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인사와 복음
복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갈라디아서 1장은 뜻밖에도 한 사람의 이력으로 시작하여 그 사람에 대한 소문으로 끝납니다. 첫머리에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를 밝히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직접 만나 본 적도 없는 유대 지방의 교회들이 자신의 변화를 전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그사이에 바울은 놀라울 만큼 격렬한 말을 쏟아 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른 복음으로 옮겨 가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자신이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길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복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복음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 까닭은 갈라디아 교회가 직면한 위기가 단순히 교리 하나를 잘못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충분한지, 그 복음을 전한 바울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예루살렘의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인가 더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가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편지 전체를 읽으면 이 논쟁에는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음이 드러납니다(갈라디아서 2:3–5; 5:2–6; 6:12–13). 갈라디아 교회에 영향을 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조직에 속했는지까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것은 편지의 논증에서 확인됩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갈라디아가 소아시아 북부의 민족적 갈라디아 지역인지, 남부까지 포함한 로마의 갈라디아 속주인지는 분명하지 않고, 편지의 정확한 작성 연대도 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편지가 바울의 선교를 통해 신자가 된 공동체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유대 율법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기 권위를 세우려고 개인적인 성공담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반전을 보여 줍니다.
갈라디아서 1장의 중심에는 바울이 얼마나 위대한 사도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삶과 이방인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셨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편지의 첫 문장부터 시작되는 논쟁
고대 편지는 대개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바울도 그 형식을 따르지만, 자기 이름을 밝히자마자 길고 이례적인 설명을 덧붙입니다.
사도 바울, 곧 사람들에게서 온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된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사도가 된 나,갈라디아서 1:1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의 사도직이 어디에서 오지 않았는지를 먼저 밝힙니다. 그리스어 원문은 복수인 ‘사람들’과 단수인 ‘사람’을 구별하여, 사도직의 근원이 인간 집단에 있지 않으며 어떤 개인이 그 지위를 중개해 준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두 부정을 뒤집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사도직의 근원으로 제시합니다.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그분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왜 사도직을 소개하면서 부활을 언급할까요?
부활은 바울에게 과거에 일어난 기적 하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도직의 권위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그분을 따랐다는 경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관계가 없거나 그들의 사역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파생된 지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뒤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자신과 함께 있는 모든 형제가 편지를 보낸다고 적습니다(1:2). 혼자만의 권위를 주장하려는 사람처럼 보이는 첫 문장과 달리, 그는 자신을 형제들과 함께 있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독립적인 사도직을 주장하면서도 공동체로부터 독립된 신앙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인사 속에 이미 들어 있는 복음
3절의 「은혜와 평화」는 바울의 편지에서 익숙한 인사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이 은혜와 평화가 어떤 사건을 통해 주어졌는지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지금의 악한 시대에서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갈라디아서 1:4 · 본디새김
바울은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이미 말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내주셨고, 그 목적은 우리를 건져 내시는 것이며, 그 모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자신을 내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금의 악한 시대에서 건져 내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죄의 용서와 구원은 분리되지 않지만, 바울의 시선은 개인의 잘못을 용서받는 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대’는 죄와 악이 지배하는 현재의 세계 질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이 시대에서 건져 내신다는 것은 신자들을 현재의 세상에서 물리적으로 사라지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의 악한 질서가 더 이상 그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를 용서받을 가능성만 열어 놓고 나머지는 인간이 완성하게 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의 문장에서 구출의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뒤이어 나올 논쟁의 출발점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다른 종교적 조건을 충족해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연한 희생이나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빼앗긴 생명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라는 자기 내어주심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일치합니다. 아버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은 마지못해 희생하시는 두 존재처럼 그려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자기 내어주심이 하나의 구원 사건 안에서 만납니다.
그 결과 바울은 곧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1:5). 편지의 본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멘」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제 지키려는 복음이 인간의 성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관한 이야기임을 먼저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에게서 떠나는 일인가
5절의 찬양이 끝나자 편지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나는 놀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이렇게 빨리 다른 복음으로 옮겨 가고 있다니 말입니다.갈라디아서 1:6 · 본디새김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는 인사 다음에 수신자들을 향한 감사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고린도전서 1:4–9, 빌립보서 1:3–11, 데살로니가전서 1:2–10).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그런 감사의 단락 대신 책망이 곧바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우연한 생략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감사할 일을 찾기 전에 반드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책망하는 내용을 자세히 보면 예상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내가 가르친 교리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옮겨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종교적인 정보를 모아 놓은 체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더욱이 「옮겨 가고 있다」는 현재형입니다. 바울은 이미 모든 일이 끝났다고 선언하기보다, 지금 진행되는 위험한 변화를 지적하며 이를 멈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닌가
7절은 6절의 표현을 즉시 수정합니다.
사실 그것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을 뒤흔들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을 뿐입니다.갈라디아서 1:7 · 본디새김
앞서 ‘다른 복음’이라고 부른 것을 뒤이어 ‘실제로는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다’라고 바로잡는 흐름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듣고 있는 것은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뒤바꾼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어떤 조건을 완수해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규정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소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다른 조건을 덧붙여야 비로소 그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한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말하더라도 복음의 중심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악하다거나 유대인의 삶이 열등하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실제 쟁점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충분성을 어떻게 훼손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뒤의 2–5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증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자신들이 듣고 있는 가르침이 단순한 부가 설명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변질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려 합니다.
사도 자신도 복음 위에 있지 않다
바울은 이어서 놀라운 가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든, 하늘에서 온 천사든,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어긋나는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갈라디아서 1:8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참된 사도이므로 자기 말은 언제나 무조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든」, 자신도 복음과 어긋나는 것을 전한다면 같은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늘에서 온 천사까지 예로 드는 것은 전달자가 얼마나 놀라운 권위를 지녔는가보다 전달되는 내용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진실성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명성이나 초자연적인 위엄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8–9절에서 반복되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는 단순한 비난이나 불쾌감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저주 아래 놓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변질이 공동체에 가져오는 결과를 그만큼 심각하게 봅니다. 다만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서로 다른 성경 해석을 지닌 모든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겨냥하는 것은 자신이 앞에서 요약한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를 뒤바꾸는 가르침입니다.
그는 9절에서 같은 경고를 반복하며, 첫 번째의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을 「여러분이 받은 것」으로 바꿉니다. 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자리가 모두 나타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받은 복음은 바울 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 복음에 충실해야 하고 갈라디아 교회도 그 복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 복음의 판단 아래 놓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려 합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얻으려 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닐 것입니다.갈라디아서 1:10 · 본디새김
바울은 앞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도 심판의 기준에 비추어야 한다고 말했고, 이제 자신의 행동 또한 그 기준에 비춥니다. 여기서 ‘노예’는 자유로운 계약 관계의 고용인이 아니라 주인에게 속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므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19–23에서 여러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여러 사람에게 맞추어 섬겼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을 섬기는 것과 사람의 인정을 얻으려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바울은 왜 「아직도」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이 표현이 바울의 과거 삶을 염두에 둔 것인지, 그가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복음을 쉽게 만들었다는 비판에 대답하는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한때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신을 부릅니다. 무엇이 그를 바꾸어 놓았을까요?
조금 더 깊이
6절의 ‘다른’에는 그리스어 헤테론(ἕτερος)이, 7절의 ‘또 하나의’에는 알로(ἄλλος)가 쓰였습니다. 흔히 전자는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을, 후자는 같은 종류의 또 다른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두 낱말의 의미 영역은 실제 그리스어 용례에서 겹치기도 하므로, 언제나 그런 차이가 성립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의 문맥에서는 ‘다른 복음’을 곧바로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다’라고 바로잡는 수사적 흐름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무너뜨리려던 것을 전하는 사람
11절부터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사실, 형제 여러분,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님을 여러분에게 알립니다.갈라디아서 1:11 · 본디새김
곧,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전해 받지도 않았고 그 복음에 관해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이심으로 받았습니다.갈라디아서 1:12 · 본디새김
이 두 절을 하나로 뭉뚱그리면 바울의 논증에서 중요한 차이를 놓칩니다. 11절의 「사람의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님」은 복음이 인간적인 기원이나 판단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12절은 바울이 그 복음을 사람에게서 전달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었다는 설명입니다.
12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이심」은 원문에서 문법적으로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뜻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는 드러내시는 주체가 그리스도이시라는 데, 두 번째 읽기는 드러난 내용 자체가 그리스도이시라는 데 무게를 둡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하므로 두 번째 읽기에 중요한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12절에서는 인간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므로 첫 번째 읽기 역시 가능합니다. 원문의 속격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읽기 모두 바울의 복음이 인간이 종교적 경험을 종합하여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드러내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비한 체험을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전에 유대교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곧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극도로 박해하며 짓밟았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1:13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박해하던 대상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박해하던 당시에는 그 공동체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무너뜨리려고 했던 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였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14절에 따르면 그는 「내 조상들의 전통에 훨씬 더 열성적」이었으며 또래보다 앞서 나갔습니다. 이 열성은 조상들의 전통을 보존하고, 그것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열성은 구약과 유대 전통에서 무조건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25:6–13에서는 비느하스의 열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인정받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돌아보며 강조하는 문제도 열성이라는 감정 자체라기보다 그 열성이 향하던 방향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기 과거를 길게 밝히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기존의 삶에서 실패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찾아 나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속한 전통 안에서 남들보다 더 앞서 나가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과 타협할 이유보다 그들을 박해할 이유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이 무너뜨리려던 믿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반전을 통해 자신의 복음이 인간적인 진로 변경이나 기존 사도들의 교육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에서 인간적인 경험과 배움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여기서 설명하려는 것은 자신의 사도적 부르심과 복음 선포의 근원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가르는 한 단어, 「그러나」
14절까지의 이야기에서 중심에 있던 인물은 바울 자신입니다. 그는 박해했고, 짓밟았고, 남들보다 앞서 나갔으며, 조상들의 전통에 더욱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문장의 주어와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나를 따로 세우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갈라디아서 1:15 · 본디새김
앞에서는 바울이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가 중요해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 자기 마음의 과정을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울려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겨 간 사건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라는 말은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을 때에도 그의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무관한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박해 자체를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의 박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박해하던 사람을 다른 길로 돌려놓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엇을 나타내 보이셨는가
16절에서 마침내 그 부르심의 목적이 밝혀집니다.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그 아들을 복음으로 전하도록 그 아들을 내 안에 나타내 보이기로 기꺼이 결정하셨을 때, 나는 곧바로 살과 피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1:16 · 본디새김
바울에게 드러난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의 복음은 어떤 새로운 종교적 규정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박해하던 이들이 믿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하나님께서 드러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12절의 계시가 이곳에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그 드러내심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내 안에」는 ‘나에게’로도 이해할 수 있어서, 바울의 내적인 변화를 강조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바울에게 아들을 드러내신 사건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일이 그리스도를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정당하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곧바로 이방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갈라디아서의 논쟁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유대인의 율법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중에 자신이 선택한 선교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일과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일은 바울의 소명 안에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는 교회가 세력을 확장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신 목적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을까
‘살과 피’는 여기서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인간적인 조언이 언제나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직과 복음의 근원을 확립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이동 경로를 밝힙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에게 가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라비아로 떠났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습니다.갈라디아서 1:17 · 본디새김
바울이 그곳에서 조용히 지냈는지, 복음을 전했는지, 어느 지역을 방문했는지는 갈라디아서 1장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를 언급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방문 목적을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가서 복음을 배운 다음 선교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이라는 말로 이전 사도들의 존재와 선행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이어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들로부터 자신의 사도직을 부여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이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1:5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예레미야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부터 그를 구별하고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9:1에서는 종이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자신을 부르신 여호와야훼를 말하고, 그 종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더불어 민족들에게 빛이 되는 사명을 부여받습니다(이사야 49:5–6). 바울의 표현은 이 본문들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구별하셨다는 언어와 여러 민족을 향한 사명의 결합은 뚜렷한 주제적 연결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바울이 예레미야나 이사야의 종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6절의 「내 안에」는 원문의 엔 에모이로, ‘내 안에’와 ‘나에게’ 두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라비아는 당시 다마스쿠스 남쪽과 동쪽의 나바테아 왕국을 포함할 수 있는 지리적 명칭입니다. 바울이 나바테아 지역에서 선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읽기도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재구성이며 본문에 명시된 사실은 아닙니다.
삼 년 뒤, 십오 일 동안의 만남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 방문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얼마나 머물렀는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게바를 만나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의 곁에 십오 일을 머물렀습니다.갈라디아서 1:18 · 본디새김
게바는 베드로를 가리키는 아람어 이름입니다. 「만나 보려고」는 사람이나 장소를 직접 찾아가 알아보거나 만나 확인하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동사만으로 바울이 게바에게서 복음의 내용을 정식으로 배웠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방문의 시기와 길이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경험한 뒤 삼 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으로 갔고, 게바와 함께 머문 기간은 십오 일이었습니다. 십오 일 동안에도 두 사람이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고, 바울이 게바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목적은 그 기간에 아무런 정보 교환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게 된 근원이 게바의 가르침이 아니었으며,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신을 정식으로 교육하고 파견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야고보는 사도였는가
19절에서 바울은 게바 외에 만난 사람을 한 명 더 언급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형제 야고보 말고는 다른 사도를 만나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1:19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 논쟁이 되는 것은 「말고는」이 앞의 어떤 표현에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의 읽기에 따르면 바울은 게바 외에 다른 사도로 야고보를 만났다는 뜻이며, 이렇게 읽으면 주님의 형제 야고보도 사도라는 범주에 포함됩니다. 다른 읽기에 따르면 게바 외의 사도는 만나지 않았지만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별도로 만났다는 뜻이며, 이 경우 야고보가 사도였다는 결론은 이 구절만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두 해석을 검토할 여지를 남깁니다. 하지만 바울의 중심 논증은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게바를 만났고 야고보도 만났지만, 그 방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을 처음으로 형성해 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1:20).
자신의 경력에 대한 작은 착오를 피하려는 정도라면 이런 엄숙한 선언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방문의 순서와 만남의 범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와 직접 관련됩니다. 만약 그의 복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면, 바울의 주장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가 원래의 가르침을 불완전하게 전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가능성에 맞서 자신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에게서 복음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주장과 사도들 사이의 교제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뒤의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그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복음에 관하여 교제하고 서로의 사역을 인정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만나 보려고」(ἱστορέω)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히스토레사이가 단지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으려는 방문을 뜻하는지, 게바에게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보려는 목적까지 포함하는지는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이 방문은 사도행전 9:26–30에 기록된 바울의 초기 예루살렘 방문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나바가 바울을 소개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한 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반면, 갈라디아서는 방문 시기와 접촉한 사도들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두 기록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한쪽의 세부 사항을 다른 쪽에 무리하게 끼워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19절에서 번역상의 문제는 단순히 야고보를 만났느냐가 아니라,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 무리 안에 포함하여 서술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얼굴은 몰랐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이후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다고 말합니다(1:21). 그러고 나서 자신에 대해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 지방의 교회들에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1:22 · 본디새김
예루살렘의 특정 인물들을 만나는 것과 유대 지방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얼굴을 몰랐어도 그의 이야기는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이제는 자기가 전에 짓밟던 그 믿음을 복음으로 전한다」는 말만 듣고 있었습니다.갈라디아서 1:23 · 본디새김
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며 짓밟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23절에서는 그 박해를 받았던 교회들이 그에 관해 전해 들은 말을 소개합니다. 그 소문에는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전에는 박해하던 사람, 지금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
전에는 믿음을 짓밟던 사람, 지금은 그 믿음을 알리는 사람.
바울의 변화는 그 자신이 주장하는 개인적인 체험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에 박해하던 공동체들이 그의 달라진 삶을 전해 들을 만큼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그 믿음」은 바울 개인의 내면에 생긴 믿음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에서 그것은 그가 전에 없애려 했고 이제 복음으로 전하는 신앙, 곧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전에 반대하던 바로 그것을 이제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이 이야기는 뜻밖의 방식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나를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갈라디아서 1:24 · 본디새김
그들이 전해 들은 것은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 성공했다는 소식이 아니라,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 그들이 찬양한 분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1장의 시작과 맞닿아 있습니다. 바울은 첫 절에서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주어졌다고 주장했고, 마지막 절에서는 자신을 직접 알지도 못하는 교회들이 그의 변화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바울이 아닙니다.
물론 유대 지방 교회들의 찬양이 곧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주장하는 모든 신학적 논점을 검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 교회의 권위를 내세워 바울의 복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주장이 있었다면, 바울의 이야기는 그 권위를 단순히 자신의 반대편에 놓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 지방의 교회들 역시 그의 변화를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권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도와 교회가 궁극적으로 누구의 역사 앞에 서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갈라디아서 1장이 보여 주는 복음의 질서
이제 바울이 왜 자신의 과거로 편지를 시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복음을 만들어 내지 않았고, 그 복음에 새로운 조건을 덧붙여 구원을 완성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주심으로 구출의 길을 여셨습니다. 바울도 스스로 복음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박해하던 그리스도께 붙들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자랑할 만한 경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교회나 전통, 다른 신자들의 가르침이 모두 무가치하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이 형제들과 함께 편지를 쓰고 게바를 찾아가 만났으며, 유대 지방의 교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로 인정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권위를 의심하고 개인의 판단만 믿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인간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권위가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장의 마지막 장면은 바울의 승리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대 지방의 교회들은 바울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도착한 것은 소문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직접 만나 칭찬하지도 않았고, 그의 새로운 지위를 승인하는 자리에 모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한때 교회를 짓밟던 사람의 이름이 전해지고, 그 이름을 들은 교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으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