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가마의 불과 예언자의 아내의 죽음
에스겔은 날짜를 적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바로 그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뒤의 말씀에서는 에스겔의 아내가 죽습니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 땅의 수도에서 일어난 국가적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예언자의 집에서 일어난 개인적 비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 사건을 하나의 말씀 안에 놓으십니다.
왜 하나님은 예언자의 가장 깊은 슬픔까지 예언의 일부로 삼으십니까?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한 사람의 아내의 죽음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한쪽에는 지워지지 않는 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드러내지 못하는 슬픔이 있습니다. 두 장면은 모두 예루살렘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앞에 서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은 상실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오랫동안 제한되었던 예언자의 입이 다시 열릴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날」 — 예언이 역사가 되는 순간
구 년째 열째 달, 그달 열흘에 여호와야훼의 말이 내게 왔다.에스겔 24:1 · 본디새김
에스겔서에는 여러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정확한 날짜가 강조됩니다.
이는 시드기야 왕 제9년 열째 달 10일로, 일반적으로 기원전 588년 1월 무렵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열왕기하 25:1과 예레미야 52:4에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바로 이날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이때 예루살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온 포로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에스겔 1:1–3에 따르면 그의 예언 활동은 바벨론의 그발강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날짜를, 바로 이날을 적어 두어라. 바로 이날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에워쌌다.」에스겔 24:2 · 본디새김
「바로 이날」이 반복됩니다. 이 표현은 평범한 날짜 기록을 특별한 선언으로 바꿉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에스겔에게 그날 벌어진 일을 알려 주시고, 그 날짜를 기록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포위는 우연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오랫동안 경고하신 심판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물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데에는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사건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으로 바뀌었습니다.
가장 좋은 고기를 넣어 끓이는 가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비유를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반역하는 집에 비유를 들려주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가마를 걸어라, 걸어라. 그 안에 물도 부어라.』」에스겔 24:3 · 본디새김
명령이 반복되면서 마치 누군가 서둘러 요리를 준비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물을 붓고, 좋은 고깃덩이들을 모아 넣습니다. 넓적다리와 어깨처럼 살이 많은 부위가 들어갑니다. 가장 좋은 뼈들로 채우고, 양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을 고릅니다.
그런데 이 가마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면 장면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가마는 예루살렘이고, 그 안의 고기는 성읍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 11:3에는 이와 직접 연결되는 말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성읍을 가마솥에, 자신들을 그 안의 고기에 비유했습니다.
그들에게 가마는 보호의 이미지였습니다.
고기가 단단한 솥 안에 있는 것처럼, 자기들도 예루살렘 성벽 안에서 안전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밖에서 공격이 들어와도 성읍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비유를 뒤집으십니다.
가마 안의 고기가 보호받는 것은 불이 적당하고 요리하는 사람이 음식을 준비할 때뿐입니다. 불이 지나치게 거세지면 고기는 익어 사라지고, 가마까지 손상됩니다.
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성읍이 오히려 그들을 파괴하는 장소가 됩니다.
「『양 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잡아라. 그 아래에 뼈들도 쌓아라. 펄펄 끓여라, 그 안의 뼈들까지 익도록.』」에스겔 24:5 · 본디새김
가마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재료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때 특권과 안전의 상징이었던 자리가 죽음의 장소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이 절에서는 가마 아래에도 뼈들을 쌓으라고 명령합니다. 흔히 장작을 쌓아 불을 피우는 장면을 예상하지만, 본문은 뼈를 말합니다. 이 특이한 배치가 어떤 실제 조리법을 반영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고기와 뼈가 거듭 등장하고, 모든 것이 극도로 끓는 장면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맨바위 위의 피 — 하나님이 덮지 않으시는 죄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화가 있다, 피의 성읍아. 녹이 그 안에 있고, 그 녹이 빠져나오지 않은 가마야. 그 안의 고기를 덩이마다, 덩이마다 꺼내라. 그것을 두고 제비를 뽑지 않았다.』」에스겔 24:6 · 본디새김
이제 비유의 초점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가마 안에 무엇을 넣고 끓이는지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가마 자체의 상태가 중요해집니다.
이 녹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 성읍이 흘린 피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성읍은 그 피를 맨바위 위에 놓았다. 땅에 쏟아 흙으로 덮을 수 있게 하지는 않았다.』」에스겔 24:7 · 본디새김
레위기 17:13은 사냥한 짐승의 피를 쏟고 흙으로 덮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여 살인으로 흘린 피도 흙으로 덮어야 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드러난 채 남아 있는 피의 이미지를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욥기 16:18에서 욥은 자신의 피를 땅이 덮지 말고 자신의 부르짖음이 쉴 곳을 얻지 못하게 해 달라고 외칩니다. 피가 덮이지 않는다는 것은 억울하게 흘린 생명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분노를 일으키고 보복을 행하려고, 나는 그 성읍의 피를 맨바위 위에 놓았다. 덮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에스겔 24:8 · 본디새김
7절에서는 성읍이 그 피를 맨바위 위에 놓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그 피를 놓으셨습니다. 성읍이 흘린 피를 하나님이 심판의 증거로 드러내 놓으신다는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폭력을 지나간 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희생자가 죽고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피를 덮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성읍의 죄는 씻어 내면 없어질 표면적인 얼룩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실제로 흘린 생명의 피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불이 더욱 거세집니다.
빈 가마까지 달구지만 녹이 사라지지 않다
9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화가 있다, 피의 성읍아. 나도 불더미를 크게 쌓겠다.』」에스겔 24:9 · 본디새김
6절에서 이미 「화가 있다, 피의 성읍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첫 번째 선언 뒤에는 피 묻은 가마의 상태가 드러났습니다. 두 번째 선언 뒤에는 그 가마가 어떻게 될 것인지 보여 줍니다.
장작을 많이 쌓습니다. 불을 붙입니다. 고기를 푹 익힙니다. 마침내 뼈들까지 타 버립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 이어집니다.
「『빈 가마를 그 숯불 위에 놓아라. 가마가 뜨거워지고 그 구리가 달아올라, 그 안의 부정함이 녹아내리고 그 녹이 사라지게 하여라.』」에스겔 24:11 · 본디새김
성읍 안의 사람들을 벌하거나 내보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읍 자체가 오랜 죄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가마에 들러붙은 녹이 떨어지지 않듯, 예루살렘에는 쉽게 제거되지 않는 부정함이 남아 있습니다.
「『그 가마는 애쓰는 이를 지치게 했다. 그 많은 녹은 거기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 녹을 불 속으로.』」에스겔 24:12 · 본디새김
불을 세게 한다고 곧바로 깨끗한 가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불완전한 정화의 이미지가 13절에서 직접적인 선언으로 바뀝니다.
「『네 부정함 속에는 음란한 짓이 있다. 내가 너를 깨끗하게 했는데도 네가 깨끗해지지 않았으므로, 내가 네게 분노를 다 풀 때까지 너는 네 부정함에서 다시 깨끗해지지 못할 것이다.』」에스겔 24: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하나님이 정결하게 하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정결하게 하시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 그 부정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고발입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거나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24장은 여기서 갑자기 방향을 바꿉니다.
도시의 가마에서 한 사람의 가정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이번에는 비유 속 고기가 아니라 예언자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히브리어는 몇몇 표현의 문법적 관계가 불분명합니다. 가마를 닦는 수고가 헛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가마가 애쓰는 이를 지치게 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의 짧은 표현 역시 녹을 불에 넘기는 명령인지, 불 속에서도 녹이 남아 있다는 진술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13절에서 구체적으로 이전의 어떤 사건 하나를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예언자들을 통해 돌이키도록 경고하시고, 백성이 자신의 행실을 바꿀 기회를 주셨던 역사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구절을 특정한 개혁이나 정결 의식 하나에만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네 눈이 아끼는 이」 — 예언자의 집에서 일어난 비극
「사람의 아들아, 보아라, 내가 네 눈이 아끼는 이를 쳐서 네게서 빼앗겠다. 너는 통곡하지도 울지도 말고, 눈물도 흘리지 마라.」에스겔 24:16 · 본디새김
앞부분과 달리 이 말씀에는 비유라는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18절에서 밝혀집니다.
에스겔의 아내입니다.
성경은 아내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살아왔는지, 자녀가 있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의 아내를 그가 눈으로 아끼는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까?
본문은 아직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에스겔과 함께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이 명령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조용히 신음하여라. 죽은 이를 위해 애도하지 마라. 네 머리쓰개를 동여매고 네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빵을 먹지 마라.」에스겔 24:17 · 본디새김
그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고통을 통상적인 애도 의식으로 표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된 신앙인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에게 내려진 명령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수행해야 할 예언적 표징입니다.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애도 규칙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왜 이토록 가혹한 방식으로 에스겔에게 표징이 되게 하셨는지를 정서적으로 납득할 만한 말로 해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에스겔의 아내가 죽어야 했던 이유를 개인의 죄나 도덕적 책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언적 표징이 된 사건이지만, 아내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 그 일을 겪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읽으면서 그의 아내를 예언자의 사명을 위해 당연히 희생되어도 되는 사람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말하지 않는 정당화의 이유를 만들어 내기보다, 그 사건이 지닌 무거움을 인정하는 편이 더 충실한 읽기입니다.
나는 아침에 백성에게 말했다.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명령받은 대로 했다.에스겔 24:18 · 본디새김
세 개의 문장 사이에 에스겔의 감정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아내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임종 직전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에스겔이 밤새 무엇을 했는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아내를 아끼는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명령받은 대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독자는 설명되지 않은 슬픔을 마주하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슬픔을 겪은 사람은 평소의 차림을 바꾸거나, 얼굴 일부를 가리고, 맨발로 다니는 등의 행동으로 애도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갈 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어간 장면은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모습과 연결됩니다(사무엘하 15:30). 레위기 13:45에는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윗입술을 가리라는 규정도 나옵니다. 또한 예레미야 16:7에는 슬픔을 겪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음식을 나누는 관습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에게 금지된 행동들은 이러한 애도의 외적인 표현들과 관련됩니다. 본문의 「쳐서」라는 표현을 특정 질병이나 사고의 이름으로 바꿀 근거도 없습니다.
백성이 알아본 이상한 애도
백성이 내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이런 일이 우리에게 무슨 뜻인지 알려 주지 않겠습니까?」에스겔 24:19 · 본디새김
그들은 에스겔에게 아내가 왜 죽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슬프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가 하는 행동이 「우리에게 무슨 뜻인지」 묻습니다.
에스겔은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입니다.
에스겔 4장에서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새긴 벽돌을 놓고 포위를 재현했습니다. 5장에서는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나누었으며, 12장에서는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짐을 꾸려 나갔습니다. 따라서 백성은 에스겔의 이상한 행동이 단순한 개인적 습관이 아니라 자신들과 관련된 예언적 표징일 수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릅니다.
앞에서는 물건을 사용하거나 몸으로 어떤 행동을 수행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언자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의 실제 삶에서 벌어진 비극이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예언자가 겪는 불행에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거나, 신앙인의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이 언제나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표징이라고 밝힌 것은 바로 이 사건입니다.
에스겔은 백성의 질문에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아내의 죽음과 예루살렘의 멸망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성소도 「눈이 아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집안에 말하여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내가 너희 힘의 자랑거리이며 너희 눈이 아끼고 너희 마음이 소중히 여기는 내 성소를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온 너희 아들들과 딸들은 칼에 쓰러질 것이다.』」에스겔 24:21 · 본디새김
에스겔의 아내는 「네 눈이 아끼는 이」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소는 백성이 「눈이 아끼고」 마음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두 구절은 히브리어에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한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그의 아내였다면, 공동체에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성소였습니다.
그리고 둘 다 빼앗기게 됩니다.
성전은 단순한 국가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와 제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였고,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었으며, 민족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더욱 절실한 의미를 지녔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자기 집과 땅을 떠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성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고향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희망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바로 그 성소를 더럽히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소를 그들의 성소라고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성소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의 이름과 임재에 관계된 장소입니다.
에스겔 8–11장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우상숭배와 부정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10:18–19; 11:22–23). 이 배경을 고려하면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너지는 사건이라기보다,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못된 안전의 근거로 삼았던 믿음이 무너지는 사건으로 읽힙니다.
성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예루살렘을 지켜 주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전보다 작은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21절은 성전의 파괴에 관한 선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미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가족을 남겨 두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잃게 될 것은 성전이라는 건물만이 아닙니다. 자녀들의 생명도 위협받습니다.
이 구절은 공동체의 종교적 상실과 가족의 개인적 비극을 떼어 놓지 않습니다. 성전의 파괴는 실제 사람들이 죽고 가족들이 무너지는 전쟁의 일부입니다.
에스겔은 한 사람을 잃었고, 예루살렘은 한 성읍과 수많은 사람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상실을 모두 「눈이 아끼는 것」이라는 언어로 연결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어떤 도시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부모의 죽음이고, 누군가에게는 자녀의 죽음이며, 누군가에게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집의 상실입니다.
한 사람의 아내를 잃은 에스겔은 그 상실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울지 못하는 백성 —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짓눌린 것이다
「여러분도 제가 한 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콧수염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빵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에스겔 24:22 · 본디새김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에 관해서는 그들이 에스겔이 한 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두 상황이 같은 행동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행동이 일어나는 이유까지 반드시 같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머리쓰개는 여러분의 머리에 있고, 신은 여러분의 발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곡하지도 울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악 속에서 쇠잔해지며 서로를 향해 신음할 것입니다.」에스겔 24:23 · 본디새김
에스겔이 아내를 잃었을 때 「조용히 신음하여라」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백성도 서로를 향해 신음하게 됩니다. 이것은 통곡보다 덜한 슬픔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때로 슬픔은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상태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아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거운 침묵으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겪는 백성의 모습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설명하시면서 죄악을 언급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단순히 외국 군대의 압도적인 힘 때문에 발생한 재앙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경고를 거부하고, 우상숭배와 불의를 버리지 않은 공동체에 닥친 심판입니다. 백성은 재앙을 겪는 동시에 그 재앙이 자신들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마주하게 됩니다.
다만 이 구절을 모든 개인의 고난이 당사자의 특정한 죄 때문에 발생한다는 일반 법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 내려진 특정한 언약적 심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죽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도 아닙니다. 국가적 심판은 개인들의 삶을 차별 없이 파괴하며, 그 안에는 공동체의 잘못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사람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너희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그가 한 모든 일대로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그 일이 닥치면 너희는 내가 주 여호와야훼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스겔 24:24 · 본디새김
여기서 표징은 단순히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예언자의 능력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미리 보여 주는 행동입니다.
에스겔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백성은 왜 울지 못하는 것일까요? 한 가지 가능성은 재앙이 너무 크고 참혹해서 일반적인 애도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가족의 죽음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그들이 슬픔을 표현할 정상적인 생활의 질서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들의 죄가 초래한 심판이라는 사실 때문에 일반적인 애도의 표현이 제한된다는 데 강조점을 두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만을 분명하게 지정하지 않습니다.
침묵하던 입이 다시 열리는 날
「그리고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그들에게서 그들의 피난처, 그들의 자랑스러운 기쁨거리, 그들의 눈이 아끼는 것과 그들의 마음이 매달린 것,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빼앗는 날,」에스겔 24:25 · 본디새김
25절은 앞서 21절에서 언급했던 상실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백성이 자랑하던 힘, 기뻐하던 것, 눈으로 아끼던 것, 마음으로 갈망하던 것,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바로 그날 도망쳐 나온 이가 네게 와서 네 귀에 소식을 들려주지 않겠느냐?」에스겔 24:26 · 본디새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건이 알려집니다. 마지막에는 그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의 소식을 통해 결과가 확인됩니다.
「그날 네 입이 열려 도망쳐 나온 이와 말하게 되고, 더는 말 못 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야훼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스겔 24:27 · 본디새김
에스겔 3:26–27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게 하여 그가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는 입을 열어 백성에게 그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의 말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백성을 설득하며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을 열어 주실 때 그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입이 다시 열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약속은 에스겔 33:21–22에서 실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곳에는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도착하여 성읍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도망자가 도착하기 전날 저녁에 하나님의 손이 에스겔에게 임하였으며, 그 사람이 아침에 도착할 무렵 에스겔의 입이 열렸다고 기록됩니다.
24장은 예루살렘 심판을 중심으로 한 앞부분의 결정적인 마무리입니다. 25–32장에서는 여러 민족을 향한 심판의 말씀들이 이어지고, 33장에서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이 도착합니다.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로운 목자, 새 영과 새 마음, 회복된 땅과 성전에 관한 말씀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나 24:27 자체는 앞으로 전해질 회복의 내용을 아직 밝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직접 약속된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확인하는 소식이 도착하고, 에스겔의 입이 열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예언자의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멸망이 현실이 된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그들의 마음이 매달린 것」이라는 표현은 원어에서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람이 짊어진 짐이라는 의미를 떠올릴 수도 있고, 마음이 향하여 갈망하는 대상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 표현들과 함께 읽으면 백성이 마음 깊이 소중히 여긴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장면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26절의 「바로 그날」을 성전이 파괴된 바로 그 날짜에 도망자가 바벨론에 도착했다는 엄밀한 시간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지역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본문은 상실과 그 소식의 전달을 하나의 결정적 사건으로 연결해 말합니다.
맺음말 — 적어 둔 날짜와 열릴 입
에스겔 24장은 하나의 날짜를 적으라는 명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가마 비유는 예루살렘이 왜 심판을 받는지 알려 줍니다. 반면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은 그 심판이 얼마나 깊은 상실인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그 심판을 선언하셨다는 사실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상실을 작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한 사람이 그 성읍에서 도망쳐 나와 소식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 에스겔의 입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에스겔 앞에는 아내가 없는 집이 있고, 멀리 예루살렘에는 바벨론의 군대가 성벽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통곡하지 못한 채, 한 성읍의 죽음이 확인되는 날 자기 입이 다시 열리리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에스겔 24장은 그 사이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