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믿음과 약속

먼저 주신 약속에 누가 조건을 붙이는가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수백 년 전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할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두 사건은 오랜 시간과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일어났지만, 바울은 그 사이에서 같은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받아들이고 복을 주시는 일은 인간이 먼저 종교적 자격을 갖추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성경을 펼쳐 보이기 전에 먼저 묻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것은 언제였으며, 어떻게 받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시점을 살펴본 뒤, 마침내 예수님을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상속자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권위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와 신명기, 하박국과 레위기를 불러와 율법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앞 장에서 그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3장에서는 그 주장이 갑자기 만들어진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복을 주셨다면, 왜 그 뒤에 율법을 주셨을까요? 율법이 필요했다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바울은 바로 이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이 장을 이끄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읽는 시간 35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여러분은 이미 무엇을 받았습니까?

갈라디아서 3:1–5 본문 →

아,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여러분의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또렷이 내걸리셨는데 말입니다.갈라디아서 3:1 · 본디새김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하며 시작합니다. ‘홀렸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사악한 영향을 끼치거나 홀린다는 뜻으로 쓰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 마술을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분명하게 보았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듯한 상황을 강한 수사적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이 분명하게 보았어야 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렷이 내걸리셨는데」(προγράφω)에 해당하는 동사는 공개적으로 게시하거나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그들 「눈앞에」 생생하게 제시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십자가에 관한 정보를 잊어버렸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마치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듯 행동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길게 논증하기 전에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에게서 이것 하나만 들어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의 행위로 영을 받았습니까, 들은 것에 대한 믿음으로 받았습니까?갈라디아서 3:2 · 본디새김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정말로 성령을 받았는지를 놓고 다투지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전제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묻습니다.

이방인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하시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에스겔 36:26–27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새 마음을 주고 그들 안에 자신의 영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엘 2:28–29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어질 미래를 말합니다.

각 본문에는 고유한 역사적 맥락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을 주시는 일이 그분의 구원과 백성의 회복을 나타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이 이미 그 영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무엇이 필요합니까? 바울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2절의 「들은 것에 대한 믿음」은 들은 것을 믿는 행위로도, 믿음에 관한 소식을 듣는 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바울의 질문은 동일한 대비를 유지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를 완수한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지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으로 시작한 일을 육으로 완성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영으로 시작해 놓고 이제 육으로 완성하려 합니까?갈라디아서 3:3 · 본디새김

여기서 「영」과 「육」의 대조를 단순히 영혼과 육체의 대립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영을 통해 시작하신 일을 이제 인간적인 조건과 능력으로 완성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논쟁이 할례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육」이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할례는 실제 사람의 몸에 새기는 표징입니다. 갈라디아서 6:12–13에서도 바울은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과 육체에 관한 자랑을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곳의 「육」에는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는 삶과 대조되는 인간적인 능력과 기준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그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는 할례와 같은 육체적 표징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시작과 완성의 관계입니다.

성령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왜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 시작을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고 다른 방식으로 완성하려 합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어떤 자격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이미 받은 성령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들이 장차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묻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무엇을 주셨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겪은 많은 고난을 언급하며, 지금 그들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이미 겪은 일들이 헛된 것이 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가 덧붙인 「정말로 헛된 것이었다면」은 그들의 지난 일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무효가 되었다는 최종 판결이라기보다, 아직 그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드러내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들에게 영을 주시고 여러 기적을 이루시는 일을 언급합니다(3:5). 바울의 논증은 과거의 회심 경험에만 근거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계시며,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하시는 방식을 바꾸셨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러옵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들은 것에 대한 믿음」(아코에 피스테오스)에는 번역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들은 것을 믿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첫 번째 읽기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한 데 무게를 두고, 믿음에 관한 소식을 듣는 일을 가리킨다는 두 번째 읽기는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 자체에 무게를 둡니다. 또 4절의 「고난을 받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넓게는 어떤 일을 겪었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박해를 가리킨다는 읽기와, 성령을 받은 뒤 겪은 신앙적 경험들을 넓게 가리킨다는 읽기가 논의됩니다. 본문만으로 그 경험의 세부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할례받기 전의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한 것

갈라디아서 3:6–9 본문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이 그에게 의로 헤아려진 것과 같습니다.갈라디아서 3: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창세기 15:6에서 옵니다. 그런데 문장은 「…와 같습니다」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 것과 지금 말하려는 것을 비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일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일을 서로 견줍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처럼,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이 의로 헤아려졌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은 아직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시고 그의 후손도 그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5:5).

그때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실현을 먼저 확인한 뒤 믿은 것이 아니라, 아직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의로 헤아려졌습니다. 「헤아리다」는 계산하거나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회계의 장부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핵심은 믿음이 물질적인 재산처럼 축적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는 시간적 순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의로 헤아려진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할례가 언약의 표징으로 주어지는 사건은 창세기 17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었고, 할례를 받기 전에 그의 믿음이 의로 헤아려졌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4:9–12에서도 명시적으로 활용하는 논증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이들의 조상일 뿐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 반드시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그러므로 믿음에 기대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인 줄 아십시오.갈라디아서 3:7 · 본디새김

바울은 아브라함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혈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누구를 복 주시려 했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실 것을 내다보고,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미리 복음을 전했습니다.갈라디아서 3:8 · 본디새김

이 말은 창세기 12:3의 약속과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된다는 약속은 창세기 18:18, 22:18 등에서도 반복됩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단순히 자기 가족의 번영을 약속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 주어진 복은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고, 아브라함의 선택은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이 처음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방인 교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약속 속에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담겨 있었다고 읽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방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일이 그 약속의 성취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은 … 미리 복음을 전했습니다」는 성경을 미래를 내다보고 말하는 인물처럼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의 뜻을 밝히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약속을 단순히 ‘옛날에 주어진 축복의 말씀’이라고 부르지 않고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단절된 새로운 종교의 출발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복음에서 오래전에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민족들에게 이르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기대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갈라디아서 3:9 · 본디새김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을 대신하는 새로운 민족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신 목적은 마침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는 데까지 이릅니다.

이렇게 보면 갈라디아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아브라함에게 속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약속을 오히려 좁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 하셨는데, 그 복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하나의 민족적 표징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약속의 방향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모든 민족을 향한 것이었다면, 율법은 왜 복과 저주를 엄격하게 구분합니까?

복의 약속에서 저주의 문제로

갈라디아서 3:10–14 본문 →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은 복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저주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의 행위에 기대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으니 말입니다.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받은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10 · 본디새김

바울의 첫 문장은 율법의 행위에 기대는 사람들이 저주 아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가 인용하는 신명기 27:26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관한 말씀에서 율법의 행위에 기대는 사람도 저주 아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일까요?

신명기 27장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야훼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언약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26절의 저주는 율법을 지키려 한다는 사실 자체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언됩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든 것」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요구에 주목합니다. 율법에 기대어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해야 하지만, 율법의 요구를 어기는 사람은 바로 그 율법에 따라 저주 아래 놓입니다.

바울의 주장과 신명기의 문장을 연결하는 해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읽기는 인간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저주를 피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는 이스라엘이 실제로 율법을 어겨 언약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역사를 중요하게 보고, 바울이 그 역사적 상황과 예수님의 구원 행위를 연결하여 논증한다고 이해합니다.

두 해석 모두 바울이 율법의 요구와 인간의 불순종 사이에 있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그러나 신명기 27:26만으로 모든 인간이 율법의 모든 명령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명제가 직접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부분에는 바울의 더 넓은 논증과 인간의 죄에 대한 이해가 작용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율법의 요구를 조금 낮추자고 제안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의 다른 말씀들을 나란히 놓습니다.

두 가지 ‘삶’과 두 가지 ‘저주’

율법으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11 · 본디새김
그런데 율법은 믿음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안에서 살 것이다」라고 합니다.갈라디아서 3:12 · 본디새김

하박국 2:4와 레위기 18:5를 인용한 두 말씀에는 똑같이 「살 것이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에서는 믿음이, 레위기에서는 율법의 규정들을 행하는 일이 살아감과 연결됩니다.

하박국 2장의 본래 상황은 불의와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묻는 예언자의 고뇌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며 의인이 믿음, 곧 신실한 신뢰 가운데 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박국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레위기 18:5의 본래 문맥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며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거기에서 율법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언약적 삶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두 구약 본문이 원래부터 서로 모순되도록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두 본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비추어 읽고, 율법을 통한 의로움과 믿음을 통한 의로움을 서로 다른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성경에서 네 말씀을 연결합니다. 10절은 신명기 27:26의 저주, 11절은 하박국 2:4의 삶, 12절은 레위기 18:5의 삶, 13절은 신명기 21:23의 저주를 다룹니다. 그 결과 논증의 바깥에는 저주에 관한 두 인용이, 가운데에는 삶에 관한 두 인용이 놓입니다.

이 배열은 바울의 질문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어떻게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삶이 주어질 수 있습니까?

저주가 선언된 나무에서 이루어진 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값 주고 사 내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사람은 다 저주받은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13 · 본디새김

바울이 인용하는 신명기 21:23의 규정은 죽임당한 범죄자의 시신을 나무에 매달았을 때 그 시신을 밤새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와 관련된 상태에 있으므로, 그 시신을 그대로 두어 땅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규정의 직접적인 대상은 로마 시대의 십자가형이 아니지만,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이 나무와 저주의 언어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신 죄인이셨다는 증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저주 아래 놓인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저주의 자리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한 순교나 억울한 처형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저주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다고 하지 않고, 「저주가 되심으로」 우리를 건져 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행위는 멀리서 조언하거나 위험을 피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값 주고 사 내셨습니다」는 값을 치르고 사들여 어떤 지배나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낱말로 저주 아래 놓인 사람들의 처지가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달라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본문은 누구에게 얼마의 값을 지불했는지 같은 거래의 세부 사항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심으로 이루신 구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어떻게 담당하셨는지에 관한 후대의 모든 속죄 이론이 이 한 구절에 상세하게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고, 그 결과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들에게 이르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믿음을 통해 약속된 영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14 · 본디새김

여기에서 3장의 처음과 중간이 만납니다. 1–5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물었고, 6–9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이 모든 민족을 향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14절에서 두 주제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미 경험한 성령의 선물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관계없는 별도의 은혜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민족들에게 이른 약속의 성취로 이해합니다.

바울에게 구원은 단순히 저주를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주에서의 해방은 복을 받기 위한 길을 열어 주고, 그 복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는 그리스어 문장의 연결 관계에 따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살 것이다’라는 강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의 논증에서는 믿음과 의로움,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주어진 율법이 먼저 하신 약속을 바꿀 수 있는가

갈라디아서 3:15–18 본문 →

형제 여러분, 사람의 일에 빗대어 말합니다. 사람의 유언이라도 일단 확정되면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거기에 덧붙이지 못합니다.갈라디아서 3:15 · 본디새김

바울이 유언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약속에 무엇인가를 나중에 덧붙이는 일이 가능한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언」과 17절의 「언약」에 해당하는 원문의 낱말은 모두 디아테케(διαθήκη)입니다. 이 낱말은 그리스어에서 유언과 같은 법적 처분을 가리킬 수 있고,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법적 약정에 관한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확정하신 언약으로 논증을 옮깁니다.

다만 고대의 모든 유언이 절대로 변경될 수 없었다는 일반적인 법률 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5절을 유언에 관한 비유로 읽을 것인지, 확정된 언약에 관한 비유로 읽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하신 약속을 나중의 제도가 임의로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전해졌습니다. 성경은 여럿을 가리키듯 「그리고 후손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한 사람을 가리키듯 「그리고 네 후손에게」라고 합니다. 그 후손은 그리스도이십니다.갈라디아서 3:16 · 본디새김

이 주장은 현대 독자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씨·후손’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문법적으로 단수형이지만 한 개인뿐 아니라 집합적인 후손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고, 그리스어 낱말도 비슷한 의미 영역을 가집니다. 따라서 ‘후손’이라는 단어가 단수형이라는 사실만으로 원래부터 반드시 한 사람만을 가리켰다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해석은 두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집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수형 명사를 예수님 한 분에게 집중시켜 약속의 성취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창세기 22:18처럼 특정한 후손을 향한 의미를 읽을 수 있는 본문에 주목하여, 바울이 그 약속을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 절의 중요성은 단어의 단수형 자체보다 바울이 그 후손을 누구라고 밝히는가에 있습니다.

「그 후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약속의 후손이 예수님 한 분이라고 말하고, 29절에서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앞의 주장을 스스로 뒤집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약속의 중심에 서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백삼십 년의 의미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확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나타난 율법이 무효로 만들어 그 약속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17 · 본디새김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졌고, 그 뒤에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이 숫자로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율법보다 약속이 먼저였습니다.

만약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완성하기 위해 나중에 추가된 필수 조건이라면, 그 약속의 의미는 율법이 나타난 뒤에 달라진 셈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새것보다 권위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효력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다는 사실에 근거하므로, 그 약속이 유효한지는 율법이 나중에 주어졌는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상속 재산이 율법에서 온다면 더 이상 약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그 상속 재산을 은혜로 주셨습니다.갈라디아서 3:18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2:7; 13:14–17; 15:18–21). 바울은 이 상속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복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로 논증을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상속은 임금을 받는 것과 다릅니다.

임금은 수행한 일에 대한 대가지만, 상속은 상속자에게 주어진 관계와 약정에 따라 받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실제 상속 제도는 여러 조건과 책임을 수반할 수 있고, 바울의 요점은 그 모든 법률 관계를 하나님의 약속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주셨습니다」(χαρίζομαι)에 해당하는 동사는 호의로 베풀거나 선물로 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논증에서 상속은 인간이 율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에게서 얻어 내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생깁니다. 약속이 먼저 주어졌고, 상속도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율법은 왜 존재합니까?

조금 더 깊이

바울이 말하는 사백삼십 년은 출애굽기 12:40의 연대 전승과 연결됩니다. 다만 히브리어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한 기간을 말하고, 칠십인역은 이집트와 가나안에서의 거주를 함께 언급하여 이 기간을 계산하는 기준에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사백삼십 년을 현대 역사 연대의 정밀한 계산 결과로 취급하거나, 이 구절만으로 족장 시대의 절대연대를 확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갈라디아서 3:19–22 본문 →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율법은 천사들을 통해 중개자의 손을 거쳐 정해져, 약속이 주어진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범법 때문에 덧붙여졌습니다.갈라디아서 3:19 · 본디새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고, 그에게 주어진 약속이 율법보다 먼저였으며, 그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모세의 율법은 무엇을 위해 주어졌습니까? 바울은 율법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율법은 「덧붙여졌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확립한 시간적 순서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에는 「약속이 주어진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여기서 후손은 16절에서 밝힌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율법 전체가 나쁘거나 하나님께서 실수로 율법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최종적인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범법 때문에 덧붙여졌다는 말의 의미

「범법 때문에」라는 말은 율법이 죄를 억제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읽기, 죄를 드러내기 위해 주어졌다는 읽기, 율법과 범법 사이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이해하는 견해로 갈립니다. 갈라디아서 3:19의 표현만으로 이 여러 역할 가운데 하나를 배타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맥에서는 율법의 한계가 분명해집니다. 율법은 범법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지만,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의롭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율법이 어떤 행동을 죄로 드러낸다는 사실과, 그 죄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죄를 드러내는 일이 반드시 죄의 지배에서 해방하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이 무익하다고 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이 이루지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왜 천사와 중개자를 언급하는가

19절 끝에는 갑자기 천사들과 중개자가 등장합니다. 구약의 시내산 이야기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신명기 5:5에서 모세는 자신이 여호와야훼와 백성 사이에 서서 말씀을 전했다고 회상합니다.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표현은 유대교의 시내산 전승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33:2의 그리스어 전승에는 천사들이 등장하며, 사도행전 7:53과 히브리서 2:2에서도 율법과 천사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신약에서도 해석이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중개자는 한쪽만을 상대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갈라디아서 3:20 · 본디새김

중개자가 있다는 것은 보통 둘 이상의 당사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뜻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두 사실을 왜 나란히 놓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 해석은 율법이 천사와 중개자를 거쳐 전달되었다는 사실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대조한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으므로 하나님의 뜻은 나뉘지 않으며, 율법이 그 약속을 무효화하거나 다른 구원의 길을 만들 수 없다는 데 주목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선언을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하나님 아래 있다는 사실과 연결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어떤 읽기가 바울의 정확한 의도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앞뒤 문맥을 고려하면 이 문장이 율법이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약속을 대신하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논증에 속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난해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명시하지 않은 복잡한 중개 구조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 자신이 바로 다음 절에서 율법과 약속의 관계를 더 명료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르는가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릅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살리는 힘이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의는 참으로 율법에서 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1 · 본디새김

바울은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 있지만,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이 율법의 역할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다면, 의로움도 율법에서 왔을 것입니다.

율법의 한계는 율법이 사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이 생명을 창조하거나 죄 아래 있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과 약속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집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더욱 어두운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약속이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22 · 본디새김

앞에서는 율법의 역할을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성경」이 주어로 등장하여 만물을 「가두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으면 사람이 죄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인간과 세계의 죄 아래 놓인 상태를 드러내며, 누구도 자신의 자격이나 성취를 내세워 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밝힌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만물」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한정되는지, 죄 아래 놓인 더 넓은 피조 세계까지 포함하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죄의 문제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논증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의 끝에서 다시 약속이 등장합니다.

죄 아래 가두는 일과 약속을 주는 일이 하나의 문장 안에서 연결됩니다. 바울은 성경이 인간을 죄인으로 드러내는 일을 마지막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성취를 구원의 최종 근거로 삼을 수 없음을 보여 주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이것이 율법과 약속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닌 이유입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생명을 예수님을 통해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범법 때문에」를 죄를 억제하는 역할로 읽는 쪽은 율법이 인간이 죄를 짓지 않도록 구체적인 경계를 세우고 행동을 규제한다고 봅니다. 죄를 드러내는 역할로 읽는 쪽은 율법이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인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데 주목합니다. 더 복잡하게 이해하는 견해는 바울이 로마서 5:20에서 율법이 들어온 결과 범죄가 많아졌다고 말하고, 로마서 7:7–13에서는 죄가 계명을 이용하여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설명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후견인의 손을 떠나 상속자의 자리에 서다

갈라디아서 3:23–25 본문 →

그런데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앞으로 믿음이 드러날 때까지 갇힌 채 율법 아래 지켜지고 있었습니다.갈라디아서 3:23 · 본디새김

22절의 「가두었습니다」(συγκλείω)와 23절의 「갇힌 채」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던 상태를 단순히 안전하게 보호받는 상태로만 설명하지 않고, 제한된 영역 안에 가두어 두고 지키는 상태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시간의 경계가 나타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앞으로 믿음이 드러날 때까지」. 믿음이 마치 어느 날 찾아오는 인물처럼 묘사됩니다.

이 말이 아브라함 시대에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미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이 의로 헤아려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오시고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되는 길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었지만, 이제 그 믿음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우리를 맡아 이끄는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3:24 · 본디새김

「후견인」(παιδαγωγός)으로 옮긴 낱말은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주로 아이를 감독하고 돌보는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 종종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거나 일상적인 행동을 감독하고 훈육하는 일을 맡았고, 오늘날의 교사처럼 학문을 직접 가르치는 사람이 그 역할의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후견인은 아이가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았을 때 보호하고 감독하며 행동을 제한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여 그 시기를 벗어나면 관계는 달라집니다. 후견인이 처음부터 쓸모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역할에 일정한 기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역할을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율법은 예수님께 이르기까지 필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 율법의 감독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이 이루신 시간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후견인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다는 배경 때문에, 이 비유를 율법이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가르쳐 마침내 예수님이라는 학교에 도착하게 한다는 식으로만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후견인의 역할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후견인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라디아서 3:25 · 본디새김

후견인 아래 있던 시기가 있었고, 이제는 그 시기가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후견인의 규칙을 완벽하게 지킬 만큼 훌륭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후견인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

갈라디아서 3:26–29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갈라디아서 3:26 · 본디새김

앞에서는 「우리는」 율법 아래 지켜지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논증의 초점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뒤의 상속 논증과 연결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들이라는 지위는 가문의 소속과 상속권을 설명하는 중요한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남성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곧바로 남자와 여자가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세례와 옷의 이미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7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예수님을 옷으로 입는 것, 두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바울은 세례를 단순히 어떤 종교 단체의 등록 의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하는 일과 연결합니다.

옷은 사람을 덮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때로 신분과 사회적 위치를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었다」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을 본받아 좋은 행동을 한다는 의미보다 깊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그 사람을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몸에 새기는 표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을 설명하면서 할례의 표징이 아니라 예수님을 옷으로 입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몸에 어떤 민족적 표지가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님께 속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다는 말의 의미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고, 노예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까닭입니다.갈라디아서 3:28 · 본디새김

이 선언은 문장의 마지막,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까닭입니다」에서부터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 사이에 모든 차이가 실제로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과 그리스인은 여전히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노예와 자유인은 법적·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현실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이 차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자격이나 상속자의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세 가지 대조는 각각 다른 영역을 가리킵니다.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은 민족적 구별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갈라디아서의 직접적인 논쟁 대상이었습니다. 노예와 자유인은 사회적 신분으로, 한 사람이 사회 안에서 누리는 권리와 자율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민족이나 법적 신분보다 더 기본적인 인간의 구별에까지 선언을 확장합니다.

여기에는 당시 사회의 모든 법적·경제적 차별이 즉시 철폐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같은 아들이며 같은 상속자라는 선언은 그러한 차별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만듭니다.

왜 마지막에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가

앞의 두 쌍은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노예도 자유인도’라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은 ‘남자도 여자도’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입니다. 이 그리스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창세기 1:27의 그리스어 표현과 일치합니다.

창세기에서의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언어입니다. 바울은 그 표현을 새로운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창조 자체를 부정하거나 남자와 여자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도 다른 쪽보다 예수님께 더 가깝거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이 더 많다고 말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한 분의 후손에게 속한 많은 후손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약속을 따라 상속자입니다.갈라디아서 3:29 · 본디새김

16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약속이 향하는 후손을 예수님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29절에서는 예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약속을 받으시는 후손이시므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아브라함의 약속에 참여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떠나 개별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자격을 획득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었다」는 표현을 세례 때 실제로 어떤 옷을 갈아입는 의식이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관습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견해는 있지만, 바울은 이곳에서 세례 예식의 세부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28절의 마지막 쌍이 창세기 1:27의 창조 언어를 의도적으로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바울이 창세기 1:27을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한 것은 아니므로, 이를 확정적인 직접 인용보다는 강한 언어적·주제적 연결로 보는 편이 신중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갈라디아서 3:1–29 본문 →

갈라디아서 3장의 많은 성경 본문과 비유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인간의 행위가 완성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후손과 복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뒤에 율법이 주어졌지만 율법이 그 약속을 무효화하거나 새로운 조건을 붙일 수는 없었고, 죄와 저주의 문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응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또 하나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중요성은 믿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졌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셨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시작하신 일을 인간이 자신의 성취로 완성하려는 유혹을 드러냅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상속자가 되었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출신과 신분과 차이를 기준으로 누가 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판단하려 합니까? 이 질문은 모든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아져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차이가 남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의 약속 안에 부르셨는지를 보라는 요청입니다.

첫 절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의 눈앞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또렷이 내걸려 계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옷으로 입고 서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혈통도 없었고 유대인의 할례 표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부족한 자격을 찾아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누구를 옷으로 입고 있는지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약속을 따라 상속자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별들을 보여 주시며 후손을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님을 옷으로 입은 이방인들에게도 그 약속의 상속자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 아브라함의 집 문턱에 서 있는 손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속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