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믿음과 약속

먼저 주신 약속에 누가 조건을 붙이는가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수백 년 전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할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두 사건은 오랜 시간과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일어났지만, 바울은 그 사이에서 같은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받아들이고 복을 주시는 일은 인간이 먼저 종교적 자격을 갖추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바울은 성경을 펼쳐 보이기 전에 먼저 묻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것은 어떻게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시점을 살펴본 뒤, 예수님을 옷처럼 입은 사람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권위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주장을 펼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와 신명기, 하박국과 레위기를 불러와 율법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앞 장에서 그는 사람이 율법을 지킨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3장에서는 그 주장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복을 주셨다면, 왜 그 뒤에 율법을 주셨을까요? 율법이 필요했다면 약속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바울은 바로 이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 흐름을 이끄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여러분은 이미 무엇을 받았습니까?

갈라디아서 3:1–5 본문 →

어리석은 갈라디아 여러분!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 눈앞에 보이듯 분명하게 전해졌는데 말입니다.갈라디아서 3:1 · 두루새김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하며 시작합니다. 「홀렸습니까?」는 누군가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거나 홀린다는 뜻으로 쓰일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이 실제로 누가 마술을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분명하게 보았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강한 비유로 묘사합니다.

그들이 분명하게 보았어야 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전해졌는데」(προγράφω)에 해당하는 동사는 공개적으로 게시하거나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 생생하게 제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이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마치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듯 행동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길게 논증하기 전에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에게 이것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킨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받았습니까?갈라디아서 3:2 · 두루새김

이 질문에는 이미 결정적인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정말로 성령을 받았는지를 놓고 다투지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전제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묻습니다.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하시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에스겔 36:26–27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새 마음을 주고 그들 안에 자신의 영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요엘 2:28–29는 하나님의 영이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어질 미래를 말합니다. 각 본문에는 저마다의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을 주시는 일이 그분의 구원과 백성의 회복을 나타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의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이미 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무엇이 필요합니까? 2절의 「복음을 듣고 믿어서」는 원문에서 두 가지로 읽힐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킨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대비는 같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으로 완성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해 놓고 이제는 육으로 완성하려 합니까?갈라디아서 3:3 · 두루새김

여기서 「성령」과 「육」의 대조를 단순히 영혼과 육체의 대립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시작하신 일을 이제 인간적인 조건과 능력으로 완성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할례는 실제 사람의 몸에 새기는 표징입니다. 갈라디아서 6:12–13에서도 바울은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과 육체에 관한 자랑을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곳의 「육」에는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는 삶과 대조되는 인간적인 능력과 기준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그 상황 속에서는 할례 같은 몸에 새기는 표징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시작과 완성의 관계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어떤 자격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장차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묻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무엇을 주셨는지 보라고 합니다.

4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것」이 헛될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정말 헛되었다면 말입니다」라는 말은 최종 판결이라기보다, 아직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드러내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일을 언급합니다(3:5).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바꾸셨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러옵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복음을 듣고 믿어서」에 해당하는 원문 아코에 피스테오스는 들은 것을 믿는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믿음에 관한 소식을 듣는 일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믿음으로 응답한 데, 두 번째 읽기는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 자체에 무게를 둡니다. 두루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따랐습니다. 4절의 동사는 고난을 받았다는 뜻으로도, 넓게는 어떤 일을 겪었다는 뜻으로도 쓰여, 구체적인 박해를 가리킨다는 읽기와 성령을 받은 뒤 겪은 신앙적 경험을 넓게 가리킨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많은 일을 겪은 것」으로 옮겨 고난으로 한정하지 않았으며, 본문만으로 그 세부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할례받기 전의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한 것

갈라디아서 3:6–9 본문 →

아브라함도 이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인정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3: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창세기 15:6에서 옵니다. 「아브라함도 이와 같습니다」라는 시작은 앞에서 말한 것과 지금 말하려는 것을 견줍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처럼,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은 아직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시고 그의 후손도 그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5:5).

그때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뒤 믿은 것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인정하셨다」(λογίζομαι)에 해당하는 말은 계산하거나 어떤 것으로 여긴다는 뜻을 지닙니다. 믿음이 재산처럼 쌓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시간적 순서가 있습니다. 믿음을 의로 인정하신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할례가 언약의 표징으로 주어지는 사건은 창세기 17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었고,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의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기 위해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그러니 믿음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을 아십시오.갈라디아서 3:7 · 두루새김

바울은 아브라함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혈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유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누구를 복 주시려 했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미리 복음을 전했습니다.갈라디아서 3:8 · 두루새김

이 말은 창세기 12:3의 약속과 연결되며, 같은 약속이 창세기 18:18, 22:18 등에서도 반복됩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은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이 처음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교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고 있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약속 속에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담겨 있었다고 읽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일이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은 … 미리 내다보았습니다」는 성경을 사람처럼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의 뜻을 밝히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약속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끊어진 새로운 종교의 출발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민족들에게 이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갈라디아서 3:9 · 두루새김

갈라디아의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대신하는 새로운 민족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 하셨습니다. 그 복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한 민족의 표징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오히려 좁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모든 민족을 향한 것이었다면, 율법은 왜 복과 저주를 엄격하게 구분합니까?

조금 더 깊이

할례 이전의 믿음을 근거로 한 이 논증은 바울이 로마서 4:9–12에서도 분명하게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이들의 조상일 뿐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복의 약속에서 저주의 문제로

갈라디아서 3:10–14 본문 →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은 복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저주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을 지킨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 아래 있습니다. 성경에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를 받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10 · 두루새김

바울은 율법을 지킨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이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인용하는 신명기 27:26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올까요?

신명기 27장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할 언약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한결같이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주가 선언된다는 점을 붙듭니다. 율법에 기대어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해야 하지만, 그 요구를 어기는 사람은 바로 그 율법에 따라 저주 아래 놓입니다.

이 연결을 읽는 방식은 둘로 갈립니다. 전통적인 읽기는 인간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에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를 피할 수 없다고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는 이스라엘이 실제로 율법을 어겨 언약의 저주 아래 놓인 역사를 중요하게 보고, 바울이 그 상황과 예수님의 구원 행위를 연결한다고 이해합니다. 다만 신명기 27:26만으로 모든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직접 증명되지는 않으며, 그 부분에는 바울의 더 넓은 논증과 인간의 죄에 대한 이해가 작용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율법의 요구를 낮추자고 제안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삶’과 두 가지 ‘저주’

율법으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11 · 두루새김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명령들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들을 지킴으로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갈라디아서 3:12 · 두루새김

두 인용에는 똑같이 「살 것이다」가 등장하지만, 하박국 2:4에서는 믿음이, 레위기 18:5에서는 명령들을 지키는 일이 삶과 연결됩니다.

하박국 2장은 불의와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묻는 예언자의 고민입니다. 그곳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레위기 18:5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규정과 법을 지켜 행하며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따라서 두 구약 본문이 원래부터 서로 모순되도록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두 본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비추어 읽고, 율법을 통한 길과 믿음을 통한 길을 서로 다른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10절은 신명기 27:26의 저주, 11절은 하박국의 삶, 12절은 레위기의 삶, 13절은 신명기 21:23의 저주를 다룹니다. 바깥에는 저주에 관한 두 인용이, 가운데에는 삶에 관한 두 인용이 놓입니다. 어떻게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삶이 주어질 수 있습니까?

저주가 선언된 나무에서 이루어진 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셔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달린 사람은 누구나 저주받은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13 · 두루새김

신명기 21:23은 죽임당한 범죄자의 시신을 나무에 매달았을 때 밤새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규정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사형당한 사람의 시신을 다루는 말이지, 로마의 십자가형을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말씀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님께서 죄인이셨다는 증거로 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저주 아래 놓인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저주의 자리에 들어가셨습니다. 멀리서 저주에 관한 가르침을 주신 것이 아니라, 「저주가 되셔서」 우리를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순교나 억울한 처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실제로 바꾸는 구원 사건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저주를 어떻게 감당하셨는지에 관한 후대의 모든 속죄 이론이 이 한 구절에 상세하게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고, 그 결과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이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3:14 · 두루새김

여기에서 3장의 처음과 중간이 만납니다. 1–5절의 성령과 6–9절의 아브라함의 복이 14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미 경험한 성령의 선물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관계없는 별도의 은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민족들에게 이른 약속의 성취입니다.

바울에게 구원은 저주를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주에서 풀려나는 것은 복으로 가는 길을 열고, 그 복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는 그리스어 문장의 연결 관계에 따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살 것이다」라는 강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믿음과 의로움, 삶이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13절의 「값을 치르시고 … 풀어 주셨습니다」는 값을 치르고 사들여 얽매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얼마의 값을 지불했는지를 상상해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거래의 세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놓으심으로 이루신 구출을 말합니다.

나중에 주어진 율법이 먼저 하신 약속을 바꿀 수 있는가

갈라디아서 3:15–18 본문 →

이제 바울은 비유를 하나 제시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 사이의 일을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사람의 유언도 일단 확정되면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만들거나 내용을 덧붙이지 못합니다.갈라디아서 3:15 · 두루새김

바울이 유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약속에 무엇인가를 나중에 덧붙이는 일이 가능한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언」과 17절의 「언약」은 원문에서 같은 낱말 디아테케(διαθήκη)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유언처럼 재산 등을 법적으로 정하는 일을 가리킬 수 있고,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을 가리켰습니다. 바울은 사람 사이의 법적인 약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확정하신 언약으로 논증을 옮깁니다.

다만 고대의 모든 유언이 절대로 변경될 수 없었다는 법률 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15절을 유언의 비유로 읽을지 확정된 언약의 비유로 읽을지도 논의가 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약속을 나중의 제도가 무효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들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사람을 가리키듯 「그리고 후손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한 사람을 가리키듯 「그리고 네 후손에게」라고 합니다. 그 후손은 그리스도이십니다.갈라디아서 3:16 · 두루새김

이 주장은 현대 독자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후손」(씨)은 문법적으로 단수형이지만 후손 전체를 가리키는 데에도 쓰이고, 그리스어도 비슷합니다. 따라서 단수형이라는 사실만으로 원래부터 한 사람만을 가리켰다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해석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 사람을 가리킬 수 있는 단수형 명사를 약속의 궁극적 성취인 예수님 한 분에게 집중시키는 해석 방식을 썼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창세기 22:18처럼 특정한 후손을 향한 의미를 읽을 수 있는 본문에 주목하여 그 약속을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 절의 무게는 단수형 자체보다 바울이 그 후손을 누구라고 밝히는가에 있습니다. 「그 후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이릅니다.

사백삼십 년의 의미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하나님께서 미리 확정하신 언약을 무효로 만들어 그 약속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17 · 두루새김

그가 이 숫자로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율법보다 약속이 먼저였습니다.

만약 율법이 약속을 완성하기 위해 나중에 추가된 필수 조건이라면, 약속의 의미는 율법이 나타난 뒤에 달라진 셈이 됩니다. 이것은 오래된 것이 새것보다 권위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약속의 효력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다는 사실에 근거하므로, 율법이 나중에 주어졌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물려받을 것이 율법에 달려 있다면, 더는 약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거저 주셨습니다.갈라디아서 3:18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고(창세기 12:7; 13:14–17; 15:18–21), 바울은 이 물려받음의 언어를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복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로 발전시킵니다. 일한 대가는 수행한 일에 따라 받지만, 물려받는 것은 관계와 약속에 따라 받습니다. 바울이 상속 제도의 모든 법률 관계를 하나님의 약속에 하나하나 대응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거저 주셨습니다」는 호의로 베풀거나 선물로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물려받을 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켜 얻어 내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생깁니다. 율법은 왜 존재합니까?

조금 더 깊이

사백삼십 년은 출애굽기 12:40에 전해지는 기간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한 기간을 말하고, 칠십인역은 이집트와 가나안에서의 거주를 함께 언급합니다. 따라서 이 숫자를 정밀한 역사 연대로 취급하거나, 이 구절만으로 족장 시대를 확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갈라디아서 3:19–22 본문 →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율법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 때문에 덧붙여졌습니다.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두신 것입니다. 율법은 천사들을 통해 중개자의 손을 거쳐 주어졌습니다.갈라디아서 3:19 · 두루새김

바울은 율법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약속보다 나중에 「덧붙여졌고」,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곧 16절에서 밝힌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입니다.

이것은 율법 전체가 나쁘거나 하나님께서 실수로 율법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주어졌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는 최종적인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 때문에 덧붙여졌다는 말의 의미

「명령을 어기는 일 때문에」는 율법이 죄를 억제하려고 주어졌다는 읽기, 죄를 드러내려고 주어졌다는 읽기, 그리고 율법과 죄의 관계를 더 복잡하게 보는 읽기로 갈립니다. 19절의 표현만으로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맥에서 율법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율법은 명령을 어기는 일과 관련된 역할을 하지만, 생명을 주고 의롭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죄를 드러내는 일이 죄의 지배에서 풀어 주는 능력까지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왜 천사와 중개자를 언급하는가

19절 끝에는 천사들과 중개자가 등장합니다. 신명기 5:5에서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말씀을 전했다고 돌아봅니다.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표현은 유대교에서 전해 내려온 시내산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신약에서도 해석이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개자는 한쪽만이 아니라 양쪽 사이에서 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갈라디아서 3:20 · 두루새김

중개자가 있다는 것은 둘 이상의 당사자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뜻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풀어 옮겼습니다. 바울이 이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를 왜 나란히 놓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율법이 중개를 거친 것과 약속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에 근거한 것을 대조한다는 읽기, 한 분이신 하나님의 뜻은 나뉘지 않으므로 율법이 약속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는 읽기, 유대 사람과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이 같은 하나님 아래 있다는 읽기입니다.

어떤 읽기가 바울의 정확한 의도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문장이 율법이 먼저 주신 약속을 대신하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논증에 속해 있다는 점은 분명하고, 바울 자신이 다음 절에서 그 관계를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르는가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어긋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다면,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은 정말로 율법에서 왔을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21 · 두루새김

바울은 율법과 약속이 서로 적대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한계는 율법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창조하거나 죄 아래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약속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집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더욱 어두운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3:22 · 두루새김

성경을 읽으면 사람이 죄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인간과 세계가 죄 아래 놓인 상태를 드러내며, 누구도 자신의 자격이나 성취로 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밝힌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람들에 한정되는지 더 넓은 피조 세계까지 포함하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유대 사람과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이 모두 죄의 문제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은 논증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의 끝에서 다시 약속이 등장합니다.

죄 아래 가두는 일은 마지막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는 과정입니다. 율법은 생명을 주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생명을 예수님을 통해 주십니다.

바울은 이제 법적인 논증에서 잠시 벗어나 한 집안의 어린아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세 읽기 가운데 억제의 읽기는 율법이 구체적인 경계를 세워 행동을 제한한다고 봅니다. 드러냄의 읽기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명령을 어기는 것인지 더 분명해진다고 봅니다. 세 번째 견해는 로마서 5:20(율법이 들어와 명령을 어기는 일이 많아짐)과 로마서 7:7–13(죄가 계명을 이용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함)에 근거합니다. 천사 전승은 신명기 33:2의 그리스어 전승에 천사들이 등장하는 데서 볼 수 있고, 사도행전 7:53과 히브리서 2:2에서도 율법과 천사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20절을 이해하려고 바울이 밝히지 않은 복잡한 중개 구조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보호자의 손을 떠나 상속자의 자리에 서다

갈라디아서 3:23–25 본문 →

믿음이 오기 전에는, 앞으로 그 믿음이 드러날 때까지 율법이 우리를 가두어 지키고 있었습니다.갈라디아서 3:23 · 두루새김

22절의 「가두었습니다」(συγκλείω)와 23절의 「가두어」는 원문에서 같은 동사입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던 상태를 단순히 안전하게 보호받는 상태가 아니라, 제한된 영역 안에 가두어 지키는 상태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시간의 경계가 나타납니다. 믿음이 마치 어느 날 찾아오는 인물처럼 묘사됩니다.

이 말이 아브라함 시대에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은 예수님께서 오시고 예수님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를 맡아 지도하는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3:24 · 두루새김

「보호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ός)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이 사람은 주로 아이를 감독하고 돌보는 역할을 맡았고, 종종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일상적인 행동을 감독하고 훈육했지만, 오늘날의 교사처럼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역할의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보호자는 아이가 아직 자라지 않았을 때 보호하고 감독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그 시기를 벗어나면 관계는 달라집니다. 보호자가 쓸모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역할에 기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도 계속 율법의 감독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신 시간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 비유를 율법이 교훈을 가르쳐 마침내 예수님이라는 학교에 도착하게 한다는 식으로만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더 중요한 것은 보호자의 역할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그 보호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라디아서 3:25 · 두루새김

왜 끝났습니까? 사람들이 보호자의 규칙을 완벽하게 지킬 만큼 훌륭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보호자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은 사람들

갈라디아서 3:26–29 본문 →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율법이 「우리를」 가두어 지켰다고 했는데, 이제 바울은 「여러분은 모두」라고 말합니다. 논증의 초점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격을 앞으로 얻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υἱός)로 옮긴 원문의 말은 ‘아들들’이며, 고대 사회에서 아들이라는 지위는 가문의 소속과 상속권을 설명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남성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곧바로 남자와 여자가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세례와 옷의 이미지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7 · 두루새김

「그리스도께 속하도록」(εἰς)의 원문 전치사는 향하는 방향이나 들어가는 대상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세례를 종교 단체의 등록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하는 일과 연결하고, 그 관계를 옷으로 표현합니다.

옷은 사람을 덮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이며, 고대 사회에서는 때로 신분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예수님을 본받아 좋은 행동을 한다는 의미보다 깊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몸에 새기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을 할례의 표시가 아니라 예수님을 옷처럼 입은 모습으로 그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몸에 어떤 민족적 표시가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님께 속해 있는가입니다.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의 구별도 없다는 말의 의미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의 구별도, 노예와 자유인의 구별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28 · 두루새김

이 선언을 이해하려면 문장의 마지막,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를 먼저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차이가 실제로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의 역사와 문화, 노예와 자유인의 법적 신분,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현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이 차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자격이나 상속자의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첫째 쌍은 갈라디아서에서 직접 논쟁된 민족적 구별, 둘째 쌍은 권리와 자유를 좌우한 사회적 신분, 셋째 쌍은 그보다 더 기본적인 인간의 구별입니다.

당시 사회의 모든 법적·경제적 차별이 즉시 없어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같은 자녀이며 같은 상속자라는 선언은 그러한 차별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만듭니다.

왜 마지막에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가

원문에서 앞의 두 쌍은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노예도 자유인도’인데, 마지막은 ‘남자도 여자도’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27의 그리스어 표현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쌍이 창조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바울이 창세기 1:27을 직접 인용한다고 밝힌 것은 아니므로, 말과 주제가 강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신중합니다. 바울이 창조 자체를 부정하거나 남자와 여자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쪽도 예수님께 더 가깝거나 약속을 받을 자격이 더 많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분의 후손에게 속한 많은 후손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물려받을 사람들입니다.갈라디아서 3:29 · 두루새김

16절에서 바울은 약속의 후손을 예수님 한 분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29절에서는 예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앞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약속을 받으시는 후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그 약속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을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갈라디아서 3:1–29 본문 →

이 모든 논증의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인간의 행위가 완성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셨습니까? 율법은 그 약속에 새로운 조건을 붙일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는 처음 하신 약속을 잊고 다른 계획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이 약속 앞에서 인간의 반응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또 하나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중요성은 믿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셨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은 독특한 이미지로 시작해서 독특한 이미지로 끝납니다.

첫 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듯 분명하게 전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옷처럼 입고 서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혈통도, 할례 표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부족한 자격을 찾아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누구를 옷처럼 입고 있는지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물려받을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별들을 보여 주시며 후손을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님을 옷처럼 입은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 약속을 물려받을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 아브라함의 집 문턱에 서 있는 손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물려받을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