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믿음과 약속
자녀가 된 사람들이 다시 노예가 되려는 이유
한 집에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집안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고, 보호자들과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정한 규칙에 따라 생활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정해 둔 때가 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관리받지 않고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다시 보호자를 찾아가 자신을 감독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은 바로 이 역설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약속에 따라 물려받을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더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추가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끌리고 있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벗어난 노예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장에는 유난히 많은 가족 관계의 말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린아이와 보호자, 어머니와 자녀, 여자 노예와 자유로운 신분의 여자가 차례로 나타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라고 부르며, 그들을 위해 다시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면, 그 사람들은 이제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바울의 대답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의 신분을 바꾸셨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을 이해하는 열쇠는 4장의 첫머리에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정해 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면서도 노예와 다르지 않은 아이
내 말은 이렇습니다.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도 아직 어릴 때는 모든 것의 주인이면서도 노예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갈라디아서 4:1 · 두루새김
바울은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에게 두 가지 상반된 표현을 붙입니다. 그는 「모든 것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일 수 있습니까?
바울은 소유할 권리와 실제로 그 권리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구별합니다. 어린아이는 장차 집안의 재산을 다스릴 사람이지만 아직 그 권한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보호자들과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져 생활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정해 둔 때까지는 보호자들과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갈라디아서 4:2 · 두루새김
아이는 스스로 충분히 성숙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보호자의 관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는 끝이 있고, 그 끝은 아버지가 정합니다. 이 「아버지가 정해 둔 때」가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과 연결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세상의 기초 요소들 아래 매여 노예로 살았습니다.갈라디아서 4:3 · 두루새김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이면서도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이제 예수님 이전의 인간 상태를 설명하는 그림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기초 요소들」입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9절에서 다시 사용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초 요소들’은 무엇인가
원어 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στοιχεῖον)는 해석이 많이 갈리는 표현입니다. 크게는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관련된 우주적 질서나 그 배후의 세력, 종교적 삶을 다스리는 초보적인 원리와 규정들, 고대의 물질적 요소들 자체로 읽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예수님 이전의 인간을 묶고 있던 것이 세계의 힘들인지, 이전의 종교적 질서인지가 달라지지만, 학계에 하나의 확정된 해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서둘러 하나의 의미로 확정하기보다, 바울이 그 표현을 어떤 역할로 쓰는지 살펴보는 편이 낫습니다. 그는 그 기초 요소들 아래 있던 상태를 「매여 노예로 살았습니다」라고 설명하고, 9절에서는 이방 신들을 섬기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그 기초 요소들에게 돌아가려 한다고 경고합니다. 적어도 바울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인간을 제한하고 지배하던 질서와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를 대조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자유는 단순히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새로운 때가 옴으로써 그전의 지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때는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조금 더 깊이
당시 지중해 세계에는 미성년자의 신분과 재산을 관리하는 여러 제도가 있었지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로마법 조항을 재현하기보다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을 비유로 씁니다. 2절의 보호자들과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앞 장에서 아이를 감독하고 데리고 다니던 보호자와 역할이 겹치지만 원어에서는 다른 직책을 가리키는 낱말들입니다. 「기초 요소들」에 해당하는 낱말은 기본적인 구성 요소나 기초적인 원리를 가리킬 수 있고, 고대에는 세계를 이루는 물질적 요소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우주적 세력으로 읽는 쪽은 인간이 자신을 지배한다고 여긴 세계의 힘들 아래 놓여 있었다는 점을, 초보적 원리로 읽는 쪽은 예수님을 통해 열린 새 시대를 알지 못한 채 이전의 종교적 질서 아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낱말이 문맥에 따라 뜻이 달라지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 이전의 삶을 이루는 기초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정하신 때에 일어난 두 번의 보내심
그러나 때가 다 차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셨고,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습니다.갈라디아서 4:4 · 두루새김
갈라디아서 4장의 방향을 바꾸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뒤에는 인간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나옵니다. 「때가 다 차자」는 단순히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라는 뜻만이 아니라, 2절의 아버지가 정해 둔 때와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시고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신 아들
「여자에게서 태어나셨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실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바깥에서 바라보기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은 여기서 출생의 기적적인 방식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므로, 이 표현만으로 처녀 탄생을 직접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율법 아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율법의 요구와 책임이 적용되는 역사적 상황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는지는 바로 다음 절이 밝힙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값을 치르고 풀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4:5 · 두루새김
두 목적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바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이전 주인의 지배에서 풀려나는 일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υἱοθεσία)로 옮긴 낱말은 입양이나 양자로 삼는 행위를 가리키는 법적 의미를 지닙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입양은 가족의 소속,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 법적 지위와 관련된 제도였고, 바울이 이 낱말을 쓰는 핵심도 새로운 가족 관계와 물려받을 사람의 지위에 있습니다.
앞의 비유는 원래 재산을 물려받을 어린아이가 자라 자유롭게 되는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두 비유를 엄격한 법적 절차에 맞추려 하지 않고, 같은 구원 사건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이미 정해져 있던 때가 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으십니다.갈라디아서 4:6 · 두루새김
바울은 여러분이 자녀가 되도록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자녀이므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의 신분을 주셨고, 그 신분에 맞게 아들의 영을 마음에 보내셨다는 흐름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원문에는 두 곳 모두 같은 「보내다」(ἐξαποστέλλω) 동사가 쓰입니다. 첫 번째 보내심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시고 율법 아래로 들어오셨고, 두 번째 보내심에서 아들의 영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사람이 노예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아들의 영을 받음으로써 그 새로운 관계가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나타납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말을 그리스어로 옮겨 적은 것이고, 바울은 그 뒤에 그리스어 「아버지」를 함께 둡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 14:36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말과 같은 형태이며, 로마서 8:15에도 나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분은 아들의 영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성령께서는」 하고 밝혀 옮겼는데, 원문에서 ‘부르짖는’이 ‘영’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사람이 특별한 신앙적 감정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영이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아버지께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유일한 아들 관계를 그대로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주심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자녀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물려받을 사람으로도 삼아 주신 것입니다.갈라디아서 4:7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복수로 부르던 「여러분」이 단수로 바뀌고, 두루새김은 이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옮겼습니다. 공동체 전체에 선언했던 사실을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의 근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충실하게 종교적 의무를 다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과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자녀가 된 사람들이 왜 다시 노예가 되려 합니까?
조금 더 깊이
「때가 다 차자」에 로마 제국의 도로망이나 공용어의 확산 같은 역사적 준비를 덧붙여 설명할 수는 있지만, 바울 자신은 그런 조건을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때를 결정하셨다는 사실만 강조합니다. 고대의 입양이 가져오는 구체적인 법률 효과는 입양 방식과 당사자의 지위에 따라 달랐으므로, 입양된 모든 사람의 과거 의무가 한결같이 사라졌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바’를 흔히 어린아이가 부르는 ‘아빠’로 설명하지만 지나치게 좁은 이해입니다. 아람어에서 이 말은 어른도 아버지를 부를 때 쓸 수 있었고, 친밀함을 담을 수 있지만 어린아이만의 표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들이 왜 다시 노예가 되려 하는가
그러나 전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실제로는 신이 아닌 것들의 노예로 살았습니다.갈라디아서 4:8 · 두루새김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전에 이방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실제로는 신이 아닌 것들」은 그 신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라는 바울의 신학적 판단이며, 그는 그들을 섬기던 삶을 노예 노릇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다시 약하고 보잘것없는 기초 요소들로 돌아가, 또 처음부터 그것들의 노예가 되려 합니까?갈라디아서 4:9 · 두루새김
바울은 말을 하다가 스스로 고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표현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내어 관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아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고,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는 4–6절과 맞물립니다.
여기서 ‘알다’는 단순히 이름이나 사실을 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아모스 3: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고 말씀하시는데, 다른 민족을 모르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특별한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표현도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더 날카로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을 자녀로 받아들이셨는데, 왜 다시 지배받는 관계로 돌아가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방 신들을 섬기던 사람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서 옛 노예 상태로 돌아가는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전에 섬긴 것은 이방의 신들이고, 지금 받아들이려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과 절기입니다. 둘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들이 다시 옛 노예 상태로 돌아간다고 말합니까?
이 문제는 「세상의 기초 요소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연결됩니다. 한 해석은 이방의 종교와 예수님 밖에서 율법에 매여 사는 종교적 삶이 모두 세상의 기초적인 질서에 속한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이 표현을 우주적 세력과 연결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여러 종교적 체계의 배후에 공통된 속박의 문제가 있다고 이해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바울이 이방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같은 존재로 취급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8절에서 그는 이미 이방 신들을 「실제로는 신이 아닌 것들」이라고 구별했습니다. 그가 두 상태를 비교하는 이유는 출처가 같아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자녀의 자유와 비교할 때 둘 다 노예 상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바로 그 신들에게 되돌아간다는 뜻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건져 내신 지배받는 상태와 닮은 삶을 다시 선택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특정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꼼꼼히 지키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4:10 · 두루새김
이 목록은 유대인의 종교 달력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날은 안식일을, 달은 초하루를, 절기는 유월절 같은 축제를, 해는 안식년 같은 주기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모든 종교적 기념일이나 정해진 예배의 시간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얻은 지위를 불충분하게 여기고, 규정을 꼼꼼히 지켜 그 지위를 완성하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녀가 될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염려됩니다. 여러분을 위해 애쓴 일이 헛수고가 된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갈라디아서 4:11 · 두루새김
바울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들인 노력이 아까워지는 일이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이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편지의 분위기가 또 한 번 바뀝니다. 바울은 갑자기 갈라디아 사람들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립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은 구체적인 명칭을 늘어놓지 않으므로 10절 목록의 각 항목을 특정한 절기 하나에 정확히 맞출 수는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이전에 쓰던 종교 달력과의 관련성도 논의되지만, 갈라디아서 전체의 율법 논쟁을 고려하면 유대교의 절기를 지키는 일이 주요한 배경이라는 이해가 유력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나를 예수님처럼 맞아 주지 않았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간청합니다. 나처럼 되십시오. 나도 여러분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내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4:12 · 두루새김
「나처럼 되십시오」는 자신이 높은 위치의 모범이니 무조건 따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이 되어야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는 율법에 따른 신분을 요구하지 않고 그들과 어울려 살았던 자신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0–21에서도 바울은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방 사람들이 유대인의 율법 아래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나처럼 되십시오」는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 삶을 함께 살자는 초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는 그의 책망이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바울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약한 몸으로 찾아온 복음 전도자
여러분이 알다시피, 내가 처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몸이 아팠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4:13 · 두루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개인적인 사정이 드러납니다. 두루새김의 「몸이 아팠기 때문입니다」는 그의 아픈 몸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나 계기였다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병이었는지, 그 때문에 여행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내 몸의 상태가 여러분을 힘들게 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업신여기거나 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나를 맞아 주었습니다.갈라디아서 4:14 · 두루새김
「내치지 않았습니다」(ἐκπτύω)로 옮긴 동사는 본래 침을 뱉는 행동과 관련된 말입니다. 고대 지중해 문화에서 침을 뱉는 행동은 경멸의 표시였고, 불길한 영향을 물리치려는 행위와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들이 아픈 몸 때문에 자신을 업신여기거나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은 바울을 실제 천사나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으로 매우 귀하게 받아들였다는 강조입니다.
여기에는 앞의 논쟁과 이어지는 역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픈 몸이 복음 전도자를 거부할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할례라는 몸에 새기는 표시가 복음에 속한 사람의 자격을 판단하는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대조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편지 전체를 읽는 독자에게 이 차이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사람들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리던 복은 어디로 갔습니까? 나는 여러분에 관해 분명히 말합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은 자기 눈이라도 빼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갈라디아서 4:15 · 두루새김
눈은 사람에게 소중한 신체 기관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을 위해 가장 귀한 것까지 내줄 마음이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과거의 인기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종교적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신들을 복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해 추가적인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갈라디아서 4:16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묻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일이 그들과 자신 사이를 갈라놓았느냐고 묻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일이 언제나 편안한 관계만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관계의 어려움을 이유로 진실을 바꾸지 않고, 진실을 지킨다는 이유로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 긴장이 다음 단락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병으로는 말라리아나 눈병 등이 제시되어 왔지만, 본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병명은 없습니다. 15절의 눈 이야기 때문에 눈병이었다고 짐작하는 견해도 있으나, 눈을 내준다는 말은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14절의 침 뱉는 동사에 문화적 배경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병이 주술적인 두려움을 일으켰다거나 사람들이 실제로 침을 뱉으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사랑하며, 누가 여러분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 하는가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좋은 뜻에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나에게서 떼어 놓아, 여러분이 자기들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게 하려 합니다.갈라디아서 4:17 · 두루새김
겉으로는 매우 헌신적인 사람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관심의 목적을 의심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떼어 놓아」(ἐκκλείω)로 옮긴 원문은 밖으로 밀어내거나 배제한다는 표현인데, 무엇에서 떼어 놓는지는 논의됩니다. 바울과의 관계인지,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인지, 예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를 열심히 가르치고 돌보는 행동이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매이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위험이 드러납니다.
좋은 뜻에서 열렬한 관심을 받는 것은 언제나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 곁에 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갈라디아서 4:18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만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누군가에게 열렬한 관심을 받는 것을 말하는지, 좋은 일을 위해 열심을 품는 것을 말하는지 원문 표현이 어려워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의 구별은 분명합니다. 열심 자체가 아니라 그 열심의 목적과 방향이 문제입니다.
바울이 다시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는 이유
나의 자녀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질 때까지 다시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4:19 · 두루새김
여기서 갑자기 바울은 어머니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이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신자가 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질 때까지 다시 그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습이 이루어질」은 형체를 이루거나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께 전혀 속하지 않았다는 단정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그들이 자녀이며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자유로운 자녀가 되었으면서 다시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들의 삶에는 구원의 의미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인격을 가꾸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새로운 신분이 실제 삶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으면서 말투를 바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4:20 · 두루새김
확신에 찬 논증을 펼치던 바울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과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어려워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곁에 있다면 그들의 반응을 듣고 말투도 바꿀 수 있겠지만, 편지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앞에서 비판한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게 하려 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한쪽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묶어 두려 하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세우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정적인 호소로 끝내지 않고 다시 성경을 펼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다」와 같은 동사가 27절 이사야 인용의 「아이 낳는 고통을 겪지 않는 여자」에도 쓰입니다. 바울은 자녀들을 위해 다시 고통을 겪는 어머니처럼 말하고, 이사야의 말씀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했던 여자가 예상하지 못한 많은 자녀를 얻게 되어 기뻐합니다. 바울이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결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4장 안에서 출생과 자녀의 이미지가 되풀이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율법 아래 있고 싶다면, 율법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율법 아래 있고 싶어 하는 여러분, 내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이 하는 말을 듣지 않습니까?갈라디아서 4:21 · 두루새김
여기서 「율법」은 한 문장 안에서 서로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 앞의 「율법 아래」는 모세 율법의 규정과 그 지배 아래 놓이는 것을, 뒤의 「율법이 하는 말」은 모세오경이라는 성경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율법의 권위에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그 율법이 담고 있는 이야기 자체를 들려주려 합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아들은 여자 노예에게서, 다른 아들은 자유로운 신분의 여자에게서 태어났습니다.갈라디아서 4:22 · 두루새김
이 이야기는 창세기 16장과 21장에 나옵니다. 이스마엘은 사라의 여자 노예 하갈에게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두 어머니의 사회적 신분보다 두 아들의 출생 방식입니다.
여자 노예에게서 난 아들은 육을 따라 태어났지만, 자유로운 신분의 여자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통해 태어났습니다.갈라디아서 4:23 · 두루새김
이 말을 이삭만 몸으로 태어나는 일과 무관하게 태어난 것처럼 읽으면 안 됩니다. 창세기에서 두 아들 모두 실제 부모에게서 태어납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자녀를 얻으려 하고, 이스마엘은 그 과정에서 태어납니다. 반면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신 뒤, 인간적으로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납니다(창세기 17:15–21; 18:9–14; 21:1–7).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육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과 계획에 근거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는 능력에 근거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 아래 들어감으로써 더 확실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고, 둘이 같은 방식으로 물려받을 사람의 지위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 속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갈과 사라, 두 어머니가 가리키는 두 언약
이 이야기를 비유로 풀면 이렇습니다. 두 여자는 두 언약을 가리킵니다. 한 언약은 시나이산에서 나와 노예로 살 자녀들을 낳습니다. 이 언약을 가리키는 여자가 하갈입니다.갈라디아서 4:24 · 두루새김
「비유로 풀면」은 어떤 이야기를 겉으로 드러난 내용 외의 다른 관계나 의미에 빗대어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사건들이 실제 역사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이야기 자체를 근거로 삼으면서, 인물들의 처지와 출생의 차이를 현재의 언약 문제에 적용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갈을 시나이산에서 비롯된 언약과 연결합니다. 하갈은 이집트인 여자 노예였고,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삭의 후손인 야곱의 자손입니다. 혈통으로 보면 시나이산과 이어지는 쪽은 사라의 후손입니다.
바울이 족보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혈통이 아니라 노예 상태를 낳는 관계라는 공통점에 주목합니다. 그의 논증에서 시나이산 언약 아래로 돌아가려는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자녀의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매인 상태에 놓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주신 일이 악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역할을 수행했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도 율법 아래 있는 상태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결정적인 조건으로 삼아, 율법이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대신하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나이산을 가리키며,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 자녀들과 함께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4:25 · 두루새김
「해당합니다」(συστοιχέω)로 옮긴 말은 서로 대응하거나 같은 줄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갈, 시나이산, 지금의 예루살렘을 같은 줄에 배열하는데, 이들을 잇는 것은 지리가 아니라 그가 이 문맥에서 문제 삼는 노예 상태와의 관계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신중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유대인이 본질적으로 노예이며 이방인 신자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민족적 비교를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인정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판을 모든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정죄로 확대하는 것은 편지 자체의 내용과도 맞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속하는 것이 곧 약속을 물려받는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롭습니다. 그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입니다.갈라디아서 4:26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을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는 어머니처럼 묘사했는데, 이제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하늘의 예루살렘, 곧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자유로운 언약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는 죽음 이후에만 도달하는 장소의 주소가 아닙니다. 「그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입니다」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현재 소속을 밝히는 선언입니다. 한쪽은 율법 아래 있는 상태를 통해 지위를 확보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자유롭게 물려받을 사람의 지위를 얻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이러한 읽기를 단순한 알레고리로 볼지, 창세기 여러 본문이 서로 이어지는 관계를 활용한 해석으로 볼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창세기와 모세오경 안의 연결을 고려해야 바울의 해석을 더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이 없는 여자에게 기뻐하라고 외치는 예언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 자녀가 없는 여자여, 기뻐하여라. 아이 낳는 고통을 겪지 않는 여자여, 소리 높여 외쳐라. 홀로 버려진 여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보다 많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4:27 · 두루새김
바울이 인용한 것은 이사야 54:1입니다. 이사야 54장에서 예루살렘은 바벨론 유배와 상실을 배경으로, 자녀들을 잃은 버려진 여자처럼 그려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여자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자녀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54:2–3에서는 자녀들이 늘어날 것이니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와 잇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했던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삭을 낳았고, 버려진 여자처럼 보이던 시온이 많은 자녀를 얻게 되며, 이제 이방 사람들까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인간이 보기에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자녀를 생겨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본래 유배 이후 시온의 회복을 말합니다. 이사야가 갈라디아의 이방인 교회만을 직접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니며, 바울은 시온의 회복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입니다.갈라디아서 4:28 · 두루새김
바울은 이삭처럼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더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약속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장애가 아닙니다.
이삭은 자신의 출생에 앞서 하나님의 약속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새로운 신분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약속의 자녀들이 지금 압박을 받고 있습니까?
왜 바울은 여자 노예와 그 아들을 내쫓으라는 말씀을 인용하는가
그러나 그때 육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 성령을 따라 태어난 아들을 박해했듯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갈라디아서 4:29 · 두루새김
창세기 21:9은 사라가 이스마엘이 웃거나 장난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할 뿐, 그 장면을 「박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낱말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를 박해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율법 아래 들어가라고 압박하는 상황에 적용합니다.
23절에서는 이삭이 「약속을 통해」 태어났다고 했고, 여기서는 「성령을 따라」 태어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을 함께 생각합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내쫓으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자 노예와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자 노예의 아들은 자유로운 신분의 여자의 아들과 결코 함께 물려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4:30 · 두루새김
이것은 창세기 21:10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한 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이 장면을 단순한 승리로 그리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때문에 매우 근심했고(창세기 21:11),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돌보셨습니다(창세기 21:17–20).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악한 인물로 그리는 것은 원래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인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평가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이 물려받는 관계를 자신의 논증에 적용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약속을 물려받는 일과 율법 아래 매인 상태를 통해 그 지위를 얻으려는 일은 같은 근거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유는 특정 민족의 혈통이나 사회적 지위가 우월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쫓아라」를 오늘날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을 물리적으로 배제하거나 박해하라는 명령으로 쓰는 것은 본문의 논증을 벗어납니다. 4장은 교회가 실제로 어떤 사람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절차를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강한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약속으로 주어진 자유의 신분을 붙들 것인가, 율법 아래로 들어가야만 온전히 물려받을 사람이 된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가입니다. 바울이 두 길을 섞을 수 없다고 보는 이유는 율법이 악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자 노예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로운 신분의 여자의 자녀입니다.갈라디아서 4:31 · 두루새김
28절의 「여러분은」이 여기서 「우리는」으로 바뀝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울과 이방인으로 태어난 갈라디아 사람들이 같은 어머니의 자녀라는 선언입니다. 엄중하게 경고하던 바울은 마지막에 그들을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밀어내지 않고, 자신과 그들이 함께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고백합니다. 이 자유를 어떻게 살아 낼지는 다음 장에서 이어지지만, 4장은 먼저 신분의 선언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1:9의 히브리어 동사는 웃거나 즐기다, 문맥에 따라 희롱하다로 이해할 수 있고, 칠십인역은 이삭과 함께 논다고 옮깁니다. 바울의 읽기에는 이스마엘의 행동을 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 유대교 해석 전통과 이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상속자의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
바울이 이 장에서 보여 준 하나님은 사람을 영원히 감독과 통제 아래 두려는 분이 아니라, 정하신 때에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자녀의 신분을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경고는 단순히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 공동체의 질서와 책임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녀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되는 순간 관계가 뒤집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신분을 주셨고, 사람은 그 신분을 받은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 자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이며, 바울이 그랬듯 다른 사람을 자기에게 묶어 두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세우는 자유입니다.
한때 집안의 관리 아래 있던, 물려받을 어린아이에게 아버지가 정하신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제 자녀의 자리에서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다시 노예의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새로운 자격을 얻으라고 말하지 않고, 그 집의 문을 다시 열어 보이며 그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이름을 들려줍니다.
노예가 아니라 자녀.
여자 노예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로운 신분의 여자의 자녀.
그들이 얻어야 할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신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