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33장

이 장의 자리 · 33–39장 · 회복의 약속

열린 입과 듣지 않는 백성

한 사람이 성벽 위에 서 있습니다. 멀리서 적군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그는 뿔나팔을 붑니다. 위험을 알리는 소리가 성읍에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에스겔 33장은 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는 뜻밖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듭니다.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좋아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장 처음의 뿔나팔과 마지막의 사랑 노래는 모두 사람의 귀에 들리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두 소리가 요구하는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나팔은 위험을 알리고 행동을 촉구하지만, 노래는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못해서만 위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자신의 삶과 무관한 소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에스겔 33장은 심판 이후의 삶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새로운 성읍을 세우는 일보다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933장 본문 읽기 →

파수꾼의 뿔나팔 — 경고는 누구를 살리기 위한 것인가

에스겔 33:1–6 본문 →

에스겔은 먼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받습니다.

어떤 땅에 전쟁의 위험이 다가옵니다. 그 땅의 백성은 한 사람을 뽑아 파수꾼으로 세웁니다.

「그는 칼이 그 땅으로 오는 것을 보고 뿔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할 것이다.」에스겔 33:3 · 본디새김

위험을 발견했더라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다면 파수꾼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위험을 알렸지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결과를 전적으로 파수꾼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첫 번째는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지만 사람들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입니다.

「누구든 뿔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칼이 와서 그를 데려가면,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에스겔 33:4 · 본디새김

여기서 히브리어의 ‘피가 자기 머리에 있다’는 관용구는 본디새김처럼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누가 죽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두 번째 상황은 더욱 엄중합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칼이 오는 것을 보고도 뿔나팔을 불지 않아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칼이 와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데려가면, 그는 자기 죄악 때문에 끌려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을 파수꾼에게 묻겠다.」에스겔 33:6 · 본디새김

이것은 한 사람의 잘못이 다른 사람의 책임을 없애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고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알고도 침묵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두 책임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에게는 성읍의 모든 사람을 반드시 살려 내야 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경고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권한도 없습니다.

파수꾼의 책임은 사람들의 반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위험을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침묵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뿔나팔은 성읍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위험을 피할 수 있을 때 불립니다.

따라서 경고의 목적은 재난을 선고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경고를 받아들여 생명을 건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 다시 파수꾼이 된 에스겔

에스겔 33:7–9 본문 →

7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방금 설명한 비유를 에스겔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에스겔 33:7 · 본디새김

앞의 비유에서는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신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일반적인 파수꾼은 자기 눈으로 적군이 접근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것은 예언자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 권한을 제한합니다. 에스겔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전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사람들이 싫어할까 두려워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사명은 듣고 전하는 데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3:16–21에서 주어졌던 파수꾼의 사명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은 처음 예언자로 부름받았을 때 이미 이스라엘 집의 파수꾼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알리는 소식이 도착하기 직전에 같은 사명이 다시 강조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에스겔은 계속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백성은 성읍의 함락을 경험했지만, 그 사건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모두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전히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8–9절은 그 책임을 다시 설명합니다. 악인이 자기 죄악 때문에 죽더라도, 에스겔이 경고하지 않았다면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경고했는데도 그 사람이 돌이키지 않았다면 에스겔은 자기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악인이 반드시 죽는다는 선언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에게 「그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심판의 말씀 안에 돌이킬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 절망하는 백성에게 주어진 맹세

에스겔 33:10–11 본문 →

「너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에 말하여라. 너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반역과 죄가 우리 위에 있고, 우리는 그 때문에 썩어 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에스겔 33:10 · 본디새김

이 말은 앞서 이스라엘이 보였던 반응과 다릅니다.

에스겔서의 앞부분에서 백성은 때로 예언자의 경고를 믿지 않았고, 심판이 곧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스겔 12:22에는 환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담까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은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돌이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더 이상 살아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이 절망에 매우 강한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들에게 말하여라. 『내가 살아 있음을 걸고 맹세한다. 주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이켜라,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돌이켜라. 이스라엘 집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스겔 33:11 · 본디새김

하나님이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가벼운 위로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뜻을 확언하십니다.

백성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미래가 닫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 죄를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실 뿐 아니라, 심판을 겪은 사람에게도 돌이키라고 부르십니다.

이 장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백성이 자신의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생기지 않습니다.

죄를 인정하되 그 죄에서 실제로 돌아설 때 열립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6:39에서도 죄악 때문에 쇠약해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내용은 에스겔 18:23과 18:32에서도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33장에서는 백성이 실제로 죄 때문에 소멸해 간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다시 선포됩니다. ‘돌이키다’라는 말은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거나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의인의 과거도, 악인의 과거도 — 현재의 길을 대신하지 못한다

에스겔 33:12–20 본문 →

12절부터는 언뜻 듣기에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네 백성에게 말하여라. 의인의 의로움은 그가 반역하는 날에 그를 구하지 못한다. 악인의 악함도 그가 자기 악에서 돌이키는 날에는 그를 넘어뜨리지 못한다. 의인도 죄를 짓는 날에는 자기 의로움으로 살 수 없다.」에스겔 33:1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인간의 삶을 과거의 성적표처럼 평가하는 방식을 흔듭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의롭게 살아온 사람은 그 의로움 덕분에 앞으로도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오랫동안 악하게 살아온 사람은 이미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의롭게 살았다는 사실이 지금 불의를 행할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또 과거에 악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지금 돌이켜 바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지 않습니다.

「내가 의인에게 그가 반드시 살 것이라고 말해도, 그가 자기 의로움을 믿고 불의를 행하면 그의 모든 의로운 행위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행한 불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죽을 것이다.」에스겔 33:13 · 본디새김

핵심 표현은 「자기 의로움을 믿고」입니다.

본문은 의로운 행위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자기 의로움에 대한 신뢰가 불의를 행하는 근거가 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현재의 행동을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미 의로운 사람이므로 지금 행하는 일도 정당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사람의 현재 행동을 심판하십니다.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도 하나님이 과거의 사실을 실제로 잊어버리신다는 심리적 설명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과거의 의로운 행위가 현재의 불의에 대한 면책 근거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에서 악인에게 죽음이 선포되었더라도, 그가 돌이켜 공정과 의를 행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5절은 돌이킴의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악인이 담보로 잡은 것을 돌려주고 빼앗은 것을 갚으며, 불의를 행하지 않고 생명의 규정들을 따라 걸으면, 그는 반드시 살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에스겔 33:15 · 본디새김

이것은 추상적인 종교적 감정이 아닙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입힌 손해를 바로잡는 행동입니다.

출애굽기 22:26–27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4:10–13도 가난한 사람에게서 담보를 취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을 설명합니다. 레위기 6:1–5에서는 속임수나 착취로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악인이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빼앗은 것을 지금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돌이킴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일입니다.

물론 모든 잘못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피해 가운데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본문 역시 모든 결과가 사라진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렇게 돌이킨 사람의 죄가 그에게 불리하게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과거의 악함이 더 이상 그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공정과 의를 행하며 이전과 다른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구원을 행위로 사거나 과거의 죄를 스스로 갚아 없앨 수 있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돌이키는 사람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는 선언 안에서, 그 돌이킴이 실제 삶에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백성은 『주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평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들의 길이다.」에스겔 33:17 · 본디새김

왜 그들은 하나님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뒤 내용을 통해 한 가지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행위를 현재의 운명을 결정하는 고정된 기준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의롭게 살았던 사람은 앞으로 무엇을 하든 그 의로움의 혜택을 누려야 하고, 오랫동안 악하게 살았던 사람은 지금 돌이켜도 여전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여호와야훼의 판단은 불공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기준 자체를 문제 삼으십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주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아, 나는 너희 각자를 저마다의 길에 따라 심판하겠다.」에스겔 33:20 · 본디새김

‘각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나라 전체가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재난 속에서도 각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성읍이 함락되었습니다」 — 예언자의 입이 다시 열리다

에스겔 33:21–22 본문 →

우리가 유배된 지 십이 년째 열째 달 닷샛날,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내게 와서 말했다. 「그 성읍이 함락되었습니다.」에스겔 33:21 · 본디새김

이 한 문장은 에스겔서 전체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에스겔 24:25–27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날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에스겔에게 소식을 전할 것이며, 그날 그의 입이 열릴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 도망쳐 나온 사람이 오기 전날 저녁, 여호와야훼의 손이 내게 임했다. 도망쳐 나온 사람이 아침에 내게 왔을 때는 여호와야훼가 내 입을 열어 놓았다. 내 입이 열렸고, 나는 더는 말문이 막혀 있지 않았다.에스겔 33:22 · 본디새김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입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읍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백성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경고가 참된 말씀이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심판이 이루어진 뒤에도 계속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하나님의 말씀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말씀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외면할 수 없게 된 사건입니다.

앞으로 34장부터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회복될 백성, 새로운 마음과 영, 마른 뼈들의 소생과 같은 주제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33장은 그 회복의 이야기로 곧바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3:26–27에서 에스겔이 처음 예언자로 부름받았을 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입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에스겔이 그동안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의 말문이 막힌 상태를 예언자의 발언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의해 통제됨을 보여 주는 예언적 표징으로 읽기도 합니다. 여기서 연대에 관한 작은 어려움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르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유배 십이 년째라고 되어 있지만, 일부 히브리어 사본과 고대 역본에는 다른 연도가 전해집니다. 십이 년째라는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예루살렘 함락에서 소식이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셈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간격의 정확한 이유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가 많으니」 — 폐허 가운데서도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에스겔 33:23–29 본문 →

23절부터는 시선이 바벨론에 유배된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갑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땅의 이 폐허들에 사는 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은 한 사람이었는데도 이 땅을 차지했다. 우리는 수가 많으니, 이 땅은 우리에게 소유로 주어졌다.』」에스겔 33:24 · 본디새김

아브라함이 땅을 약속받은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수가 많거나 힘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1–7; 15:7–21).

창세기 18:19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야훼의 길을 지키며 공정과 의를 행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땅을 주장하면서, 그 약속과 함께 주어진 삶의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폐허에 남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사용합니다.

에스겔 11:15에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유배된 사람들을 향해 여호와야훼에게서 멀리 떠나라고 말하며, 땅이 자신들에게 소유로 주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비슷한 생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땅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의 소유권 주장을 직접 반박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피째 먹고, 너희 우상들을 향해 눈을 들며, 피를 쏟는다. 그러면서 이 땅을 차지하겠느냐?』」에스겔 33:25 · 본디새김

피째 먹는 행위는 레위기 17:10–14에서 금지됩니다. 피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들을 향해 눈을 드는 것은 여호와야훼가 아닌 다른 신들을 의지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피를 쏟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폭력과 연결됩니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여호와야훼에게 신실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자신들이 땅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칼에 의지했고, 역겨운 일을 행했으며, 저마다 이웃의 아내를 더럽혔다. 그러면서 이 땅을 차지하겠느냐?』」에스겔 33:26 · 본디새김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땅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의지하는 것은 자기들의 칼입니다. 그들은 약속을 말하지만, 자신들의 안전과 소유를 지키는 근거는 폭력적인 힘에서 찾습니다.

파수꾼은 다가오는 칼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의 칼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칼은 원래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할 위험의 이미지였는데, 이제 그들이 의지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공동체 안에서 정작 이웃의 가정과 관계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레위기 18:24–28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땅을 더럽히는 행위 때문에 주민들이 그 땅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앞의 10절에 등장한 유배민들과 대조됩니다. 유배된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반면 땅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당연히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미래를 포기합니다.

다른 한쪽은 자신들의 혈통과 지위 때문에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태도 모두 현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바라보지 못합니다.

27절에서는 폐허와 들판, 요새와 동굴에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폐허에 있는 사람들은 칼에 쓰러지고, 들판에 있는 사람들은 짐승에게 넘겨지며, 요새와 동굴에 있는 사람들은 역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28절에서는 이스라엘 산들마저 지나는 사람이 없는 황무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땅과 힘이 더 이상 그들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29절은 그들이 행한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그 땅이 황무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의를 행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 공정과 의를 행하며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관계 안에 있었습니다.

예언자가 사랑 노래가 되다 — 듣는 즐거움과 순종 사이의 거리

에스겔 33:30–32 본문 →

이제 에스겔은 다시 바벨론에 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향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성이 예언자를 거부하거나 공격하지 않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네 백성이 담장 곁과 집들의 문간에서 너에 관해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저마다 자기 형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 와서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오는 말이 무엇인지 들어 보자.』」에스겔 33:30 · 본디새김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긍정적인 변화처럼 보입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모습을 다르게 평가하십니다.

「내 백성인 그들은 백성이 모여들듯 네게 와서 네 앞에 앉아 네 말을 듣지만, 그 말대로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입으로는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부당한 이익을 따라간다.」에스겔 33:31 · 본디새김

‘내 백성’이라는 표현과 ‘그 말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나란히 나옵니다. 여기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그 말씀을 행하는 일이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15절에서 악인이 돌이킨다는 것은 담보로 잡은 것을 돌려주고 빼앗은 것을 갚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1절의 사람들은 여전히 부당한 이익을 따라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신의 경제적 행동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그가 말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은 뒤 어떻게 행동하는지에서 드러납니다.

「보아라, 너는 그들에게 목소리가 아름답고 현악기를 잘 타는 이가 부르는 사랑 노래와 같다. 그들은 네 말을 듣지만 그 말대로 행하지 않는다.」에스겔 33:32 · 본디새김

문제는 하나님의 경고를 단지 감상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태도입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에스겔의 말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을 아름다운 노래처럼 듣습니다. 이것은 심판을 경험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32절에서 예언자의 말씀이 사랑 노래와 비교되는 것도 31절의 ‘사랑’과 같은 표현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31절의 ‘사랑’은 단순히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애정과 호감을 드러내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합니다. 32절의 사랑 노래라는 표현은 에스겔이 실제로 음악에 맞추어 예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의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그 일이 닥칠 때」 —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다

에스겔 33:33 본문 →

에스겔 33장은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남깁니다.

「보아라, 그 일이 닥치고 있다. 그 일이 닥칠 때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에스겔 33:33 · 본디새김

에스겔의 목적은 자기 예언이 맞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도록 부름받은 파수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씀을 실제로 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뒤늦게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씀에는 비극적인 긴장이 있습니다. 말씀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시점이 반드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시점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경고가 현실이 된 뒤에야 그 경고가 옳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은 원래 그 위험이 닥치기 전에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 울렸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그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서 폐허에 남은 사람들에게 선포한 심판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전해진 예언의 성취를 넓게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을 특정한 단일 사건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표현은 에스겔 2:5에서 처음 예언자로 부름받을 때 주어졌던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이 반역하는 집안일지라도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들리는 경고

에스겔 33:1–33 본문 →

에스겔 33장이 마지막에 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듣고 실제로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입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실제로 방향을 바꾸며, 다른 사람에게 행한 불의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파수꾼의 나팔은 이미 울렸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졌다는 소식도 도착했습니다.

예언자의 입은 열렸고, 사람들은 그의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여전히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언자의 목소리를 아름다운 노래처럼 듣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아직 돌이킬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를 전하는 예언자는 지금도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라,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돌이켜라. 이스라엘 집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