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장 · 끝 권면

서로의 짐과 십자가의 자랑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장에서 이상한 두 가지 짐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서로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몇 절 뒤에는 「저마다 자기 몫의 짐을 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명령일까요? 아니면 바울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할 때와 혼자 책임져야 할 때를 구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짐보다 더 뜻밖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할례를 강요하는 이들이 다른 사람의 몸에 새기려는 할례의 표징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바울 자신의 몸에 남은 예수님의 낙인 자국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은 이 두 장면을 통해 편지 전체의 논쟁을 마무리합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다시 교리 논쟁을 펼치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서로의 짐을 어떻게 질 것인지, 가진 것을 어떻게 나누고 선을 행할 것인지 이야기한 뒤, 자신이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근거를 바꿀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바꿉니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장에서 이 두 변화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136장 본문 읽기 →

잘못한 사람을 바로 세우는 사람도 자신을 살펴야 한다

갈라디아서 6:1 본문 →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잘못에 붙잡히거든, 영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온유한 영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세워 주십시오. 그대 자신을 살피면서, 그대도 시험받지 않도록 말입니다.갈라디아서 6:1 · 본디새김

바울은 마지막 장을 잘못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는 죄를 범한 사람을 정죄하거나 공동체에서 몰아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못에 붙잡히거든」이라고 말하고, 그를 바로 세워 주라고 합니다. 「바로 세워 주십시오」는 어긋나거나 손상된 것을 바로잡고 온전한 상태로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목적은 잘못을 깨닫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동체가 죄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구별됩니다. 하나는 잘못을 발견하고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을 분명히 다루면서도 그 사람을 회복시키려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후자를 요구합니다.

왜 바로잡는 사람도 시험받을 수 있는가

바울은 이 책임을 「영을 따라 사는 여러분」에게 맡깁니다. 이는 앞 장에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는 권면과 연결되며, 공동체 안의 특별히 우월한 신자 집단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아닙니다.

그들은 「온유한 영으로」 대해야 합니다. 온유는 지난 장에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투를 부드럽게 하라는 예절상의 조언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는 삶이 공동체의 잘못을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문장 끝에서 갑자기 상대를 바꿉니다.

앞에서는 「여러분」이라고 복수로 말했지만, 이제는 「그대 자신」과 「그대도」라고 단수로 말합니다. 공동체 전체를 향한 권면이 잘못한 사람을 바로잡으려는 개개인에게 직접 다가옵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은 자신은 결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 나는 그보다 더 성숙합니다. 나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생각이 자라는 순간, 잘못한 사람을 회복시키려던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잡는 사람에게 자신을 살피라고 명령합니다. 그 역시 시험받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을 가볍게 여기라는 명령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도 은혜가 필요한 사람임을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실패를 바라보는 위치에 올라서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붙잡히거든」(프롤렘프테)은 갑작스럽게 잘못에 빠진 경우로 읽을 수도 있고, 잘못이 드러나 붙잡힌 경우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동사 자체만으로 그 잘못이 고의적이지 않았다거나 단 한 번의 실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세워 주십시오」(카타르티조)는 마태복음 4:21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손질하는 행동에도 쓰입니다. 바울이 반드시 찢어진 그물을 떠올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손상된 것을 다시 쓸 수 있는 상태로 회복한다는 뜻은 6:1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시험은 동일한 잘못에 빠질 위험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바로잡는 과정에서 교만과 가혹함에 빠질 위험까지 포함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시험의 종류를 제한하지 않지만, 앞 장에서 허영과 도발과 시기를 경고한 점을 생각하면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는 위험은 이 권면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서로의 짐을 지면서도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

갈라디아서 6:2–5 본문 →

서로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루게 될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2 · 본디새김

바울은 일부 강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의 짐을 일방적으로 져 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짐입니다. 공동체 가운데 누구도 항상 도움을 주기만 하는 사람이나 항상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직전 문맥에는 잘못에 붙잡힌 사람이 등장하므로, 죄와 실패 때문에 생긴 짐과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어려움이 우선 떠오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명령을 그 상황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공동체 안의 갈등도 넓은 의미에서 포함될 수 있지만, 그런 사례가 이 구절에 직접 나열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명령에 뜻밖의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스도의 법」.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왜 다시 법이 등장하는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로 돌아가지 말라고 거듭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법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가 어떤 규범도 없는 상태라는 오해를 막아 줍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에게는 살아가야 할 방향이 있고, 바울은 그 방향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의 범위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르침과 명령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고(요한복음 13:34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 주신 자기 내어주심의 삶이 그리스도의 법을 규정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바로 앞의 5:14에서 이웃 사랑이 율법 전체를 이룬다고 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사랑의 법과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5:14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율법 전체를 이룬다고 했고, 6:2에서는 서로의 짐을 져 주는 일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룬다고 합니다. 바울은 사랑을 추상적인 원리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셨다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짐을 진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의 죄를 속량하는 구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확보하려는 삶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주는 삶은 같지 않습니다.

남보다 낫다는 생각이 짐을 지지 못하게 한다

누구든지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라도 되는 줄로 여긴다면 자기를 속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6:3 · 본디새김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주려면 그 사람을 자신보다 하찮은 존재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잘못에 붙잡힌 사람을 바로잡는 상황에서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스스로를 강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상대를 부족하고 실패한 사람으로 구분하기 쉽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라는 표현은 인간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자신을 남보다 높은 자리에 놓을 근거가 없으면서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만은 자기기만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따져 보십시오. 그러면 남과 견주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자랑거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4 · 본디새김

「따져 보십시오」는 어떤 것을 시험하거나 검토하여 그 실제 성격을 확인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행동을 정직하게 살펴보면, 그런 자기 평가가 근거 없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남과 견주지 않고」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실패를 이용하는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다른 사람이 넘어졌다고 내가 더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조금 더 잘했다는 사실이 곧 내 행동이 참으로 선하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자랑거리를 가지게 될 것」이라며 자랑을 허용하는 것처럼 말할까요? 이를 남과의 비교에서 얻는 우월감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정직하게 검토한 결과 얻는 근거 있는 만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어적 의미가 있다고 읽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실제로 자신의 행위를 엄격하게 검토한다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일 이유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자기 평가의 기준을 다른 사람의 실패에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그는 다시 짐을 말합니다.

자기 몫의 짐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마다 자기 몫의 짐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6:5 · 본디새김

이 문장은 2절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절은 짐을 가리키는 낱말이 다르고, 이 문맥에서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합니다. 2절에서는 다른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함께 져 주는 책임이, 5절에서는 자기에게 맡겨진 행동과 책임을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 회피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준다는 것이 그 사람의 모든 책임을 대신해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각자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을 돕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의 짐을 외면할 수 없지만,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서로를 감시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각자가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로의 짐을 지는 관계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무거운 짐」은 바레로, 무게가 있는 짐과 부담을 가리킵니다. 5절의 「자기 몫의 짐」은 포르티온으로, 짐이나 적재물, 맡겨진 부담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두 낱말의 의미 영역은 겹치므로 하나는 언제나 나누는 짐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로 나누지 못하는 짐이라는 엄격한 구분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5절의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는 미래형이어서, 장차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에 대해 책임지는 일까지 바라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일반 원칙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7–8절이 심은 것을 거두는 문제를 다룬다는 사실은 최종적인 책임을 생각하게 하지만, 5절만으로 구체적인 심판 장면을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는 좋은 것도 함께 나눈다

갈라디아서 6:6 본문 →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 주십시오.갈라디아서 6: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초기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도 누군가가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든 좋은 것」은 물질적 지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가르치는 일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생활의 필요가 있으며, 고린도전서 9:11–14에서도 바울은 같은 원칙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절은 보수의 액수나 지급 제도를 정하지 않고, 「모든 좋은 것」이 오직 돈만을 가리킨다고 명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근거로 특정한 헌금 방식이나 금전적 의무를 그대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나누어」라는 표현입니다. 이 낱말은 어떤 것에 함께 참여하거나 서로 나눈다는 의미를 지니며, 갈라디아서 2:9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함께 나누는 사이의 표로 오른손을 받은 장면에도 같은 어근의 낱말이 등장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서로의 사역을 인정하는 교제가, 여기서는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 사이의 실제적인 나눔이 나타납니다.

복음 안에서 서로 교제한다는 말은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것을 공동체와 나누고, 배우는 사람도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나눕니다. 바울은 가르치는 사람을 높은 계급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역할이 서로의 유익을 위해 연결되는 것이며, 서로의 짐을 진다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필요를 인정하면서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권면을 끝내자마자 갑자기 농사를 짓는 장면을 꺼냅니다.

사람은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둔다

갈라디아서 6:7–8 본문 →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바로 그것을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6:7 · 본디새김

바울의 말투가 다시 엄중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셨고 성령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은 인간의 행동이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농사의 원리를 비유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선한 행동을 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고 악한 행동을 하면 곧바로 불행이 닥친다는 기계적인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실제 농사에서도 씨를 뿌리는 일과 거두는 일 사이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지금의 삶과 장차 얻게 될 결과 사이에 도덕적·영적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 육에 심는 사람은 육에서 썩어 없어짐을 거두고, 영에 심는 사람은 영에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8 · 본디새김

여기서 육과 영은 앞 장에서 설명한 두 삶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육에 심는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중심에 놓는 삶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고, 영에 심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썩어 없어짐과 영원한 생명은 인생의 성공이나 실패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문제와 연결되는 궁극적인 결과를 이야기하며, 이는 5:21에서 육의 행실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과 이어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거둔다는 말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뜻인가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에 심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까?

바울의 표현은 「영에 심는 사람은 영에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충분한 선행을 쌓으면 하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아 낼 수 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 방향의 오해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육의 욕망을 계속 추구해도 최종적인 결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대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생명의 방향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을 착취하거나 자신의 허영을 만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태도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주제는 장의 마지막에 나올 할례 논쟁과 이어집니다.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몸에 새긴 표징을 자랑으로 삼으려 하지만, 종교적인 표징을 갖추는 일과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이나 자기 과시에 속지 않으십니다.

이 경고를 끝낸 뒤 바울은 다시 공동체의 실제적인 행동으로 돌아옵니다.

거둘 때를 기다리면서 지금의 기회를 사용하십시오

갈라디아서 6:9–10 본문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치지 않으면 제때에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6:9 · 본디새김

씨앗을 뿌린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수확하지 못합니다. 선을 행하는 삶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주어도 그 사람이 쉽게 회복되지 않을 수 있고, 잘못한 사람을 온유하게 바로 세우려 해도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직접 열거한 상황은 아니지만, 앞의 권면들을 실제 삶에 적용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어려움들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은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제때에」는 그에 합당한 때, 정해진 때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때가 언제인지 계산해 주지 않지만, 선을 행하는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앞 절에서 영에 심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라고 했으므로, 이 수확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이라는 전망이 포함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현재의 삶에서 모든 선행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성공으로 보상받는다는 약속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선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가진 동안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선을 행합시다.갈라디아서 6:10 · 본디새김

9절의 「제때에」와 10절의 「기회」에는 모두 그리스어 카이로스(καιρός)가 사용됩니다. 9절에서는 거둘 때를, 10절에서는 지금 선을 행할 기회를 바라봅니다. 바울은 미래에 거둘 것을 기대하면서 현재의 행동을 미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 심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바울은 선을 행할 대상을 믿음의 식구들로만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식구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짐을 지고,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를 회복시키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구체적인 책임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책임이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지켜 왔습니다. 그 복음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자기들끼리만 선을 행한다면, 그 삶은 복음이 지닌 넓은 방향과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며, 그 자유는 사랑을 통해 일합니다. 그 사랑의 범위는 교회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편지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쓴 글씨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자신의 손으로 쓴 큰 글씨

갈라디아서 6:11 본문 →

내가 여러분에게 손수 얼마나 큰 글씨로 썼는지 보십시오.갈라디아서 6:11 · 본디새김

편지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의 시선이 갑자기 글의 내용에서 글씨 자체로 옮겨 갑니다. 고대에는 편지를 구술하고 다른 사람이 받아 적는 일이 있었으므로, 이 구절을 바울이 직접 펜을 들어 맺음말을 쓰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왜 큰 글씨였는지는 시력 문제, 마지막 권면의 강조, 필사자와 다른 바울 자신의 필체 같은 설명이 있지만 어느 쪽도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손으로 쓴 글씨에 주의를 환기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제 다른 사람의 평가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자랑할 것인지 직접 밝힙니다. 독자는 바울의 손으로 쓰인 글씨를 바라보고, 이어서 그의 몸에 남은 낙인 자국에 관한 말을 듣습니다.

조금 더 깊이

로마서 16:22에는 편지를 받아 적은 더디오가 자신의 이름으로 문안하는 장면이 있고, 고린도전서 16:21과 빌레몬서 19절에도 바울이 직접 손으로 썼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다만 정확히 어느 구절부터 필적이 바뀌었는지는 이 문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으며, 편지 전체를 직접 썼다는 가능성을 검토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시력 문제와 연결하는 해석은 4장에서 몸이 약했던 일과 갈라디아 사람들이 눈이라도 빼어 주었으리라는 표현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굳이 바울의 병명을 찾아내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몸을 자랑하는 사람들

갈라디아서 6:12–13 본문 →

몸의 일로 체면을 세우려는 자들은 모두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박해받지 않으려는 것일 뿐입니다.갈라디아서 6:12 · 본디새김

바울은 그 이유가 하나님께 더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판단과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에게서 어떤 방식의 박해를 받고 있었는지, 어느 집단의 압력을 두려워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한다면, 이방인들이 할례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복음의 급진적인 주장이 완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편지 전체의 논쟁을 고려한 역사적 해석이며, 바울이 직접 밝히는 것은 할례 강요가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피하려는 동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음 절에서 더 심각한 모순을 지적합니다.

할례를 받는 자들 자신조차 율법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여러분의 몸을 두고 자랑하려고 여러분이 할례를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6:13 · 본디새김

바울은 5:3에서 할례를 받는 사람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강요하는 쪽조차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조항을 어겼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근거로 할례받은 유대인 전체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비판하는 사람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두고 자랑하려고」에서 할례를 받는 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지만, 그것을 자랑하려는 사람들은 할례를 강요하는 이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새겨진 표징이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6장의 첫머리와 대조됩니다. 첫 번째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의 무게를 자신의 어깨로 옮깁니다. 두 번째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지우고 그 결과를 자신의 명예로 가져옵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사람을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신 사람들을 다시 어떤 조건 아래 묶어 두고, 그 조건을 충족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성공으로 자랑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자랑에 맞서 자신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왜 십자가인가

갈라디아서 6:14 본문 →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자랑하는 일이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로 나에게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세상에게는 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갈라디아서 6:14 · 본디새김

십자가는 원래 자랑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형은 극심한 고통과 함께 공개적인 수치를 가하는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승리자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처형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십자가는 세상이 예수님께 가한 수치스러운 처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내주셨고, 그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이전의 지배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세상의 평가가 최종적인 진실이 아님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자랑의 기준을 바꾼다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의 자랑은 인간이 무엇을 했는가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은 십자가의 상징을 소중히 여긴다는 고백 이상입니다.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달라졌다는 선언입니다.

이 문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관계는 두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에게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게 바울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적인 세계 전체가 악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의 가치와 지위를 결정하는 질서, 곧 명예와 수치, 성공과 실패, 종교적 자격을 판단하는 기존의 기준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질서는 더 이상 바울에게 옛 방식으로 자랑할 이유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바울도 더 이상 그 세상이 제공하는 영광을 자신의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왜 할례와 무할례가 더 이상 결정적인 기준이 아닌지를 밝힙니다.

할례도 무할례도 아니라 새 창조

갈라디아서 6:15 본문 →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새 창조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6:15 · 본디새김

이 문장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논쟁을 짧게 압축합니다.

만약 바울이 할례를 비판하면서 무할례를 새로운 자랑거리로 만든다면, 그는 한 가지 종교적 표징을 다른 표징으로 바꾸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두 표징 모두를 최종적인 판단 기준에서 내려놓고, 그 자리에 「새 창조」를 놓습니다.

새 창조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표현은 개인이 새롭게 변화된 상태로도,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현실로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새롭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현실로도 읽힙니다. 한 차원만으로 그 의미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성령을 받은 일, 육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아브라함의 약속에 참여하는 일이 모두 이 표현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구절만으로 바울이 새 창조의 모든 범위와 완성 시점을 상세히 규정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새 창조가 인간이 몸에 어떤 표징을 새기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전의 질서가 결정적으로 달라지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과 관계를 만들어 가시는 일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선언은 할례와 무할례의 대립을 끝내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현실이 결정적이라면, 이전의 민족적 표징을 근거로 사람의 지위를 다시 구별하려는 일은 그 새 창조의 의미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행동이 됩니다.

5:6에서는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고, 6:15에서는 새 창조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앞의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삶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뒤의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새로운 현실을 보여 줍니다. 새 창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과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새 창조」는 그리스어로 카이네 크티시스입니다. 개인의 변화, 공동체의 형성, 우주적 갱신이라는 관점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65:17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며, 그 본래 문맥은 하나님의 백성과 피조 세계의 회복을 약속하는 장면입니다. 갈라디아서 6:15는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신다는 성경의 큰 주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과 새 창조를 직접 연결합니다.

이 기준에 따라 걷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이스라엘

갈라디아서 6:16 본문 →

이 기준에 발맞추어 걸어갈 모든 이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갈라디아서 6:16 · 본디새김

「이 기준」은 바로 앞의 선언, 곧 할례도 무할례도 아니라 새 창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발맞추어 걸어갈」(στοιχέω)은 5:25에서 「영에 발맞추어 걸읍시다」라고 할 때 사용했던 동사와 같습니다. 성령에 발맞추어 걸어가는 삶과 새 창조의 기준에 발맞추어 걸어가는 삶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이 표현은 크게 세 방향으로 읽힙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히 언급한다는 읽기,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다시 부르는 명칭이라는 읽기, 유대 민족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별도로 기원한다는 읽기입니다. 이 차이는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포함되는지라는 물음과 직결되며, 문법적인 형태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해석이 갈리므로 이 구절만을 근거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대체했다고 선언하거나, 이방인 신자들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이스라엘과 연결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논쟁 때문에 바울이 실제로 축복하는 내용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임해야 한다고까지 선언하며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마지막에서는 평화와 자비를 빕니다. 그가 지키려 했던 복음은 사람들을 끝없이 갈라놓기 위한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기준」은 그리스어 카논으로, 어떤 것을 측정하거나 판단하는 기준을 가리킬 수 있고, 「발맞추어 걷다」는 스토이케오입니다. 논쟁의 중심에는 「그리고」에 해당하는 카이가 있습니다. 이 접속사는 보통 ‘그리고’를 뜻하지만 문맥에 따라 앞의 표현을 다시 설명하는 기능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새 창조의 기준에 따라 사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빈 뒤 유대인 신자들을 특별히 언급한다고 보고, 두 번째 읽기에서는 「그리고」가 별도의 집단을 추가하기보다 앞의 사람들을 다시 부른다고 이해합니다. 갈라디아서 3:29와 4:28–31에서 바울이 이방인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약속의 자녀라고 선언한 사실은 두 번째 읽기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반면 바울이 다른 편지들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유대 민족에게 사용하는 사례들은 첫 번째나 세 번째 읽기의 근거로 제시될 수 있으며, 로마서 9–11장과 함께 읽으며 이 표현을 유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새긴 할례와 바울의 몸에 남은 낙인

갈라디아서 6:17 본문 →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낙인 자국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6:17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몸을 이야기합니다.

「낙인 자국」은 몸에 새겨진 표시나 낙인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이미지로 자신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박해와 고난 때문에 몸에 남은 상처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5에서 바울은 매를 맞고 채찍질당하며 돌에 맞았던 경험을 언급합니다.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몸에 표징이 새겨지기를 원했고, 그 표징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반면 바울의 몸에 남은 흔적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 종교적 의식의 결과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며 자신이 감당한 고난의 흔적입니다.

한쪽은 다른 사람의 몸에 표징을 새겨 자기 체면을 세우려 합니다.

다른 한쪽은 자신의 몸에 남은 상처를 통해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이 편지에서 반복되어 온 노예와 자유의 언어가 마지막으로 되돌아옵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속한 노예로 불렀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낙인 자국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겉으로 보면 다시 노예의 표식이 등장한 셈이지만, 이 낙인은 앞에서 거부한 노예살이의 멍에와 다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낸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소속과 그 복음 때문에 감당한 고난의 흔적입니다.

바울은 왜 이제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는가

17절의 첫 문장은 다소 지친 사람의 말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편지 전체에서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진실성을 변호해야 했고, 갈라디아 사람들이 흔들리는 현실을 염려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이미 자신의 삶으로 드러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박해받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달리 바울은 실제로 그 복음 때문에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다는 자랑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 상처는 바울 자신이 구원자라는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흔적입니다.

그는 글씨와 몸을 통해 자신의 복음 선포가 말로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자랑은 자기 손이나 자기 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조금 더 깊이

「낙인 자국」은 그리스어로 스티그마타입니다. 고대에는 몸에 새겨진 낙인이나 표식이 노예의 소속, 형벌, 특정한 종교적 헌신 등과 관련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모든 노예에게 항상 낙인을 찍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으며, 지역과 시대에 따라 사용 방식이 달랐습니다. 갈라디아서 6:17은 낙인 자국의 정확한 위치나 모양, 개수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입으신 상처와 똑같은 상처가 나타났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말은 은혜다

갈라디아서 6:18 본문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형제 여러분. 아멘.갈라디아서 6:18 · 본디새김

바울이 마지막 문장에서 선택한 말은 논쟁이나 경고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했고,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격렬한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그가 지키려 했던 복음의 중심이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바울은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선언으로 편지를 끝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바울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 논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은 인간의 내적 생명이나 인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에 관한 앞선 논증과 연결해서 이해할 여지도 있지만, 이 표현 자체를 반드시 성령의 다른 이름이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의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자랑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갈라디아서 6:1–18 본문 →

갈라디아서 6장은 처음에 다른 사람의 잘못과 무거운 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설명했고, 마지막에는 바울 자신이 무엇을 자랑하며 어떤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패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잘못한 사람을 온유하게 바로 세우고,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며, 자기 몫의 짐을 정직하게 집니다. 서로의 짐과 자기 몫의 짐은 모순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랑을 내려놓은 사람의 두 모습입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격을 얻기 위한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에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가르쳤는지, 얼마나 많은 이방인들을 믿게 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쓴 큰 글씨를 가리키고, 자신의 몸에 남은 낙인 자국을 이야기합니다.

한쪽에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은 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그 상처를 영웅의 훈장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상처를 지니고 있는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편지의 마지막에는 두 가지가 남습니다. 바울의 몸에 남은 예수님의 낙인 자국, 그리고 그가 형제들에게 남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인사.

그의 몸에는 고난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의 마지막 말에는 은혜가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