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믿음과 약속

아들이 된 사람들이 다시 노예가 되려는 이유

한 집에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집안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그의 생활은 후견인과 관리인들이 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정해 둔 기한이 끝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관리받지 않고 상속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다시 후견인을 찾아가 자신을 감독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속자의 지위를 얻었는데도 예전처럼 누군가의 명령 아래 살겠다고 나섭니다.

갈라디아서 4장은 바로 이 역설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더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추가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끌리고 있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벗어난 노예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장에는 유난히 많은 가족 관계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린아이와 후견인, 어머니와 자녀, 여종과 자유인 여자가 차례로 나타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라고 부르며, 그들을 위해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가족의 장면들이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셨다면, 그 사람들은 이제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의 신분을 바꾸셨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을 이해하는 열쇠는 4장의 첫머리에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정해 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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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주인이면서도 노예와 다르지 않은 아이

갈라디아서 4:1–3 본문 →

그런데 내 말은 이렇습니다. 상속자는 모든 것의 주인이면서도, 어린아이일 때에는 노예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갈라디아서 4:1 · 본디새김

바울은 앞에서 말한 상속자의 문제를 하나의 가정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상속자는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노예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일 수 있습니까?

바울은 소유할 권리와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구별합니다. 어린 상속자는 장차 집안의 재산을 다스릴 사람이지만 아직 그 권한을 자유롭게 행사하지 못하고, 후견인과 재산 관리인 아래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도리어 아버지가 정해 둔 기한까지는 후견인과 재산 관리인 아래 있습니다.갈라디아서 4:2 · 본디새김

이 상태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충분히 성숙했다고 선언함으로써 후견인의 관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정해 둔 기한」이 있고, 이것이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연결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기초 요소들 아래에서 노예로 매여 있었습니다.갈라디아서 4:3 · 본디새김

상속자이면서도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이제 예수님 이전의 인간 상태를 설명하는 이미지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세상의 기초 요소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9절에서 이 표현을 다시 쓸 때에도 명시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해석이 많이 갈립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과 관련된 우주적 질서나 그 배후의 세력으로 읽기도 하고, 종교적 삶을 규제하는 초보적인 원리와 규정들로 읽기도 하며, 고대의 물질적 요소들 자체로 읽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예수님 이전의 인간을 묶고 있던 것이 세계의 힘들인지, 이전의 종교적 질서인지가 달라집니다. 학계에 하나의 확정된 해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서둘러 하나의 의미로 확정하기보다, 바울이 그 표현을 어떤 역할로 사용하는지 살펴보는 편이 낫습니다. 그는 그 기초 요소들 아래 있던 상태를 「노예로 매여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9절에서는 이방 신들을 섬기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그 기초 요소들에게 돌아가려 한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인간을 제한하고 지배하던 질서와,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를 대조합니다.

여기서 자유는 단순히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새로운 때가 도래함으로써 그전의 지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때는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조금 더 깊이

당시 지중해 세계에는 미성년자의 신분과 재산을 관리하는 여러 제도가 있었지만 세부 제도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로마법 조항을 정확하게 재현하기보다,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을 비유로 사용합니다. 2절의 후견인과 재산 관리인은 앞 장에 나왔던 아이를 감독하고 데리고 다니는 후견인과 역할이 겹치지만, 원어에서는 다른 직책을 가리키는 낱말들입니다. 여기서는 어린아이 자신과 그가 장차 물려받을 재산이 아직 다른 사람들의 관리 아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기초 요소들」로 옮긴 그리스어 스토이케이아는 기본적인 구성 요소나 기초적인 원리를 가리킬 수 있고, 고대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들을 뜻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주적 질서로 읽는 쪽은 예수님 이전의 인간이 자신을 지배한다고 여기는 세계의 힘들 아래 놓여 있었다는 점을, 종교적 원리로 읽는 쪽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새로운 시대를 알지 못한 채 이전의 종교적 질서 아래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낱말이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 이전의 삶을 이루는 기초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정하신 때에 일어난 두 번의 보내심

갈라디아서 4:4–7 본문 →

그러나 때가 다 차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은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갈라디아서 4:4 · 본디새김

갈라디아서 4장의 방향을 바꾸는 문장입니다.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후견인 아래 있고 인간이 기초 요소들 아래 노예로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뒤에는 인간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나옵니다.

「때가 다 차자」는 단순히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라는 뜻만이 아니라, 2절에서 아버지가 정해 둔 기한과 연결됩니다. 후견인 아래 있는 아이의 상태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에서 나신 아들

「여자에게서 나셨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실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바깥에서 바라보기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예수님의 동정녀 출생을 직접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출생의 기적적인 방식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둡니다.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율법 아래 있는 사람으로, 율법의 요구와 책임이 적용되는 역사적 상황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값 주고 사 내시고, 우리가 아들의 신분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4:5 · 본디새김

두 목적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바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단순히 이전 주인의 지배에서 풀려나는 일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을 얻는 일입니다.

‘아들의 신분’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사용된 낱말은 입양이나 양자로 삼는 행위를 가리키는 법적 의미를 지닙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입양은 사적인 양육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가족의 소속, 상속권, 법적 지위와 관련된 제도였습니다. 바울이 이 낱말을 사용하는 핵심은 새로운 가족 관계와 상속자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앞의 비유와는 약간의 긴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원래 상속자인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자유롭게 되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는 아들의 신분을 받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두 비유를 엄격한 법적 절차에 따라 하나로 맞추려 하지 않고, 같은 구원 사건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이미 정해져 있던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영, 곧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는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셨습니다.갈라디아서 4:6 · 본디새김

바울은 여러분이 아들이 되도록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들이므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을 주셨고, 그 신분에 합당하게 자신의 아들의 영을 마음에 보내셨다는 흐름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두 곳 모두 같은 동사 「보내다」(ἐξαποστέλλω)가 쓰입니다. 첫 번째 보내심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로 들어오셨고, 두 번째 보내심에서 아들의 영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사람이 노예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고 아들의 신분을 얻으며, 아들의 영을 받음으로써 그 새로운 관계는 사람의 내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구원을 외적인 신분 변경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αββα)는 아버지(πατήρ)를 뜻하는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옮겨 적은 말이고, 바울은 그 뒤에 그리스어 「아버지」를 함께 둡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 14:36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말과 동일한 형태로 등장합니다. 로마서 8:15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부르짖는가입니다. 그리스어에서 ‘부르짖는’ 분사는 ‘영’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람이 특별한 신앙적 감정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영이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아버지께 부르짖으셨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물론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유일한 아들 관계를 그대로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주심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들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아들입니다.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디아서 4:7 · 본디새김

복수의 「여러분」이 단수의 「그대」로 바뀝니다. 바울은 공동체 전체에 선언했던 사실을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합니다.

그대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그대는 아들입니다.

그대는 상속자입니다.

이 선언의 근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충실하게 종교적 의무를 수행했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과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아들이 된 사람들이 왜 다시 노예가 되려 합니까?

조금 더 깊이

예수님의 오심에 로마 제국의 도로망이나 공용어의 확산 같은 역사적 조건이 준비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일 수는 있지만, 바울 자신은 그 조건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때를 결정하고 그때에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4절과 6절의 「보내다」는 그리스어로 모두 엑사포스텔로입니다. 입양의 구체적인 법률 효과는 입양 방식과 당사자의 법적 지위에 따라 달랐으므로, 모든 입양자의 과거 의무가 일률적으로 소멸했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흔히 ‘아바’를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부르는 ‘아빠’에 해당한다고 설명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좁은 이해입니다. 아람어에서 이 말은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할 수 있었고, 친밀함을 담을 수 있지만 반드시 유아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들이 왜 다시 노예가 되려 하는가

갈라디아서 4:8–11 본문 →

바울은 이제 갈라디아 사람들의 과거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신이 아닌 것들에게 노예 노릇을 했습니다.갈라디아서 4:8 · 본디새김

갈라디아 사람들의 이방인 배경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본질상 신이 아닌 것들」은 신들의 실재와 본성에 관한 바울의 신학적 판단입니다. 그는 이방의 신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을 섬기던 삶을 노예 노릇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자기 표현을 고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데 —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셨는데 — 어떻게 다시 약하고 보잘것없는 기초 요소들로 돌아가 또 처음부터 그것들에게 노예 노릇을 하려 합니까?갈라디아서 4:9 · 본디새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울도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사실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내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아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4–6절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의 신분을 주셨고,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알다’는 단순히 이름이나 사실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인정하고 선택하여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관계적 의미를 지닙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의 새로운 신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신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셨는데, 왜 다시 예전의 종속적인 관계로 돌아가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방 신들을 섬기던 사람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서 옛 노예 상태로 돌아가는가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전에 이방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받아들이려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과 절기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며,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일과는 구별됩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들이 다시 옛 노예의 상태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세상의 기초 요소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연결됩니다. 한 해석은 이방의 종교와 예수님 밖에서 율법에 종속되는 종교적 삶이 모두 세상의 기초적인 질서에 속한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이 표현을 우주적 세력과 연결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여러 종교적 체계의 배후에 공통된 속박의 문제가 있다고 이해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바울이 이방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동일한 존재로 취급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8절에서 그는 이미 이방 신들을 「본질상 신이 아닌 것들」이라고 분명히 구별했습니다. 그가 두 상태를 비교하는 이유는 출처가 같아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아들의 자유와 비교할 때 둘 다 노예 상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도 과거에 섬기던 바로 그 신들에게 되돌아간다는 뜻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건져 내신 종속 상태와 닮은 삶을 다시 선택하려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세심히 지키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4:10 · 본디새김

이 목록은 유대인의 종교 달력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모든 종교적 기념일이나 정해진 예배의 시간이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얻은 지위를 불충분한 것으로 여기고, 종교적 규정의 세심한 준수를 통해 그 지위를 완성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염려합니다.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면, 갈라디아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종교적 수행을 통해 신분을 확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아들로 삼으신 사람인데도 여전히 아들이 될 자격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염려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수고한 것이 혹시 헛되었을까 해서입니다.갈라디아서 4:11 · 본디새김

바울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들인 노력이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이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편지의 분위기가 또 한 번 바뀝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아들의 영, 율법과 기초 요소들에 관해 설명하던 바울이 갑자기 갈라디아 사람들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립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아신다는 표현은 그를 인정하고 선택하여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아모스 3:2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른 민족의 존재를 모르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특별한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는 의미이며, 바울의 표현도 이와 유사한 관계적 의미를 지닙니다. 10절의 날은 안식일과 같은 특정한 날을, 달은 초하루와 같은 월례 절기를, 절기는 유월절을 비롯한 정해진 축제들을, 해는 안식년과 같은 주기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체적인 명칭을 열거하지 않으므로 각 항목을 특정한 절기 하나에 정확히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이전에 사용하던 종교적 달력과의 관련성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하는지도 논의되지만, 갈라디아서 전체의 율법 논쟁을 고려하면 유대교의 절기 준수가 주요한 배경이라는 이해가 유력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나를 예수님처럼 맞아 주지 않았습니까

갈라디아서 4:12–16 본문 →

나처럼 되십시오. 나도 여러분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4:12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이전의 논증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친밀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처럼 되십시오」는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는 종교적 모범이므로 무조건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나도 여러분처럼 되었다」는 말은 유대인의 율법적 정체성을 이방인에게 요구하지 않고 그들과 교제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0–21에서도 바울은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방 사람들이 유대인의 율법 아래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나처럼 되십시오」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삶을 함께 살아가자는 초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은, 그가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하는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이나 과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바울에게 놀라운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약한 몸으로 찾아온 복음 전도자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내가 처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몸이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4:13 · 본디새김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개인적인 사정을 듣습니다. 「몸이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는 번역은 그의 신체적 약함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나 계기였다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확히 어떤 병을 앓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몸의 상태가 여러분에게 시험거리였는데도, 여러분은 그것을 업신여기거나 침 뱉어 내치지 않고, 나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맞아 주었습니다.갈라디아서 4:14 · 본디새김

그의 몸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시험거리가 될 만한 상태였고, 그것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를 업신여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멸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으로 매우 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앞의 논쟁과 연결되는 역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바울의 상태보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할례라는 몸의 표징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중요한 기준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직접 대조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편지 전체를 읽는 독자에게 이 차이는 의미심장합니다. 처음에는 몸의 약함이 복음 전도자를 거부할 이유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몸에 새기는 표징이 복음에 속한 사람의 자격을 판단하는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사람들

그러니 여러분이 스스로 복되다고 여기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갔습니까? 사실 여러분이 할 수만 있었다면 자기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갈라디아서 4:15 · 본디새김

눈은 사람에게 소중한 신체 기관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을 위해 가장 귀한 것까지 내줄 마음이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과거에 얼마나 인기를 얻었는지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 얼마나 기뻐했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얼마나 깊이 환대했는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종교적 조건을 충족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때문에 자신들을 복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해 추가적인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원수가 된 것입니까?갈라디아서 4:16 · 본디새김

한때 자신을 예수님처럼 환영했던 사람들이 이제 자신이 전하는 진리를 불편하게 여기는 듯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관계가 달라졌느냐고 묻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일이 그들과 자신 사이를 갈라놓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관계의 어려움을 이유로 진실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진실을 지킨다는 이유로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 긴장이 다음 단락에서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병으로 말라리아나 눈병 등 여러 질환이 제시되어 왔지만, 본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병명은 없습니다. 몸의 약함 때문에 여행을 중단했는지, 일정이 바뀌었는지, 어느 지역에 머무르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15절의 「자기 눈이라도 빼어」 때문에 그의 질병이 눈병이었다고 추론하는 견해가 있지만, 눈을 내준다는 말은 극진한 사랑과 호의를 나타내는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어 병명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4절 「침 뱉어 내치지 않고」의 원어 엑프튀오는 본래 침을 뱉는 행동과 관련된 동사입니다. 고대 지중해 문화에서 침을 뱉는 행동은 경멸의 표시로 사용될 수 있었고, 불길한 영향을 물리치려는 행위와 연결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표현에 그런 배경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그의 질병이 주술적 공포의 대상이었다거나 사람들이 실제로 침을 뱉으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천사처럼」이라는 말도 바울을 실제 천사와 동일한 존재로 여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여러분을 사랑하며, 누가 여러분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 하는가

갈라디아서 4:17–20 본문 →

그들이 여러분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좋은 뜻에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밖으로 밀어내어 여러분이 자기들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4:17 · 본디새김

그들은 겉으로는 매우 헌신적인 사람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관심의 목적을 의심합니다.

「밖으로 밀어내어」가 정확히 무엇에서 배제한다는 뜻인지는 논의됩니다. 바울과의 관계에서 떼어 놓는 것인지,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를 끊게 하는 것인지, 예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자신들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행동을 바울이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누군가를 열심히 가르치고 돌보는 행동이 언제나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기 위해 관심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열심 자체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로 열렬한 관심을 받는 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좋습니다.갈라디아서 4:18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만 갈라디아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그리스어 표현은 누군가에게 열렬한 관심을 받는 것을 말하는지, 좋은 일을 위해 열심을 품는 것을 말하는지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중요한 구별은 분명합니다. 열심 자체가 아니라 그 열심의 목적과 방향이 문제입니다. 상대방을 예수님 안에서 세우려는 열심과 상대방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려는 열심은 다릅니다.

바울이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 이유

나의 자녀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빚어지실 때까지 나는 여러분을 두고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라디아서 4:19 · 본디새김

여기서 갑자기 바울은 어머니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이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자가 되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위해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빚어지실 때까지 그 고통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빚어지실」은 형체를 이루거나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올바른 교리 몇 가지를 기억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단순한 인격 수양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이 그들의 실제 삶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께 전혀 속하지 않았다는 단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바울은 이미 그들이 아들이며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유로운 아들들이 되었으면서 다시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들의 삶에는 예수님의 구원이 지닌 의미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있고 내 말투를 바꾸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4:20 · 본디새김

바울은 확신에 찬 신학적 주장을 펼치면서도 갈라디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과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어려워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는 편지라는 수단의 한계를 느끼는 듯합니다. 직접 곁에 있다면 그들의 반응을 듣고 말투도 바꿀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모습은 앞에서 비판한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게 하려 하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갈라디아 사람들 안에 빚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한쪽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묶어 두려 하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세우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감정적인 호소로 편지를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성경을 펼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토록 율법 아래 있고 싶어 한다면, 바로 그 율법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들어 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빚어지실」의 그리스어는 모르포오입니다. 19절의 「해산의 고통을 겪다」(오디노)는 27절의 이사야 인용에서도 같은 동사로 다시 나옵니다. 바울은 자녀들을 위해 다시 고통을 겪는 어머니처럼 말하고, 이사야의 말씀에서는 해산의 고통을 겪지 않았던 여자가 예상하지 못한 많은 자녀를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 때문에 기뻐합니다. 바울이 이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결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갈라디아서 4장 안에서 출생과 자녀의 이미지가 반복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장은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묻는 동시에, 그 자녀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방식으로 자라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율법 아래 있고 싶다면, 율법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4:21–23 본문 →

율법 아래 있고 싶어 하는 여러분, 나에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이 하는 말을 듣지 않습니까?갈라디아서 4:21 · 본디새김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율법을 읽어 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한 문장 안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앞의 「율법 아래」는 모세 율법의 규정과 그 지배 아래 놓이는 것을, 뒤의 「율법이 하는 말」은 모세오경이라는 성경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창세기 16장과 2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입니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인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두 어머니의 사회적 신분보다 두 아들의 출생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을 따라 태어났고, 자유인 여자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갈라디아서 4:23 · 본디새김

이 말을 잘못 읽으면 이삭은 육체적인 출생과 무관한 방식으로 태어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두 아들 모두 실제 부모에게서 태어납니다. 차이는 생물학적인 출생 방식에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자녀를 얻으려 하고, 이스마엘은 그 과정에서 태어납니다. 반면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뒤, 인간적으로는 그 출생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납니다(창세기 17:15–21; 18:9–14; 21:1–7).

바울은 이 차이를 육과 약속의 대조로 읽습니다. 여기서 육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과 계획에 근거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약속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는 능력에 근거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지금 율법 아래 들어감으로써 더 확실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상속자의 지위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갈과 사라, 두 어머니가 가리키는 두 언약

갈라디아서 4:24–26 본문 →

이 일들은 빗댄 뜻으로 풀이됩니다. 이 두 여자는 두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시내산에서 비롯되어 노예 노릇을 할 자녀를 낳는데, 이 언약이 하갈입니다.갈라디아서 4:24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읽고 있는지 직접 밝힙니다. 「빗댄 뜻으로 풀이됩니다」는 어떤 이야기를 그 표면적인 서술 외의 다른 관계나 의미에 빗대어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를 두 언약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지만, 창세기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 역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의 이야기 자체를 근거로 삼으면서 인물들의 처지와 출생의 차이를 현재의 언약 문제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갈을 시내산에서 비롯된 언약과 연결합니다.

하갈은 이집트인 여종이었고 이스마엘의 어머니였습니다. 반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삭의 후손인 야곱의 자손입니다. 혈통의 역사를 기준으로 하면 시내산과 직접 연결되는 쪽은 하갈이 아니라 사라의 후손들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족보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혈통의 연결이 아니라 노예 상태를 낳는 관계라는 공통점에 주목합니다. 하갈은 여종이고, 바울의 논증에서 시내산 언약 아래로 돌아가려는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아들의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종속 상태에 놓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일이 악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율법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역할을 수행했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도 율법 아래 있는 상태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결정적인 조건으로 삼아, 율법이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대신하는 위치에 놓이는 것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인데,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그 예루살렘은 자기 자녀들과 함께 노예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4:25 · 본디새김

문장은 지리적 사실처럼 시작하지만, 「해당합니다」는 서로 대응하거나 같은 줄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갈, 시내산, 지금의 예루살렘을 같은 줄에 배열합니다.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지리적 공통점이 아니라 바울이 이 문맥에서 문제 삼는 노예 상태와의 관계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은 신중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유대인이 본질적으로 노예이며, 이방인 신자는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민족적 비교를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갈라디아서 2장에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인정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예루살렘에 대한 바울의 비판을 모든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정죄로 확대하는 것은 편지 자체의 내용과도 맞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율법 아래 들어가려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율법에 속하는 것이 곧 약속을 상속하는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시내산 언약 아래 있는 상태를 「지금의 예루살렘」과 연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또 하나의 예루살렘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롭고, 그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입니다.갈라디아서 4:26 · 본디새김

바울은 앞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고, 자신을 그들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는 어머니처럼 묘사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어머니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루살렘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응되는 하늘의 예루살렘, 곧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자유로운 언약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에 있다’는 말을 단순히 죽음 이후에만 도달할 수 있는 장소의 주소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입니다」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현재 소속을 밝히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도시에 대한 지리적 대비가 아니라 두 공동체를 규정하는 근거의 차이입니다. 한쪽은 율법 아래 있는 상태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자유로운 상속자의 지위를 얻습니다. 바울은 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빗댄 뜻으로 풀이됩니다」의 그리스어는 알레고레오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읽기를 단순한 알레고리로 이해할 것인지, 창세기 여러 본문의 상호 관계를 활용한 해석으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며, 창세기와 모세오경 내부의 연결을 고려해야 바울의 해석을 더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25절 「해당합니다」의 그리스어는 쉬스토이케오입니다.

아이 없는 여자에게 기뻐하라고 외치는 예언

갈라디아서 4:27–28 본문 →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여, 기뻐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겪지 않는 여자여, 소리를 터뜨려 외쳐라. 홀로 버려진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가진 여자의 자녀보다 많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4:27 · 본디새김

바울이 인용한 것은 이사야 54:1입니다. 이사야 54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벨론 유배와 그에 따른 상실을 배경으로, 한때 백성으로 가득했던 도성은 자녀들을 잃은 버려진 여자처럼 그려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여자에게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 기뻐하라고 하시는 이상한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자녀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예언은 현재의 황폐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내지 못한다는, 시온의 회복과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했던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삭을 낳았습니다. 버려진 여자처럼 보이던 시온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많은 자녀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 사람들까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연결의 중심에는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자녀를 생겨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가 원래 갈라디아의 이방인 교회만을 직접 가리켜 말한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본래 유배 이후 시온의 회복을 말하고, 바울은 그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그런데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입니다.갈라디아서 4:28 · 본디새김

이것이 앞의 긴 비유와 예언을 통해 도달한 결론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삭처럼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결정적인 장애가 아닙니다. 이삭은 자신의 출생에 앞서 하나님의 약속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신분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약속의 자녀들이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서 압박을 받고 있습니까?

조금 더 깊이

이어지는 이사야 54:2–3에서는 장막터를 넓히고 휘장을 아끼지 말고 펼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자녀들이 늘어날 것이므로 거처를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는 말씀을 인용하는가

갈라디아서 4:29–31 본문 →

그러나 그때에 육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 영을 따라 태어난 아들을 박해하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합니다.갈라디아서 4:29 · 본디새김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를 갈라디아의 현재 상황에 비추어 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1:9는 사라가 이스마엘이 웃거나 장난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할 뿐, 그 장면을 명시적으로 ‘박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낱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를 박해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 해석을 갈라디아에 적용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약속의 자녀가 된 갈라디아 사람들을, 이제 누군가가 율법 아래 들어가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압박을 약속의 자녀들을 향한 박해와 연결합니다.

23절에서는 이삭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고 했는데, 29절에서는 「영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을 함께 생각합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내쫓으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아들은 자유인 여자의 아들과 함께 결코 상속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4:30 · 본디새김

이것은 창세기 21:10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한 말입니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상속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서술과 바울의 적용을 구분해야 합니다. 창세기 21장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집에서 떠나는 이야기를 단순한 승리의 장면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때문에 그 일을 매우 근심했고(창세기 21:11),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돌보셨습니다(창세기 21:17–20).

따라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악한 인물들로 묘사하는 것은 원래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누락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평가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의 상속 관계를 자신의 논증에 적용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는 일과, 율법 아래 있는 종속 상태를 통해 상속자의 지위를 얻으려는 일은 같은 근거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특정 민족의 혈통이나 사회적 지위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쫓아라」라는 말씀을 오늘날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을 물리적으로 배제하거나 박해하라는 명령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논증을 벗어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은 갈라디아 교회가 실제로 어떤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절차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강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주어진 자유의 신분을 붙들 것입니까, 아니면 율법 아래로 들어가야만 온전한 상속자가 된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입니까? 바울은 그 두 길을 섞을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율법이 악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 여자의 자녀입니다.갈라디아서 4:31 · 본디새김

28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은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울과 이방인으로 태어난 갈라디아 사람들이 같은 어머니의 자녀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그는 율법 아래 있고 싶어 하는 그들을 향해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들을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밀어내지 않고, 자신과 그들이 함께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특권도,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의 특권도 아닌,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신분입니다.

그 자유를 어떻게 살아 내야 하는가는 이어지는 장에서 다루어질 문제입니다. 그러나 4장은 그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신분의 선언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1:9의 히브리어 동사는 웃거나 즐기다, 문맥에 따라 희롱하다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고, 칠십인역은 이삭과 함께 논다고 합니다. 바울의 박해 읽기에는 이스마엘의 행동을 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 유대교의 해석 전통과 연결되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상속자의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

갈라디아서 4:1–31 본문 →

갈라디아서 4장은 아버지가 정해 둔 기한까지 후견인 아래 있던 어린 상속자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다 차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자기 아들의 영을 사람들의 마음에 보내셨습니다. 이 장에서 바울이 드러낸 하나님은 사람을 영원히 감독과 통제 아래 두려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고를 단순히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 공동체의 질서와 책임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되는 순간, 바울은 그 관계가 뒤집혔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 신분을 얻기 위해 종교적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분을 받은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 자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 안에서 살아갈 자유이고, 다른 사람을 자기에게 묶어 두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세울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붙들어 두려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빚어지시기를 바랐습니다.

한때 집안의 관리 아래 있던 어린 상속자에게 아버지가 정하신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제 아들의 자리에서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다시 노예의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바울은 그들 앞에서 그 집의 문을 다시 열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이름을 들려줍니다.

노예가 아니라 아들.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 여자의 자녀.

그들이 얻어야 할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신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