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예루살렘에서 만남

같은 복음, 함께하는 식탁

예루살렘에서는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안디옥에서는 식탁이 갈라졌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은 서로 대조되는 두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이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고, 이방인 디도에게도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함께 나누는 사이의 표로 오른손을 내밉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장면에서는 그 악수를 나눈 게바가 안디옥에서 이방 신자들과 함께 먹다가 갑자기 그들을 떠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안디옥에서는 이방인이 유대 관습을 따르도록 만드는 행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바울은 이 사건을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였을까요? 사람마다 음식에 관한 양심과 관습이 다를 수 있고, 함께 식사하지 않는 데도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는 식탁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다가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논하기 시작합니다. 할례와 식사 문제에서 출발한 논증은 마침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라는 고백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꾸었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달라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은 그 변화가 추상적인 신학적 선언에 머무를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가 하는 문제이며, 마침내 누구와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82장 본문 읽기 →

한 사람의 할례가 복음 전체의 문제가 되다

갈라디아서 2:1–5 본문 →

바울은 십사 년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와 디도가 함께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동역자였고, 디도는 그리스인이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문제가 된 것은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바울은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간 것입니다.

디도는 단순한 수행원이 아닙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여기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내가 올라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선포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내놓았는데, 유력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는 따로 내놓았습니다. 혹시 내가 달리고 있는 것이, 혹은 이미 달려온 것이 헛될까 염려해서였습니다.갈라디아서 2:2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확신하면서도, 그 복음이 헛되지 않을까 염려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도 자신의 복음이 참된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렇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걱정한 것은 복음의 내용이 거짓으로 드러날 가능성이라기보다 자신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수행한 사역이 공동체의 분열 때문에 열매를 잃을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달리다」라는 경주의 비유로 표현합니다. 이미 먼 길을 달려왔는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이방인 교회가 서로 다른 기준으로 신자들을 받아들인다면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고도 불완전한 신자로 취급받고, 바울이 세운 공동체와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는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이 인간의 승인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교회들이 같은 복음을 인정하며 교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디도는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던 그리스인 디도조차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2:3 · 본디새김

중요한 것은 단순히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가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에게 할례는 사소한 문화적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7:9–14에서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인 디도에게는 이 표징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자체를 무효로 만들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유대인의 몸에 새겨진 언약 표징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디도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할례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지위를 얻는 데 필요하다는 압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추상적인 원칙만 제시하지 않고,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 줍니다.

왜 바울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바울은 이 일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밝힙니다.

몰래 들여보내진 거짓 형제들 때문에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닌 자유를 엿보러 슬그머니 들어왔습니다.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2:4 · 본디새김

「거짓 형제들」은 그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평가입니다. 그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어떤 조직에 속했는지, 실제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는 본문만으로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왜 그토록 강경하게 대응했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할례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강요하는 일이 복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사도행전 16:1–3에서 유대인 어머니를 둔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으로 기록되고, 갈라디아서 5:6에서도 할례와 무할례 자체가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인 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입장을 모든 할례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반대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할례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강요되는 순간 발생합니다. 그때 할례는 문화적·종교적 표징의 자리를 넘어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충분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자유와 노예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주신 자유는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없이 자기 뜻대로 살아갈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서 벗어난 자유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한순간도 굽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 곁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2:5 · 본디새김

뜻밖의 표현은 「여러분 곁에」입니다.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디도를 위해 싸웠다고만 말하지 않고,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논쟁의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디도의 할례 문제에서 결정된 원칙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디도가 할례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갈라디아 사람들도 할례 없이 예수님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지키려 한 것은 디도 개인의 편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진리였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십사 년을 바울의 부르심부터 계산해야 하는지, 앞서 언급한 첫 예루살렘 방문부터 계산해야 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이번 방문을 사도행전 11:27–30의 구제 방문과 연결하는 견해와 사도행전 15:1–29의 예루살렘 회의와 연결하는 견해가 모두 있습니다. 사건의 유사성은 중요하지만, 두 기록이 같은 방문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기둥들이 발견한 것은 바울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갈라디아서 2:6–10 본문 →

무언가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이들로 말하자면 — 그들이 전에 어떤 사람이었든 나에게는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십니다 — 곧, 그렇게 여겨지는 이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2:6 · 본디새김

바울이 권위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의 핵심은 그들의 인격이나 사도직을 깎아내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특별한 지위 때문에 다른 기준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말은 신명기 10:17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의 지위에 따라 편파적으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설명하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이 원칙을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사도가 되었든, 그 사실 때문에 바울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복음을 수정할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은 나에게 할례받지 않은 이들을 위한 복음이 맡겨졌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에게 할례받은 이들을 위한 복음이 맡겨진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갈라디아서 2:7 · 본디새김

지도자들이 한 일은 복음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바울에게 주어진 일을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힘을 주어 할례받은 이들을 위한 사도의 일을 하게 하신 분이 나에게도 힘을 주어 이방 사람들을 위한 사도의 일을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2:8 · 본디새김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에게 힘을 주신 분과 바울에게 힘을 주신 분이 동일합니다.

두 사도의 사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서로 다른 두 복음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1장에서 바울은 이미 복음을 서로 다른 내용으로 나눌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2장에서는 그 하나의 복음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하나님께서 여러 일꾼을 세우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사역 분담을 엄격한 지리적·민족적 분리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사역하는 장면이 있고, 사도행전 13:14–16 등에는 바울이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배타적인 활동 구역이 아니라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의 주된 방향입니다.

악수의 의미

그래서 기둥이라고 여겨지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나에게 주어진 은혜를 알아보고, 나와 바나바에게 함께 나누는 사이의 표로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우리는 이방 사람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9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훌륭한 설교자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주어진 은혜」를 알아보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은혜는 바울이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사도적 사명과 이를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오른손을 내민 행동은 단순한 인사 이상입니다. 「함께 나누는 사이」(κοινωνία)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함께 나눔, 참여, 교제를 가리킵니다. 9절의 오른손은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과 같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동역자임을 인정하는 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의 첫 번째 장면이 완성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요청은 남겼습니다.

다만 그들은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을 기억해 달라고 했는데, 나도 바로 그 일을 하려고 힘썼습니다.갈라디아서 2:10 · 본디새김

이 요청은 얼핏 앞의 신학적 논쟁과 별개의 실무적인 부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기로 했다고 해서 두 사역이 서로 무관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들이 실제로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복음 안에서 서로 다른 민족이 연결되었다면, 그 연결은 사도들의 합의 문서나 악수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실제적인 돌봄으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야기가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가난한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10절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지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바울은 이후 고린도전서 16:1–4와 로마서 15:25–27에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언급하며, 로마서 15:27에서는 이방인들이 유대인 신자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했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를 펼칩니다.

식탁에서 일어난 일은 왜 복음을 무너뜨리는가

갈라디아서 2:11–14 본문 →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나는 그가 이미 유죄로 판명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면전에서 맞섰습니다.갈라디아서 2:11 · 본디새김

예루살렘에서는 악수를 나누었던 두 사람이 안디옥에서는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유죄로 판명되어 있었으므로」는 어떤 재판 기관이 정식 판결을 내렸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이 보기에 그의 행동이 이미 책망받아 마땅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사람이 야고보에게서 오기 전에는 그가 이방 사람들과 함께 먹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자 할례받은 쪽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물러나 스스로 따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갈라디아서 2:12 · 본디새김

고대 유대인에게 음식과 식탁은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11장의 음식 규정과 정결 관습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방인과 함께 먹는 일은 상황에 따라 그 규정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유대인이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이방인과의 식사를 절대적으로 금지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제2성전기 유대 문헌에는 식탁 교제를 허용하는 조건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나타납니다.

게바는 원래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되어야만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다고 요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에게서 몇 사람이 오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바울이 밝히는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합니다. 게바는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이미 실천하던 교제를 중단했습니다.

게바는 무엇을 강요했는가

게바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했을까요? 본문에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공개적으로 그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이면서도 이방 사람처럼 살고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 유대 관습을 따르라고 강요합니까?」갈라디아서 2:14 · 본디새김

게바가 입으로 강요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 이방인 신자들과의 식사를 중단하면, 그들과 계속 식탁을 나누는 것이 옳지 않다는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다시 같은 식탁에 앉으려면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도록 압박받을 수 있습니다.

명령하지 않아도 강요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 디도가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라고 할 때 쓴 동사는 14절의 「강요합니까」(ἀναγκάζω)와 같은 그리스어 동사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표징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안디옥에서는 게바의 행동이 이방인에게 유대 관습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게바 자신은 이미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있었으니, 바울은 그 사실을 근거로 반문합니다.

게바는 복음의 내용을 공개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그가 이미 인정했던 복음의 의미와 충돌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교리를 잘못 표현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의 실제 행동이 복음의 진리가 가리키는 바른 방향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믿음의 내용일 뿐 아니라 그 내용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바나바까지 끌려간 이유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부렸고, 그래서 바나바까지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갈라디아서 2:13 · 본디새김

바나바는 예루살렘 방문에서 바울과 함께 이방인의 자유를 위해 일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조차 게바의 행동에 휩쓸렸습니다.

바울이 이 일을 ‘위선’이라고 부른 까닭을 그들의 내면이 위선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그들의 행동이 이미 인정하고 실천했던 진리와 모순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의한 원칙을 안디옥의 식탁에서는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게바가 물러났고, 다른 유대인들도 그를 따랐으며, 바나바까지 그 흐름에 끌려갔습니다. 공개적인 행동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었으므로,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충돌 이후 게바가 어떻게 응답했는지, 두 사람이 어떻게 화해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기를 거부한다면, 그 인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질문이 다음 단락의 의롭게 됨에 관한 논증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정확히 무엇을 요구했는지, 그들이 야고보의 공식적인 지시를 전달했는지, 식탁의 구체적인 문제가 음식 종류였는지 정결 관습이었는지, 아니면 이방인과의 교제 자체였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재구성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14절의 「똑바로 걷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바른 방향으로 걸어간다는 뜻을 지닙니다.

왜 식탁 문제에서 '의롭게 됨'을 이야기하는가

갈라디아서 2:15–16 본문 →

우리는 나면서부터 유대 사람이고 이방 사람 출신의 죄인이 아니지만,갈라디아서 2: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바울이 유대인은 태어날 때부터 의롭고 이방인은 본래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도덕적 본성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언약 백성으로 이해하고 이방인들을 그 밖에 있는 사람들로 구별하던 관점을 논증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는」이라는 말로 바울은 게바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유대인인 자신들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사람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2:16 · 본디새김

바울은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으니 믿음으로 구원받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과 게바를 포함한 유대인 신자들조차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되기 위해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신자 자신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면, 왜 이방인 신자는 거기에 더해 유대인의 율법적 정체성을 획득해야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까? 바울은 식탁 문제를 신학적 문제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식탁 문제 속에 이미 들어 있는 신학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

원문의 낱말은 의롭다고 인정하거나 선언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법정에서의 판결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사람이 점차 도덕적으로 훌륭해져 가는 과정만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문맥에서 이 문제는 개인의 판정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면, 그 사람이 어느 민족 출신인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어떤 위치를 차지합니까? 바울에게 의롭게 됨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도 영향을 주는 진리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무엇인가

16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세 번 반복합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바울 신학의 오랜 해석 쟁점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인간이 율법을 행한 공로를 근거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중심으로 이 표현을 이해했습니다. 다른 해석은 할례와 음식 규정과 같은 율법의 실천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경계 역할을 했으며, 바울은 그러한 율법적 표지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요구하는 일을 문제 삼는다고 봅니다.

논쟁이 할례와 식탁에서 시작되었으므로 2장의 직접적인 문맥은 두 번째 읽기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16절 마지막의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사람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은 특정한 관습을 넘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근거를 말하므로, 바울의 주장을 두 가지 관습의 문제로만 제한하기도 어렵습니다. 두 관점은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다루는 구체적인 문제는 율법의 표지를 통한 공동체의 구별이지만, 그의 대답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닿아 있습니다.

믿음인가, 예수님의 신실하심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라는 표현의 그리스어(디아 피스테오스 이에수 크리스투)는 예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을 뜻할 수도 있고, 예수님 자신의 신실하심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는 같은 절에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라고 명시하는 것을 중요한 근거로 삼습니다. 두 번째 읽기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신실하게 순종하시고 사명을 이루신 행위에 주목하며, 20절에서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하는 것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두 읽기는 그리스어 속격의 문법만으로 확정하기 어려우며, 신약학에서도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바울은 인간의 믿음을 예수님과 무관하게 구원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공로처럼 제시하지 않으며,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라는 고백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의 논증에는 믿는 인간과 그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모두 등장하시고,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신 일입니다.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면, 인간은 무엇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예수님입니다. 그 대답이 옳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받아들이신 사람을 인간의 관습 때문에 밀어내는 행동은 복음의 중심과 충돌합니다.

조금 더 깊이

‘율법의 행위’ 논의에서는 사해 문서 4QMMT도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 문서에는 ‘율법의 행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이 등장하며, 구체적인 율법 규정들이 공동체의 정체성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문서의 용례만으로 바울의 표현이 동일한 범위를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16절 마지막 표현은 시편 143:2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시편에서 시인은 살아 있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으므로 자기 종을 심판하지 마시기를 여호와야훼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신실하심에 호소합니다. 바울의 표현은 시편의 문장과 완전히 같지 않으므로 직접 인용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이 자기 의로움을 내세울 수 없다는 공통 주제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섬기신다는 말인가

갈라디아서 2:17–18 본문 →

바울은 이제 자신의 논증에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을 다룹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기를 구하면서 우리 자신도 죄인으로 드러났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섬기는 이라는 말입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갈라디아서 2:17 · 본디새김

왜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까?

안디옥 사건을 고려하면 한 가지 가능한 논리가 드러납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먹으면, 전통적인 율법의 기준에서는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의 경계를 넘어섰고, 그 결과 우리 유대인마저 죄인이 되었다면, 결국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로 이끄신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는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되기를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임을 깨닫는다는 의미로 봅니다. 이 경우 바울의 반박은 예수님께서 죄를 드러내신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죄의 조력자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확보하려던 이전의 관계가 달라지는 일을 죄라고 규정하는 논리를 거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나 자신이 율법을 어긴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18 · 본디새김

이미 철거한 것을 다시 건축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전에 했던 행동을 뒤집는 셈입니다.

「내가 헐어 버린 것」은 안디옥 사건의 흐름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여 함께 교제하지 못하게 만들던 율법적 경계와 연결되고, 보다 넓게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이전의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실제 공동체의 관계를, 후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근거를 강조하지만, 바울은 이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게바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다시 물러선 일은 예수님을 통해 허물어진 것을 인간의 두려움 때문에 다시 세우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바꾸어 놓으신 관계를 이전의 질서로 되돌리는 일이야말로 복음에 어긋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한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도 등을 돌렸다는 뜻입니까?

율법에 대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2:19–20 본문 →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갈라디아서 2:19 · 본디새김

율법에 대해 죽었다면 율법과 관계가 끝났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죽음이 바로 율법을 통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의 해석은 율법이 죄를 드러내고 인간에게 그 한계를 깨닫게 하므로, 율법 자체의 작용을 통해 율법에 의존하려는 삶이 끝났다는 데 무게를 둡니다. 다른 해석은 율법 아래에서 죄인이 받아야 할 저주의 문제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으며,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율법과의 이전 관계에서 벗어났다고 보고, 갈라디아서 3:13과 연결합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에 근거가 있으며, ‘율법을 통해’라는 짧은 표현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바울이 바로 이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는 사실은 십자가가 그의 죽음 이해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대한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된 사건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모두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뜻도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14에서 바울은 이웃 사랑을 통해 온 율법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는 옛 관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는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지금 나는 육신으로 살면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삽니다.갈라디아서 2:20 · 본디새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와 「지금 나는 육신으로 살면서」가 한 문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인격이나 자기 의식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여행하고, 설교하고, 때로는 게바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바울의 삶을 지탱하고 규정하는 중심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율법적 성취와 종교적 지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사람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συσταυρόομαι)의 동사는 완료형으로, 이미 일어난 사건의 결과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매일 새롭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을 먼저 제시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삶을 이미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은 삶의 종결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사시는 삶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표현을 순전히 개인의 내적 영성으로만 읽으면 앞의 논증과의 연결을 놓치기 쉽습니다. 바울은 지금 안디옥에서 일어난 공동체의 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행위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고 자기 의로움을 확보하려던 이전의 삶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면, 그 사실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단순히 공동체 윤리에 관한 비유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실제로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새로운 생명의 관계가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며, 그 관계가 공동체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 이방인 디도, 게바와 바나바,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이야기하던 논증의 절정에서 문장이 갑자기 한 사람에게 집중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1:4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20에서는 「나를 위해」로 시선이 좁혀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동체의 문제를 잊고 개인적인 신앙 체험으로 도피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으로 살아가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박해하며 짓밟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새로운 삶은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성취했는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의해 설명됩니다.

이 대목에서 2장의 모든 논증은 중심을 찾습니다.

왜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까? 왜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을 식탁에서 구별해서는 안 됩니까? 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됩니까? 바울의 대답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기 내어주심은 사람의 종교적 자격에 따라 차등적으로 베풀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울 같은 사람에게까지 이르렀다면, 바울은 그 사랑을 인간이 세운 다른 조건에 종속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헛된 일이 될 수 있는가

갈라디아서 2:21 본문 →

바울은 자신의 논증을 마무리하면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제시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로 돌리지 않습니다. 의가 율법을 통해 온다면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까닭 없이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2:21 · 본디새김

사람이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의롭게 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일은 「아무 까닭 없이」 일어난 것이 됩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생각을 은혜에 덧붙이는 추가적인 요구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바꿀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방인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도 유대인의 율법적 표징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바울은 그 모순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에게 사랑과 순종의 삶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 자체가 그 반대의 사례를 보여 줍니다. 바울은 게바의 실제 행동이 복음과 어긋난다고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다만 삶의 순서가 달라집니다. 인간은 자신의 종교적 성취로 예수님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근거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은혜는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한 대가가 되지 않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무효로 돌리다」에 해당하는 원어(ἀθετέω)는 무효로 만들다, 배척하다, 폐기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아무 까닭 없이」로 옮긴 원문의 도레안(δωρεάν)은 문맥상 헛되이, 이유 없이, 아무런 목적 없이를 뜻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값을 받지 않고 죽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이 의를 가져다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구원에 필수적인 사건일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식탁 사이의 거리

갈라디아서 2:1–21 본문 →

처음에는 별개로 보였던 두 사건은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인 디도가 할례 없이 온전한 신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가, 안디옥에서는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가가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두 문제 모두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대답을 찾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관습보다 이방인의 관습이 더 자유롭거나 낫다는 주장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화적 차이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바울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하신 사람에게 인간이 추가적인 종교적 자격을 요구하여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으로 인정받는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게바의 식탁 문제를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신앙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교훈에서 멈추지 않고, 왜 그런 행동이 복음에 어긋나는지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을 내주셨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그 구원을 완성하려 할 필요가 없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신자에게 예수님 외의 자격을 요구하여 온전한 교제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올바르게 고백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그 십자가가 허문 경계를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모순을 안디옥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한때 함께 먹던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바가 두려움 때문에 물러서자 다른 유대인들도 그를 따랐고 바나바까지 끌려갔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 유대 관습을 따르라고 강요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단순히 함께 식사할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심으로 열어 놓으신 구원의 자리에, 인간이 다시 문턱을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