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인사와 복음
복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갈라디아서 1장은 뜻밖에도 한 사람의 이력으로 시작하여 그 사람에 대한 소문으로 끝납니다. 첫머리에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를 밝히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직접 만나 본 적도 없는 유대 지방의 교회들이 자신의 변화를 전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그사이에 바울은 격렬한 말을 쏟아 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른 기쁜 소식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자신이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길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복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복음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 까닭은 갈라디아 교회가 맞닥뜨린 위기가 단순히 교리 하나를 잘못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충분한지, 그 복음을 전한 바울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예루살렘의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인가 더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가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편지 전체를 읽으면 이 논쟁에는 유대 사람이 아닌 신자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음이 드러납니다(갈라디아서 2:3–5; 5:2–6; 6:12–13). 갈라디아 교회에 영향을 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까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것은 편지의 논증에서 확인됩니다. 갈라디아가 북부의 민족적 갈라디아 지역인지 남부까지 포함한 로마의 속주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편지가 바울의 선교로 신자가 된 공동체들을 향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기 권위를 세우려고 개인적인 성공담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반전을 보여 줍니다.
갈라디아서 1장의 중심에는 바울이 얼마나 위대한 사도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삶과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셨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편지의 첫 문장부터 시작되는 논쟁
고대 편지는 대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밝히고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바울도 그 형식을 따르지만, 자기 이름을 밝히자마자 길고 이례적인 설명을 덧붙입니다.
나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사도의 일을 맡은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을 통해 사도가 된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사도가 되었습니다.갈라디아서 1:1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이 사도가 된 일이 어디에서 시작되지 않았는지를 먼저 밝힙니다. 원문은 복수인 「사람들」(ἄνθρωπος)과 단수인 「사람」을 구별하여, 그 근원이 인간 집단에 있지 않으며 어떤 개인이 그 지위를 연결해 준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부정을 뒤집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그 근원으로 제시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왜 자신이 사도가 된 일을 소개하면서 부활을 언급할까요? 부활은 바울에게 과거에 일어난 기적 하나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도의 권위는 예수님께서 땅에 계실 동안 그분을 따랐다는 경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 나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다른 사도들의 일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사도가 된 일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뒤에서 예루살렘 방문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자신과 함께 있는 모든 형제자매가 편지를 보낸다고 적습니다(1:2). 독립적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공동체로부터 독립된 신앙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인사 속에 이미 들어 있는 복음
3절의 「은혜와 평화」는 바울의 편지에서 익숙한 인사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이 은혜와 평화가 어떤 사건을 통해 주어졌는지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금의 악한 시대에서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 일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1:4 · 두루새김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이미 말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내주셨고, 그 목적은 우리를 건져 내시는 것이며, 그 모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자신을 내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금의 악한 시대에서 건져 내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대」는 몇 년이나 몇 세기를 가리키는 시간 구분이 아니라, 죄와 악이 지배하는 현재의 세계 질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이 시대에서 건져 내신다는 것은 현재의 악한 질서가 더 이상 그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를 용서받을 가능성만 열어 놓고 나머지는 인간이 완성하게 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의 문장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는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뒤이어 나올 논쟁의 출발점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다른 종교적 조건을 채워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빼앗긴 생명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일치합니다. 아버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은 마지못해 희생하시는 두 존재처럼 그려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이 스스로 자신을 내주신 일이 하나의 구원 사건 안에서 만납니다.
그 결과 바울은 곧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1:5). 편지의 본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멘」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제 지키려는 복음이 인간이 이루어 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에 관한 이야기임을 먼저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에게서 떠나는 일인가
5절의 찬양이 끝나자 편지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을 떠나, 이렇게 빨리 다른 기쁜 소식으로 돌아서고 있다니 놀랍습니다.갈라디아서 1:6 · 두루새김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는 인사 다음에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향한 감사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고린도전서 1:4–9, 빌립보서 1:3–11, 데살로니가전서 1:2–10).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그런 감사의 단락이 없고 책망이 곧바로 등장합니다. 감사할 일을 찾기 전에 반드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내가 가르친 교리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을 떠나」 돌아서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종교적인 정보를 모아 놓은 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신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서고 있다니」(μετατίθημι)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바울은 이미 모든 일이 끝났다고 선언하기보다, 지금 진행되는 위험한 변화를 멈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닌가
7절은 6절의 표현을 즉시 수정합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이 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뒤틀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갈라디아서 1:7 · 두루새김
앞서 「다른 기쁜 소식」이라고 부른 것을 바울은 곧바로 「다른 복음이 또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바로잡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듣고 있는 것은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뒤튼 것입니다.
왜 바울은 이 차이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길까요? 복음은 인간이 어떤 조건을 완수해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규정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다른 조건을 덧붙여야 비로소 그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한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말하더라도 복음의 중심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악하다거나 유대 사람의 삶이 열등하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실제 쟁점은 유대 사람이 아닌 신자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충분함을 어떻게 훼손하는가에 있으며, 이 문제는 뒤의 2–5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증됩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다른」은 그리스어 헤테론, 7절의 「다른」은 알로입니다. 흔히 전자는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을, 후자는 같은 종류의 또 다른 것을 뜻한다고 설명하지만, 두 낱말의 뜻은 실제 쓰임에서 겹치기도 하므로 언제나 그런 차이가 성립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낱말의 차이보다 말을 바로잡는 흐름이 중요합니다.
사도 자신도 복음 위에 있지 않다
바울은 이어서 놀라운 가정을 제시합니다.
우리 자신이든 하늘에서 온 천사든,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과 어긋나는 것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갈라디아서 1:8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참된 사도이므로 자기 말은 무조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든」, 곧 자신도 복음과 어긋나는 것을 전한다면 같은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늘에서 온 천사까지 예로 드는 것은 전하는 사람의 권위보다 전하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참되다는 사실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명성이나 초자연적인 위엄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8–9절에서 반복되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저주 아래 놓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 말씀을 근거로 서로 다른 성경 해석을 지닌 모든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겨냥하는 것은 자신이 앞에서 요약한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를 뒤바꾸는 가르침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같은 경고를 반복하되, 처음에는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라 하고 두 번째에는 「여러분이 받아들인 복음」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받아들인 복음은 바울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며, 바울도 갈라디아 교회도 그 복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 복음의 판단 아래 놓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얻으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닐 것입니다.갈라디아서 1:10 · 두루새김
이제 바울은 자신의 행동도 복음이라는 기준에 비춥니다. 「노예」는 자유롭게 계약을 맺고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므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19–23에서 여러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여러 사람에게 맞추어 섬겼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을 섬기는 것과 사람의 인정을 얻으려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그는 한때 조상들에게서 내려온 전통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신을 부릅니다. 무엇이 그를 바꾸어 놓았을까요?
조금 더 깊이
10절의 「아직도」가 바울의 과거 삶을 염두에 둔 것인지, 그가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복음을 쉽게 만들었다는 비판에 대답하는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바로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무너뜨리려던 것을 전하는 사람
11절부터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갈라디아서 1:11 · 두루새김
나는 그 복음을 사람에게서 전해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 보여 주셔서 받았습니다.갈라디아서 1:12 · 두루새김
11절은 복음의 근원이 인간적인 기원이나 판단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주장이고, 12절은 바울이 그 복음을 사람에게서 전해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었다는 설명입니다. 두 절을 하나로 뭉뚱그리면 이 차이를 놓칩니다.
12절의 원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읽기는 드러내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라는 데 무게를 두며, 인간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12절의 강조와 잘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읽기는 드러난 내용이 그리스도이시라는 데 무게를 두며,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드러내 보이셨다는 16절이 근거가 됩니다. 두루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따랐지만, 원문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읽기가 공통으로 보여 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의 복음은 인간이 종교적 경험을 모아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드러내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비한 체험을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전에 유대 사람의 신앙을 따르며 어떻게 살았는지 여러분도 들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심하게 박해하며 짓밟았습니다.갈라디아서 1:13 · 두루새김
박해하던 당시에는 그 공동체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무너뜨리려고 했던 공동체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다는 고백입니다.
14절에 따르면 그는 「조상들에게서 내려온 전통을 지키는 데 훨씬 더 열심」이었으며 또래보다 앞서 나갔습니다. 이 열심은 전통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열심은 구약과 유대 전통에서 무조건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25:6–13에서 비느하스의 열심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인정받습니다. 바울이 돌아보는 문제는 열심 자체보다 그 열심이 향하던 방향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기 과거를 길게 밝히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기존의 삶에서 실패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찾아 나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전통 안에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타협할 이유보다 그들을 박해할 이유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이 무너뜨리려던 믿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반전을 통해 자신의 복음이 인간적인 진로 변경이나 기존 사도들의 교육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그의 삶에서 인간적인 경험과 배움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전하게 된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가르는 한 단어, 「그러나」
14절까지의 이야기에서 중심에 있던 인물은 바울 자신입니다. 그는 박해했고, 짓밟았고, 남들보다 앞서 나갔으며, 전통을 지키는 데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문장의 주어와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셨습니다.갈라디아서 1:15 · 두루새김
앞에서는 바울이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가 중요해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 자기 마음의 과정을 먼저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울려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겨 간 사건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의 부르심도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라는 말은,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을 때에도 그의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무관한 우연의 연속만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박해 자체를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의 박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박해하던 사람을 다른 길로 돌려놓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무엇을 나타내 보이셨는가
16절에서 마침내 그 부르심의 목적이 밝혀집니다.
자기 아들을 내 안에 드러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내가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 아들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곧바로 다른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1:16 · 두루새김
바울에게 드러난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의 복음은 새로운 종교적 규정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박해하던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하나님께서 드러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12절의 드러내심이 이곳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그 드러내심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으로 이어집니다.
「내 안에」는 원문에서 「나에게」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는 바울의 내적인 변화를, 「나에게」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아들을 드러내신 사건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일이 그리스도를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논쟁은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율법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중에 자신이 선택한 선교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신 목적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일과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일은 바울의 부르심 안에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을까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드러내심을 경험한 뒤 곧바로 「다른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원문은 다른 사람을 「살과 피」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적인 조언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사도가 된 일과 복음의 근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라비아로 떠났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습니다.갈라디아서 1:17 · 두루새김
아라비아는 당시 다마스쿠스 남쪽과 동쪽의 나바테아 왕국을 포함할 수 있는 지리적 명칭입니다.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갈라디아서 1장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를 언급하는 이유는 방문 목적을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가서 복음을 배운 다음 선교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데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그는 이전 사도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이어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들로부터 사도의 일을 맡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이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표현은 예레미야 1:5(어머니 배 속에서 나오기 전부터 따로 세워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심)와 이사야 49:1(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부르심)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주제에서 뚜렷한 연결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49장의 종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더불어 민족들에게 빛이 되는 사명을 받습니다(이사야 49:5–6). 이것은 바울이 그들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구약의 부르심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나바테아 지역에서 선교했을 가능성을 보는 읽기도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 자료로 재구성한 것이며 본문에 적힌 사실은 아닙니다.
삼 년 뒤, 십오 일 동안의 만남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 방문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얼마나 머물렀는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 뒤 삼 년이 지나서야 나는 게바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와 함께 십오 일 동안 지냈습니다.갈라디아서 1:18 · 두루새김
게바는 베드로를 가리키는 아람어 이름입니다. 「만나려고」(ἱστορέω)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사람이나 장소를 직접 찾아가 알아보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지만, 이 동사만으로 바울이 게바에게서 복음의 내용을 정식으로 배웠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방문의 시기와 길이입니다. 삼 년이 지난 뒤에야 갔고, 게바와 지낸 기간은 십오 일이었습니다. 십오 일 동안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겠지만, 바울의 목적은 정보 교환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게 된 근원이 게바의 가르침이 아니었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신을 교육하고 보낸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사도였는가
주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를 만나지 않았습니다.갈라디아서 1:19 · 두루새김
논쟁이 되는 것은 「외에는」이 무엇을 연결하는가입니다. 한 읽기에 따르면 바울은 게바 외의 다른 사도로 야고보를 만났고, 그렇다면 야고보도 사도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다른 읽기에 따르면 게바 외의 사도는 만나지 않았지만 야고보는 별도로 만났다는 뜻이어서, 야고보가 사도였다는 결론은 이 구절만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두 해석을 검토할 여지를 남깁니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바울의 중심 논증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게바와 야고보를 만났지만, 그 방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로서 맡은 일을 처음으로 형성해 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1:20). 그가 제시하는 방문의 순서와 만남의 범위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와 직접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복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면,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원래의 가르침을 불완전하게 전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에게서 복음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그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복음에 관하여 교제하고 서로의 일을 인정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9:26–30은 바나바가 바울을 소개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한 일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갈라디아서는 방문 시기와 만난 사도들의 범위를 밝힙니다. 두 기록은 목적이 다르므로 한쪽의 세부 사항을 다른 쪽에 무리하게 끼워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얼굴은 몰랐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이후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고 말합니다(1:21). 그러고 나서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유대 지방의 교회들은 내 얼굴을 알지 못했습니다.갈라디아서 1:22 · 두루새김
예루살렘의 특정 인물들을 만나는 것과 유대 지방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얼굴을 몰랐어도 그의 이야기는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이런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가 짓밟던 그 믿음을 복음으로 전하고 있다.」갈라디아서 1:23 · 두루새김
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며 짓밟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그 박해를 받았던 교회들이 그에 관해 전해 들은 말이 나옵니다.
전에는 박해하던 사람, 지금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
전에는 믿음을 짓밟던 사람, 지금은 그 믿음을 알리는 사람.
바울의 변화는 개인적인 체험에만 머물지 않고, 그가 박해하던 공동체들이 전해 들을 만큼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그 믿음」은 바울의 내면에 생긴 믿음만이 아니라, 그가 전에 없애려 했고 이제 복음으로 전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나에게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갈라디아서 1:24 · 두루새김
그들이 전해 들은 것은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 성공했다는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 그들이 찬양한 분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1장의 시작과 맞닿아 있습니다. 첫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했고, 마지막 절에서는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교회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바울이 아닙니다.
유대 지방 교회들의 찬양이 바울의 모든 신학적 논점을 검증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 사실은 갈라디아의 독자들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 교회의 권위를 내세워 바울의 복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주장이 있었다면, 그 교회들 역시 그의 변화를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권위를 무너뜨려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고, 모든 사도와 교회가 누구의 일하심 앞에 서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갈라디아서 1장이 보여 주는 복음의 질서
이제 바울이 왜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자신의 과거를 길게 이야기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복음을 만들어 내지 않았고, 그 복음에 새로운 조건을 덧붙여 구원을 완성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고, 바울은 스스로 복음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박해하던 그리스도께 붙들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자랑할 만한 경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교회나 전통, 다른 신자들의 가르침이 모두 무가치하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이 형제자매들과 함께 편지를 쓰고 게바를 찾아가 만났으며, 유대 지방의 교회들을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로 인정했습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인간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권위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르침을 평가할 때 누가 말했는가에 얼마나 쉽게 이끌립니까? 바울은 자신의 경우마저 그 기준에서 예외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권위를 의심하고 개인의 판단만 믿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어떤 구원을 이루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 지방의 교회들은 바울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도착한 것은 자신들을 박해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들이 믿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다는 소문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직접 만나 칭찬하지도 않았고, 그의 새로운 지위를 승인하는 자리에 모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한때 교회를 짓밟던 사람의 이름이 전해지고, 그 이름을 들은 교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으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