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장 · 성령을 따르는 자유

자유와 노예의 길

갈라디아서 5장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므로 다시는 노예살이의 멍에에 매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절 뒤에는 사랑으로 서로에게 노예 노릇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노예가 되지 말라면서 노예가 되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얻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긴 논증을 펼쳐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유의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다시 노예라는 말을 꺼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기서 바울이 문제 삼는 두 가지 삶의 방향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격을 얻기 위해 다시 율법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미 주신 자유 안에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자신을 제한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응답하는 삶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자는 아직 얻지 못한 자격을 확보하려는 데서 출발하고, 후자는 이미 받은 은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실제 공동체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을 위험에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의 규정을 더 철저하게 지키거나 반대로 모든 규정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파괴하려는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은 자유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성령의 열매와 공동체의 관계로 끝납니다.

읽는 시간 34분소단락 95장 본문 읽기 →

자유롭게 되었으니 굳게 서십시오

갈라디아서 5:1–4 본문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자유를 누리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노예살이의 멍에에 매이지 마십시오.갈라디아서 5:1 · 본디새김

바울은 이 장을 명령으로 시작하지만, 그 명령 앞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되었으니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어는 ‘자유’라는 명사와 ‘자유롭게 하다’라는 동사를 한 문장에 나란히 놓습니다. 이 반복은 예수님의 행동과 그 목적이 일치한다는 사실, 곧 예수님께서 이루신 해방이 사람들이 실제로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명령의 핵심은 새로운 신분을 얻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신분을 저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울은 곧바로 밝힙니다.

보십시오.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2 · 본디새김

바울이 할례라는 행위 자체를 언제나 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6절에서 그는 할례뿐 아니라 무할례도 예수님 안에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왜 할례를 받으려 하는가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할례는 단순한 민족적 관습이나 가족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 받아야 할 종교적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할례가 그런 필수 조건이라면, 예수님의 구원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일이 하나의 구원 방법 안에 함께 놓입니다.

바울은 그 두 근거를 결합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한 가지 표징을 받으면 왜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하는가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3 · 본디새김

갈라디아 사람들은 할례라는 한 가지 요구를 받아들이면 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왜 한 가지 행위가 율법 전체와 연결됩니까?

할례는 이스라엘의 언약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는 것은 특정한 의식 하나만 수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율법을 자신에게 적용되는 언약적 의무의 전체로 받아들이는 일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율법적 표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왜 그 표징만 요구하고 율법 전체에 대한 의무는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한다면 인간은 다시 그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과 그에 따른 판단 아래 서게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자유와 정반대 방향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더 높은 단계의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벗겨 주신 「노예살이의 멍에」를 다시 짊어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말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갈라디아서 5:4 · 본디새김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행동이 곧 예수님에게서 끊어지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이라고 대상을 분명하게 한정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은혜를 의로움의 근거로 삼지 않고 율법을 통해 그 의로움을 확보하려 한다면, 예수님의 구원 행위와의 관계 자체가 훼손됩니다.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덜 느끼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의 근거로 삼던 자리에서 벗어났다는 강한 경고입니다.

다만 이 말씀만으로 신자가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에 관한 후대의 모든 신학적 논쟁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율법을 의로움의 근거로 선택하는 일이 예수님의 은혜와 양립할 수 없다는 문제를 직접 다룹니다.

바울은 그들이 사소한 교리상의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이루셨는가 하는 문제에 직접 닿아 있습니다.

의로움을 얻으려는 사람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

갈라디아서 5:5–6 본문 →

우리는 영으로, 믿음에 근거하여 의의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5:5 · 본디새김

바울은 지금까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미 의롭게 되었다면 왜 여전히 기다려야 합니까?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현재의 신분으로 말합니다. 성령 역시 이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구원의 모든 결과가 지금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최후의 심판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될 미래의 판결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3–25에서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여전히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다른 읽기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그 의로움에 따르는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과 확증을 기다린다는 데 무게를 둡니다.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지만 강조점에 차이가 있으며, 5절의 짧은 표현만으로 미래의 의로움이 정확히 어떤 단계를 가리키는지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중심적인 대조는 분명합니다.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조건에 집중합니다. 반면 바울은 「우리는」이라는 말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영으로 믿음에 근거하여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이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관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는 까닭입니다.갈라디아서 5:6 · 본디새김

바울은 할례만 무효라고 말하지 않고 무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자격을 판단할 때 할례가 효력을 갖지 않는다면, 할례받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특별한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무할례라는 새로운 종교적 표징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구원의 근거에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을 놓습니다.

믿음은 어떻게 일하는가

바울은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믿음이 사랑을 통해 일한다고 말합니다. 이 동사가 믿음이 사랑을 통해 작용한다는 뜻인지, 사랑을 통해 효력 있게 된다는 뜻인지는 논의가 있지만, 어느 쪽을 강조하든 바울이 믿음과 사랑을 떼어 놓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그렇게 강하게 주장했던 바울이 왜 갑자기 믿음의 활동을 강조합니까? 혹시 그는 율법의 행위 대신 사랑의 행위를 새로운 구원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앞의 논증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바울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업적을 쌓아야 의롭게 된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믿음과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수단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향하고, 그 믿음은 사랑을 통해 현실에서 작용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5장 전체를 관통하는 연결이 나타납니다.

5절에서는 영과 믿음이 함께 등장합니다.

6절에서는 믿음과 사랑이 함께 등장합니다.

13절에서는 자유와 사랑이 함께 등장하고, 2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이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에네르구메네는 믿음이 실제로 작용하거나 효력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중간태와 수동태의 형태가 같아, 믿음이 사랑을 통해 작용한다는 읽기와 사랑을 통해 효력 있게 된다는 읽기가 논의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용례를 고려하여 전자를 선호하는 해석이 많지만, 형태 자체만으로 모든 논의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잘 달리던 사람들을 누가 가로막았는가

갈라디아서 5:7–12 본문 →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익숙했을 이미지를 다시 꺼냅니다.

여러분은 잘 달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했습니까?갈라디아서 5:7 · 본디새김

바울은 그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길에서 달리고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누군가 달리는 사람들의 방향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가로막아」(ἐγκόπτω)로 옮긴 말은 진행을 방해하거나 장애물을 만드는 행위를 가리키며, 경주의 문맥에서는 달리는 사람의 진로를 막아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더 잘 달리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가로막히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진리에 순종」하는 일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며, 오히려 예수님의 복음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를 지키는 길입니다.

그 설득은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갈라디아서 5:8 · 본디새김

원문에서는 7절의 ‘순종하다’와 8절의 ‘설득’에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누구의 말에 설득되어 누구에게 순종하고 있는지를 문제 삼으며,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과 그들을 흔드는 설득을 대조합니다.

어떤 가르침이 종교적으로 진지하고 성경의 권위에 호소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판단 기준은 그 가르침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누룩 조금이 반죽 전체를 부풀린다

누룩 조금이 반죽 전체를 부풀립니다.갈라디아서 5:9 · 본디새김

바울은 달리기의 이미지에서 반죽의 이미지로 옮겨 갑니다. 누룩은 작은 양으로도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비유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흔드는 가르침이 처음에는 작은 요구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공동체 전체의 복음 이해를 바꿀 수 있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할례가 하나님께 의롭게 인정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면, 그것은 의식 하나를 추가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다른 율법적 의무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의 문제까지 건드립니다. 그러므로 작은 요구가 복음 전체를 바꾸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미 모두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는 주 안에서 여러분을 두고 이렇게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뒤흔드는 자는 누구든지 그 심판을 짊어질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0 · 본디새김

바울은 그들의 의지력이 반드시 강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데서 자신의 확신을 찾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곧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을 신뢰합니다.

바울은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흔드는 사람들을 구별합니다. 그는 전자를 회복하려 하고, 후자에게는 자신들이 끼친 해악에 대한 책임을 묻습니다.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는 방법

11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한 어떤 주장에 대답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째서 아직도 박해를 받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걸림돌은 이미 제거된 셈입니다.갈라디아서 5:1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바울이 여전히 할례를 선포한다는 주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누가 그런 말을 퍼뜨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박해받는 현실을 근거로 반박합니다.

무엇이 십자가의 걸림돌입니까?

십자가 자체는 당시 로마 세계에서 수치스럽고 잔혹한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에서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의 직접적인 상황에서는 그 걸림돌이 특히 할례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 하나님께 의롭게 되는 길이 열렸다면, 이방인은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는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의 필수 조건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자랑할 수 있는 종교적 표징을 구원의 최종 기준에서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할례를 필수 조건으로 선포한다면 그 걸림돌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 결과 박해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사람들이 거부하지 않도록 설명하는 것과, 사람들이 거부하는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복음의 내용을 바꾸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환영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닌 의미를 바꾸지 않으려 합니다.

할례 논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말

그다음 절에서 바울은 편지 전체에서도 가장 거친 표현 가운데 하나를 사용합니다.

여러분을 뒤집어 놓는 자들이 아예 스스로 거세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갈라디아서 5:12 · 본디새김

이 말은 그 사람들이 공동체를 떠났으면 좋겠다는 온건한 표현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앞의 할례 논쟁에서 자르는 행위를 더욱 극단적인 수준으로 밀어붙입니다. 실제로 그런 신체 훼손을 실행하라는 지시가 아니라, 상대의 주장을 극단적인 결론으로 밀어붙이는 격렬한 풍자와 저주에 가까운 소망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단순한 농담으로 만들거나 바울의 감정적 격렬함을 없애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에서 멀어질 위험에 대한 그의 분노는 실제로 강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격렬한 말투 자체를 오늘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의 모범으로 삼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거친 말을 한 직후 다시 갈라디아 사람들을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원문 동사 아포콥손타이는 잘라 낸다는 뜻을 지니며, 바로 앞의 할례 논쟁에서 자르는 행위와 맞물립니다. 고대 주석 전통에서도 그 강한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논의되었습니다.

노예가 되지 말라는 사람이 왜 노예 노릇 하라고 하는가

갈라디아서 5:13–15 본문 →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이 틈탈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에게 노예 노릇을 하십시오.갈라디아서 5: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5장 전체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1절의 노예살이는 예수님께서 해방하신 이전의 지배 관계를 가리킵니다. 13절의 노예 노릇은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 사랑으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더 부드러운 단어로 이 역설을 피하지 않고, 노예로 섬긴다는 동사의 명령형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다시 노예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 노예 상태는 신분을 얻기 위한 조건입니다.

두 번째는 이미 얻은 신분에서 흘러나오는 삶입니다.

바울은 특정한 사람들만 다른 사람들에게 노예 노릇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곧 공동체 전체가 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어떤 사람에게 일방적인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없습니다. 노예의 신분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자유로운 공동체가 사랑을 통해 서로의 유익을 추구하라는 역설적인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유를 받은 사람들도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줍니다. 여기서 자유는 자기 욕망을 무제한으로 행사하는 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자유가 육의 기회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바울은 「그 자유를 육이 틈탈 기회로 삼지 말고」라고, 자유가 잘못 사용될 가능성도 경고합니다. 여기서 「육」을 단순히 사람의 신체나 육체적인 욕구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유를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데 사용하는 삶의 방향을 경고합니다.

이 욕망에는 성적인 욕망만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장의 뒤쪽에 나타나는 육의 행실에는 질투와 격분, 이기적 야심, 분열과 파벌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자유가 육의 기회가 된다는 말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위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자유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방식으로 관계를 새롭게 만듭니다.

율법 전체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역설

율법 전체는 한 말씀 안에서 다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입니다.갈라디아서 5:14 · 본디새김

바울은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할 의무 아래 들어가는 일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율법 전체가 한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왜 앞에서는 율법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서, 여기서는 율법의 완성을 말할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바울이 인용한 레위기 19:18을 살펴야 합니다. 레위기 19장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거룩하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19:17–18에서는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지 말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또한 19:33–34에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하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따라서 레위기의 이웃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라는 권면이 아니라, 실제 인간관계에서 미움과 보복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바울이 사랑을 율법과 완전히 별개의 새로운 원리로 제시하는지, 아니면 율법의 참된 의도가 사랑 안에서 성취된다는 점을 강조하는지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사랑을 율법의 요구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율법에 들어 있는 이웃 사랑의 명령을 자신의 자유에 관한 가르침의 중심에 놓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일과, 예수님 안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이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의 뜻을 이루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지배 아래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자유가 사랑을 통해 율법의 뜻을 성취하는 길을 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공동체의 현실을 매우 거친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서로를 먹어 치우는 공동체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는다면, 서로에게 먹혀 없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갈라디아서 5:15 · 본디새김

14절의 이웃 사랑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들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마치 짐승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장면처럼 묘사합니다.

물어뜯습니다.

잡아먹습니다.

마침내 서로에게 먹혀 없어집니다.

처음에는 상대를 공격하는 행동으로 시작하지만, 그 공격이 계속되면 공동체 전체가 파괴되는 결과에 이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누가 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따지며 서로를 판단하고 배제하기 시작하면, 율법 논쟁은 신학적 의견 차이로 끝나지 않고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할 공동체를 스스로 파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어느 정도의 다툼이 벌어졌는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이 절은 조건문의 형태로 위험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20절과 26절에서 다시 다툼과 시기, 도발을 언급한다는 점을 보면, 적어도 공동체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심각한 우려가 편지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자기 욕망의 기회로 삼으면 사람들은 서로를 물어뜯습니다.

자유를 사랑의 기회로 삼으면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어떤 힘이 사람들을 첫 번째 길이 아니라 두 번째 길로 이끕니까?

영을 따라 걸으십시오

갈라디아서 5:16–18 본문 →

내 말은 이렇습니다. 영을 따라 걸으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결코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6 · 본디새김

바울은 공동체가 서로를 물어뜯을 위험 앞에서 세부적인 규정들을 새로 나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걷다’는 실제로 걷는 행동을 뜻하지만, 비유적으로는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영적인 경험을 한 번 더 얻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성령을 따라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3장의 첫머리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과 성령을 따라 걷는 일은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먼저 육의 욕망을 모두 제거한 뒤 성령을 따라 걸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따라 걸으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을 자신의 힘으로 욕망을 억누르는 일에서 찾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데서 찾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실제로 「걸으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의 출발점은 인간의 독립적인 도덕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영입니다.

육과 영은 몸과 영혼의 싸움인가

육이 바라는 것은 영을 거스르고, 영이 바라는 것은 육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곧, 이 둘은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도록 서로 맞서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17 · 본디새김

이 절은 자칫 육은 몸이고 영은 영혼이며, 몸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식으로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설명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신체 자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힘과 욕망의 지배 아래 있는가입니다.

5장의 「육」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맞서 자기 욕망을 따르는 인간의 삶을 가리키고, 「영」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주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뒤의 육의 행실 목록에도 음행과 방탕만이 아니라 적대와 다툼, 질투와 파벌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육의 지배가 나타날 수 있다고 봅니다.

17절의 마지막 문장에서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육의 욕망을 따르려는 의지로 보는 읽기, 선을 행하려는 의지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읽기, 그리고 목적을 나타내는 표현을 실제 결과에 가깝게 보는 읽기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가 문맥 해석에 영향을 주지만, 어느 한 해석이 문법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논증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육의 욕망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는 실제적인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따라 걸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영에 이끌린다면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라디아서 5:18 · 본디새김

이것은 성령을 따르는 사람에게 어떤 도덕적 기준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것은 삶을 이끄는 원천의 변화입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규정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무가 중심에 놓입니다. 반면 성령께 이끌리는 삶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이 사람을 사랑과 의로움의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의 자유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랑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만으로는 그 삶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육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를 나란히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육의 욕망을 따르려는 인간의 의지로 이해하면, 성령께서 육의 욕망에 맞서시므로 신자는 마음대로 죄를 행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선을 행하려는 신자의 의지까지 포함한다고 보면, 육의 저항 때문에 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선한 일을 쉽게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문장의 목적을 나타내는 표현을 실제 결과에 더 가까운 의미로 이해할 가능성도 논의됩니다.

육의 행실은 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가

갈라디아서 5:19–21 본문 →

육의 행실은 뚜렷합니다.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주술, 적대, 다툼, 질투, 격분, 이기적 야심, 분열, 파벌, 시기, 술 취함, 흥청거림,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전에 경고한 것처럼 지금도 여러분에게 경고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9–21 · 본디새김

목록에는 성적인 부도덕, 우상 숭배, 주술, 술 취함과 같은 행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목록의 한가운데에서 바울은 매우 많은 분량을 사람들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에 할애합니다.

적대, 다툼, 질투, 격분, 이기적 야심, 분열, 파벌, 시기.

이것들은 한 개인의 은밀한 욕망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행동들이며, 15절의 경고와 연결됩니다.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는 공동체에서는 이런 행위들이 자라나기 쉽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주장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공격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여깁니다.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파벌을 만듭니다.

바울은 이런 모습도 육의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육의 행실을 성적인 죄나 육체적 쾌락의 문제로만 좁히면 바울이 갈라디아 공동체를 향해 경고하는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율법을 매우 진지하게 지키려는 사람이 다른 신자들을 질투하고 배제하며 파벌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자유를 자기 욕망의 기회로 삼아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어떤 종교적 규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삶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죄의 목록은 왜 이렇게 다양한가

바울은 성적인 행위와 종교적 행위, 공동체의 갈등과 음주에 관련된 방탕을 모두 언급합니다. 이 다양성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는 삶이 특정한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목록 끝의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도 대표적인 행위들을 제시한 뒤 같은 성격을 지닌 다른 행동들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 목록을 완전한 금지 사항의 목록처럼 취급해서 여기에 명시된 것만 피하면 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21절의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앞에서 이어져 온 상속의 언어를 다시 불러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아들의 신분을 얻었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육의 행실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죄와 방종을 별문제 아닌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육의 욕망에 따라 살아도 된다는 보증서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이 절을 어떤 죄를 한 번 범한 사람은 즉시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지위를 영원히 잃는다는 기계적인 판정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반복적인 악행을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로 가볍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르는 삶과 육의 욕망에 사로잡힌 삶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경고만 남기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사람들 가운데 어떤 것을 만들어 내시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들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원문의 현재분사는 계속되거나 특징적인 행동 양식을 표현할 수 있지만, 그 형태만으로 몇 번 이상 반복해야 이 경고가 적용되는지를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육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는 무엇이 다른가

갈라디아서 5:22–23 본문 →

그러나 영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거스르는 율법은 없습니다.갈라디아서 5:22–23 · 본디새김

바울은 육의 행실과 영의 열매라는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행실은 실제로 사람이 하는 행동을 가리키고, 열매는 어떤 생명과 작용에서 맺히는 결과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무는 열매를 만들어 내기 위해 겉에 열매 모양의 장식을 매달지 않습니다. 열매는 살아 있는 나무에서 맺힙니다.

바울이 성령의 결과를 열매라고 부르는 것은 그 결과가 사람의 독립적인 성취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단어의 차이만으로 인간의 행동과 성령의 행동이 완전히 분리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곧바로 신자들에게 육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하고, 성령에 발맞추어 걸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나타나는 결과도, 인간이 스스로 덕목들을 생산하여 성령의 사람이라는 자격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이끄시며 그 사람의 실제 삶에서 나타나게 하시는 결과입니다.

왜 열매는 단수인가

그리스어 원문에서 「열매」(καρπός)는 단수이고, 육의 「행실」은 복수입니다. 이 차이 때문에 성령의 열매를 여러 가지 서로 독립된 능력들이 아니라 하나의 성령께서 만들어 내시는 통일된 삶의 모습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며, 그런 해석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집합적인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으므로, 단수형 자체가 열거된 아홉 가지가 절대로 개별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목록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미 6절에서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을, 13절에서 사랑으로 서로에게 하는 노예 노릇을, 14절에서 이웃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율법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자유는 사랑으로 나타나고, 그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 공동체가 서로 물어뜯을 위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머지 열매들도 개인이 조용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성품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덕목들입니다.

적대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격분과 시기가 있는 곳에는 오래 참음과 온유가 필요합니다.

이기적 야심과 방탕이 있는 곳에는 사랑과 절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성격의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육의 행실과 실제로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여기서 무엇을 가리키는가

22절의 「믿음」은 원문의 피스티스(πίστις)를 옮긴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리킬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신실함이나 신뢰할 만한 태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주변에 오래 참음과 친절, 선함과 온유가 나열되어 있으므로 신실함이라는 성품으로 이해하는 해석에 근거가 있습니다. 반면 5절과 6절에서 바울이 이미 성령과 믿음과 사랑을 연결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성령의 열매에 포함된다는 이해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자리의 피스티스를 반드시 어느 한쪽으로만 제한해야 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삶은 신뢰와 충실함을 잃어버린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배신하는 삶은 성령의 열매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거스르는 율법은 없다

지금까지 바울은 율법 아래 들어가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를 설명하면서 다시 율법을 언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 율법의 참된 뜻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과 평화, 오래 참음과 친절, 선함과 절제를 금지하는 율법은 없고, 오히려 이런 삶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기 위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는 율법이 지향하던 사랑의 삶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율법 전체가 이웃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14절),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합니다(22절).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은 어떻게 걸어가는가

갈라디아서 5:24–26 본문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이들은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디아서 5:24 · 본디새김

바울은 다시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육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동사의 주어를 그들로 세웁니다.

갈라디아서 2:19–20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며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 전체에 관해 말합니다.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은 이전에 자신을 지배하던 육의 욕망과의 관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결정적으로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의 욕망을 느끼지 않아야 합니까?

바울은 바로 앞에서 육과 영이 서로 맞서고 있다고 말했고, 성령을 따라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육의 욕망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런 명령과 경고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육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육의 욕망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이전의 삶과 결정적으로 결별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체를 해치거나 모든 감정과 욕구를 없애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인간의 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맞서는 육의 욕정과 욕망입니다. 성령의 삶은 욕망이 더 이상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영으로 산다면 영에 발맞추어 걸읍시다

우리가 영으로 산다면 영에 발맞추어 걸읍시다.갈라디아서 5:25 · 본디새김

「발맞추어 걸읍시다」(στοιχέω)로 옮긴 동사는 일정한 줄이나 기준을 따라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16절의 일반적인 ‘걷다’와 비교하면, 어떤 기준에 발걸음을 맞춘다는 느낌이 더욱 분명합니다.

동사의 형태도 달라집니다. 16절에서 바울은 「걸으십시오」라고 명령했지만, 25절에서는 1인칭 복수로 「걸읍시다」라고 권합니다.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그들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했지만,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서는 자신도 함께 걸어가야 하는 사람 가운데 포함합니다.

성령의 삶은 바울만 이미 완성한 특별한 단계가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25절의 앞부분은 생명의 근거를, 뒷부분은 그 생명에 합당한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하셨으므로 자유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성령께서 생명을 주셨으므로 성령에 발맞추어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일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근거가 됩니다.

마지막 경고는 놀랍도록 일상적이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관한 설명을 마치면서 뜻밖의 경고를 남깁니다.

서로 도발하고 서로 시기하는 허영에 찬 사람이 되지 맙시다.갈라디아서 5:26 · 본디새김

왜 하필 이 말로 장을 끝냅니까?

바울은 5장 전체에서 염려하던 공동체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앞에서는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는 일을 경고했고, 육의 행실 목록에서는 적대와 다툼, 질투와 격분, 이기적 야심과 파벌을 언급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그 모든 행동의 밑바탕에 놓일 수 있는 허영을 문제 삼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발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보다 높아 보이는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시기할 수 있습니다. 두 방향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공통된 중심을 가집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허영에 찬」은 헛된 영광을 추구하거나 근거 없는 자만에 사로잡힌 상태를 나타냅니다. 할례를 통해 자신이 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려는 태도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모두 인간의 지위를 높이려는 욕망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바울은 갈라디아의 모든 할례 주장자가 오직 허영 때문에 행동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26절은 공동체 전체에 대한 권면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은 특별한 종교적 경험을 자랑하는 데서만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허영과 경쟁심을 내려놓고 사랑과 온유로 살아가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갈라디아서 5:1–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은 하나의 큰 역설을 풀어 가는 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으므로, 더 이상 자신의 종교적 성취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지위를 확보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유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고립된 자율성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신 사랑을 따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 안에서 자라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자유를 오해하는 두 길을 모두 거부합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더 많은 종교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길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해방을 불충분하게 만들고, 이미 자유롭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도 된다는 길은 그 자유를 육의 욕망을 위한 기회로 바꿉니다.

처음에는 굳게 서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성령에 발맞추어 걸어가자는 권유가 있습니다.

굳게 서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걸어가는 것은 그 자유를 실제 삶에서 살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걸음이 향하는 곳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곳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이겨야만 자신이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끼는 순간, 사람은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도 벗어나게 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미 받아들이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에 다시 자신을 권면의 대상 안에 넣어 「우리가 영으로 산다면 영에 발맞추어 걸읍시다」라고 말하고, 그 걸음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곧바로 덧붙입니다. 「서로 도발하고 서로 시기하는 허영에 찬 사람이 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는 이렇게 가장 일상적인 관계의 자리까지 이릅니다.

바울은 이 장을 자유의 선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받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 주며 끝냅니다.

다시 멍에 아래로 돌아가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를 물어뜯지도 않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하셨기에, 성령에 발맞추어 사랑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