말을 전하는 대상은 호렙에서 언약이 처음 주어졌던 시대의 이스라엘과 정확히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세월이 흘렀고, 새로운 세대가 자랐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우리 조상들과 이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곧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맺으셨습니다.」신명기 5:3 · 본디새김
창세기 15장과 17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출애굽기 19–24장에서는 실제로 호렙의 언약을 받았던 이전 세대가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신명기 5:3의 부정문을 단순히 ‘조상들뿐 아니라 우리와도’라는 말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조상들과 우리를 대조합니다.
하나는 여기서 ‘조상들’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선조들로 읽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지만, 지금 모세가 말하는 호렙의 언약은 그들과 직접 맺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어진 것이었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 세대와 현재 살아 있는 세대를 대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모세는 언약을 이미 지나간 조상들의 사건으로 남겨 두지 않고, 현재 청중 자신이 참여하는 언약으로 선언합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이 구절의 중심에 있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라는 표현을 함께 설명합니다. 특히 신명기 전체의 연설에서는 과거의 역사가 현재 청중에게 다시 주어지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앞선 사건들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같은 ‘우리’로 불립니다.
호렙에서 주어진 말씀은 호렙을 떠났다고 끝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4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앞 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음성은 들었지만 형상은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신명기 4:12).
「얼굴을 마주하고」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백성과 직접 말씀하시는 관계를 나타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 모양을 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모세가 중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온 회중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불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 사이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그때 말씀하셨던 내용을 다시 전합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말씀하십니다
열 가지 말의 첫 문장은 금지 명령이 아닙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이다.』」신명기 5:6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기 전에 자신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셨는지 밝히십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계명을 잘 지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종살이하던 때에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선언은 「너」라는 단수형으로 전달됩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인격처럼 부르는 단수 표현이 자주 사용됩니다. 열 가지 말도 공동체 전체를 향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그 공동체에 속한 각 사람이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들어야 하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그 구원의 관계를 바탕으로 첫 금지가 주어집니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어서는 안 된다.』」신명기 5:7 · 본디새김
이 표현을 ‘다른 신들을 섬겨도 되지만 여호와야훼보다 낮은 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충성과 예배가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우상 금지는 그 배타적인 관계를 구체화합니다.
「『너 자신을 위해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이든 본떠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신명기 5:8 · 본디새김
이 명령은 단순히 다른 신들의 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보다 폭넓게 읽힙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형상으로 나타내려는 일도 이 금지와 충돌합니다.
그들은 호렙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음성으로 자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아라. 이는 나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버지들의 죄악을 자녀들에게 삼 대와 사 대까지 묻고,』」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수천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기 때문이다.』」신명기 5:9–10 · 본디새김
이것을 단순히 부모가 잘못하면 자녀들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회적 결과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 죄악을 자녀들에게 물으신다고 말합니다. 세대 사이의 영향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 언급합니다.
이 문제를 읽을 때에는 같은 신명기의 24:16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자녀를 부모의 죄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되며, 각자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다만 신명기 24:16은 인간 사회의 사법적 처벌에 관한 명령이고, 신명기 5:9는 하나님이 죄악을 세대에 걸쳐 물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적용 영역이 다르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 세대 간 심판이 일으키는 모든 윤리적 질문이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5:9는 그 심판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녀에게 조상의 죄책이 자동으로 똑같이 전가된다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본문이 말하는 세대 간 심판을 모두 자연적인 결과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심판은 삼 대와 사 대까지 언급되지만, 사랑은 수천에 이르기까지 베풀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수천’이라는 말에는 세대인지 사람인지 단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의 세대 표현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지만, 본문에 없는 단위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함과, 사랑하고 순종하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나란히 놓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관계가 얼마나 엄중하고 깊은 것인지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말에 이용하지 마십시오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입에 올리지 말아라.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입에 올리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신명기 5:11 · 본디새김
이 명령은 흔히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말하거나 욕설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행동도 이 명령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다루는 문제를 단순히 발음이나 언어 예절로 제한하면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헛되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브(שָׁוְא)는 헛됨이나 무가치함, 거짓됨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입에 올리는 행위에는 거짓된 맹세나 속이는 말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일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2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맹세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말의 진실성을 보증하거나 약속의 책임을 확인하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면서 실제로는 거짓을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손으로 신적 대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하나님의 권위를 끌어들여 이용합니다. 두 행동은 방식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간의 목적에 종속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위험을 지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자신의 말도 진실해야 합니다.
종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다른 종을 쉬게 할 것인가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이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여라.』」신명기 5:12 · 본디새김
안식일 명령은 출애굽기 20:8–11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두 본문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하나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 일을 근거로 듭니다. 반면 신명기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일과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하신 일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너와 네 아들과 네 딸과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소와 네 나귀와 네 모든 가축과 네 성문 안에 있는 네 거류민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네 남종과 네 여종도 너처럼 쉬게 하려는 것이다.』」신명기 5:14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 「너처럼」이라는 말이 결정적입니다. 남종과 여종은 집안의 주인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과 시간을 자유롭게 결정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주인과 마찬가지로 쉬어야 합니다.
주인이 쉰다고 종에게 그날의 모든 일을 떠넘겨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노동을 멈추는 동안 종들도 노동에서 쉬어야 합니다. 이것은 고대의 불평등한 사회질서 안에서 노동의 한계를 설정하는 명령입니다.
물론 이 명령이 종살이 제도 자체를 폐지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여전히 남종과 여종의 존재를 전제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제한을 둡니다.
「『네가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다는 것과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거기서 이끌어 냈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이 네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했다.』」신명기 5:15 · 본디새김
출애굽기 5:6–14를 보면 이집트의 감독들은 이스라엘에게 벽돌을 만드는 일을 강요하면서 필요한 짚은 주지 않으면서도 생산량을 줄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종의 시간은 주인의 요구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자기 땅을 소유하고 다른 사람을 고용하거나 종으로 부리는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과거를 기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기억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신 이유는 그들이 새로운 주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끝없는 노동을 강요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해방받은 백성은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쉼을 빼앗지 않는 방식으로 그 해방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왜 땅에서의 삶과 연결되는가
안식일 명령 다음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이 네게 명령한 대로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여호와야훼 네 하나님이 네게 주는 땅에서 네가 오래 살고 잘되게 하려는 것이다.』」신명기 5:16 · 본디새김
이 명령은 흔히 자녀들에게 부모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가르칠 때 사용됩니다. 물론 부모를 존중하고 그들의 정당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도 이 명령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공경하다’는 표현을 어린 자녀의 순종으로만 좁히면 그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성인이 된 자녀가 나이 든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도 포함합니다.
레위기 19:3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하라고 명령하며, 출애굽기 21:15, 17은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행위를 매우 엄중하게 다룹니다. 신명기 자체에서도 부모에 대한 존중은 중요한 공동체적 책임으로 나타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땅에서 오래 살고 잘되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것을 부모에게 효도하면 개인의 수명이 반드시 길어진다는 기계적인 보상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세대가 이어지는 공동체의 질서와 관련됩니다. 앞선 세대가 가르침을 전하고, 다음 세대가 그 가르침을 받아 살아갈 때 공동체의 삶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모를 경멸하고 세대 사이의 관계를 파괴한다면, 공동체가 경험을 전하고 책임을 이어 가는 일도 어려워집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하는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단순한 가족 윤리에 머물지 않고 언약 공동체의 지속성과 연결됩니다.
이 명령은 출애굽기 20:12에도 나오지만, 신명기에서는 「잘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더해져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그곳에서 좋은 삶을 누리는 문제를 함께 강조합니다.
이웃의 생명과 관계와 소유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17절부터 명령의 문장이 갑자기 짧아집니다.
앞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가 비교적 길게 설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세한 이유를 덧붙이지 않습니다. 이 명령들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넘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경계를 제시합니다.
생명을 빼앗지 말라
「『살인하지 말아라.』」신명기 5:17 · 본디새김
17절의 「살인하지 말아라」에는 히브리어 라차흐(רָצַח)에서 나온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 동사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 가운데 법적·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살해를 가리키는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다만 언제나 고의적인 살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35장에서는 고의적인 살해와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다루는 문맥에서도 관련 표현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명령을 모든 형태의 죽임을 예외 없이 금지하는 문장으로 단순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신명기 자체가 전쟁과 사법적 처벌을 별도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간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행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명령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계를 세웁니다. 바로 앞 장에서 모세가 도피성을 지정한 일은 그러한 생명 보호가 실제 사회 제도와 연결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다른 사람의 혼인 관계를 침해하지 말라
「『또 간음하지 말아라.』」신명기 5:18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혼인 제도는 오늘날의 혼인 제도와 동일하지 않았으며, 이 법은 그러한 고대 사회의 관계와 관습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럼에도 이 명령이 분명히 금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혼인 관계를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유로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지 말라
「『또 도둑질하지 말아라.』」신명기 5:19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살아가는 각 사람의 소유와 생활 역시 존중되어야 합니다. 이 명령은 다른 사람의 재산뿐 아니라 그 사람의 생활을 유지하는 기반을 침해하는 일과도 관계됩니다.
거짓된 말로 이웃을 해치지 말라
「『또 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신명기 5:20 · 본디새김
고대의 재판에서는 증인의 말이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거짓된 증언은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재산과 생명을 잃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증언을 금지하는 일은 단순한 말의 예절이 아니라 공정한 재판과 이웃의 권리를 보호하는 문제입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할 때 사용된 샤브가 20절의 「거짓 증언」에도 사용됩니다. 같은 낱말이지만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일과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하는 일은 서로 다른 명령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간의 말이 진실과 권위를 왜곡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문제를 보여 줍니다.
말의 진실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합니다.
빼앗기 전에 이미 시작되는 욕망
21절에서는 금지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또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아라. 또 네 이웃의 집과 그의 밭과 그의 남종과 그의 여종과 그의 소와 그의 나귀와 네 이웃에게 속한 어떤 것도 욕심내지 말아라.』」신명기 5:2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살인과 간음, 도둑질과 거짓 증언 같은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 소유를 탐내는 욕망 자체가 언급됩니다. 이웃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도 공동체의 관계를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17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명령을 먼저 제시하고, 같은 동사로 이웃의 아내와 나머지 소유물을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반면 신명기 5:21은 이웃의 아내를 먼저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웃의 집과 밭, 남종과 여종과 가축 등을 따로 열거합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두 금지는 서로 다른 동사를 사용합니다. 아내를 「탐내지 말아라」에는 하마드가, 집과 나머지 소유를 「욕심내지 말아라」에는 아바에서 파생된 형태가 사용됩니다. 두 동사는 모두 강하게 바라거나 원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외부 행동을, 다른 하나는 내면의 생각만을 가리킨다고 엄격하게 구별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 동사의 차이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 신명기가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냄과 이웃의 재산에 대한 욕심을 구별하여 반복해서 금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편이 본문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신명기에서는 출애굽기의 목록과 달리 「밭」이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현실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각 사람의 집과 밭은 삶을 유지하는 기반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밭을 탐내는 욕망은 그 사람의 삶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그런 위험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원했고, 이세벨이 거짓 증언을 이용하여 나봇을 죽게 한 뒤 그 포도원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그 사건에서는 탐욕과 거짓 증언, 살인이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손이 이웃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이웃의 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다룹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열 가지 말 가운데 여러 명령을 인용하시며 그 의미를 설명하십니다(마태복음 5:21–30; 19:16–19). 이는 신명기 5장의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과는 구별되는 후대의 가르침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의 행동과 마음 모두에 관계된다는 주제를 이어 갑니다.
하나님께만 충실하라는 명령은 사람들 사이의 신실함과 공정함을 요구하는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명령의 선포가 끝난 다음, 모세는 다시 호렙의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말씀은 끝났지만, 백성은 불 앞에 서 있었다
22절은 열 가지 말의 선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산의 불과 구름과 짙은 구름 속에서 여러분의 온 회중에게 큰 음성으로 이 말들을 하셨고, 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말들을 돌판 두 개에 쓰셔서 제게 주셨습니다.」신명기 5:22 · 본디새김
온 회중에게 직접 선포된 말씀이 여기서 마무리되었다는 뜻입니다.
23절에서는 그들이 불타는 산과 어둠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고 모세에게 다가옵니다. 지파의 우두머리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그들의 생각을 전합니다.
「여러분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여호와야훼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여 주셨고, 우리는 불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셔도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신명기 5:24 · 본디새김
그러나 곧이어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왜 죽어야 합니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야훼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 듣는다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신명기 5:25 · 본디새김
이것은 앞의 고백을 곧바로 취소하는 모순된 말이라기보다,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셨지만, 그분의 거룩함은 인간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만든 형상이나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그들에게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요청합니다.
「『당신이 직접 가까이 가서 여호와야훼 우리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모두 들으십시오. 그리고 여호와야훼 우리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모두 당신이 우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듣고 실행하겠습니다.』」신명기 5:27 · 본디새김
이 요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진 지도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에게 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이 역할의 근거는 모세 자신의 권위나 능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라는 표현에는 원문상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벨로 야사프는 ‘더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문맥에 따라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는 다른 해석도 제시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큰 음성으로 이 말들을 하신 뒤 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열 가지 말이 온 회중에게 직접 선포되는 특별한 계시였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이후의 명령과 규정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가 백성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남아 있는 한 가지 소원
28절은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여러분이 제게 말할 때 여러분의 말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네게 한 말소리를 내가 들었다. 그들이 한 말은 모두 옳다.』」신명기 5:28 · 본디새김
하나님은 백성이 모세를 통해 말씀을 듣겠다고 요청한 것을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다는 이유로 믿음이 없다고 꾸짖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2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들과 그 자녀들이 영원히 잘되도록, 그들에게 언제나 나를 두려워하고 내 모든 명령을 지키는 이런 마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신명기 5:29 · 본디새김
백성이 지금 말로 표현한 태도가 언제나 지속되기를 바라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29절에는 「언제나」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옳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옳다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진심으로 약속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약속이 언제나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는 그 사실을 여러 차례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한 번 올바른 대답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대답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서 살아갈 때 그들과 다음 세대가 누릴 삶의 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그들의 순종 자체만이 아니라, 그 순종을 통해 그들이 살아갈 미래와 연결됩니다.
30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자기 천막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다른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너는 여기 나와 함께 서 있어라. 네가 그들에게 가르칠 명령 전체와 규정과 법규를 내가 네게 말하겠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차지하라고 주는 땅에서 그것들을 실행해야 한다.』」신명기 5:31 · 본디새김
모세는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백성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받아 약속의 땅에서 실행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미 이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누가 주겠느냐’라는 형태이지만, 실제 문맥에서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나타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주실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바브는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의지, 판단과 결심이 이루어지는 내면을 포괄합니다. 신명기 6:5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0:16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하고, 30:6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는 삶
모세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 여러분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대로 지켜 실행하십시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마십시오.」신명기 5:32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 여러분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모든 길을 걸으십시오. 여러분이 살고 잘되며, 여러분이 차지할 땅에서 오래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신명기 5:3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단순히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라는 뜻보다 더 생생한 이미지를 가집니다. 광야를 지나온 이스라엘에게 길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방향을 돌렸고, 길을 따라 이동했으며, 어떤 길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다른 길로는 나아가야 했습니다.
신명기 2:27에서는 모세가 시혼에게 통행을 요청하면서 「길로, 길로만 가겠습니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실제 영토를 통과하는 길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삶을 같은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며, 이웃을 올바르게 대하는 삶을 이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신 백성이 그 땅에서 살아가며 좋은 삶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불타는 산에서 자기 천막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입에서 나온 한순간의 약속만이 아니라, 그 약속에 따라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그 삶을 이끌어야 합니다.
백성은 불타는 산 아래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천막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가족이 있고, 종들이 있으며, 매일의 노동과 휴식이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있고, 누군가의 재산을 탐낼 기회도 있으며, 진실을 말하거나 거짓을 말해야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지켜져야 할 곳은 바로 그들이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곁에 서서 더 많은 말씀을 듣습니다. 백성은 천막으로 돌아가 그 말씀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언제나 자신을 경외하고 그 모든 명령을 지키는 마음을 품기를 바라십니다.
호렙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이 얼마나 큰 음성을 들었는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은 뒤 자기 천막으로 돌아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불은 산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야 할 길은 산 아래, 그들이 살아갈 땅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