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33장
이 장의 자리 · 33–39장 · 회복의 약속
열린 입과 듣지 않는 백성
한 사람이 성벽 위에 서 있습니다. 멀리서 적군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그는 뿔나팔을 붑니다. 위험을 알리는 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에스겔 33장은 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는 뜻밖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듭니다.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좋아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장 처음의 뿔나팔과 마지막의 사랑 노래는 모두 사람의 귀에 들리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두 소리가 요구하는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나팔은 위험을 알리고 행동을 촉구하지만, 노래는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서 에스겔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이 도착합니다.
그동안 에스겔이 경고했던 재난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바로 이 시점에 예언자의 입을 다시 열어 주십니다.
도시는 무너졌지만, 말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 33장은 심판 이후의 삶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일보다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파수꾼의 뿔나팔 — 경고는 누구를 살리기 위한 것인가
에스겔은 먼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받습니다.
어떤 땅에 전쟁의 위험이 다가옵니다. 그 땅의 백성은 한 사람을 뽑아 파수꾼으로 세웁니다. 파수꾼은 높은 곳에서 적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칼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면 뿔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그는 칼이 그 땅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뿔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할 것이다.」에스겔 33:3 · 두루새김
위험을 발견했더라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다면 파수꾼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위험을 알렸지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결과를 전적으로 파수꾼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첫 번째는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지만 사람들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입니다.
「누군가 뿔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칼에 목숨을 잃는다면, 그 죽음의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에스겔 33:4 · 두루새김
여기서 히브리어의 ‘피가 자기 머리에 있다’는 관용구를 두루새김은 「그 죽음의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로 옮겼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누가 죽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두 번째 상황은 더욱 엄중합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칼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뿔나팔을 불지 않아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했다고 하자. 칼이 닥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 그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나는 그 죽음의 책임을 파수꾼에게 묻겠다.」에스겔 33:6 · 두루새김
이것은 한 사람의 잘못이 다른 사람의 책임을 없애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고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알고도 침묵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두 책임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에게는 도시의 모든 사람을 반드시 살려 내야 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경고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권한도 없습니다. 파수꾼의 책임은 사람들의 반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위험을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침묵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뿔나팔은 도시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위험을 피할 수 있을 때 불립니다.
따라서 경고의 목적은 재난을 선고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경고를 받아들여 생명을 건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 다시 파수꾼이 된 에스겔
7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방금 설명한 비유를 에스겔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라.」에스겔 33:7 · 두루새김
앞의 비유에서는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신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일반적인 파수꾼은 자기 눈으로 적군이 접근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원문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예언자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면서 동시에 그 권한을 제한합니다. 에스겔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전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사람들이 싫어할까 두려워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사명은 듣고 전하는 데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3:16–21에서 주어졌던 파수꾼의 사명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은 처음 예언자로 부름받았을 때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파수꾼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알리는 소식이 도착하기 직전에 같은 사명이 다시 강조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에스겔은 계속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백성은 도시가 적의 손에 넘어가는 일을 겪었지만, 그 사건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모두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전히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8–9절은 그 책임을 다시 설명합니다. 악한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죽더라도, 에스겔이 경고하지 않았다면 그 죽음의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경고했는데도 그 사람이 돌아서지 않았다면 에스겔은 자기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는 선언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에게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심판의 말씀 안에 돌아설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어?」 — 절망하는 백성에게 주어진 맹세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라. 너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지른 반역과 죄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어. 우리는 그 죄 때문에 썩어 가고 있어.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어?』」에스겔 33:10 · 두루새김
이 말은 앞서 이스라엘이 보였던 반응과 다릅니다.
에스겔서의 앞부분에서 백성은 때로 예언자의 경고를 믿지 않았고, 심판이 곧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스겔 12:22에는 환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담까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은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돌이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더 이상 살아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이 절망에 매우 강한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들에게 전해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나는 악한 사람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가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가 왜 죽으려 하느냐?」에스겔 33:11 · 두루새김
하나님이 악한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가벼운 위로가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 뜻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백성은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어?」
여호와야훼께서는 되물으십니다.
「너희가 왜 죽으려 하느냐?」
백성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미래가 닫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여전히 돌아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죄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돌아갈 길까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백성이 자신의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생기지 않습니다.
죄를 인정하되 그 죄에서 실제로 돌아설 때 열립니다.
의인의 과거도, 악인의 과거도 — 현재의 길을 대신하지 못한다
12절부터는 언뜻 듣기에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 백성에게 전해라. 의로운 사람이 반역할 때는 그가 전에 의롭게 살았던 것이 그를 구하지 못한다. 악한 사람도 악에서 돌아서면 전에 저지른 악 때문에 쓰러지지는 않는다. 의로운 사람이라도 죄를 지으면 전에 의롭게 살았던 것으로 목숨을 지킬 수 없다.」에스겔 33:1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인간의 삶을 과거의 성적표처럼 평가하는 방식을 흔듭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의롭게 살아온 사람은 그 의로움 덕분에 앞으로도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오랫동안 악하게 살아온 사람은 이미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의롭게 살았다는 사실이 지금 옳지 않은 일을 할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또 과거에 악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지금 돌아서서 바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지 않습니다.
「내가 의로운 사람에게 반드시 살 것이라고 말했어도, 그가 자기 의로움을 믿고 옳지 않은 일을 하면, 그가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행한 옳지 않은 일 때문에 죽을 것이다.」에스겔 33:13 · 두루새김
핵심 표현은 「자기 의로움을 믿고」입니다. 본문은 의로운 행동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자기 의로움에 대한 믿음이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근거가 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현재의 행동을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미 의로운 사람이므로 지금 하는 일도 정당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사람의 현재 행동을 심판하십니다.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도 하나님이 과거의 사실을 실제로 잊어버리신다는 마음의 작용에 관한 설명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과거의 의로운 행동이 현재의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면하는 근거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에서 악한 사람에게 죽음이 선포되었더라도, 그가 돌아서서 공정하고 옳은 일을 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5절은 돌아서는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담보로 받은 물건을 돌려주고 빼앗은 것을 갚으며,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생명에 이르는 규정들을 따른다면, 그는 반드시 살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에스겔 33:15 · 두루새김
이것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이 아닙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입힌 손해를 바로잡는 행동입니다.
출애굽기 22:26–27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4:10–13도 가난한 사람에게서 담보를 받을 때 지켜야 할 원칙을 설명합니다. 레위기 6:1–5에서는 속임수나 착취로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악한 사람이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빼앗은 것을 지금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돌이킴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일입니다.
물론 모든 잘못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피해 가운데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본문 역시 모든 결과가 사라진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렇게 돌아선 사람의 죄가 그에게 불리하게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과거의 악함이 더 이상 그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공정하고 옳은 일을 하며 이전과 다른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구원을 행동으로 사거나 과거의 죄를 스스로 갚아 없앨 수 있다는 뜻으로 좁혀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돌아서는 사람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는 선언 안에서, 그 돌이킴이 실제 삶에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네 백성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공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정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다.」에스겔 33:17 · 두루새김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뒤 내용을 통해 한 가지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행동을 현재의 운명을 결정하는 고정된 기준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의롭게 살았던 사람은 앞으로 무엇을 하든 그 의로움의 혜택을 누려야 하고, 오랫동안 악하게 살았던 사람은 지금 돌아서도 여전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여호와야훼의 판단은 공정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기준 자체를 문제 삼으십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공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아, 나는 너희가 살아온 길에 따라 너희 각자를 심판하겠다.」에스겔 33:20 · 두루새김
「각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나라 전체가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재난 속에서도 각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해야 합니다.
「도시가 적의 손에 넘어갔어요」 — 예언자의 입이 다시 열리다
우리가 포로로 끌려온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5일,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온 사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도시가 적의 손에 넘어갔어요.」에스겔 33:21 · 두루새김
에스겔 24:25–27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날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에스겔에게 소식을 전할 것이며, 그날 그의 입이 열릴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이 오기 전날 저녁,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사람이 아침에 나에게 왔을 때는 이미 여호와야훼께서 내 입을 열어 주셨습니다. 내 말문이 열렸고, 나는 더 이상 말을 못 하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에스겔 33:22 · 두루새김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입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도시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백성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경고가 참된 말씀이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심판이 이루어진 뒤에도 계속됩니다.
앞으로 34장부터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회복될 백성, 새로운 마음과 영, 마른 뼈들이 되살아나는 일과 같은 주제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33장은 그 회복의 이야기로 곧바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이 처음 예언자로 부름받았을 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입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에스겔이 그동안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의 말문이 막힌 상태를 예언자의 말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따라 통제됨을 보여 주는 예언적 표징으로 읽기도 합니다. 두루새김이 따르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포로로 끌려온 지 열두째 해라고 되어 있지만, 일부 히브리어 사본과 고대 번역본에는 다른 연도가 전해집니다. 열두째 해라는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예루살렘이 적의 손에 넘어간 때부터 소식이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셈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간격의 정확한 이유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가 많으니」 — 폐허 가운데서도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23절부터는 시선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갑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땅의 이 폐허들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은 한 사람이었는데도 이 땅을 차지했어. 우리는 수가 많으니, 이 땅은 우리가 차지하라고 주어진 거야.』」에스겔 33:24 · 두루새김
아브라함이 땅을 약속받은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수가 많거나 힘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1–7; 15:7–21).
창세기 18:19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야훼의 길을 지키며 공정하고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땅을 주장하면서, 그 약속과 함께 주어진 삶의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 11:15에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향해 여호와야훼에게서 멀리 떠나라고 말하며, 땅이 자신들에게 소유로 주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에도 비슷한 생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땅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의 소유권 주장을 직접 반박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전해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고기를 피째 먹고, 너희 우상들을 우러러보며,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린다. 그러면서 이 땅을 차지하겠느냐?」에스겔 33:25 · 두루새김
고기를 피째 먹는 행동은 레위기 17:10–14에서 금지됩니다. 피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들을 우러러보는 것은 여호와야훼가 아닌 다른 신들을 의지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폭력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종교 의식을 조금 잘못 수행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여호와야훼에게 신실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자신들이 땅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칼에 의지하고 역겨운 일을 저질렀으며, 저마다 이웃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해 그 여자를 더럽혔다. 그러면서 이 땅을 차지하겠느냐?」에스겔 33:26 · 두루새김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땅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의지하는 것은 자기들의 칼입니다. 그들은 약속을 말하지만, 자신들의 안전과 소유를 지키는 근거는 폭력적인 힘에서 찾습니다.
파수꾼은 다가오는 칼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의 칼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칼은 원래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할 위험의 이미지였는데, 이제 그들이 의지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공동체 안에서 정작 이웃의 가정과 관계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레위기 18:24–28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땅을 더럽히는 행동 때문에 주민들이 그 땅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앞의 10절에 등장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반면 땅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당연히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미래를 포기합니다. 다른 한쪽은 자신들의 혈통과 지위 때문에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태도 모두 현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27절에서는 폐허와 들판, 요새와 동굴에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폐허에 있는 사람들은 칼에 쓰러지고, 들판에 있는 사람들은 짐승의 먹이가 되며, 요새와 동굴에 있는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배열은 사람이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서로 다른 장소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어느 곳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28절에서는 이스라엘 산들마저 지나는 사람이 없어 황폐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땅과 힘이 더 이상 그들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29절은 그들이 저지른 온갖 역겨운 일 때문에 그 땅이 황폐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의 약속을 자신들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근거로만 생각했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물으십니다.
예언자가 사랑 노래가 되다 — 듣는 즐거움과 순종 사이의 거리
이제 에스겔은 다시 바벨론에 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향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성이 예언자를 거부하거나 공격하지 않습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고, 예언자의 앞에 앉아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모습을 다르게 평가하십니다.
「내 백성이 무리를 지어 네게 와서 네 앞에 앉는다. 네 말을 듣지만 그대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부당한 이익을 좇는다.」에스겔 33:31 · 두루새김
「내 백성」이라는 표현과 「그대로 행하지는 않는다」라는 표현이 나란히 나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애정과 호감을 드러내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합니다. 그 마음이 향하는 곳은 「부당한 이익」입니다.
이 표현은 앞서 15절에서 등장한 회개의 구체적인 행동과 강하게 대조됩니다. 15절에서 악한 사람이 돌아선다는 것은 담보로 받은 물건을 돌려주고 빼앗은 것을 갚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1절의 사람들은 여전히 부당한 이익을 좇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그가 말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은 뒤 어떻게 행동하는지에서 드러납니다.
「보아라, 너는 그들에게 목소리가 아름답고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 부르는 사랑 노래와 같다. 그들은 네 말을 듣지만 그대로 행하지는 않는다.」에스겔 33:32 · 두루새김
문제는 하나님의 경고를 단지 감상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을 들으며 감동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지닌 진실성과 깊이를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심판을 경험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난 뒤에도, 그 잘못을 바로잡으라는 말씀을 듣고 즐기는 데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 일이 닥치면」 —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다
에스겔 33장은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남깁니다.
「보아라, 그 일이 닥치고 있다. 그 일이 닥치면,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음을 알 것이다.」에스겔 33:33 · 두루새김
에스겔의 목적은 자기 예언이 맞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도록 부름받은 파수꾼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뒤늦게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씀에는 비극적인 긴장이 있습니다. 말씀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시점이 반드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시점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경고가 현실이 된 뒤에야 그 경고가 옳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은 원래 그 위험이 닥치기 전에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 울렸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그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앞서 폐허에 남은 사람들에게 선포한 심판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전해진 예언이 이루어지는 일을 넓게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을 특정한 단일 사건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음」이라는 표현은 에스겔 2:5에서 처음 예언자로 부름받을 때 주어졌던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이 반역하는 백성일지라도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들리는 경고
장 처음에는 경고를 전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장 마지막에는 에스겔이 경고를 전하지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말씀은 단지 듣고 감동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그 삶을 돌이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수꾼의 나팔은 이미 울렸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졌다는 소식도 도착했습니다. 예언자의 입은 열렸고, 사람들은 그의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의 목소리를 아름다운 노래처럼 듣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를 전하는 예언자는 지금도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서라,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가 왜 죽으려 하느냐?」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